학교에 있다 보면 머리가 아픈 일이 있고 마음이 아픈 일이 있는데 아이들 문제는 처음에는 머리가 아팠다가 그 통증이 마음으로 내려간다. 이번 일 역시 그렇다. 학교폭력법이 강화되면서 애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거지, 라는 두루뭉술한 해결책은 고릿적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폭력의 피해자든 가해자든 중립적인 입장에서 아이들 모두를 동시에 껴안아야 하는 선생은 운신의 폭이 훨씬 좁아진 셈이다.

 

아이들은 정의구현이나 이익옹호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싸움이 대개 그렇듯 그냥 싸운다. 한두 마디 장난처럼 오간 말에 머리꼭지가 홱 돌아버리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따로 불러 이야기해 보면 이처럼 순한 양이 따로 없다. 더 많이 해를 입은 쪽이 피해자이긴 하지만 쌍방의 잘못 없이 싸움이 일어나지 않듯 어느 사건이고 속속 파헤쳐보면 양쪽 다 갈등의 불씨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일주일간 학교 관리자들까지 대거 동원되어 양쪽 부모를 만났고 이제 해결은 가해자의 부모가 얼마나 설득력있게, 정성스럽게, 진심을 다해 피해자의 부모에게 사과하느냐의 문제만이 남았다. 흥분한 어머니들은 차치하고 양쪽 아버지들이 직접 만나 해결을 봐야 할 듯 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담임인 내가 호흡곤란에 어깨통증으로 잠을 못 이뤄서 우황청심환을 몇 병째 들이켰나 모르겠다. 엄마는 남의 자식 일로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네 자식한테 일이 닥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나무라셨다. 어려운 일을 겪다보면 점점 단련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꼭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선생이 이러면 안되는데 그냥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힘이 든다. 이런 느낌을 고백하는 일 자체가 바보같아서 꾹꾹 눌러 참다보니 신체적인 이상 징후로 나타나고 아프다 보면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잿빛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먹을 것은 나눠주되 가까이 지내지는 말라고 했는데 말이지요." 피해자 어머니의 말이 졸렬한 적선처럼 들려서 짜증이 나는데 참아야 했고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아이가 변했다는 가해자 어머니의 말에 "어머니부터 그러신 건 아니구요?" 라고 받아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했다. 부모들의 당당한 입장표명 안팎으로는 밥은 먹고 다니냐? 물으면 안 먹었다는 아이들이 태반이고 부모님이랑 얘기는 좀 하고 다니냐? 물으면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니 참 답답하다.

 

나도 내가 부모라는 사실이 무섭다. 훌륭한 부모는 커녕 그냥 보통 부모만 되어도 다행인데 단순히 먹이고 입히는 양육을 넘어 교육과 훈육이 필요한 시기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하다. 남편한테 미룰까. 얍삽한 생각도 해보지만 각자의 역할이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생으로서 그간 누누이 확인해오지 않았던가. 입으로 가르치려고 들지 말고 너 자신이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된다는 엄마 말씀이 그나마 와닿는 말이긴 한데 갖가지 스트레스를 컨트롤하지 못해 아이들 앞에서 허구언날 long face를 하고 다니니 아, 나는 멀어도 너무,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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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0-2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hy the long face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this too will pass away 입니다.


깐따삐야 2012-10-24 11:18   좋아요 0 | URL
메피님의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감사하고 반가워요!

감은빛 2012-10-2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늘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려 살았어요.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 탓에,
누군가 절 건드리면 무조건 받아쳤거든요.
그러다보니 반에서 가장 많이 싸운 아이는 항상 저였어요.
그래도 그땐 싸움이 워낙 흔해서 그랬는지.
거의 선생님들께 혼난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면서,
짝꿍이 지우개를 뺏았다거나,
팔을 꼬집었다거나 하는 얘길 들으면 저도 모르게 화가 나더라구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는 짝꿍에게 화를 내면서, 하지말라고 소리를 지르라고 시켰어요.
저는 만약 누가 아이를 때렸다면,
같이 때리라고 말할 것 같아요.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2-10-27 14:2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재미있네요. 어떤 아이였을지 눈앞에 그려져요. 저 역시 많이 싸웠지만 다들 그러면서 컸죠.

공감합니다. 저라도 같이 때리라고 말할 것 같아요. 다시는 깐보지 못하게 아주 본때를 보여주라고 말할 지도 몰라요. 그러면서도 이게 지금 뭐하는 건가, 잘하는 짓인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은 계속 되고 말이죠. 학교선생으로서는 물론 저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저는 이러한 간극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좋은 방법이 있다면, 해결책이 있다면 알고 싶어요. 이러한 문제는 언제나 괴롭고 앞으로도 괴로울 일이 많이 닥치리라 생각해요.
 

"날이 좋은가. 결혼식이 많네."

영달이와 어린이랜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예식장 입구의 갓길이 주차해놓은 차, 주차하려는 차들로 붐볐다. 완연히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 결혼기념일이 지나버렸구나. 나의 말에 남편은 정신없이 살아서 챙길 새도 없어, 바로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하긴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도 조금 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영달이 생일과 이틀 사이로 붙어 있어 사라져버린 내 생일과 정신없이 사느라 기억 저편으로 건너가버린 결혼기념일. 영달이라는 엄청난 존재감 앞에서는 그까짓 날들, 뭐가 중요한가 싶으면서도 굳이 합리화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쓸쓸하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에 나는 무엇을 했더라. 평소처럼 수업을 했고 사이버연수가 완료되었는지 체크했고 간간히 오가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했고 목소리를 쥐어짜며 방과후수업을 했고 퇴근해서는 영달이와 공원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자기 전에는 책을 읽었고 허리가 아파서 근육통 약을 먹었다.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마쳤다, 싶은 하루. 착한 하루였다. 남편은 갑자기 생각났다는듯 외쳤다. 그래도 당신 운동화 사신었잖아. 운동화! 아, 맞다. 나는 새 운동화를 샀다. 겉모양새는 멀쩡한데도 품이 늘어나 앞꿈치가 자꾸 앞으로 쏠리는 탓에 탄탄하게 모양이 잡힌 새 것을 샀다. 그런데 운동화는 언제라도 구입하는 품목 아닌가. 결혼기념일과 운동화는 별로 안 어울리지 않나. 물론 속생각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영달이가 한창 인형뽑기에 꽂힌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 가르텐 비어 옆에 두 개의 인형뽑기 기계가 놓여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다람쥐, 토끼, 비버 등을 뽑았다. 남편은 감각이 중요하다고 하고 나는 집중력을 강조하는 편인데 뽑기 실력은 남편이 좀더 우월하다. 하지만 영달이는 뽑은 인형 자체보다 인형을 골라잡는 과정, 뽑았을 때의 환호성, 놓쳤을 때의 안타까운 제스처 등을 더 좋아하고 엄마인 나는 그 모든 것을 과장되게 보여준다. 가르텐 비어는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곳이다. 약 4년 후, 그와 그녀는 가르텐 비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를 안은 채 인형을 뽑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복사실 철문에 손가락이 끼어 손톱의 상처가 채 낫지 않았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자는 인형을 향해 제대로 조준을 못한 여자를 탓하고 있고 그 남자의 눈빛에 마냥 부끄러워하던 여자는 곧 죽일 듯 남자를 쏘아보며 시끄러워요, 집중을 못하겠잖아! 괴성을 지르고 있다. 차마 상상도 못했던 장관이다.

 

 

 

 

 

 

 

 

 

 

 

 

 

 

그 와중에 읽게 된 책. 요즘 우리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 잔뜩 도착해서 행복에 겨워하는 중인데 이 책을 발견하고 사서 선생님이 더 좋아졌다. 아름다운 책. 아직 다 읽지 않았는데도 이 책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임영태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 떠오르기도 하고 옛날 주말의 명화로 보았던 <마리안의 허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내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깨달음. 이야기의 골자는 평범한데 오감에 호소하는 사실적인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안목과 솜씨가 상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전 나얼의 '바람기억'이 너무 슬퍼서 더 이상 듣지 못하듯 이 소설 역시 더 이상 진도를 나가기에 너무 슬프다는 것이 슬프다.

 

지금은 이런 단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았다. 그런 습성들이 짜증스러웠던 이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짜증스럽다면 도로시를 그만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 p.76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의 단점과 함께 사는 일이 그의 부재를 견디는 일보다 좋았다고. 우리가 정신없이 살던 지금보다 옛날, 서로를 향한 정신이 좀 있던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인내하는 일이 참 힘들었다. 쿨하게 인정하면 좋은데 쿨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서, 짜증짜증한 갈등과 끈적끈적한 인내로 서로를, 하루를 버텼다. 지금은 영달이라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와 상대하느라 대적할 시간은 커녕 두세 마디 이상의 대화조차 힘들고, 어쩌면 인생의 또다른 단계로 접어든 셈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서로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많았는지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야 하지 않는가, 반문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그가 없는 나를 상상한다. 세차는 누가 하지? 영달이 담요의 토끼 날개는 누가 꿰매 주지? 쓰레기 분리수거는 누가 하지? 매트하고 이불은 누가 털지? 어항 청소는? 영달이 장난감도 조립해야 하고 운동화 끈도 그 사람이 더 잘 매는데... 몹시 간악하게도 그가 부재함으로써 불편해질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더불어 허구언날 널브러져 있는 것만 좋아한다고,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다고 구박했는데 그가 널브러지기 직전 바쁘게 움직이던 모습과 머리를 써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싹둑싹둑 편집되고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상실과 부재를 묘사함으로써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왜, 어떻게 중요한지 통찰하는 소설. 한 치 앞을 모르기에 막 살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모르기에 잘 살아야 된다고 격려하는 소설. 시종일관 덤덤하고 잔잔함에도 교묘하게 상처를 주었다가는 그것을 다시 치유하는 소설. 결혼기념일 즈음, 나는 운동화만 산 것이 아니라 앤 타일러의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을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책이 내게로 와서.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소설을 계속 읽기 힘들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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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 타일러는 언제나 일상을 돌아보게 하죠. 일상을, 일상의 디테일하고 사소한 부분을 가장 잘 짚어내요. 페이퍼를 읽으면서, 앤 타일러는 깐따삐야님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깐따삐야 2012-10-17 11:37   좋아요 0 | URL
언젠가도 말했듯 다락방님의 추천도서는 대부분 다 재미있고(발췌, 인용하신 문장들을 보면 책욕이 마구 일어요!) 이제는 그 책들 중에서 저와 코드가 맞는 책을 고르는 재주까지 생겼습니다. 앤 타일러의 <종이시계>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치니 2012-10-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 님, 요새 몰래 뭐 좋은 거 먹어요? 글이 다 예술입니다. :)

깐따삐야 2012-10-17 11:38   좋아요 0 | URL
요며칠 오징어회무침이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데 어제 엄마가 해주셨어요. 그런 음식을 먹으면 마구 솔직해지나 봅니다.^^

조선인 2012-10-1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댓글에 한표. 뭘 먹으면 이런 글을 쓰시나요?

깐따삐야 2012-10-17 11: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징어회무침 입니다.^^

조선인 2012-10-18 08:25   좋아요 0 | URL
좋았어요. 저도 오징어를 먹겠어요. 불끈!

레와 2012-10-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는 참 고운데, 내용은 슬픈가봐요? 그래도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깐따삐야 2012-10-17 11:42   좋아요 0 | URL
책표지가 자물쇠 달린 옛날 다이어리마냥 아주 곱고 약간 촌스럽고 좋아요. 따듯한 감성의 레와님도 이 책을 싫어하진 않으실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도시에도 속속 백화점이 들어서고 대규모 마트들이 동동마다 거대하게 진을 치고 있지만 역시 발길이 자주 닿고 발길따라 마음까지 가 닿는 곳은 가깝고 낯익은 작은 가게들이다. 걷고 뛸 줄 알면서도 업어달라거나 안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영달이 덕분에라도 어설프게 끙끙거리며 포대기를 두른 채 둘러볼만한 데도 동네의 소규모 가게들 뿐. 조금 멀리 나갔다가는 돌아올 때의 모습이 참 가관이다. 영달이는 나 힘들어! 땡깡을 부리고 이미 지쳐버린 나는 엄마도 힘들어! 라고는 차마 못하고 박찬호 허벅지와 추성훈 팔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껏 사력을 다해 업고 돌아오곤 한다. 늘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직장맘의 자격지심으로 인한 자발적 수난이긴 하지만 내 등과 영달이의 배가 맞닿아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지점이 싫지 않은 이유도 있다.

 

  집 근처 횡단보도를 건너면 최근에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빵집이 보인다. 이곳은 주인 아저씨, 아줌마의 인상이 참 좋다. 아저씨는 깐깐하게 생겨서 적어도 못된 재료들을 반죽에 섞진 않을 듯 하고 주로 판매를 담당하는 후덕한 아줌마는 늦은 시간에 가면 덤도 얹어주고 학급에 단체주문이라도 하는 날이면 손이 더 커진다. 특히 아저씨가 매일 굽는 토끼, 오두막, 초승달, 아기곰 쿠키는 영달이의 인기 품목. 밤하늘의 초승달과 손에 쥔 초승달 쿠키를 비교하며 좋아하던 영달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짜지 않게 양념한 아삭한 야채가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야채빵과 옥수수 빛깔의 고소한 못난이빵, 가장 적정한 단맛을 촉촉하게 유지하는 단팥빵과 빵의 기본, 소보루빵도 이 집의 베스트셀러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카페를 겸한 유명 베이커리들이 늘비하지만 신선한 맛과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쿠키나 빵이 생각날 때면 꼭 찾게 된다.

 

  철마다 옷을 구비하는 것도 일 중의 일인데 이제는 출산 전과 실루엣 자체가 달라도 너무나 달라져 내 스타일에 맞는 옷을 찾아 입는 것도 곤욕이다. 마른 몸이야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쳐도 멋이 나지만 감출 것이 많은 내 몸은, 더욱이 새참한 아가씨도, 중년의 귀부인도 아닌, 어중간한 연령의 애매모호한 계급의 나는 잘 맞는 옷을 고르는 일이 쉬우면서도 어렵다. 그 와중에 발견한 옷가게가 하나 있다. 주인 아줌마의 눈매가 고와서, 걸려 있는 옷들이 무난하면서도 나름 독특해서, 필요한 옷이 생기면 들르곤 한다. 요즘들어 좋아하는 옷, 싫어하는 옷에 대한 자기만의 취향이 생긴 영달이, 초록색에 꽂힌 영달이는 가게를 지나치며 "저 초록색 옷 예쁘다!"라고 외치기도 한다. 현금으로 흥정하면 곧잘 깎아주기도 하고 아줌마가 센스 있게도 내가 커버하고 싶은 부분을 꿰뚫고는 오래, 질리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잘 골라준다. 남편은 당신은 왜 항상 똑같은 옷을 사느냐고 하지만 이제는 어떤 스타일도 소화할 수 있는 몸둥아리가 아니므로, 라고 말하기 보다는 잘 보면 조금씩 다 달라요, 소심하게 응수하곤 한다.

 

  그리고 학교 옆 중국집. 뜨겁고 매운 국물이 필요한 날, 짭짤하고 기름진 먹거리가 필요한 날, 바삭한 고깃덩어리를 오물거리고 싶은 날, 집밥의 담백함이 아닌 어느만치 자극성 있는 향미가 그리운 날, 내가 찾는 곳이다. 음식을 배달시켜서 랩을 벗길 때면 그 느낌이 반감되어 직접 걸어가서 먹어야 제맛인데 남편과 싸우고 화해의 언저리에서 같이 고개를 숙인 채 짜장면을 먹기도 하고 덜컥 찾아온 졸업생들과 함께 몰려가 간짜장과 탕수육을 먹기도 했다. 중국집은 왁자지껄함도 봐주고 흘리고 먹는 모습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늘 팔팔 끓는 물과 기름 덕분에 춥지 않은 분위기가 있어 좋다. 어느 날은, 씩씩하게 주문 전화를 받고 주문받은 내역을 주방을 향해 크게 외치는 주인 아줌마의 모습을 보며 짬뽕 국물을 넘기다가 울끈불끈 기운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 집은 너무 물렁하지도, 너무 덜 익지도 않은, 적당히 익은 양파맛이 일품인 간짜장과 두껍고 축축하게 씹히지 않는 바삭한 탕수육이 맛있다. 남편과 나는 먹을 때마다 똑같이 말한다. 왜 다른 집은 이렇게 못 만들지?

 

  그리고 이름처럼 정성이 있는 정성내과. 작년 봄에 기관지가 쑥대밭이 되어서 새벽마다 고통스럽게 컹컹 짖어대던 나를 살려준 곳이다. 혈관을 찾기 어렵다고 대학병원 간호사들마저 마구 후벼대던 내 팔에서 단 한번에 혈관을 찾아내 아프지 않게 링거주사를 놓아준 의사선생님이 있는 곳. 지쳐 있던 나는 따뜻한 전기요가 깔린 침대 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손님을 받으려고 서둘러 진료를 마치거나, 약을 독하게 지어 금방 효과를 보게끔 재촉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쉬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의사가운도 입지 않고 말투도 어눌한 의사선생님이지만 자분자분한 설명이 듣기 좋고 아파서 우울해진 나를 위로해 주시기에 단골이 되었다. 그만큼 자주 아팠다는 얘긴데 그 점은 좀 슬프네.

 

  이밖에도 아리따움의 보철 낀 수다쟁이 아가씨나 두청이라는 효과만점 진통제를 소개해 준 신세계약국 약사 아저씨, 적극적인 모과마냥 생겨서 영달이가 노골적으로 무서워하는 아가방 아줌마, 찾는 책은 어떤 책이든 그 다음날로 구해주시는 서점 아저씨 등 모두 부지런하고 중요한 나의 이웃들이다. 근거리에 이러한 가게들이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불편해지겠지. 정육점 아저씨 얘기를 듣자 하니 내가 혼수를 장만했던 가구점과 그릇점이 문을 닫고 이전을 한단다. 주인이 가게세를 두배로 올려주지 않을 거면 나가라고 했단다. 플래카드를 보니 유명브랜드의 스포츠 의류매장이 입점할 예정이란다. 주인장이 직접 운영한다는데 사업이나 경영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남편과 내가 보아도 그 자리는 생뚱맞게 옷가게가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있는 사람이 더 하다고 그렇게 많은 점포를 소유하고도 모자라서 본인이 직접 나서려는가 보다. 우리는 이전을 앞두고 있는 가구점에 들러 원목 장롱을 구입하고 편백나무 토막을 두 개 얻어왔다. 영달이가 좀더 자라면 이 곳에서 책상을 사주고 싶었는데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외곽으로 이전한다니 좀 아쉽다.  

 

  판매자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말 한번 섞지 않고도 원하는 물건을 모두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오프라인에 거주하는 작은 가게들, 나와 함께 아침을 시작해서 나와 함께 어둠을 맞고 불을 끄는 그 친밀한 가게들이 나는 더 좋다. 알라딘이 책만 사는 공간이라면 이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오가는 말이 있고 그 말 속에 사연과 풍경이 쌓여 구체적 기억으로 아로새겨지기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바, 그래서 우리 동네의 작고 오래된 가게들이 나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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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1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 있다면 추천을 다섯개쯤 하고 싶어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님의 글이 있어서 저도 알라딘이 좋아요. 참 좋습니다.

깐따삐야 2012-10-11 12:26   좋아요 0 | URL
가끔은 다락방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 알라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흐음.( '')

레와 2012-10-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집 중국집.. 아이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습니다.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12-10-11 12:27   좋아요 0 | URL
집밥이 최고지만 그래도 가끔 빵, 간짜장, 짬뽕, 그런 것들이 생각날 때가 있죠? ^^

비로그인 2012-10-1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부러움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전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논,밭,,,가게들은 커녕 배달의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어요...얼른 이사가야겠어요!흑

깐따삐야 2012-10-11 12:30   좋아요 0 | URL
논밭이면 공기 하나는 끝내주겠네요. 저희집은 도심 한가운데라 편리하긴 하지만 먼지도 많고 종종 시끄럽고 그래요. 홍보 트럭 지나가면 영달이가 언니들 목소리 막 따라하기도 하구요.ㅠ

코코죠 2012-10-11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편의 알흠다운 수필을 읽은 것 같아요...라는 댓글은 아껴둘 걸 그랬죠. 이젠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아, 잠 못 드는 밤 이 글을 읽어 다행이었어요. 못 참고 후다닥 읽어버렸으니 이제 한번 더 차근자근 읽어보러 갈래요.

깐따삐야 2012-10-11 12:32   좋아요 0 | URL
오즈마님, 참 오랜만이네요. 아주 오래전 사진이긴 하지만 가끔 잠옷 입은 채로 머리 쥐어 박고 있던 귀여운 오즈마님 사진이 떠오르기도 해요. 요즘은 안 아프고 건강하신 거죠? ^^

LAYLA 2012-10-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청!!!!!!저에게도 궁극의 진통제인데 웬만한 약국은 인팔더라구요 ㅠㅠ

깐따삐야 2012-10-12 11:43   좋아요 0 | URL
아시는군요! 제가 웬만한 두통약은 다 잡숴봤는데 타이레놀이 역시 고전은 고전이지만 두청은 약국 이름처럼 신세계의 발견이었어요. 정말 효과 좋아요.
 

  나는 늘 오빠를 쫓아다니던 아이였다. "돌멩아, 노올자아-" 문밖에서 오빠를 찾는 동네 오빠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내가 먼저 뛰쳐나가 문 앞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놀거리, 볼거리 변변찮은 시골의 산 69-1번지에서 오빠는 혈육 이상으로 친구이자 선배이자 나의 모든 상대였다. 다섯살이라는 적잖은 터울 탓에 오빠는 대부분 나를 귀찮아했지만 거의 생래적인 책임의식으로 나를 챙겨왔다. 나는 입만 살아있는 드센 아이였고 가족의 희망을 넘어 마을의 자랑, 지역사회의 촉망받는 인재였던 오빠는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수줍은 모범생이었다. 공부를 안해서, 틀린 문제를 또 틀려서 이따금씩 맞은 적은 있는데 오빠는 다정하다거나 친절하지는 않았다. 어릴적부터 무언가 절대적인 느낌과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 그냥 오빠였다.

 

  엊그제는 그런 오빠의 뒷모습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진홍색 후드점퍼를 입은 오빠는 아직 단풍이 이른 푸른 숲길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는 유모차를 끌며 눈으로는 계속 오빠를 쫓았다. 그러고보니 오빠와 나란히 걸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빠는 언제나 앞장 서서 걷거나 뒤에서 따라오곤 했다. 오빠 옆에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영달이를 챙겨야 해서 발길이 자꾸만 뒤쳐졌다. 오빠와 올케언니는 세심정으로 올라갔고 남은 가족들은 법주사 안으로 들어가 보리수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담소를 나눴다. 24시간 깨어 있어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도시 서울과, 오빠가 문재인 후보를 싫어하는 개인적인 이유, 언니와 집안일을 균등하게 분담한다는 놀라운 사실 등 엄마의 입을 통해 여러 소식들이 오갔다. 나는 어린 시절, 오빠가 소풍날 파란 점퍼를 입고 개구쟁이 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 모처럼의 연휴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 거뭇거뭇해진 턱선, 영달이를 바라보던 눈빛 등 갖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며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녁에 오빠는 영달이를 바라보며 "애가 참 똑똑하구나. 똑똑하게 키워야지." 그런다. "똑똑하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시큰둥하게 응대하자 "그래도 머리가 좋아야 살기가 편해." 대꾸했다. 모르겠다. 오빠는 아이 잘 키우라고 한 말일텐데 나는 오빠가 늘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미심쩍었는가 보다. 영달이는 가끔 보는 외삼촌이 썩 마음에 드는지 입에 떡도 넣어주고 뽀뽀도 해주고 덥썩 안기기도 하고 평소에 안 하던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용돈을 사양하는 영달이에게 오빠는 쿨한 척 하지 말라고 퉁박을 주었고 영달이가 부끄러운 듯 마지못해 용돈을 받아들자 가족 모두 웃었다.

 

  다음날 친정에 가보니 오빠가 내 책장에 있는 책들 중에서 세 권을 가져갔단다. 한 권은 <욕망해도 괜찮아>인데 나머지 두 권은 모르겠다. 나는 오빠가 읽을만한 책을 눈에 띄는 곳에 더 많이 꽂아두지 않은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오빠와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 그것을 함께 즐기거나 나눌 시간 없이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려던 시절의 추억과, 사뭇 지친 기색으로 나이 들어가는 지금의 모습, 그 간극 속에서 서로를 향한 눅눅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오빠는 마냥 징징거리던 짬보인 내가 본인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것 같은 오빠가 실상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 그 어느 곳에 갖다 놔도 자신의 둥지를 틀고 재미를 찾을 생명력 강한 오빠지만 내 먼 기억속에서부터 지금껏 오빠의 모습은 한결같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커다란 나무 같다.

 

  항상 만남의 반가움에 이은 작별의 순간, 그 이후의 여운에는 슬픔과 답답함이 뭉근하게 고이곤 한다. 나는 여전히 오빠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이 되어버리고 행여 나의 알은체와 상관없이 오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길을 갈 것이지만 오빠의 뒷모습이 오래오래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음 만남에는 오빠가 좋아하거나 좋아할만한 책을 집안 여기저기에 떨구어 놓아야겠다는 다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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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10-0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구나, 깐따삐야 님.
전 오빠 둘이 네 살, 다섯 살 터울이라 맨날 쫓아다녀도 퉁박만 받고 가끔 놀아주면 꼭 울려서 수도꼭지라는 별명을 듣고 살았어요. 이제는 다들 커서 자주 보지도 못하지만, 오빠 늙은 얼굴 보면 괜스레 마음이 짠 하고.
ㅎㅎ 그런데 왜 돌멩이라고 불렀대요?

깐따삐야 2012-10-04 12:43   좋아요 0 | URL
치니님도 오빠가 두분이나 있으시군요! 오빠도 나가서 또래들과 맘껏 놀고싶은데 어린 동생을 챙겨야하니 귀찮았을 것 같긴 해요. 저도 일년에 고작 몇 번 만나는 게 전부지만 피곤해 보이거나 그러면 한동안 계속 마음이 안좋아요.
오빠 이름이 돌멩이와 비슷해서 동네 오빠들이 돌멩이, 돌맹이 동생,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ㅋㅋ

다락방 2012-10-0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깐따삐야님. 글 좀 자주 써주세요. 이 글이 무척 좋아요.

나는 오빠가 읽을만한 책을 눈에 띄는 곳에 더 많이 꽂아두지 않은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여기엔 빨간 볼펜을 들고 밑줄을 긋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 문장에 다 녹아들어있어서요.

깐따삐야 2012-10-04 12:4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처럼 하루하루가 시트콤처럼 재밌으면 좋을텐데 저는 주로 지친 몰골을 한 채 기계인간처럼 살고 있어서 쓸거리도 없고 쓸 시간도 별로 없답니다. 그 점이 아쉽고 안타깝지만 짬짬이 알라딘에 글 남기고 좋은 글, 좋은 책, 구경하며 쉬어가는 이 시간이 참 좋아요.

가족이란 참 오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관계여요.^^

감은빛 2012-10-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면서 저는 여동생에게 어떤 오빠였을까 궁금해지네요.
아, 아마 알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결코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거든요.

이 글 참 좋네요.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2-10-05 13:19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란 그런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은빛님. 종종 뵈어요.
 

  근처 동네 키즈 카페 아래층에 영풍문고가 생겨서 영달이를 데리고 종종 놀러 가는 편이다. 위층에서 열심히 놀다가 영달이가 피곤해 하면 아래층 서점으로 내려온다. 어린이책 코너에서 영달이와 아빠가 소리 나는 책을 눌러보고 이런저런 책들을 만져보고 구경하는 사이, 나는 슬며서 코너와 코너 사이를 빠져나와 소설, 인문, 등등의 코너에서 재빨리, 재빠르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끼며, 정말 천천히 책을 구경하고 싶다는 욕구에 도리질을 하며, 눈에 들어온 책들 중에서 가장 끌리는 책을 한 권 고른다. 그 즈음 되면 영달이는 엄마를 찾고 영달이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 또는 내가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른 다음, 두 권을 계산한다. 영달이 아빠가 본인 책을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에게 있어 책이란 마트에 진열된 각종 야쿠르트나 두루마리 휴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마저 책을 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내 책, 영달이 책도 이미 많은데!

 

  그리고 동네 서점. 우리집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의 서점이 하나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지하서점은 작년에 문을 닫았다. 주인이 알라디너 아닌가 싶을 만큼 여기서 본 책을 거기서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고 공간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가보니 직원들이 책을 쌓아놓고 정리하고 있더라는. 간판은 그대로 있지만 문은 닫은 상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학습교재를 중심으로 매매하는 지금 이 서점을 자주 찾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매력도 있지만 마음 허전할 때, 또박또박 걸어서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 맛도 쏠쏠하기에 정가를 지불하고 책갈피를 끼워 서점을 나서는 행위를 그만둘 수가 없다. 어제 저녁에는 펭귄클래식 시리즈의 하나인 <테레즈 데케루>를 샀다. 남편은 무슨 책이냐는 듯 힐끔 쳐다봤고 나는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에요."라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영달이는 표지 그림을 보고 "엄마, 이 사람 누구야?"라고 묻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무섭게 생겼단다. 남편은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영달이는 룰루랄라 뽀로로 스티커북을 샀다.

 

  <테레즈 데케루>는 물론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훨씬 이상이다. 절반 정도 읽었는데 글맛이 느껴지는 번역은 아니지만 작품의 매력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왜? 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흥미로운 소재인데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심리묘사는 섬세하고 탁월하다. 관습적인 인물은 인물대로, 그 인물과 반목하는 인물들은 인물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나는 지금 장 아제베도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하는 상태. 테레즈에 비해 지성이나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안을 사로잡고 변화시킨 남자, 분명 테레즈와 관련이 있을 그 남자, 장 아제베도. 그 이름은 전헤린의 수필집에도 등장했던 중요한 이름 아니던가. 성마른 나는 <테레즈 데케루>를 다 읽지도 않았는데 속편이 궁금해 <밤의 종말>도 알라딘에 주문했다. 내 책만 주문하기에는 또 뭐해서 영달이가 좋아하는 토끼가 있는 책도 함께 주문. 남편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가계에 도움이 된다.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많이 읽는다. 한동안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영달이가 좀 컸고 내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정도는 아니게 되었고 동료들과의 대화가 하나도 재미있지 않고 친구들은 각자 본인의 고민과 본인의 삶에 충실해 있다. 안도감, 환멸, 그리움 같은 것이 잔잔히 엉켜 그 기분과 요즘의 날씨가 나를 독서로 이끌고 있다. 가을 동안, 밖으로 떠드는 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무르익었으면 좋겠고 영달이와의 감정 교류도 보다 깊고, 보다 섬세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서점으로 마실 갈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듯 남편에게도 상쾌한 햇볕과 바람 아래서 테니스를 칠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아내와 딸을 치다꺼리 하느라 그 남자도 수고가 많다. 신발장과 자동차 트렁크 안에 그의 테니스채가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테레즈를 이해하는 동시에 체면 따위나 중시하는 그 남편에게 짜증을 내다 보니 영달이 아빠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독서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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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참 좋으네요, 깐따삐야님.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읽으시고, 그래서인지 이렇듯 글도 써주셔서 좋아요. 깐따삐야님의 글을 읽는건 제게 오프라인 서점에 들르는 것 같아요. 바로 그런 기분을 줘요.

깐따삐야 2012-09-20 11:54   좋아요 0 | URL
가끔 세월을 헤아리면 신기한 생각이 들어요. 알라딘에서 책을 사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어언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새 나이를 먹고 다락방님과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고.^^ 진솔하고 아름다운 글을 꾸준히 써주시는 다락방님 같은 알라디너 분들이 없다면 알라딘에 접속하는 일이 더 뜸해질 것 같아요.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은 공간이에요!

비로그인 2012-09-2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떼레즈 수업을 들었었는데...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사본이 있어 깐따삐야님 덕에 다시 꺼내 읽어 보았어요. 단어 하나하나 종이사전을 뒤적여가며 수업듣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네요..ㅠㅠ
제가 사는 곳엔 나름 크다는 서점도 왠지 정이 안가서 서점구경했던 게 꽤 오래전 일이네요...통유리창 바로 앞에서 멋진 전망을 눈앞에 두고 책 읽을 수 있는 서점이 가까이 있다면 매일 출근도장을 찍을텐데 말이에요...

깐따삐야 2012-09-21 09:42   좋아요 0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듣는 문학수업... 저도 그립습니다. 너무 그리워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교수님이 꿈에 나타나 비를 맞고 있는 저에게 우산을 주셨습니다.^^
이 정도 시리즈는 있겠거니 하고 갔는데 없을 때, 내가 묻는 책을 주인아저씨나 아줌마가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을 때, 조금씩 실망스럽긴 해요. 그래도 동네에 서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밤 늦게 환하게 불켜진 서점을 지나칠 때, 서점 안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느낌도, 요즘은 감사합니다. 소규모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참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