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거나 질려갈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방학이 찾아온다. 몇몇 동료들은 출석 연수도 신청하고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과 회포를 풀 예정인가 본데 나는 그저 한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혼자 있고 싶었다.

 

방학 시작과 동시에 일찌감치 근무조를 마쳤고 아름다운 가게로 보낼 물품들을 정리했다. 곧이어 알라딘 중고샵에 판매할 책들을 켜켜이 쌓아두니 어느만치 홀가분해진 느낌. 영달이는 다음주부터 방학이라 오늘은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조금 쉰 후에 놀이터에 나가 원없이 놀다 온다.

 

놀이터에서 얼굴을 익힌 엄마들은 내가 선생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노하우라도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것저것 물어오지만 뭐가 있을 턱이 있나. 오히려 육아에 대한 자세 및 유용한 팁을 얻는 것은 내쪽이다. 이따금 젊은 엄마들의 우렁찬 주장들을 듣다 보면 다들 저렇게 자식 잘 키우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교육현장이나 나라꼴은 왜 이럴까 싶다가도 또또 인간에게 하릴없이 기대를 건다 싶어 마음을 접곤 한다. 삼십대 중반에 처해 있는 지금, 나 자신을 포함 모든 것을 향한 환멸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환한 빛을 뿜으며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분명 내가 지나온 시간일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뭇잎 한 장, 돌멩이 한 덩어리를 가지고도 수억년 전을 상상하고 수억년 앞을 희망한다. 무궁화꽃 한 송이를 보고도 자신만의 비밀 동화를 풀어내고 흔하디 흔한 나뭇가지 두 개로도 새로운 역할을 꾸며낸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시설 하나에 다 올라타고는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이 되기도 한다. 종종 놀이터에 나와 아이들에게 과자를 풀어주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신 백발의 할머니,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아이들의 소음과 열기가 그리운 할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사춘기도 아니련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분열로 미칠 것 같다가도 누군가 따듯하게 건네는 말 한 마디, 무심코 흘린 말을 기억했다가 나누어먹는 음식, 아이들의 해맑은 함성 소리, 상념으로 끈적한 이마를 시원하게 헹구어주는 바람, 쨍하니 귓전에 울리는 친정엄마의 건강한 꾸지람... 그렇듯 소소한 것들로 위안을 받고 다시 버텨나갈 힘을 얻는다. 약간의 시간 차와 개인 차가 있을 뿐, 결국 내가 아는 것들은 남들도 이미 다 아는 것이거나 알게 될 것이라는 부질없음이, 그 부질없는 깨달음이 도리어 서늘한 용기를 준다. 체념의 두번째 뜻이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나를 괴롭히는 분열증의 해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결국 비슷하다면 내 나이 즈음에 남편도 참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가 말했을 때,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영달이가 너무 어렸던 탓에 경청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남편의 선명한 말보다 영달이의 무언의 몸짓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럴 때 그는 남자고, 아빠니까 괜찮았을 거라고 얼버무리기엔 석연치 않다. 그가 힘들다고 했을 때 엄마인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든가, 나는 앞으로 더 힘들어질 예정이니 나한테 그딴 말 걸지 마시오, 하는 차가운 눈빛을 쏘아주진 않았던가. 그때 그 남자는 혼자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식으로 단념했기에 지금 저런 얼굴을 하고 다닐까. 어쩌면 내가 주장하는 나보다 나와 같이 살아온 저 남자가 나를 더 잘 아는 건 아닐까.

 

그렇듯 요즘은 무심한 듯 일상을 조율하고 근근이 관계를 엮어나가는 사람들을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삶과 사람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갖고 사는 나같은 인간에게 그들은 창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상의 반복, 또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사건들을 무척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묵묵하고 인내심 강한 그들을 숙주 삼아 물적, 심적 호사를 누리며 잘난척 해왔던 내가 마치 고급 기생충은 아닌가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살아가는 데에는 신선한 감성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다져진 근육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방전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새로운 날들을 준비해야 하는 방학.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격려와 치유가 필요하다. 학교에 갇혀 있는 동안 함께 갇혀 있었던 생각들을 풀어내고 자연의 여유로운 기운도 받아와야겠다. 내 안의 숱한 상념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에게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의 가치가 새삼 고마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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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낙산의 마음

 

- 김 광 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살쾡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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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조라 학교에 나와 있다. 아직 잠들어 있는 영달이를 뒤로 하고 학교까지 걸어오는데 갑자기 발걸음이 뒤엉키고 시야가 뿌얘지는 것이 빈혈은 아닐테고. 학교 오기 정말 싫었나 보다. 점심으로 김치비빔밥인지 김치덮밥인지 김치볶음밥인지 정체불명의 김치밥을 맛없게 먹고 나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 낯익은 글상자에 글을 쓰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구나.

 

출산 이후로 모든 관절이 좋지 않았는데 한번 크게 넘어진 뒤로 무릎이 나빠져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다. 연말정산을 하는데 의료비를 보고 기함했다. 동네 의사가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도 아니련만 돈을 저리 많이도 갖다 줬군. 좋아지다가 나빠지다가 하는 무릎 상황에 이제는 짜증보다는 적응을 할 때인가. 남편은 어깨가 아프다고 해도 나이 탓, 무릎이 아프다고 해도 나이 탓, 머리가 아프다고 해도 나이 탓을 해대며 본인이 사십줄에 들어선 것을 으스댄다. 그 나이가 놀랍고 그 나이를 먹고도 칭찬과 비난에 따라서 눈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폼이 너무나 유치해서 또 놀랍다. 고령화 시대에 제발 나이 탓만 하지 말고 나잇값 좀 하며 삽시다.

 

영달이는 여섯 살. 작년 초 유치원 적응 후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극한 모범생이 되었다. 물론 사회생활의 적잖은 스트레스를 집에 돌아와 만만한 어미에게 풀어내기 일쑤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친정엄마가 편찮으셨던 모습을 지켜보며 요즘들어 죽음에 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아졌고 제 아비와 어미를 엄정한 잣대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왜 결혼식 사진 속에서 아빠 혼자만 웃고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시무룩해 있느냐는 예리한 질문 앞에서 허둥대다가 위기철의 '우리 아빠, 숲의 거인'을 읽어주며 세상 모든 결혼의 비의에 대해 설명했다. 영달이는 결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며 과학자가 되어 혼자 살겠다는 선언을 했고 남편과 나는 부모로서 송구한 마음에 각자의 뒷모습에 자꾸만 흠칫거리는 못난 어미, 아비로 살고 있다.

 

지난 달, 친정엄마가 편찮으셨던 일주일은 재난 25시와도 같았다. 당장에 영달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일을 남편과 내가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가며 번갈아 해야 했고 유약하신 아버지께서 덩달아 몸이 안좋아지시는 바람에 친정과 우리집을 정신없이 오가는 나는 초긴장 상태였다. 떨걱대는 무릎에는 파스가 네 장씩 붙어 있었고 꽁꽁 언 양손에는 국통, 김치통 등이 주렁주렁. 잠을 못 자서 안개 같은 머릿 속은 온통 엄마의 검사 결과에 대한 슬픈 상상으로 가득했다. 육아휴직이든 간병휴직이든 내고서 엄마를 돌봐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다가도 갑자기 나를 포함, 영달이까지 불쌍해져서 눈물을 찔끔찔끔. 엄마는 그 와중에도 오빠한테는 자신의 상황을 절대 알려선 안 된다며 이미 방정맞은 내 입을 봉하는가 하면 오빠와 올케가 내려온다고 하자 쑥떡을 쪄놔야 한다고 야간 외출을 도모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일관되게 깐깐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주변을 놀래켰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괜찮았고 엄마도 씩씩하게 걸어서 퇴원하셨지만 나의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간 매일매일 엄마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보아야 마음을 놓았던 것 같다. 무뚝뚝한 오빠의 전화질과 택배 공납도 엄청났다. 대한민국에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배달되는 것 같았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걷는지 달리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엄마, 지금은 안 그래도 돼. 엄마도 이제 나이를 생각하세요. 오래오래 살아서 부족한 딸내미를 계속 혼내고 가르치고 해야 나도 엄마만큼은 못해도 그 발뒤꿈치라도 엇비슷하게 따라가는 어미가 되고 인간이 되지." 나는 친정에 갈 때마다 부탁인지 위로인지 푸념인지 하소연인지도 모를 소리를 매양 해가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엄마의 옷자락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

 

요즘 나는 홀딱 발가벗겨진 채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거나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광장에 서 있는 기분일 때가 많다. 고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읽다보니 삼십 중반을 넘겼으면 이제 중년이나 다름없던데 어째 이 나이를 먹고도 자신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선생도 십년쯤 했으면 눈을 감고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육아도 오년쯤 해왔으면 아이 마음까지는 못 읽어도 입에서 나오는 말뜻은 읽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하고도 육년쯤 살았으면 우정 비슷한 감정이라도 생겨나야 할텐데 싸우는 게 귀찮아서 아예 입도 닫고 귀도 닫고 할 때가 많으니 살면 살수록 첩첩산중, 혼비중천이다.  

 

독서와 사색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지난 시절에는, 영달이 비유로 엄마가 공주처럼 예뻤던 그 찰나의 시절에는 무엇이 무엇인가, 정의를 찾아 참 많이도 헤맸었다. 그 무엇에는 행복, 자유, 사랑 등이 있었으리라. 지금은? 들기름 발라 구워낸 고소한 꽁치살이 딸내미 입으로 쏙쏙 들어갈 때마다 헤벌쭉 좋아라 하는, 집중력 있게 밥 먹이기의 달인이 된 또 다른 내가 있다. 별일 없이 흘러가는 다행한 하루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안도의 숨을 쉬며 잠자리에 드는 낯선 내가 있다. 수필과 자동차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괴리감. 하지만 어쩐지 이 또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나저나 토토가에 015B는 왜 안 나오는 것이냐. 

 

새해에는 아픈 무릎이 더 많이 아프지는 않길 바라며 똑똑하고 건강한 영달이도 딱 이 정도만 똑똑하고 건강하여도 과분할 듯 하고 영달이의 바람직한 인생관 및 결혼관 성립을 위해 남편과의 비정상회담도 정상회담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무엇보다도, 나의 영원한 멘토인 우리 엄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엄마, 아프지 마요. 제발. 그리고 십년 넘게 하고 있는 선생 노릇도 부디 아이들 인생에 지저분한 낙서로 남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찌어찌 살다 보면 나도 인간 될 날이 오리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죽을 수 있으리라. 설사 그렇지 못하다 해도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노력은 해야 하리라. 매일매일이 첩첩산중, 혼비중천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아쉬운 방학이 가고 있다. 점. 점.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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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5-01-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은퇴를 했지만 마님이 현역때부터 워낙 무리하게 몸을 쓰는 일을 하다보니 관절 마디마디가 성하지 않은데.. 그 중에 오른쪽 무릎이 제일 말썽이었답니다.

여기저기 병원 다니다 동네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그나마 호전을 보이고 있다죠.

주변에 봉침 하는 곳 있음 찾아가 보세요.

깐따삐야 2015-01-28 11:04   좋아요 0 | URL
저랑 같네요.
저도 오른쪽 무릎을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된 것이 벌써 몇년 전인데 이젠 왼쪽 무릎도 같이 나빠졌어요. 무릎을 새 무릎으로 갈아버리고 싶다, 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서서 가르치고 서서 살림하고. 어쩔 수 없지요.

봉침도 맞아봤는데 그때 뿐이던걸요. 신통방통 명약이란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걸까요. ㅠ.ㅠ
 

영달이를 낳고는 방학이 없다. 학기 중엔 남의 아이들 보랴. 방학 중엔 내 아이 보랴. 몸도 마음도 두 개면 좋겠다. 기왕이면 튼튼무쌍한 것으루다가. 방송 중 어떤 패널이 한국 여자들은 아이 낳은 후 부터는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더니만  나 역시 그렇다. 양방과 한방을 오가며 뻐그덕대는 몸둥아리를 수리해가며 이 여름을 났다. 나고 있다. 직장이 아무리 가족 같은 분위기 어쩌느니 해도 가족은 아니듯 싸가지 없는 말씀만 골라하는 관리자에게 하는 데 까지 하다가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배째라고 나갔더니 눈에 가시마냥 사사건건 갈궈댄다. 하지만 일단 배를 째고 본 나는 뱃속을 비워내니 한량없이 마음 편하다. 우야됐든 간에 인간이 먼저 아닌가. 우야됐든 간에 살고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영달이는 그 사이 무럭무럭 자라 꼬박꼬박 말대꾸에, 사사건건 반항에, 조곤조곤 엄마한테 훈계하기 등. 미운 네살을 온전히 실천 중이다. 예전 성질 같으면 집에 불난리든 물난리든 났을 것이지만 아마 나보고 사람 되라고 이 소녀를 보내셨는지 어금니 꽉 깨물며 참아넘기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백번. 그래도 여름 나면서 질병을 몇 차례 앓아 더 좋은 어미가 되지 못함을 자책하기도 수천번. 어느 순간 눈 감아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리면 놀라움과 두려움과 끈끈함에 가슴이 뛰기도 한다. 이 현실은 어쩐지 익숙해지는 날이 없고 매번 당황스럽다. 아직 의연한 사람이 되기엔 쓴 쑥, 매운 마늘을 더 먹어야 하는가 보다.

 

알라딘 서재가 십년이 되었다니. 나도 올해로 교육경력 십년차 교사다. 보람과 희망 속에 살아가는 교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그만둘 기세로 뱃속을 다 게워버린 교사. 옛글을 찾아 읽다보니 그 안에 묻어나는 새내기 교사로서의 열정과 순수가 참 그립다. 한편으로는 나이 먹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고 말이다. 요즘 새내기 교사들은 똑똑하고 깔끔해서 나처럼 찐득찐득한 감정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지만 나는 앞으로 이십년차 교사가 되어도,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만은, 아이들과 여전히 꾸덕꾸덕 감정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을 것 같다. 경험이나 경력보다 무서운 것이 유전 및 본성이라고 직업인으로서의 기술엔 탄력이 붙을지언정 교육 현장에 있는 '나'는 그대로다. 이 현실도 어쩐지 익숙해지는 날이 없고 매번 당황스럽다. 처참하도록.

 

서재에 쓴 페이퍼들이 차곡차곡 저장되는 사이 나도 열 살이나 더 먹고 서재와 함께 늙어간다는 말도 과연 틀리지는 않는구나. 그때는 그래도 좀 꾸미고 나서면 예뻤는데 이제는 몸무게도 너무 늘고 아줌마가 다 되었다. 남편은 물론 남자를 봐도 설레지가 않고 오로지 매일매일의 할 일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이런저런 병만 늘었다. 책을 읽다 졸기 일쑤고 리뷰는 커녕 100자평 올릴 시간도 부족하다. 이렇듯 나도 몰래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선택의 현장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는 자각이 들면 아, 아직 인간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은 것이 어서 정신 차리고 나의 선택에 책임을! 이런 구호가 들리는 듯 하다. 혹시나 싶어 이런저런 책을 찾아읽고 똑똑한 사람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도 역시나 그저 내 자리에서 내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삶 외에는 별다른 정답도, 모범답안도 없다. 더구나 영달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모자란 어미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많이도 컸다. 우리 딸.  엄마 되서 자유가 없다고 툴툴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간 십년 사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너를 낳은 일. 앞으로도 나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렴. 엄마는 너를 바라보며 더 정직하게, 열심히 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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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3-08-15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달이 반가와요. 빨대가 아니라 광선검이라도 들고 있는 표정이에요. >.<

깐따삐야 2013-08-16 17:42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도 반가워요. 오랜만이죠? 영달이는 주로 큰 빨대를 좋아합니다.^^

hnine 2013-08-15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이 낳고나서 한동안 엄마에게 방학이란 없지요.
무엇보다도 아이 사진을 보니 정말 감격이네요. 제가 댓글을 꼬박꼬박 남기지는 않았지만 깐따삐야님 서재에 글이 올라오면 즐겨 읽고 있었던 터라 아이를 가지셨다는 것, 영달이를 낳으셨다는 소식, 영달이 키우는 얘기, 가끔씩 올려주시는 글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리 컸어요. 그동안 책 한권 분량의 얘기들도 쌓였지 않나요? ^^
아이를 보며 하시는 다짐, 아이는 나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라는 것, 공감 백배 입니다.
저도 태그따라서 영달이 만세입니다.

깐따삐야 2013-08-16 17:49   좋아요 0 | URL
천방지축 이십대 때에는 저도 제가 인간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늘 두려웠는데 덜컥 엄마가 되었고 엄마됨=인간됨으로 생각하고 목하 수행 중이어요. hnine님처럼 이미 그 아득한 육아의 강을 건너오신 분들을 보면 저야말로 존경과 감격입니다.
영달이를 보며 저도 남편도 아닌 제3의 인물이라고 낯설어하다가도 저를 닮고 남편을 닮은 모습을 볼 때마다 놀랍고 부끄럽고 조심스러워지고 그렇답니다.^^

치니 2013-08-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영달이 영달이 하셔서 혼자 남자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던 저는, 편견덩어리.
아주 야무지고 똘똘하게 생긴 어린이네요! 사진에서 엄마 훈계하는 목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아요. ㅋㅋㅋ
영달이 만세 ~ !

깐따삐야 2013-08-16 17:51   좋아요 0 | URL
영달이가 어렸을 땐 머리 숱이 많지 않아서 아들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지금은 씩씩한 소녀가 다 되었죠. 엄마도 혼내고 아빠도 혼내고 나름 비밀도 있는 것 같고 말이죠. ㅋㅋ
치니님도 제주도에서 건강히, 잘 지내시는 거죠?

다락방 2013-08-1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달아 반가워! 제 조카랑 비슷한 나이대라 그런지 더욱 반갑네요. 저렇게 키우느라 깐따삐야님 얼마나 마음 졸이는 시간이 많았을까 생각도 들고요. 치니님 말씀대로 되게 야무지게 생겼어요. 어떤 아이로 또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궁금해져요.

'가장 잘한 일'이라 자신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잘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 깐따삐야님, 네, 더 정직하게, 열심히 지낼 수 있도록 저도 응원할게요.
:)

깐따삐야 2013-08-16 17:54   좋아요 0 | URL
타미 이모 다락방님. 아, 타미는 다락방님 같은 이모가 있어 얼마나 좋을까. 페이퍼 읽을 때마다 부러움이 그야말로 용솟음쳐요. 영달이에겐 자매를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왜 나는 언니가 없지, 여동생이 없지, 이러고 있는다는.ㅜ.ㅜ

그럴까요. 제가 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저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주는 건 영달이 엄마로서 뿐이니까요. 아주 놀라운 경험이지요. 저처럼 이기적인 인간한테는 말예요. 응원 감사합니다. 갑자기 힘이 나네요. 열심히 살게요!

레와 2013-08-1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달이, 엄마 닮았을 것 같아요!! ㅎㅎ 강한 확신이 퐉퐉. ㅋㅋㅋㅋ (이 확신이 어디서 왔는진 모르겠어요.ㅋㅋㅋ)


깐따삐야 2013-08-16 18:02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죠, 레와님? ^^
저처럼 집착이 강하고 변덕이 심하고 직선적이고 몽상 덩어리... 아, 이런 점을 피해가면 좋겠는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죠. 아마. ㅠ.ㅠ 하지만 영달이는 다행히도 감각적이고 영리해서 어느 때는 얄미울 정도인 제 아빠를 많이 닮았답니다. 저처럼 미련한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요.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저는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ㅋㅋ
 

육아가 항상 신선하고 즐겁기만 하면 좋을텐데 높이 쌓아올렸다가 다시 무너뜨리는 블럭놀이처럼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다. 내 아이의 예쁨과 소중함. 말할 것도 없지만 어미로서의 본능과 역할 이외에 그냥 사람으로서의 또는 여자로서의 욕구와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누군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를 마시거나 모두 잠든 사이 집어드는 책 한 권. 친구와의 전화 통화. 그렇듯 소소한 행위만으로도 쉽게 해소가 될 때가 있지만 이도저도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져서 그냥 하루 완벽하게 공치고 싶어지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일종의 불안감과 사명감이 단단히 나를 떠받쳐 밖으로 나가는 대신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곤 하는데 책읽기는 무색무취의 부담없는 친구처럼 나를 늘 위로하고 격려한다. 화장대 위에, 식탁 위에, 책상 위에 늘 책이 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힌 수인처럼 읽고 있다, 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담배, 누군가에게는 프로포폴, 나에게는 책인가.

 

 

 

 

 

 

 

 

 

 

 

 

 

 

그리고 이 책을 요즘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영화 <더 리더>에서 책을 읽어주는 마이클에 기대어 잠드는 한나의 모습이 있었던가. 엄마 품에서 옛날 이야기를 청하는 아이처럼 책 읽어주는 남자도 나의 로망 중의 하나인데 이 책은 그 욕구를 어느만치 해소시켜준다. 대학원 다닐 무렵 <맥베스>의 문장들을 장렬한 연극톤으로 낭독하며 열강을 펼치시는 교수님의 모습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매력이 있다.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전문가의 역량을 선량하게 발휘하고 있으며 그 톤은 더없이 공정하고도 자상하다. 서평집이나 독서에세이에 쉽게 매료되면서도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지? 싶을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은  "독서가, 또는 잠재적 독서가를 위한 고전 즐겁게 읽기"라는 부재를 달아도 좋을만큼 너무 할랑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채로 독자의 주의를 끌며 다채로운 고전의 세계로 안내한다.

 

특히 <아주 사적인 독서>라는 제목과는 달리 고전을 가능한 한 여러가지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단순한 감상이나 비평의 차원이 아니라 소설의 탄생 배경부터 그 이후까지 전체적으로 조망한 다음 소설이 갖는 사회적, 심리적, 미학적 의의까지 짚어낸다. 그리고는 소설을 읽는 독자, 개인으로 컴백하여 등장인물과 나를 중첩시켜 대단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투시하게끔 돕는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여자를 청어와 송어로 비유하는 대사와 그 대사를 분석한 구절이 나오는데 과연! 이란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래! 송어는 해방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지엽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고전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텍스트-무한'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속속들이 깊이있고 흥미로운 만화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봄방학 중 근무일. 오늘도 학교에 나와 쉬고 있다. 학기 중엔 큰 아이들 때문에, 방학 중엔 작은 내 아이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길게 쉴 수 없기에 짬짬이 쉬는 노하우를 터득해가고 있다. 그 와중에 한 챕터씩 야금야금 읽으며 만나는 고전 속 인물들이 나와 같고 나의 욕망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남몰래 한숨을 쉬기도 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인간이 먼저인가. 제도가 먼저인가. 욕망과 이성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자유는 과연 모든 가치에 우위하는 존재 조건인가. 환상을 좇게 하는 지식과 현실을 깨우쳐주는 지식은 완전히 다른가. 오로지 한 겹 차이인가... 이 책을 '읽고 있고' '읽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많은 질문들로 내몰고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로쟈의 <아주 사적인 독서>역시 서평의 고전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번 다 읽고나서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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