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영희 교수가 아버지인 고 장왕록 교수를 회고하며 엮은 책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뒤늦게 찾아읽으며 지적이고 사려깊으면서도 온기가 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지 설레고 충만한 마음으로 체험하고 있다. 영어 전공자임에도 아직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귀부인의 초상>의 한 대목이라는 저 말이 아련하고도 뭉근하게 다가오게 된다.
아직도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종종 꺼내시는 엄마. 살아 계실 적엔 듣기 민망할 만큼 별에별 구박도 마다하지 않더니 그간 적잖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리어 추억은 더욱 오롯해지는가 보다. 영문학을 전공하셨지만 사학으로 전향, 일평생 밥벌이와 담 쌓은 채 향토사를 연구하셨던 외할아버지. 스물 초엽에 외할아버지와 한지붕 아래서 함께 산 일이 있었다. 커피, 담배, 일본 야구, 손바닥을 마주치던 습관, 기침소리... 파편적이긴 하나 함께 살았기 때문일까. 기억이 꽤나 또렷하다. 비록 겉핥기 식으로 영문학을 배우는 사범대생이었지만 대학생이 된 나에게 할아버지는 맨스필드 단편선, 녹색의 장원, 옥스포드 영영사전 등 몇 권의 책을 선물하셨다. 고서와 원서라는 이중 부담, 더불어 이중의 기쁨이었다. 엄마와 갈등이 있거나 소읍의 무료함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오만원씩 용돈을 주시면 굴다리를 지나 버스를 타고 시내 서점까지 직행, 카뮈, 니체, 베르그송 등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각자의 방에 감금되어 책으로 성곽을 두른 채 유폐생활을 하는 할아버지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지금이라면 할아버지의 지식과 경험과 통찰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질문을 하고 많은 답을 얻으려 했을텐데 그때의 나는 가까운 곳의 지식인은 몰라보고 네이버 지식인하고나 노는 격이었다. 책에서 지혜를 갈구하고 모니터 앞에서 소통을 도모하고 있을 무렵 외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슬펐던가. 이후에 집안에 큰 구조조정이 있었기에 사뭇 정신이 없었고 나 자신 연애 문제라든가, 학업 문제로 골몰해 있던 때라 슬프지도 않게 기억 저편으로 아득해져 갔다. 현대 소설을 읽지 말고 고전을 읽어라, 요즘 책이 궁금하거든 좋은 계간지를 하나 구독해라, 쟤는 돈만 생기면 책을 산다고 구박하는 엄마 말에 쟤가 나중에 다른 건 못 사도 책 사는 안목은 뛰어날테니 걱정 말라고 독려하시던 할아버지. 내가 캐나다에 갔다가 한달만에 돌아왔을 때도 모두가 나를 탓하고 놀렸지만 할아버지 만큼은 유명인의 예를 들며 잘했다, 참 똑똑하다, 뭐 배울 게 있더냐, 한 마디로 정리해주시던 멋진 분이었다. 시인 윤동주와 한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다는 경험담으로 나를 놀래켰던 분. 생선회와 초콜릿을 좋아하셨는데 지금 같으면 매일매일 사다드리며 그 내공과 의지를 닮으려 할텐데 외할아버지의 존재가 이제와서야 참으로 아쉽고 그립다.
능력이 차고 넘침에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 때문일까. 이모들은 외할아버지를 입 짧고 이기적이고 까탈스런 노인네 정도로 치부하곤 했지만 투정과 원망의 어미에는 항상 애정과 존경이 깔려 있었음을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생전 아이스크림을 먹는 손녀의 손이 시려울까봐 화장지로 돌돌 말아주는 장면이 아직도 어른어른한데 외할아버지도 내게는 맛있고 진한 커피를 나눠주거나 마음껏 책 사보라고 용돈을 찔러주는 평범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주변의 사람과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거나 당시의 고민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할아버지와 보다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으련만 할아버지가 워드 작업을 부탁하시면 안 하던 전공공부 한답시고 투덜대기나 했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지려고 한다.
이후에 교사가 되고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대학원에 갔을 때에도 할아버지의 존재가 못내 아쉬웠다. 들어야 할 말이 있었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고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맑은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은 채 말씀하셨다. "너는 큰 글은 쓰지 못할 거다. 신문기사라면 모를까.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네게 맞지 않을 테고. 수필 같은 것은 괜찮겠구나." 당시에는 그 말이 조금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통찰, 날카롭고 고마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사학, 더구나 향토사학이라는 분야는 예나 지금이나 밥벌이가 되지 않기에 대를 이을 연구자가 없어 할아버지의 연구는 미완의 자료들로 남았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던 이종 오빠들도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직업을 갖게 되었다. 면면히 흐르는 피의 영향일까. 썩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외할아버지를 존경했고 오직 책 읽는 재미로 산다던 S오빠가 부부교사인 남편과 나에게 직접 찾아와 신용이니 금리니 하는 말을 꺼냈을 때는 하루 종일 우울했다.
오후 늦게 학원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 무리를 보며 저렇게 공부를 많이 시키니 나라가 망하려고 그러는가 보다, 한숨을 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 생경했던 기억. 공부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이 하신 분이 저렇게 공부를 많이 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시다니. 지금은 그 말뜻을 이해한다. 할아버지 저 엄마가 됐어요. 선생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할아버지가 공부를 왜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이제는 이해해요!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어도 외할아버지는 지금 여기에 다시 와주실 수 없지만 그러나 베풀어주신 사랑은 남았고 오랜 숙고 끝에 도달한 말씀들도 내 청춘의 마디마디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사랑의 추억은 어디에 비할 수 없는 막대한 유산이자 남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오타 하나 없이 정갈하게 엮인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아껴가며 읽으며 자연스레 외할아버지를 회상했고 경쟁과 증오를 당연시하는 이 험악한 세계에서 꼿꼿하고 기품있고 사랑이 넘치는 두 어른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해져 그립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