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 해봤니?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흔한 이별노래들론 표현이 안 돼.

너를 잃어버린 내 느낌은

그런데 들으면 왜 눈물이 날까.

 

거실 바닥을 닦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잠시 회상에 잠겼다. R.ef의 이별공식. 지금도 내 입술은 자연스럽게 흥얼흥얼. 권투선수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체육 선생님은 실기 시험으로 스포츠댄스? 에어로빅? 어쨌든 5분가량의 체조를 짜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친구 몇몇은 우선 배경음악부터 고르자 했고 나와 HFM라디오 덕후였던 덕분에 이런저런 노래들을 좀 아는 편이었다. 적당히 리듬감도 있으면서 후지지도 않는 이별공식으로 낙점. 안무를 짜는 과정에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며 삐지기도 했지만 틈만 나면 팔다리를 휘두르며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연습한 결과 우리 조는 를 받았다. 체육선생님은 구성지게 잘 짰다면서 조회 시간에 단상에서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셨고 우리는 그 또래 여자아이들답게 꺄악, 어후, 도리도리, 요란법석 거절을 했다. 사실 나는 이제와 고백하건데 비 오는 체육시간을 기다리던 소녀였다. 뛰는 게 싫어서, 쥐뿔도 없는 권투선수 출신 체육선생님의 인생사가 듣고 싶어서. 단단하고 까무잡잡한 차돌멩이 같던 선생님의 입에서 팡세의 주옥같은 명언들이 막힘없이 흘러나올 때, 작지만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시골중학교의 나른해 빠진 다른 선생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정열과 의지가 번뜩일 때, 남몰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것도 같다. 이제는 이름 석자도 잊었지만 영화 코코에서 이야기하듯 내가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나중에 선생님이 주로 결손 가정 아이들로 이루어진 권투부를 꾸려 지역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역시 선생님답다, 싶었다. 겸손한 인터뷰 내용도 여전했다. 나는 체육을 싫어하는 학생이었고, 공이나 던져주고 사라지는 몇몇 체육 선생님들에게 실망한 참이었고, 선생님 눈에 사랑스런 학생으로 보여질만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R.ef의 노래처럼 아련하고 따듯한 향수에 젖는다. 화창한 날에는 게으른 소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렬히 뛰어다니고 비오는 날에는 나를 생각하는 갈대로 만들어주셨던 선생님. 제 직업에서 사기를 치는 너절한 인간들을 볼 때, 그리 될까 경각심이 들 때, 선생님의 한결 같던 직업정신을 떠올리면 풀려버린 사지와 척추가 꼿꼿이 다시 서는 느낌이다.

 

영화 남한산성을 뒤늦게 찾아보며 남편은 내게 그랬다. 당신은 김상헌 같은 사람이고 나는 최명길 같은 사람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에 견줄만하냐고 서로를 실컷 비웃어준 다음 맞다고, 잘 봤다고, 나는 스스로 뱃가죽을 가르는 한이 있어도 항복은 못한다고,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고 응수했다. 남편은 철없는 애송이 보듯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 다음 자신의 얍삽한 기회주의가 나라를 구할만한 융통성이라도 되는 듯 거만을 떨었다. 나는 일평생 저런 사람들을 존경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저런 사람들 덕택에 생명과 자리를 유지하고 사는 것 같은 불쾌미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같으나 그 가치가 다를 때 우리는 얼마만큼 타인을 존중할 수 있을까.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체육선생님의 인생 도서. 팡세의 명언이다. 일찍이 R.ef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이, 새로운 사람을 사귈 필요도 없이, 그 허망한 욕심들은 접어두고 과거의 페이지들을 숙독하여 그 깨달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현자가 되고도 남겠다.

 

모두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 거라 생각을 해.

저마다 감정은 각자 다 다른 거니까.

각자 나름대로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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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으면 좋았겠지만 몇 분 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단련 또는 제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교실에서는 학교폭력이라든가 인권침해 같은 분란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다. 나라는 사람은 아이들에게 상처도 입지만 기운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은 잠시 뿐. 좁은 교무실에서 보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 있고 알고 싶지 않아도 터득이 되는 불화의 정치를 보고 있자니 명치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학기 소감을 물어오는 다정하신 선생님께는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한껏 순화된 표현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부재중일 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곰곰이 떠올리자면 짠하게 밀려오는 뭉클함 같은 것이 있다. 반면교사라 하지 않던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인데 나 역시 오래 머물면 그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한 환경은 나를 열정적인 독서가로 만들어 주었다. 에머슨부터 논어까지, 무릎을 치며 읽어 내려간 구절이 얼마나 많던가. 에둘러 말하는 인간학인 문학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인간학들에 관심이 갔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독서에 몰두하다 보니 얻은 것이라고는 인간에 대한 엄청난 통찰은커녕 견비통과 위장병뿐이지만 습관적으로 모든 것에 원인 제시,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는 마치 신이 나를 일부러 이곳에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꾸준하고 치밀하게 상대를 읽고, 이해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잽 또는 어퍼컷을 시도했다가는 뭐하는 짓인가. 혹시 내 인생이 트루먼쇼인가. 당혹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게 밝다, 솔직하다, 깔끔하다, 등 긍정적 수식어를 붙여주며 나를 파악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들이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적나라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면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는 것 같은 혼란과 짜증에 경악해버리겠지.

 

그 사이 영달이는 내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잘잘못을 대충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직 나보다 말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찰과 침묵에 능하다는 면에서는 훨씬 강자임에 틀림없다. 아이 앞에서 책잡히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방학에도 쉬지 못하고 머리와 손발을 놀리는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이다. 상대의 가슴 한복판을 파고드는 독설은 나를 닮은 데다 남편의 서늘하기 짝이 없는 새침함까지 빼닮아서 당최 만만치가 않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가끔 머릿속에서 단단한 견고딕체로 둥둥 떠다니곤 한다. 면피할 수 없는 자리, 부모.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책. 안개의 나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선집이다. ‘크낙산의 마음’, ‘나무처럼 젊은이들도와 같은 시들은 너무 좋아서 옛 시집에서 찾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도 했는데 좋은 시들이 가득 담긴 양장본 시선집으로 나오니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선물과도 같다.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과묵하고 점잖은 교수님이셨을텐데 시들을 읽다 보면 갈등, 회한, 연민 등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다채로운 감정들이 읽힌다. 요즘의 어떤 시들 마냥 수다스럽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지극히 평이하고 단순한 시어들인데 한 번 더 읽어보게 되고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산란한 날, 위로나 수양 차원에서 읽어보고픈 시들이 많다. 누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내가 나를 보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 아픈 나를 나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 시를 찾고 시를 읽게 되는 것 같다.

 

그 손

- 김 광 규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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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은 사람도, 바람도, 구름도 모두가 천천히 흘러간다. 아침엔 티라노사우르스 모양의 구름이 층을 지어 조용히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첫 출근 후 보름 남짓 지났다. 아침마다 열 한 명의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하루에 두 번 정도 만난다. 아이들이 별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수업 외의 시간은 대개 고요하다. 영어교과실에는 철 지난 사전, 스토리북, 영화 dvd들이 빼곡하고 이 공간을 거쳐 가신 선생님들의 흔적과 종종 마주친다. 수업 시간, 모기약은 필수이며 청량한 바람은 서비스다. 일대일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고 역동적인 그룹 활동은 불가하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아이들은 사는 곳을 닮아 있다. 반짝반짝 하다기보다는 어쩐지 그윽하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 꼬박꼬박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마저 저당 잡힌 채 빼곡한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하며 지내다가 이런 여유를 만나니 처음엔 좀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던 대로 하자. 시골 아이들이라고 해서 단어를 덜 외워도 좋다거나 진도를 천천히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처음엔 버거워 해도 나중에는 잘 따라온다. 다만, 여유가 있으니 칭찬도 고루고루 해줄 수 있고 모든 질문에 성의껏 답해줄 수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장점을, 좋은 점을 최대한 보기로 한다.

 

   영달이는 다행히 할머니와 잘 지내고 있다. 수업을 마치면 할머니 손을 잡고 돌아와 마늘도 찧고, 고스톱도 치고, 종이접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아빠와 함께 우쿨렐레도 연주하고... 나름 알찬 생활을 하고 있다. 학원에는 보내지 않았다.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보낼 수밖에 없는 때가 올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엄마가 우리 곁에 더 오래, 건강하게 계셔 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학교 오는 길 저 너머로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개나리 움트는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이모와 마주앉아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제 이모를 떠나보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오열하는 엄마를 달랠 여력도 없이 영정사진 속에서 가을하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이모를 보니 나 역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밤에 잠이 들었다가 잠시 깨었을 때, 이모의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귓전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아 정신이 맑아졌다. 대학 기숙사로 떠날 때 이모가 사주신 이불로 4년을 지냈다. 임용고시 2차 시험이 있던 날, 밤새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고 이모는 택시비를 갖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오셨다. 영달이가 태어났을 땐 조리원에 오셔서 우리 가족의 앞날을 응원해주셨다. 우리 엄마도 해줄 수 있는 일을 이모니까, 이모라서 해주신 것이다.

 

   어느 소설 제목처럼 이제 나에게 남은 하루하루는 작별의 날들 뿐인가 보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어떤 어른들은 애도의 시간을 보낼 틈도 없이 다시 담담한 얼굴로 일상으로 복귀하던데 나란 사람은 기억과 한 몸처럼 부벼대며 거의 못 헤어 나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 벌써부터 두렵고 막막하다. 연습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이별의 순간들. 이 곳으로 들어와 고요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담대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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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꽃망울 터질 때쯤엔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는데 눅눅한 여름이 다가서니 집 밖으로 다시 나서기가 망설여져 마음이 또 눅눅하다. 긴 삶에 짤막한 쉼표 하나 찍는다는 것이 이렇듯 번뇌로운 일이었던가.

 

어미로서의 불안을 먹이고 또 먹이는 것으로 대체하여 그런가. 영달이는 내가 쉬는 사이, 참 무럭무럭 많이도 자랐다. 위로는 친정엄마, 아래로는 딸내미로부터 끊임없는 구박덩어리 같은 존재지만 그저 남들과 다 같은 엄마라는 이름, 그 묵직한 자리 덕분인지 그럭저럭 효용 가치가 있었나 보다.

 

놀이터에 나가 있다 보면 울타리 밖으로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는 아이들이 있다. 손만 번쩍 흔들고 가는 아이, 꾸벅 인사 하는 아이, 성큼성큼 다가와 안부를 묻는 아이... 봄에 만난 아이들은 반갑고 고마웠는데 지금 만나는 아이들은 반갑고 또 두렵다. 앞으로 마주할 과제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여름이 지나면 조금 먼 곳의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야 한다. 전교생이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 높은 산이 굽이굽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 초가로 지은 문학관 옆에 자리한 시골 중학교, 그 곳이 내가 9월부터 근무할 학교다. 아주 큰 학교도 무섭지만 아주 작은 학교도 무섭긴 마찬가지다. 사실 나에게 새로운 것은 온통 다 무섭다.

 

스물 이후에 몇 번의 쉼표가 있었다. 같은 학번 중에 군대를 가는 남자동기들을 제외하고는 휴학을 한 건 나 혼자였다. ? 라는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요즘과 같은 취업난 세대가 겪는 대2병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회의와 환멸을 느낀 후, 실존적 방황으로서의 대2병 같은 것이었다. 슬렁슬렁 놀면서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했고 더 많은 것을 느꼈다. 복학할 무렵에는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이 치유되면서 의욕이 되살아났다. 돌이켜보면, 내게 꼭 필요한 쉼표 같은 거였다. 그래서인지 실습 나온 후배 교생들에게도 주저 말고 휴학하라고 무책임한 권유를 하곤 한다.

 

교사가 된 후 3년이 지나고 다시 한 번의 쉼표가 있었다. 가끔 꿈에도 등장하는 우리 교수님. 학위만 받아 챙기고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서, 등의 핑계로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뿡뿡이 닮으셨던 우리 교수님.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 여전히 변함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이 너무 많이 변해서 찾아갈 수가 없다. 어느 밤, 꿈속에서 비 맞지 말라며 우산을 건네주셨던 교수님, 다정히 마주앉아 추어탕이며 김치찌개며 소탈한 음식들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대학원 동기들... 마음껏 연구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었던 2년간의 대학원 생활. 싱글로서의 마지막 황금기였다.

 

나 자신을 위한 쉼표는 거기까지였나 보다. 이후에는 영달이를 배 안에 안고, 또는 배 위에 안고 다니며 1년을 쉬었고 영달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맞은 반년의 휴직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더 쉴까, 더 쉬고 싶다가도, 오래 쉬었다가 방황마저 길어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두려움이 엄습하고 벌써부터 이런저런 일로 보채오는 새 학교에 대한 부담감이 마음을 죄어온다. 영달이는? 다행히 든든한 외할머니 덕분에 엄마의 복직을 어마어마한 일로 여기진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항상 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빠삐코나 마이쮸를 건네는 엄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때는 키즈폰으로 전화하라고 할까. 수업 중이라 못 받으면 어쩌지. 예전에는 쉬고 나면 재충전, 재도약이 되곤 했는데 어째 영달이를 낳고 나서는 불안 재가동이다.

 

그럼에도, 모처럼 친정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눴고, 영달이와 끈끈한 시간을 보냈고, 전업주부로서 남편에게 병아리 오줌만큼이라도 좀 더 잘해줄 수 있었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반성하고 사색할 수 있었던 이 시간에 감사하며 감사해야 한다. 나는 쉬면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곤 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아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의 쉼표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후회 없이, 오히려 더 완벽하게 쉬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쉰다고 늦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더 잘 갈 수 있더라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더 잘 보이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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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07-0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직하시는군요.
아이는 엄마의 걱정보다 훨씬 더 잘 자라지요. 때로는 속도 더 깊고...
화이팅입니다^^

깐따삐야 2017-07-04 11:46   좋아요 0 | URL
지금도 주위의 평판으로는 저보다 똑똑한 영달이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항상 아기 같아요.
세실님도 워킹맘이셨으니 제 마음 잘 아실 듯.
잘 지내시죠? ^^

순오기 2017-07-0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영달이가 초등생이 되었네요.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알라딘에서 요렇게 간간이 소식을 듣는데도 성장이 그려지네요.^^ 복직에도 힘내시라 응원해요!!♥

깐따삐야 2017-07-04 11:47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자랐답니다. 이젠 업는 것도 힘들어요.
순오기님도 잘 지내시죠? 응원 감사합니다!
 

잠정 백수니 집안일이라도 빈틈없이 해야 한다는 부담.

생활비가 줄었으니 씀씀이를 확 줄여야 한다는 압박.

주어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영달이와 알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집념.

복직 이후 헤매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닌, 꾸준히 공무원 마인드로 지내야 할 것만 같은 강박.

입맛을 잃고 잠을 설치고...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싶은 불안...

 

어미가 이러는 사이 영달이는 기사식당 같은 급식 메뉴만 빼면 그런대로 즐겁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시간차로 오가는 길이 어긋나면서 영달이를 보자마자 울고불고하는 엄마를 혼내고 다독거리는 당찬 딸, 왁자지껄 친구들 사이에서도 살짝 드라이한 성격으로 어필하는 믿음직한 딸이 우리 영달이다. 키즈폰을 사서 매달아주고 혹시나를 대비해 만날 장소를 거듭 확인하고 수업 끝나기 20분 전부터 밖에서 서성여도 손을 꼭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만가지 불길한 상상과 수천가지 복잡한 잡념이 엄습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우려를 넘어 정신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친정엄마한테 맡겼을 때보다 나 자신한테 내 딸을 맡겼을 때가 훨씬 더 불안하니 정말 자괴감이 든다.

 

올해 초 서울에 가서 공연도 보고 체험도 하며 타로 점을 잠깐 본 적이 있다. 나보고 쉬지 말라고 했던가. 꼭 쉬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렇게 쉬어봐야 직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질 거라고 했다. 영달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한 아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타로 점을 봐달라고 했다. 타로 책 한 권으로 야매 타로점술사가 된 남편 앞에서 카드를 척척 골랐고 이상한 그림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절망했다. 나는 정말 쉬면 안 되나 봐, 영달이한테 도움이 안 되는 엄마인 게 틀림없어, 나가서 돈이나 버는 게 낫겠어... 남편이 서울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야매로 타로 점을 본 이후까지 많은 말로 나를 위로했지만 가슴에 돌 하나 얹은 것 같은 먹먹함과 무력함이 그칠 날이 없다.

 

대학 졸업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일종의 경제인으로 살아오는 것에 세팅이 되어 있다 보니 내 역할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인데도 이토록 공황장애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가 보다. 아이가 여럿도 아니고 영달이 하나뿐이라 집안이 그다지 더러워질 일도 없는데 무슨 강박증 환자마냥 쓸고 닦고 정리하고 물건을 이리로 옮겼다 저리로 옮겼다, 책을 뺐다 꽂았다, 냄비를 겹쳐 놓았다 떨어뜨려 놓았다, 옷을 계절별로 정리했다 색깔별로 정리했다... 아마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본다면 정상은 아니지 싶어 혀를 끌끌 찰 거다.

 

친정엄마는 집안일 요령 있게 하는 법, 다 소홀해도 괜찮지만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 몇 가지만을 간추려 주면서 전업주부 2주차인 내게 매일 매일의 교육을 하신다.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고 의지하는 영달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면 친정엄마의 소중한 전언들을 새겨 들을 일이다. 영달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엉엉 울어대는 나와 그런 약해빠진 엄마 모습에 화를 내는 영달이를 보고 노쇠한 엄마는 얼마나 안쓰럽고 답답하셨을까. <참 쉬운 인생>이란 책에 소피아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여장부 같은 할머니와 영특한 손녀 사이에 철부지 짐짝처럼 끼어 있는 엄마 역, 요즘은 내가 꼭 소피아 같다. 어제는 영달이가 레고 역할놀이 중에 우울증에 걸린 엄마 이야기를 꾸며내서 좀 놀랐다. 나와 남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어느새 들었나 보다. !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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