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모임에 다녀온 남편에게 남편 친구들의 근황을 물어봤다. 남편은 내 친구들의 근황에 대해 결코 묻는 일이 없지만 나는 남편 친구들의 근황도 무척 궁금하다. 특히 S씨는 남자로서 육아휴직을 했던 흔하지 않은 경우인데다 그집 딸내미가 우리 영달이와 동갑이기에 저절로 관심이 가곤 한다.

"S는 올해 복직하는데 아이를 3월부터 놀이학교에 보내기로 했대."

"놀이학교? 비용이 만만찮을텐데. 통크다!"

나도 놀이학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이 있었다. 지난 여름, 영달이가 어린이집 적응에 실패하고 할머니 품으로 컴백하여 어린이집, 유치원이란 말만 꺼내도 진저리를 칠 무렵,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놀이학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에 참으로 각양각색의 놀이학교들이 있었거나, 생겨나고 있었다. 국가에서 보육료를 지원하게 되면서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함량 미달의 보육시설이 마뜩찮은 엄마들이 나처럼 놀이학교를 찾아보고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차를 타지 않아도 되는 가까운 곳이 최고라는 생각에 집 근처 놀이학교에 전화를 해봤더니 역시 이곳도 사교육 시설이고 일종의 학원이다 보니 친절하고 상세하기가 이루말할 데가 없었다. 네살부터 받는다길래 반년 기다렸다가 이곳을 한번 생각해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S씨의 딸내미가 놀이학교에 다닌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성마르기 그지없는 나는 바로 놀이학교에 전화를 해서 상담을 받은 후 조만간 아이를 데리고 방문하겠노라고 했다.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들어가는 비용에 또 한번 식겁했지만 S씨네 부부도 우리처럼 부부교사이긴 마찬가지인데 우리라고 못 보낼 게 뭐 있어, 하는 유치한 허영심이 한몫 거들었다. 남편과 상의라기보다는 경과 보고를 했더니 탐탁찮은 목소리였지만 그닥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듯 한번 직접 가보자는 뜻을 내비쳤다. 나는 갑자기 너무 신이 나서 놀이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아이들이 알록달록 화려한 교구를 갖고 수업받는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영달이가 또래 아이들과 반짝이옷을 입고 합동댄스를 하는 등의 장면을 떠올리며 무한긍정표 상상의 나래를 마구마구 펼쳤다. 가계 재정 따위는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한푼도 모으지 않고 몽땅 영달이 놀이학교에 쏟아부을 심산인 마냥 쓸데없는 지출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퇴근을 해서 저녁을 먹던 중 나만의 찬란한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역시 이번에도 친정엄마가 몽롱한 내 정신에 아찔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더 절약하고 덜 모으면 된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너는 엄마란 것이 아이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냐!"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대체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내가 지난 일은 까마귀 고기 삶아먹은 듯 잊어버렸고 앞으로 예상되는 일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달이는 아직 기저귀도 하고 분유도 완전히 떼지 못한 상태이다. 지난 여름에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이 두가지 사항이 영달이를 무척 힘들게 했다. 배가 고프거나 볼 일을 보고 싶을 때 알아서 챙겨주거나 도와주는 엄마, 아빠,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영달이를 불안하게 했고 그 불안함은 한밤중에 혼자 깨어나 통곡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안타까운 한편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해가며 안달했지만 친정엄마는 "설마 중학교에 다니면서까지 기저귀 하고 젖병 물고 다니겠니." 담담하게 응수하시며 어린이집을 관두게 하셨다. 그리고는 "너도 다섯살 때까지 기저귀 하고 젖 먹었다는 걸 모르냐."며 잘난척 하지 말라는 투로 면박을 주셨다. 나도 질세라 "나는 영달이도 중요하지만 엄마도 중요해. 엄마 건강이 자꾸 안좋아지니깐 내가 너무 속상하잖아." 속마음을 쏟아내곤 울컥했지만 "내가 만약에 아파서 아이를 못 봐주면 네가 직장 그만둔다는 각오로 아이를 키워야지. 소신 없이는 절대 아이 잘 키울 수 없는 줄만 알아라." 하는 말씀에 쪼르르 꼬리를 내렸다.

 

남편은 장모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아서인지, 허황된 지출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삐질삐질 의뭉스런 미소를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밥을 꾸역꾸역 우겨넣으면서도 놀이학교는 일반 어린이집이과는 다를텐데, 영달이가 오전반만 다녀도 엄마가 조금 덜 힘드실텐데, 영달이도 놀이학교에 가서 놀면 더 즐거울텐데... 갖가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앞으로도 지겹게 오래 다닐 학교인데 뭐가 그리 급하냐고, 때가 되어 제가 간다고 할 때 보내도 늦지 않다는 엄마 말씀에 동의하며 놀이학교에 대한 미련을 접는 대신 엄마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마음이 무거웠다. 오가는 이야기에 눈치를 챘는지 오늘 아침 영달이는 할머니 품에 안겨 출근하는 나를 쿨하게 보내주었다.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다가는 어제 엄마가 말씀하신 아이의 자존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달이가 뭔가 실수했을 때 영달이 혼 좀 내라는 식으로 남편에게 고해 바친 기억, 영달이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 영달이 험담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기억, 영달이보다 먼저 퍼즐 조각을 완성한 후 혼자 박수치며 좋아했던 순간이라든가 책 제목을 마음대로 꾸며 읽는 영달이에게 글자 하나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다시 말해주던 순간, 그때 살짝 침울해지던 영달이 모습 등을 상기하며 나란 여자가 대체 생각이란 게 있기는 있는 여자인가. 직장 다니는 엄마라고 돈만 써댈 줄 알았지 아이의 자존심을 세심하게 배려해 본 적이 있었던가. 강도 높은 자아비판을 하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씁쓸히 들이켰다. 개성 강하고 고집이 세서 크면서 엄마 마음을 안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데 아빠는 물론 친척들까지 죄다 나를 엄청 착실하고 모범적인 인간으로 판단하게 만든 건 이제껏 친정엄마의 속깊은 배려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니 고개와 함께 마음까지 숙여졌다. 그렇듯 현명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영달이는 참 행운의 아이고 이렇듯 모자란 엄마, 뒤늦게 깨닫고 몸서리치며 후회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는 영달이는 참 안쓰런 아이다. 자존심 하나로 삶의 온갖 피로를 견디며 꼿꼿하게 살아오신 엄마의 건강이 요즘 별로 좋지 않아 염려스럽고 죄스럽지만 되도록 두번 실수 반복하지 않는 성숙한 엄마가 되어 우리 엄마의 걱정을 좀 덜어드려야겠다. 그리고 우리 딸, 영달이에게도 시시콜콜 재미만 주는 엄마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튼튼한 엄마가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갈 길이 참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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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5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5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3-02-0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육아모범 페이퍼로 전시하고 싶어요. @.@

깐따삐야 2013-02-06 10:32   좋아요 0 | URL
타이틀은 '나쁜 엄마의 좋은 예' 정도로 하면 되겠지요.ㅠ 우리 또래 엄마들은 당최 자기밖에 모르고 큰 세대라서 그런지 두루두루 헤아리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많이 좀 혼나야 되요.

치니 2013-02-0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 백번! 근데 혹시 그쪽 지역에 공동욱아 어린이집은 없는지, 갑자기 궁금하네요. 제 경험상 공동욱아 어린이집이라면 영달이 경우 적응하기가 좀 낫지 않나 싶어서요.

깐따삐야 2013-02-07 11:59   좋아요 0 | URL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네요. 치니님 댓글 보니 이것도 한번 생각해봐야겠단 생각 들어요. 요즘 저희 엄마가 방학 동안 버르장머리 없어진 영달이 때문에 저한테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계셔요.ㅠㅠ

꿈꾸는섬 2013-02-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가 넘 멋지세요. 아이의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냐~ㅎㅎ아이들 때가 되면 다 잘 하더라구요. 제가 알던 아이는 어린이집에 적응 못해서 놀이학교로 보냈는데, 거기서도 적응을 못 하더라구요. 근데 1년반을 참았다가 애가 준비된것 같아 좀 큰 유치원에 보냈는데 정말 잘 다니더라구요. 아이가 먼저 준비가되면 그 다음부터는 걱정할게 없어지는것 같아요. 힘드셔도 손주 봐주시겠다고 자청하시는 부모님께 더 잘하시면 좋을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3-02-07 12: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엄마가 쫌 독특하셔요. 삼십 중반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하루라도 엄마한테 욕을 안 먹으면 뭔가 허전한;; 저야 엄마가 봐주시니 너무 고맙지만 엄마 건강도 염려되고 영달이도 낯가림이 심해서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요. 엄마한테 잘해드리고 싶은데 뭘 바라시는 게 있어야 잘해드리죠. 제가 똑똑하게 살길 바라시는 것 같긴 한데 그게 가장 어려워요!
 

방 한칸, 부엌이라기도 뭣한 주방 한칸, 왜 넓은지 이해가 안됐는데 살아보니 넓어서 편했던 욕실 한칸. 2000년대 초기. 한 지붕 세 자취생 중 한 명이 나였다. 친구가 놀러와 김치부침개라도 부치는 날이면 옆방 총각들이 슬며시 창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한 수다를 못 참겠거나 고소한 지짐 냄새를 못 견디겠거나. 하숙생이 아니라 자취생이었기에 문 닫으면 각자의 공간이었고 각자의 생활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면 편안했고 한편 쓸쓸했다.

 

그 즈음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오빠가 내게 권한 사이트가 yes24였다. 캐나다에 가느라 만들었던 비자카드가 있었기에 온라인 책쇼핑이 가능했다. 그곳엔 많은 책과 다양한 리뷰가 있었다. 독후감과 레포트에 익숙했던 나는 리뷰라는 자유로운 형식이 흥미로웠고 학교도서관의 너덜거리는 책과 구내서점의 눈치주기에 서글펐던 참이라 온라인 서점의 신세계를 단연 환영했다. 당시에 어떤 책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택배 아저씨가 문 두드리는 소리, 칼로 조심조심 포장을 뜯는 순간, 띠지를 걷어내고(난 띠지가 싫다. 띠지는 모아서 버린다. 대체 띠지는 왜 만들까?) 향긋한 책내음을 음미하며 첫 장을 여는 순간들을 즐기고 사랑했다. 책상과 연결된 책장에 새 책이 하나, 둘 꽂힐 때마다 자취생활의 외로움이 덜해지는 느낌이었고 그 책에 관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가뿐한 클릭질 하나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색다른 유희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 드나들던 학교 정문 앞 '열린 지성'이라는 서점이 폐점했다. 주인아저씨는 아무리 오래 구경해도 눈치를 주거나 괜히 내가 있는 쪽으로 와서 책 정리를 하는 척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책장사도 장사인데 그렇듯 열린 마음을 갖고 장사를 하던 아저씨는 급기야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술집, 커피숍, 편의점들이 늘비하게 들어섰다. 간혹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갔을 때 드나들던 '일선문고'는 커피숍을 옆에 끼고 새로 오픈했다. 이곳은 입점한 위치도 그러하고 직원들의 태도 역시 '열린 지성'에 비해 상업적인 냄새가 강했는데 근래의 풍경을 보면 덩치만 키웠을 뿐 파란 티셔츠를 말쑥하게 빼입은 직원들은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분류도 엉망이라서 어느 시점부터인가 발길이 안 닿는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학부 시절엔 온이건 오프이건 마음 놓고 책을 사보거나 책쇼핑에 실패해도 괜찮은, 그런 넉넉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불타오르는 독서욕이 구매욕을 불지르거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공서적은 대개 제본을 떴고 꼭 사야만 하는 책은 선배로부터 물려받거나 할인된 가격으로 구내서점에 주문했다. 교양국어 시간에 교수님이 시인과 시집을 하나씩 정해주시고 레포트를 써오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수강생들로부터 꼭 책을 사야만 하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교수님이 몇천원 하는 시집 값이 아깝더냐고 반문하실 때는 얼굴이 활활 뜨거워졌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우리는 호주머니 할랑하고 미래는 불확실한 IMF 시대의 지방국립대생들이었다. 술값도 커피값도 아까웠고 책값도 아깝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 먹는 밥값도 아까웠다. 비교적 등록금 저렴한 국립대생들도 그럴진데 큰 꿈을 안고 상경한 친구들의 생활은 더욱 팍팍했으리라.

 

결국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전공서적 외에 그저 나의 소소한 관심사에 불과한 책읽기는 주로 도서관 대출이나 서점 마실로 해결했고 여윳돈이 생기면 오래도록 읽고 싶고 갖고 싶었던 책을 구입했다. 그 중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있고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루 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등등의 책들이 있고 그 책들은 여전히 중고샵이나 폐지장수에게 주어버리지 않은 채 내 책장을 지키고 있다. 지식욕과 인식욕에 목마른 청춘이었으나 읽는 기쁨 외에 소유하는 기쁨, 두고두고 내킬 때마다 펼쳐볼 수 있는 만족감에 이르기에는 나는 너무 가난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남들은 취업하면 근사한 옷, 명품 가방부터 산다는데 나는 돈 걱정 안 하고 마음껏 책을 사볼 수 있다는 기쁨에 눈물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알라딘에 둥지를 튼 건 신규교사로 발령 받고 일년 즈음 됐을 무렵인가 보다. 날이면 날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눈물 범벅 콧물 범벅해가며 느끼고 5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나의 유일한 낙은 '퇴근 후 책읽기'였던 것 같다. 물론 작은 학교이다보니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능력있고 따듯한 선배교사들과 순수한 아이들 덕분에 즐거운 추억도 많았지만 십수년 전이나 십수년 후나 크게 바뀌지 않을 듯 느릿느릿 돌아가는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편안하다 못해 단조롭고 지루했다. 더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영화관 하나 없고 온통 아이들 문제집만 빼곡히 쌓아놓은 동네 서점에 실망, 마음 먹고 근처 도시로 외출하지 않는 한 문화생활이 어려웠다.

 

그 와중에 우연히 알게 된 알라딘. 우선 yes24에서 볼 수 없었던, 혹은 내가 미처 발견 못했던 멋진 리뷰어들이 포진해 있었다. 위트와 유머로 무장한 M님, 솔직하고 능수능란한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P님, 외모부터 지식수준까지 아트 자체인 A님, 바스러질듯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로 나를 매혹시켰던 J님... 그 분들의 리뷰나 페이퍼에 항상 동의하거나 찬사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사랑하는 공통분모를 지닌 채 다양한 삶, 흥미로운 글쓰기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은 상당했다. 도서산간지역도 아닌데 꼬박 사나흘 이상 걸려야 책 한 권 받아볼 수 있는 시골마을에서도 알라딘에 접속하면 얼마든지 지적인 대화, 책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들이 가득했다. 지구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고 싶은 절망적인 날에도 이곳에 들어와 다른 이들의 일상다반사를 읽고 그들이 권해주는 책 한 권 집어들면 다시 살고 싶어지는 생에의 의지마저 체험했다. 그처럼 초창기의 훌륭한 멤버들이 조성해놓은 독특하고 훈훈한 알라딘 서재 문화가 아마도 나와 같은 소외된 이들을 보다 풍부하고 깊이있는 독서로 이끌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 후 도시로 나오면서 드디어 빈번한 오프라인 서점행이 가능해졌다. 집 근처 '한성문고'가 폐점하기 전까지 나는 왕성한 단골이었다. 서점 주인이 알라디너가 아닐까 싶을 만큼 배열된 책들이 마음에 들었고 단골에게 포인트도 적립해주고 예쁜 책갈피를 서비스로 끼워주는 것도 좋았다. 가끔 문제집 사러 오는 학부모나 학생들만 눈에 띄고 한산하다는 점이 좋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지하 책방은 어느 날 문을 닫았다. 간판을 여태껏 치우지 않았는데 지나칠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난다. 밥 먹는 와중에 계산하러 달려오던 동그란 얼굴의 점원, 책갈피를 무늬가 다른 것으로 두 개를 챙기던 내 모습, 아들 문제집 사러 온 선생님과 마주쳐서 안부를 주고받던 기억, 길다란 의자에 앉아 신간 한 권을 다 읽어치우고 뿌듯함과 미안함이 공존했던 순간... 모두 다 '한성문고'와 함께 한 추억이다. 그 이후에 옮겨 간 곳이 지금의 '홍문당서적'이다. 지난 달에 우수고객으로 5천원 할인권을 받았을 만큼 이곳 역시 단골인데 알라딘에서 2, 3일 이상 걸리는 책도 이곳에 주문하면 바로 이튿날 받아볼 정도로 주인 아저씨가 친절하고 발빠르다. 특히 영달이 그림책을 많이 구입하는데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를 그 자리에서 구입,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다음 <도깨비를 다시 빨아버린 우리 엄마>를 알라딘에 주문해서 읽었다. 어떤 가게보다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는 우리 동네의 홍문당서적은 내부 실정은 잘 모르지만 항상 북적이고 생기가 넘친다.    

 

지난 해 터미널 근처에 '영풍문고'가 오픈한다고 했을 때 엄청 반겼는데 빛 좋은 개살구마냥 인테리어만 그럴싸할 뿐. 유명출판사의 전집류만 빼곡히 쟁여놓았지 막상 찬찬히 둘러보면 책 구성이 알차지도 않고 직원은 또 어찌나 무뚝뚝하고 불친절한지! 그래도 한 달에 두어번씩 들르는 이유는 위층에 회전목마와 기차를 탈 수 있는 키즈카페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공짜로 가져가도 되는 '책과 삶'이라는 독서신문 때문이다. 그 외에는 이곳을 굳이 방문해서 책을 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달에 서너권 정도 읽고 그 외에 옛날 책 다시 읽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알라딘과 홍문당서적, 두곳이면 충분하다. 영달이 역시 으레 책은 그 두곳에서 구입해서 읽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 한글에 관심을 보이며 어찌나 주구장창 읽어대는지 영달이 도서구입비를 위해 내 책을 팔아야 할 지경이다. 그래도 책을 사랑하는 삶은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삶보다 진지하고 행복할 거라 생각하기에 나는 오늘도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영달이는 라바, 채플린, 뽀로로만 가끔 본다) 구형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지 못하며 휘발성 강한 최신 매체들에 별다른 관심도 없다. 며칠 전 영화관으로 영달이와 함께 <뽀로로의 슈퍼썰매 대모험>을 보러 갔는데 꽤 길었던 러닝타임 동안 흥미진진하게 보고나서도 두 번 보자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만약 책이라면, 책이었다면, 또 읽어줘! 또 보여줘! 했을텐데 말이다.

 

엄마가 된 후 옛날처럼 많이, 다양하게 읽지 못하고 읽을 시간도 없어 아쉽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그림책의 세계에 눈을 뜨고 세계명작을 다시 읽는 기쁨이 있어 나름대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미녀와 야수>의 왕자가 허름한 노파를 함부로 무시했기에 야수로 변했다는 점이나 <구두장이 요정>이 구두장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옷과 신발을 선물받는다는 점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다시금 알게 되었다. <장화신은 고양이>의 재치는 나이 먹어 다시 보니 무척이나 교활하고도 깜찍하다. 고운 삽화에 신선한 이야기들을 담은 창작동화도 많지만 아이들의 그림책 세계에서도 고전 파워를 여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살핀 후, 그 그림에서 새로운 이야기, 뜻밖의 결말을 만들어내는 영달이를 보고 있으면 아이의 창조력을 발현시키는 책의 힘이 놀랍고도 또 놀랍다. 그러한 영달이를 데리고 동네 오프라인 서점에 마실가는 일도 즐겁고 유익하며 알라딘 화면에서 읽고 싶은 책 표지를 찍은 다음 보관함이나 장바구니에 넣는 재미도 쏠쏠하다. 결국 책 좋아하는 우리 모녀에겐 이곳이나 그곳이나 저곳이나 모두 필요한 셈이다. 더구나 윤대녕이 대관령 너머 무슨 고개 이름인 줄 아는 바쁜 사람들, 레이몬드 카버을 무슨 다이아몬드 케이스 쯤으로 치부하는 실용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책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책에 대한 이야기와 애정이 오가는 이러한 공간은 주위의 삐딱한 시선과는 하등 상관없이 참으로 소중하다.   

 

그나저나 방학이 끝나간다. 금요일 출근, 이제 다음주면 개학이다. 책 읽을 시간이 크게 늘어나거나 크게 줄어드는 변화는 아니다. 나는 밖에서는 정신없는 선생이고 안에서는 역시 정신없는 엄마니까. 다만 짬짬이 책을 손에 들고 읽는 것일 뿐. 책을 읽고 소유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으로 도약하지는 못하더라도 더 몹쓸 인간으로 추락하는 일은 예방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기대. 누군가 한 마디 할 때 보다는 한 줄 쓸 때 조금 더 고심하지 않았을까, 조탁하지 않았을까, 하는 독자로서의 소망. 그 모든 효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복잡하고 현란한 시대, 홀로 책 한권 든 채 활자 사이를 유영해가며 한없이 고독해질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읽는다. 오래된 습관이자 기쁨이니 이변이 없는 한 내일도 읽겠지?

 

그래도 날이 따듯해지면 영달이와 더불어 자연으로 나갈 것이다. 몸이 흐물흐물, 근질근질하다. 겨우내 책으로만 읽고 보고 느꼈던 자연을 직접 안아줄 것이다. 근처 미동산 수목원에 가서 새싹과 꽃잎들을 구경하다 목조 건물로 아름답게 지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든, 안 읽든, 그 서늘하고 쾌적한 공기를 느끼다 오는 그림을 상상한다. 숲속 도서관 나들이! 동백꽃을 채송화라고 우겨대는 영달이, 바로잡아주려는 아빠 사이에서 즐겁게 묵인하고 있기에 어서 사방팔방 꽃잎 만발한 봄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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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3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주 영풍문고일지도 모르겠군요..

깐따삐야 2013-01-31 14:0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알라딘보다 책값 비싸지. 동네서점보다 불친절하지. 획기적 문화공간이라도 창출할 것마냥 법석거리더니 돌아가는 모양새는 지극히 평범 플러스 불친절;; 뭘 믿고 그러는 걸까요.

그나저나 새소식을 듣고 나니 수저질마냥 자연스럽던 클릭질이 돌연 주춤합니다. 신구간 할 것 없이 읽고픈 책은 많고. 조만간 Book Poor가 되는 걸까요.ㅠ

Mephistopheles 2013-02-01 00:45   좋아요 0 | URL
전 영풍가서 제가 찾는 책을 현장에서 구입한 적이 5%도 안되요.

깐따삐야 2013-02-01 10:06   좋아요 0 | URL
여기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대체 어떤 책을 찾으시길래. 제시카 알바 화보집?

Mephistopheles 2013-02-01 11:20   좋아요 0 | URL
그건 야클님이 찾으실 물품...

2013-01-31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1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3-01-3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 그러고보면 전 깐따삐야님이랑 놀면서 서재에 적응한 것 같아요.
영달이도 책 좋아하는 어린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흐흐.

깐따삐야 2013-02-01 10:17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이랑 알라딘에서 새벽까지 불밝히며 놀던 이십대 끝자락의 기억은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로 재미있고 행복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웬디양님은 너무나 똘똘하고 발랄하고 귀여웠던 것 같아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시시때때로 집어던지는 영달이는 책에 대한 애증이 있는 어린이로 자라나고 있답니다. 흐흐.ㅠ

마태우스 2013-01-3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에 젖게 만드는 글이네요. 음, 제가 대통령과 기생충이란 책을 냈을 때, 띠지가 있다는 말에 뛸듯이 기뻤어요. 제 책이 좀 있어 보인다 싶었죠. 그때를 제외하곤 저도 띠지가 영 귀찮습니다. 그래도 계속 띠지가 있는 이유는 저자들이 저처럼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스에서 알라딘으로 넘어오신 건 서재 서비스를 조금 먼저 시작해서인 거군요! 암튼 뒤늦게나마 환영합니다

깐따삐야 2013-02-01 10:21   좋아요 0 | URL
제가 작가라면 그 덜렁덜렁 귀찮기만 한 띠지는 절대 넣지 마세요! 라고 할텐데. 없어 보일까요?ㅠ
마태우스님이 예전처럼만 꾸준히 활약하셨어도 알라딘이 업계 1위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쫌 아쉬워요. 그래도 요즘의 일상도 좋아 보여요. 원래 좋은 분이었지만 점점 더 훌륭한 분이 되어가시는 것 같아서요.^^
 

친정엄마와 도서정가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얼마나 세상사에 어둑한지, 멍청한지 알았달까.

 

뉴스의 이면을 보라, 는 어머니의 말씀. 나는 멀어도 한참 멀었어!

 

알라딘의 서명운동에 잠시나마 물음표를 쳐들었던 스스로를 마구 질타했다.

 

관련 글들을 읽다가 발견한 칼럼을 링크한다.

 

찬반을 떠나 앞으로 예상되는 그림이 너무 암울하다.

 

국회의원들이 뭘 강하게 주장하면 하여간 강하게 의심부터 하고 봐야 돼. 이런 돼지같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으로 계속 남을 테고 영달이 역시 알라딘 플래티넘 2세가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이 뭐이가 있겠는가. 그거면 다지. 가계를 위해 책 안 사려고 해도 클릭질이 중독이 됐으니 그리 될테고. 무엇보다 여기서 놀멍쉬멍 하는 거이 너무나 좋고!

 

http://www.hv.co.kr/talk_honor/320512

 

새해에도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는 다짐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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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9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먹거리 대부분을 친정에서 공수해다 먹는데도 모처럼 당면한 전업주부의 일상이란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밥을 차렸다 치웠다 하며 꼬박꼬박 반복되는 나날. 하도 움직이니 발뒤꿈치가 갈라질 정도로 발바닥에선 후끈후끈 열이 나고 손가락과 손등도 거칠거칠. 한편으론 싱그런 숲처럼 자라나는 영달이를 온종일 바라보는 덕분에 안면 근육 하나하나가 화알짝 펴질 만큼 웃음도 끊이지 않는다. 영달이는 요즘 흘러나오는 동요를 따라부르며 깜찍한 율동도 하고 자신만의 옛날 이야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지어내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어제는 친정엄마와 내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둘이 오랜만에 만났나 보네."라고 심상히 말해 가족 모두 빵 터졌다. 영달이의 엄마로서 영달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정성들여 대답하는 스스로를 보며 학교 선생으로서의 모습도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질러 자르거나 핀잔과 비판을 일삼던 순간들. 다 듣고 있기가 귀찮아 사실확인서 따위나 내밀며 또박또박 알아볼 수 있게 쓰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시간들. 새해에는 무엇보다 '잘 들어주는 엄마,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 한 줄 공들여 읽는 일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사느라 바빠 못 만났던 친구들도 하나 둘 만났다. 벌써 두 아이의 엄마인 K는 첫눈에도 많이 지쳐 보였다. 둘째 이야기를 하길래 손사래를 쳤고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무리라고 말했다.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기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본인의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고 둘째를 낳아 씩씩하게 키워내고 있는 K를 보니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E는 여전히 싱글인데 못 보던 사이 더 예뻐지고 화려해졌다. 그녀는 결혼을 하기엔 본인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양심적인 선택일 수 있다고 호응했다. 나 역시 이럴줄 모르고 한 결혼이었지만 막상 가정을 이루고 보니 그간의 소소한 선택들 마냥 관두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뭔가 지엄하고 강력한 힘이 있어서 계속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던 네가 참 많이 변하긴 했지, 라며 E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계속 싱글로 남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갖가지 장단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녀의 바른 성정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1년 더 있기로 했다. 5년을 꽉 채우는 것이다. 이동 시기마다 머리 굴리는 사람들이 하도 많고 내 머리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구조물일 뿐이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가 싫어 순리에 맡기기로. 운명이 이끄는대로 살리라. 마음을 정하니 편하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 나하기 나름이란 생각을 하다보니 주변의 웅성거림이 아스라할 뿐. 그저 내년에도 집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 배정되길 바랄 뿐이다. 영달이가 내년이면 지금보다 조금 더 커 있을 테고 내후년이면 그보다 더 많이 자라날 테고.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친정엄마도 조금 편해지시겠지. 첩첩산중의 육아에 마치 환한 여명이라고 비칠 것처럼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노긋해진다.

 

며칠 전엔 남편의 없는 숱에서 흰머리 몇 가닥을 솎아냈다. 그는 나에게 벽두부터 영달이 다 키우면 산으로 들어가서 책이나 읽으며 자유롭게 살라는 거의 체념 조의 이야기를 했다. 마치 미약한 너에게 자유를 허하노라, 는 선지자의 어투로. 정말? 진짜? 반색을 하며 반기는 척 했지만 다 키운다는 게 대관절 언제이며 저 사람이 평소에 나를 뭘로 보길래 저런 말을 하고 앉았나, 의아했다. 소개팅을 하고나서 거의 회한조로 "자꾸 그 사람 단점이 눈에 거슬리는데 그 사람이라고 내 단점이 안 보이겠어. 전화받는 말투라든가. 게을러서 약속시간에 늑장 부리는 거라든가..." 중얼거리던 E의 말처럼 이 남자라고 왜 나에 대한 불만이 없겠는가. 더욱이 그도 나도 인간이란 절체절명의 역경을 겪어내더라도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하간 영달이가 태어난 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우리는 부부애라기 보다는 거의 전우애적 결탁으로 살고 있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고 짬 나면 바로 드러누워 눈을 붙이고... 남편의 비유처럼 마치 1박 2일을 찍는 것처럼.

 

2013년 새해 첫 독서. 남편이 선택한 책. 난독증도 아니련만 이 남자는 이 책을 읽어내는 데 무려 한달을 소모했다. 소파 위, 선반 위, 식탁 위, 텔레비전 옆에 소리소문 없이 옮겨다니는 책을 내가 제자리에 꽂고 다시 또 제자리에 꽂기를 여러 번. 다 읽었다는 말과 함께 책발이 먹혀서인지 요즘 나의 어명에 유치하게 토 다는 일이 줄었다. 책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잠깐 변화시키기는 한다. 책이 주는 효용 중 분명한 사실 중 하나임. 오은영 선생님의 말씀은 방송으로 볼 때나 책으로 읽을 때나 마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만약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면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은 책은? 이 질문에 영달이가 고른 책이다. 토끼를 좋아하는 영달이는 토끼 담요를 항상 갖고 다니고 마트에 가서도 하양 토끼, 까망 토끼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책도 토끼를 좋아하는 영달이를 위해 사준 책인데 토끼가 아무나 앉으라고 만든 의자에 여러 동물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나귀가 가져온 도토리가 왜 밤으로 변했을까? 도토리는 밤의 아가였던 걸까? 요즘은 책을 읽고 나서 질문을 하거나 퀴즈를 내면 곧잘 똘똘하게 대답하는 영달이 덕분에 유아도서 읽기가 참 재미난다.

 

 

 

학기 중에 밤에 졸면서 한번 슬렁슬렁 읽고 방학이 되자 다시 꺼내든 책. <안나 카레니나>와 <괴테의 말>을 읽고 천재들의 생활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물론 책에는 톨스토이나 괴테마냥 천재라고 명명할 수 밖에 없는 작가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작가 군상이 등장한다. 뗄레야 뗄 수 없는 읽기와 쓰기의 구도를 균형 있게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근무조로 학교에 나와 있다 보니 간만에 긴 글을 쓴다.

이제 점심 먹어야겠다. 아이들이 오는 오후엔 바빠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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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1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붙은 뜨거운 열정과 사랑도 잠시 결국 남는 건 정과 동료애, 의리로 사는디는 것이 부부.
-메피스토- (어 쓰고 보니 그럴 듯 하네..ㅋㅋ)

깐따삐야 2013-01-11 15:32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가봐요. 직장에는 직장 동료. 가정에는 가정 동료. 어쩐지 슬푸다.ㅠ

비연 2013-01-1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이상 산 부부들은..대부분 [의리]를 얘기하더군요... 부부의 의리라.

깐따삐야 2013-01-11 15:34   좋아요 0 | URL
저는 고작 4년 살아놓고 이러는 건가요. 진심으로 남편에게 우정을 느낀다고. 어쩐지 이것도 슬푸네.ㅠ

blanca 2013-01-1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달이가 정말 많이 컸군요. 토끼의 의자는 여섯 살 제 딸도 좋아하더라고요. 토끼 정말 좋아해요, 영달이처럼.

깐따삐야 2013-01-11 15:37   좋아요 0 | URL
의사소통이 되니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울어제낄 때보다 좀 편해졌어요. 토끼의 의자는 참 좋은 책이죠? blanca님의 따님도 토끼를 좋아하네요. 토끼와 상당히 친밀감을 느끼는데 아가 때부터 쓰던 토끼 담요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모르겠어요.^^

세실 2013-01-1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든지 삶에 찌들어 불쌍해 보이는 모습은
내보이고 싶지 않겠지만,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나는거 보면
서글프지요.
영달이 많이 컸네요. ㅎ

깐따삐야 2013-01-13 16:34   좋아요 0 | URL
동갑내기인데도 싱글보다 아기 엄마들이 확실히 더 지쳐 보이긴 해요. 안정되고 넉넉한 미소가 있긴 하지만요.^^
영달이는 엄마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벌써 네살이 되었답니다.

마태우스 2013-01-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깐따삐야님은 손에 물 안묻히고 귀하게 사셔야 할 분인데, 밥만 차리신다뇨. 방학이 더 힘든 게 아닌지 싶습니다. 그래도 영달이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람이겠습니다

깐따삐야 2013-01-13 16:40   좋아요 0 | URL
손에 물 안 묻히고 귀하게 살 만큼 착한 일을 한 게 없어서.^^ 방학이 더 힘든 것 같지만 밖에서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보다는 그래도 좋아요. 살림은 하루아침에 잘하게 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구요. 페이퍼를 보니 마태우스님도 복작복작 다복하게 사시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답니다. 예삐는 하늘나라에서도 귀염 받으며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에요!
 

처음엔 어느 남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 청순하고 수줍어 뵈는 아가씨가 교무실 문 앞에서 머뭇머뭇. 무얼 전해주려고 찾아왔나 싶어 물었더니 모친상을 당한 미술 선생님 대신 근무하게 된 미술학도였다. 너무 어려보여서 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살포시 웃는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어찌어찌하여 내 옆자리로 오게 되었는데 짐도 몇 가지 없고 하얀 점퍼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 문득 전공이 궁금했다. 역시 동양화란다. 어린 선생님이 있는 사흘 동안 청주에는 폭설이 내렸고 청초한 여인과 순백의 날씨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근무일이 오늘까지인 것도 모르고 옆자리의 또다른 미술 선생님이 웬일로 점심을 나가서 먹자고 하길래 이 폭설을 헤치고 무슨 김치찌개냐고 쌍지팡이 짚고 나섰는데 어쨌든 오동통한 두부와 쫄깃한 돼지고기가 씹히는 김치찌개는 무한정 맛있었고 아름다운 여인과 눈 속에서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걷는 기분도 썩 괜찮았다. 보송보송 털이 달린 구두도 요정의 신발 같고 어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보이는 것이 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나, 싶었더랬다. 안나는 어찌하여 키티가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참이라 안나를 이해하기 싫었다. 어리고 고운 여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그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보여주는데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정교한 판화 같고 어떤 그림은 추상적인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한없이 응시하고 싶을만큼 깊고 은은했다. 가까운 백화점에 걸리기도 했다니 조만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선생님의 이름 석자를 꼭 새겼다. 이제 조금 말문이 트여 사적인 얘기도 오고가고 하는데 종례를 마치고 와보니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반짝 들고 작별인사를 한다. 선생님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했을 때 연락처라도 받아둘걸. 마치 대시할 타이밍을 놓친 뻘쭘한 상대처럼 부랴부랴 배웅을 해서 보내고 나니 어쩐지 좀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간식으로 사들고 온 과자도 하나도 못 먹고 갔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과 열망의 투영이라 할지라도 눈과 함께 왔다가 눈과 함께 사라진 어린 여인의 잔향이 생각보다 얼얼하다. 꼭 지금의 나와 같은 눈빛과 마음으로 어린 날의 나를 바라보던 어른들의 시선도 떠오른다. 예쁜 여인을 보면서 영달이의 앞날도 상상해 본다. 저처럼 조신하게, 야무지게, 단아하게... 물론 영달이는 나의 욕심이나 허영과는 무관하게 저의 잠재력대로 자라날 테지만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 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참 설렌다. 모처럼 예쁜 여인을 보니 예쁜 생각을 하게 되고 예쁜 상상을 불러 오고. 아! 정말 순백의 미스 도. 기분 좋은 사흘이었다. 앞날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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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2-0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에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아부 한 마디..

"미인은 미인을 알아보는 법이라더군요." 오호호호호호!

깐따삐야 2012-12-10 11:35   좋아요 0 | URL
뭐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