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번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불분명한 형태로 그 느낌을 빠져나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내게는 그런 욕망이 순전히 내 성격이 만들어 낸 주관적이고 무기력하고 환상적인 창조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 욕망은 자연이나 현실과 무관했고, 그리하여 현실도 모든 매력이나 의미를 상실한 채 내 삶에서 하나의 관례적인 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마치 여행자가 기차 좌석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고 책을 읽을 때 그가 탄 기차가 소설의 허구 세계에 대해 그러하듯이.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여러 다른 인상들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므로, 아마도 그 인상들은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훗날 내게 많은 환멸을 맛보게 했고, 또 많은 과오를 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추억들이 서로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그 추억들 사이에서 ? 가장 오래된 것과 ‘향기’로 인해 생긴 최근 추억,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다른 사람에 대한 추억 사이에서 ? 진정한 균열이나 단층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어떤 암석이나 어떤 대리석에서처럼 기원과 나이와 ‘형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돌의 결이나 색채의 다양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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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꽃의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풍기는 향기는 그 강렬한 생명력의 속삭임인 듯했고, 제단은 살아 있는 곤충의 더듬이들이 방문하는 어느 시골 울타리인 듯 진동했다. 거의 붉은 빛이 도는 몇몇 꽃 수술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은 꽃으로 변신했으나, 곤충이 지닌 봄의 독기와 자극적인 기운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 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는 메제글리즈라비뇌즈였는데, 그 길로 가려면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은 게르망트 쪽이었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에 대해서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과, 일요일이면 이상한 사람들이 콩브레에 와서 산책한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란 이번에는 아주머니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메제글리즈에서 왔을 것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르그랑댕 씨와 함께 그의 집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밝은 달이 비추었다. "고요함에는 좋은 점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나처럼 상처 받은 마음에는, 그대가 나중에 읽을 소설가가 말했듯이, 그늘과 고요만이 적합하다네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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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2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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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실천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그 어떤 정념적 대상들과 상관없이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저 생각할 수만 있었던 저 자유를 객관적 실재로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와 윤리의 기초를 확보한다는 것. 이에 따르면 자유는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다시 말해 윤리적 차원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2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풀이한 이수영의 <실천이성비판 강의>. 앞선 <순수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시공간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에 입법하는 지성의 역할과 이에 대해 순수이성에 의한 월권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면, 이제는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한 논의와 해설이 <실천이성비판 강의>에서 이루어진다.

자유의 범주들은 저 자연의 범주들에 비해 명백한 특징을 갖습니다. 자연의 범주들(지성의 범주들)은 무규정적인 객관들을 보편적인 개념들을 통해 인식하는 사고형식이었지만, 자유의 범주들은 자유로운 의사의 규정에 관계하므로 실천적 요소 개념들로서 직관의 형식(시공간) 대신 이성 중에 있는 순수의지의 형식을 주어진 것으로 그 기초에 두고 있습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123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무래도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A54)"는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과 자유(自由)라 생각된다. 얼핏 '~을 해야한다'는 명령과 자유의 개념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실천이성비판 강의>는 끊어진 듯 보이는 이 간격을 쉬운 해설을 통해 부드럽게 이어준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는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상황, 감정 등과 같은 여러 조건들이 관여하는 순간 도덕법칙은 시공간의 현상으로서 규칙으로 전락할 것이기에, 도덕법칙이 형이상학적인 항상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념'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 규칙이 하나의 실천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하는 결과를 위해 우리가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의지 자체를 충분히 규정해야 합니다. 즉 가언적이지 않고 정언적이어야 합니다. 법칙이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필연성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지에 우연히 부착해 있는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33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은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부터 정언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러한 형식에 대해 '자유'의지를 통해 내용을 실천적으로 채워갈 것을 요구받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 관계하는 것은 오로지 실천이성이라는 것을 <실천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이해하고, 이 개념들을 바탕으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으로 들어간다면 좋을 듯하다. 너무 많은 설명을 해설서를 통해 다 이해하기 보다 큰 틀을 세워두고 상세한 내용을 채워간다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념들로부터 얻어지는 부분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PS.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칸트는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쓴 책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이해될 수 있도록 배려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정언명령은 선험적인 명제입니다. 경험을 통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여기서 순수이성은 자신이 근원적으로 법칙 수립적임을 고지합니다. 감성도 지성도 아닌 이성 자신이 의지에게 명령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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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은 정의로운 상황에서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한편 존 롤스(John Rawls)는 공정한 상황에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된 내용은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절차적 정의관을 채택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정의의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 P50

 결국 노직이 정당한 권리에 근거한 배타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면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이익의 개선을 고려하는 차등 분배를 주장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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