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57/206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침묵 沈默>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이 길을 따르는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최소한 두 인물이 떠올랐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의인 욥과 <신약성경>의 의인 예수. 


 <구약성경>에서 자신에게 닥친 이유없는 불행에 대해 욥은 계속적으로 탄원을 하며, 이러한 불행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던진다. 이에 대해 <욥기>에서는 다행히도(?) 응답받는다. 그가 의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의로움이 드러나기 위해 의인에게 시련이 닥쳤기 때문임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 349~407)는 저서에서 밝힌다.


 

 그러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욥 40 : 6 - 8)


 그분은 당신의 개입이 '너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당신께서 승인하신 개입을 함으로써 욥의 시련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네가 의롭게 되도록'이라고 하지 않고, 그가 실제로도 그랬고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네가 의롭게 보이도록"이라고 하셨습니다. _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욥기 주해> 中


 <구약성경>에서 욥은 응답을 받지만,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아니, 그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윗-솔로몬의 영광이 재림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실망감이 미움으로, 미움이 증오로 바뀌며 제자들에게마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예수.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大衆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 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7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의 죽음을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의 전승과 같이 말하지만, 예수 자신은 <루카 복음>의 내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한다. 같은 공관 복음에서도 엇갈리는 최후의 순간에 대한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반된 역사적 기록들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까. 앞의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기록이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최후의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루카 복음> 기록은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함축하기에 이들 증언 사이의 차이는 크다. 슈사쿠는 아마 이 점을 <사해 부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로 다른 전승 속에 바오로에 의해 세워진 교리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완강한 그 침묵은 나(대사제 안나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 침묵은 처음부터 나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운 말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p174)...  "그대는... 마지막에 저 비탄의 시편 구절을 외치게 될 거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네." "아닙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라고. 이 모든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75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성경>의 의인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응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은 의로운가. 알지 못한다면 스승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에 예수의 길(道)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선택을 한다. 


 라삐들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는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율법을 날마다 엄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율법을 날마다 외워야 한다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느님은 외로우시므로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해 주기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하느님은 보호자가 필요 없는 훌륭한 학자나 제사장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선인善人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울면서 외롭게 걷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했다(p253)... 라삐은 황당무계한 꿈같은 예수의 이야기가 머지 않아 본색이 드러나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예수는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사랑이 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종교 지도자인 라삐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환멸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255


 로드리고의 선택은 <침묵>에서 생각이 오래 머무르는 지점이다. 그 어떤 선택도 독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예수의 침묵에 고민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개인적으로 로드리고 선택은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했으리라 여겨진다. 바오로(Paulus, ACE 5 ~ 64(?))에 의해 규정된 그리스도가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예수의 모습을 로드리고는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불완전함을 걷어낸 믿음의 근원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길은  슈사쿠의 다른 저서 <사해 부근에서> <예수의 생애>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본질적 일은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제자를 만들고 이들에게 무한한 애착심을 불어넣고, 또 이들의 한복판에 자신의 교리의 새싹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가장 큰 업적이요, 또 동시대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교리를 세우지 않았고,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도라 불리는 까닭이었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396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생명을 살리는 것과 믿음을 저버리는 양 갈래 길은 로드리고에게 '예수'와 '그리스도' 중 어느 길을 택하는가와 마찬가지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로드리고의 고민이 생각보다 가볍게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다. 선택을 위해 이번에는 로드리고 개인의 문제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한 사람의 일생과 순간의 다툼.


 성직자로서 일생을 한 길만 걸어온 한 사람의 신념과 찰나와도 같은 배교의 순간. 어쩌면 평생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박해시기만 참고 버틸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영육(靈肉)간에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는 남은 삶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이리라. 예수와 그리스도의 선택과 이어지는 영원과 찰나의 선택.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의 선택. 이것이 <침묵>에서 로드리고가 처한 절망적 상황이 아니었을까.


 바오로와 제자 그룹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다. 그러나 신격화한 예수를 어떤 형태로 믿는가 하는 점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머지않아 재림할 그리스도, 곧 머지않아 세상 종말에 재림하여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구해 줄 그리스도였다. 이에 반해, 바오로의 그리스도는 율법이라는 자력自力 구원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선사하는 존재로, 하느님의 자신과 인간과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한 희생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그리스도관觀은 서로 얽히고설켜 그리스도교 안에서 뿌리를 내려간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90


 한 인간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어떤 선택을 했든 로드리고 신부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내용일지라도...  <침묵>을 읽은 후 로드리고의 선택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의 선택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권위를 부여 받은 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슈사쿠의 다른 저서들과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드러나듯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기적을 통해 부여받은 권위를 걷어냈을 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야 비로소 로드리고 선택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독립적으로 읽기보다 <사해부근에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사람마다 같은 해석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침묵>의 의미를 정리하는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본의 아니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귀신을 쫓는 사람이 되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위대한 신적 생애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기적은 행했다기보다는 여론이 요구한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적은 보통 군중이 만들어낸 것이지, 그것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예수는 군중이 자신을 위하여 지어낸 기이한 일을 행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역사와 민중 심리의 법칙이 이처럼 큰 저촉을 입은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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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5-29 13: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수의 생애>와 동일한 내용,다른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여러 책들이 이렇듯 연결되는걸 보면
평생에 걸쳐 신앙에 관한 고민이 작가에게 있었나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9 17:42   좋아요 2 | URL
미미님 말씀처럼 슈사쿠에게 신앙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문제는 인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로 보입니다. 그만큼의 깊이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구요 ^^:)
 

 측시학 horology이 연구 분야로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계는 모든 정밀 기계의 원형이다. 일단 시계가 섬세하고 매혹적인 장난감으로서 단순히 찬탄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정밀 기계로 여겨지는 순간, 순진무구했던 산업의 시대는 끝난다.... <시계와 문명>은 한편으로는 명백하게, 한편으로는 뜻밖의 방식으로 <대포, 범선, 제국>을 보완한다. 즉 대포와 시계의 발전을 선도한 수공업자들이 흔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183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시계와 문명 Clocks and Culture: 1300-1700>은 그의 다른 저작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 Expansion 1400~1700>의 다른 축이다. 최소한 서양과 동양이 만났을 때, '시계'와 '대포'로 대표되는 서양의 대외진출의 두 상징이 보다 열렬하게 환영받은 지역이 중국과 일본으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이후 행보가 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양의 시계와 화기가 극동에 출현했을 대 공상적인 중국인들은 시계에 매료된 반면 호전적인 일본인들은 특히 총포에 매료되었다. 일본인들은 곧 화승총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분명 대량의 화승총을 생산했다(p98)... 중국의 기술력이 일본보다 부족했으리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는 있다(p101)...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두 나라의 크기의 차이와 대다수 중국인의 삶의 고립성이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2/183

 

  <대포, 범선, 제국>이 군사력을 활용한 서양의 대외거점 확보와 상업 독점권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포로 표현되는 상업자본주의의 진출을 그린다면, <시계와 문명>은 도시의 상공업자와 장인들에 의한 산업자본주의의 대외진출을 표현한다. 여기에 중국에서 시계가 예수회의 대(對)중국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의 진출 도구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수단 외에 상품으로 제국주의를 본다면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도 논의에 추가할 수 있겠다. 이상은 <시계와 문명>에서 제국주의의 진출과 관련해서 점검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럽 상인들은 선교사들의 실례를 금방 본받아, 무역 허가와 상업적 특권을 얻고자 유력 인사에게 값비싼 시계를 바쳤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면 뛰어난 솜씨와 기술로 만들어진 시계가 아시아의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선물 가운데 흔히 포함되었다. 특히 관료제가 권력 남용이 쉬운 여건을 제공하고 관리와 환관들이 때로 뇌물로 매수될 수 있는 중국에서 시계는 흔히 선물로 이용되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2/183


 

<시계와 문명>에서는 시계가 가지는 자체적인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science'과 '기술 technology'의 결합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이후 동방으로부터 수입된 자연과학 지식은 좌표계의 원점을 신(神)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그 과정에서 신학을 대신한 과학이 등장하고, 시장 경제 발전과정에서 정기시(定期市, fair)가 열리며, 도시 중심의 상공업자들과 길드의 형성은 대량 생산 기술과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대량의 독일어 성경 인쇄를 가능케 하며, 기술은 이미 가톨릭 신학과 중세에 일격을 가한 바 있었다. 이제, 기술은 과학과 결합하며 새로운 근대를 여는 입구에 서 있었는데, 이러한 과학기술 연합의 결정체가 바로 '시계'다.


 성숙한 과학자 대 단순한 수공업자란 식의 순진한 이분법으로 현상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더 미묘한 방식으로, 훨씬 더 복잡한 경로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작동한다(p29)... 결국에는 혁신자들이 승리했다. 그들의 승리는 경험주의와 실리주의에 물든 새로운 철학의 승리였고 새로운 철학은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침투했다. 수학은 분석의 주요 도구가 되었고 기계는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30/183


 측시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서로 맞물려 있는 기술적 변화의 더 폭넓고 복잡한 흐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햑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응용역학의 전반적 발달에서 첨단을 달리며 과학 기구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p61)... 정밀 기기는 과학의 진보를 가져온 반면, 과학은 정밀 기기의 향상을 가능케 했다(Les instruments precis font progresser la science, tandis que la science permet l'amelioration des instruments precis)". 오랜 잉태 기간을 거친 후 우리의 근대과학이 탄생했다. 그리고 누적된 과정은 점진적으로 그 발전을 가속화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3/183


 저자는 <시계와 문명>에서 시계의 의미를 이와 같이 발견하지만, 동시에 '왜 이러한 과학기술 문명'이 동양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이는 19세기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材)의 한계와도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시계의 부품이 아닌 시계침이 가리키는 움직임의 의미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 결과를 내려는 시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실증된다. 그렇지만, 치폴라는 여기에서 논의를 멈추지 않는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예술과 철학은 배웠지만 과학은 배우지 않았다. 리치 신부가 언급한 대로 "학문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려는 사람 어느 누구도 수학이나 의학에서 실력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도시 생활은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문인 상류층과, "분이나 시가 아니라 날과 달로 시간을 헤아리는" 다수의 농민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시계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로 활약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사회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나야, 다시 말해 사회의 구조와 필요가 싹 바뀌어야 했다. 기계는 환경과 다른 인간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만 실천적인 의미를 얻는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1/183


 동양에서 과학기술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문명의 한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들이 필연적으로 결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회구조, 사회적 요구와 필요성이 문명의 다른 화학적 결합을 끌어냈기에 문명의 우열(優劣)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3/183


 <시계와 문명>은 서양의 정밀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영향에 대해 분석하며. 이를 통해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큰 틀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과학기술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줌에도 이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책이다. 동서양 문명을 같은 선상에서 인식했을 때 오늘날 서구 문명이 처한 한계상황에 대한 처방을 동양 문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설명하는 물질문명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관계 설저에서 구조적인 움지임을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사치와 자본주의> <전쟁과 자본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과 <시계와 문명>은 미시적으로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때문에 이들을 서로 연결해서 읽는다면 보다 알찬 독서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제 다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마지막 3권으로 넘어가야겠다...


 16세기와 17세기는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을 목도하고 대양 항해가 크게 확장된 시기였다. 천문학자와 항해자 모두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고 별이 뜨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해 정밀한 시간 측정 기기가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고도로 정밀한 측시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과학혁명의 핵심인 역학의 기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과학자들이 시간 측정 문제에 주목하게 된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측시학에 과학적 원리와 체계적인 실험이 적용되었다. 당시 과학자와 시계공들은 긴밀하게 협력했고 그 결과 일련의 혁명적 발견이 이루어져 시계 제작의 기술 진보에서 돌파구가 열렸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0/183


PS.  치폴라는 '시계'가 중국에서 보다 환영받고, '대포'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서구화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니다. 치폴라 사후인 오늘날 정밀과학 기술에 보다 관심을 보인 '시계'의 중국이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첨단과학을 따라잡으며 G2로 우뚝 선 반면(최근에는 주춤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재무장에 열을 올리는 '대포'의 일본은 1985년 프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여년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역전된 이들의 위상을 지켜보며 근대화의 정의와 함께 역사 해석의 적정한 시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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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9 12: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이런 책 좋아하는데 요즘은 이런 류를 여유있게 보지를 못하네요
자극받고 갑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번역때문인지 잘 안읽히더라구요....^^
지중해의 기억 읽다가 그냥 몇페이지 참고만 하고 말았어요

겨울호랑이 2022-05-29 10:39   좋아요 4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편하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이루는 3층 구조를 설명하려는 브로델의 방대함과 꼼꼼함이 함께 들어가 있어 어려움을 더하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지중해의 기억>은 저자의 다른 작품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전에 먼저 읽으면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대작이 주는 느낌도 다르지만, 다만 학술서에 가깝기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내용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도 같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2-06-10 0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식 시간과는 너무나 다르군요. 묘시에 만나자는 어떻게 해석하나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기차와 함께 서양의 정확한 시계개념 들어왔다고 하던데 ㅠㅠ 이 리뷰를 제가 왜 놓쳤을까요. 넘 재미있어요 호랑이님 ㅎㅎ그리고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2-06-10 10:17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서양 문명의 특성은 수량화, 정량화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상품이 대포와 시계이고, 치폴라는 이들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알기 쉽게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하라 2022-06-10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기쁜 주말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0 13:26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6-10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0 22: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벌써 올해도 반이 지나갔네요.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6-11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1 08: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께서도 행복한 초여름의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thkang1001 2022-06-11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시계에게는 모든 하루가 다 똑같고 동일한 길이이다.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이 책은 아름다운 나머지 너무도 짧았던 날들을 회상하며 쓰였다. ut hora, Ora, sic dies nostri(우리의 날은 시간과 같다).

반면 숙련공의 유출은 한 나라의 쇠퇴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쇠퇴의 징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유능한 수공업자를 잃은 이탈리아는 역동적이고 고도로 수용적인 사회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정체되고 보수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마침, 숙련 노동력을 수입하던 나라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도 채택했는데 이 새로운 신앙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지상주의는 문자 해득을 장려함으로써 인적 자원의 질적 향상에 기여했다. 이것들과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여 155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경제력의 균형추가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사리온 추기경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서방의 최신 기술을 배우라고 촉구한 지 두 세기가 지난 후, 기술 발달과 경제 발전의 지도적 위치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야금술에 한해서는 스웨덴이 차지하게 되었다.

생산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의 상당 부분은 수요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 즉 중간계급과 시계를 구입할 여유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율이 꾸준하게 증대하는 상황과 엮여 있었다. 수요와 공급 양 측면에서 발전이 결합하여 시계는 더 널리 유포되었다.1

초창기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중세 수공업자들이 정확성에서 눈에 띄는 개선을 이뤄내지 못한 반면, 신기하고 매우 복잡한 운동 장치가 달린 시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탈진기를 제어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톱니바퀴에 또 다른 톱니바퀴를 추가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한편으로 복잡한 운동 장치는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체의 회합會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인간사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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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는데, 구석기 동굴벽화의 뛰어난 수준과 그 창작자에 대한 암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형태나 기술에서 고도의 숙련성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주제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게 아닐까. 뛰어난 그림이나 암각으로 장식된 동굴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많다.

마지막으로, 동굴벽화의 걸작들 대부분은 다시 칠하거나 손보지 않고 한 번에 제작된 게 많은데 이는 작가들이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필수적인 교육과 수련을 통해 숙련된 기술을 선보일 수는 있지만, 교육을 한다고 천재가 나오는 건 아니다.

일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내재된 가공할 만한 힘을 중재하는 자이니만큼, 우리는 샤머니즘 사회에서 샤먼을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다. 자연 세계와 초자연적 세계의 평형을 잡아 주고, 집단의 생존과 존속을 결정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결론은, 이만여 년 동안 충분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본 개념을 갖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이 종교를 토대로 한 동일한 행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토대를 탐색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 토대를 통해 사고의 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 등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샤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은 세계(또는 세계들)의 투과성과 유동성이다. 샤먼적 요소들(환영이나 환각)이 대부분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런 개념들이 신앙 및 의례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틀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강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샤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라고 부르는 것도 오늘날에는 의식이 바뀐 상태를 특정할 때 사용되지만, 실제 샤머니즘 문화에서는 특화된 필수적인 수단이다.

빙하기시대의 벽화 예술과 이를 만들어낸 믿음은 그저 단순히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정말 인간적인 사회와 만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해 보려 애쓰고, 예술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상당히 복잡한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독창성은 지하 환경을 개발하고 활용했다는 데 있다. 야외가 아닌 동굴 안쪽에 그들의 작품과 흔적을 남겨 그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다.

요컨대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개연적인 것에 기대어,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이 사냥꾼들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약간 흔들리면서도 생생한 그들의 실루엣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간 정신성의 위대함이 만일 이 죽은 자들이 가 있는 세계를 어떻게든 찾고 그 세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일어났다면, 연속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실현이라는 희열(실제 체험이든 환각이든)만이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근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환치 가능한 등가어인 이유는 흔히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선사인과 현대인은 죽음 앞의 이 무력함에서만큼은 진정한 동시대인이다.

선사인들이 동굴 내벽 너머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한 간절함으로 암각화를 새겼듯 현대의 예술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세계와 닿으려고 몸부림친다. 예술이 선과 색채, 언어 자체에 있지만은 않음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회화든 문학이든 한 작품에 씌어진 ‘언어’를 읽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로 흘러드는 것이다. 독서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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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권이란 최우선의 권력 또는 권위이다. 현대 영국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다. 유럽연합이나 다른 단일기관이 영국 국민의 주권을 박탁한 것도 아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군림하는 것은 기득권층이다. 바로 이 기득권층이 영국 민주주의를 축소하고 박탈했으며, 나라가 아주 소수의 허세를 부리는 엘리트를 위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 부분이 바뀌기 전에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울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38/382


 오언 존스(Owen Jones, 1984 ~ )의 <기득권층 The Establishment>은 영국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네트워크, 현대 귀족 집단을 설명한다. 정치인, 언론, 기업, 금융자본, 회계법인, 조세당국 등 서로 다른 분야에 전문가 또는 권력집단은 카르텔을 형성한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해당하는 이들은 긴밀하게 상호연대하여 각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배하는 다수들을 교묘하게 분리시켜 분할통치한다. 과거 19세기 제국시대 열강들처럼.


 내가 이해하는 '기득권층'의 의미는 이렇다. 오늘날 기득권층은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있는 자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성인 인구의 거의 전체가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권력 집단의 시도를 대표한다.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은 권력자 집단을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호하려는 방화벽으로 볼 수도 있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13/382


 기득권을 보호하는 또다른 장치는 대중의 분노가 사회의 상부가 아닌 최하층에게로 굴절되는 현상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지불하는 고용주를 향해 분개하기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한다는 실업수당 청구인들쪽을 시샘하게 만든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3/382


 그들은 피지배계층을 중간계급(대중)과 최하층으로 분리한다. 이른바 차브(chav)라 불리우는 이들 집단은 대중의 분노와 모멸의 대상이다. 과거 유대인과 집시가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이들이 대신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다른 저작 <차브 Chavs>에서 다뤄지며, 이들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세트에서 다뤄지지 않는 중간계급(중산층)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기득권과 절망하는 차브들의 이야기는 21세기 영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대처리즘이 영국의 새로운 기득권층을 형성해냈다면, 레이건 행정부도 두 임기를 치르며 미국에 비슷한 현상을 일으켰다. 레이거니즘은 많은 부분 두 이념의 혼합이었다.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그것이다(p314)...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 그리고 미국에서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부상은 영국 기득권 지식인과 미국 엘리트의 결속을 강화시킨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16/382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_ 오언 존스, <차브> , p7/446


 온건파에서 급진파까지 여러 면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영국 기득권층의 통치이념은 일관적이다. 국가는 나쁘고, 기업인이 재능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자유시장이 성장과 진보를 책임진다. 진정 부를 창조해내는 이는 바로 기업인들이다. 모든 엘리트 정치인들도 이런 정서를 공유한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199/382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간층으로의 지지를 받는 것은 체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결과제다. 저자는 이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차브'가 지목되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가 결합한 영미식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금융자본에 의한 민영화가 확산되고, 시장주의가 퍼져가면서 사회는 암울하게 돌아가며 대중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이에 대한 돌파구가 바로 하층민인 차브에 대한 사회적 공격이다.


 모든 것은 중간계급의 기준에서 판단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가 바로 중간계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포부도 없는' 게으름뱅이 건달들, 인종주의자들과 술주정뱅이, 강도 등으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찌꺼기들처럼 묘사된다.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최근 몇년간 빈곤층은 실제로 더 가난해지는 상황에서 최하위계층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은 비극적인 동시에 불합리한 일이다. 차브 혐오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01/446


 차브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반격할 수 없다. 노동의 파편화와 비정규직 확대, 정규직 감소라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세력을 잃어갔고, 노동조합에 근거한 노동당의 위치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당마저, 중간계급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은 고립되어 갔고, 점차 극우화되는 양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극우화된 차브를 더 혐오하게 되면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대립은 심해졌다.


 종합해보면 신노동당의 복지정책은 무능하고 열망이 없으며 얻어먹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무질서하다는 일련의 차브 이미지를 노동계급에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에서 나옴으로써 노동계급 사회와 개인을 향한 중간계급이 가진 수많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욱 교묘하다. 신노동당의 기반이 된 많은 철학들은 중간계급 승리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_ 오언 존스, <차브> , p136/446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합리화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74/446


 부유층 엘리트들의 구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해지면서, 노동조합이 노동자에게 더 큰 몫의 부를 돌리려고 연대해서 힘을 사용하는 일이 전례없이 어려워진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저항 부재는 일터에서나 사회 전체에서나, 기업엘리트에게 전무후무한 권력이 집중될 수 있게 했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276/382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노동이 문제다(p231)... 노동조합의 약화는, 호황기에도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고 정체됐던 까닭을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엄청난 금액의 돈이 주로 사장과 기업주들을 배불리는 데 돌아갔는데, 그 까닭은 유럽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을 하는 수백만명이 자신들의 온전한 몫을 얻도록 도와줄 조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33/446


 그 사이 기득권은 자신들의 요구를 차례로 관철할 수 있었다. 연구기관에 의해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몰이를 하며, 민영화를 통해 기업들에게 더 많은 부를 안기며, 기업활동 전반(IPO부터 세금납부까지) 회계법인과 조세당국과의 긴밀한 유착은 부가 그들의 이너서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점점 심각해지는 부와 권력의 집중은 여러 이유로 일어났다. 기득권층의 이념은 너무나 지배적이고, 거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도전받지 않고, 좀 기벽이 있는 사람이나 정치적으로 살아있는 화석류급인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기득권층의 이념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를 따르다보면 부자감세, 민영화, 그리고 노동자 권리 박탈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다. 싱크탱크와 언론기업은 끊임없이 이런 목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기업 엘리트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이익과 동의어인 것처럼 묘사한다. 대기업은 정당과 싱크탱크에 돈을 댈 뿐 아니라 국가기관 자체와 부분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노조의 철저한 약화로 조직화된 운동에서 나오는 대항력이 부재하는 마당에 부와 권력이 끊임없이 최상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견재할 방법은 이제 거의 없다. 기득권층 이념과 대기업의 정치적 지배, 그리고 선동자들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않는다면 이 과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아마 더 가속화될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279/382


 저자는 <기득권층>과 <차브>에서 서술된 구조가 개혁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았다. 기득권의 피라미드는 튼튼하고, 이를 무너뜨릴 힘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세트에서 다뤄지지 않는 다른 계급에서 찾아야 한다. 중간계급이다.


 극우의 부상은 더욱 큰 위기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다. 그 위기란 노동계급의 대표성 위기다. 정치의 여역에서 축출되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사회 안에서 누려온 권력이 축소되고, 그들의 관심사가 외면받고 있음을 생각할 때, 국민당 같은 정당에 투표한 노동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 있다(p372)...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대중의 정치적 소외, 비관주의와 냉담함은 영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위태롭다. _ 오언 존스, <차브> , p373/446


 이 세트에서 중간계급은 다뤄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계급은 기득권에게 이용당한다는 측면에서는 피해계급인 반면, 하층계급인 차브를 악마화한다는 점에서는 가해계급이다. 이러한 이중의 성격을 갖는 중간계급은 계급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비중을 구조를 바꿀 힘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 제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는 자신과 무관한, 완전히 추상적이며 삶과 동떨어진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많은 국민들이 투표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고 여긴다. 여러 도시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보니, 그것은 놀랄만큼 서로 닮아 있었다. '투표해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 '정치인들은 다 자기네 생각밖에 안 한다' '정치인들은 제 잇속 차리기에만 바쁘다' '정치인은 다 똑같지' '항상 공약을 어기지 않느냐' 같은 것이 그 이유들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6/382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길들여진 실망감을 느꼈기에, 그들은 차브들에게 빼앗아온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s)에 열광하는 동안, 의료 민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서비스가 기득권의 이윤창출의 수단이 되었음을 깨닫지 못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러한 구조에 대한 개선점을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적극적인 자기 의사 표명에 있다. 


 오언 존스의 <기득권층>과 <차브>는 영국사회를 분석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국문제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세계화에서 온 것임을 반증하는 한편, 쉽지 않은 문제임을 함께 알려주는 것이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가야할 길이기에 우리는 관심을 놓칠 수 없음도 함께 생각한다. 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 생각을 실천을 옮겨할 때이기에 두 권의 책을 페이퍼로 서둘러 정리한다...


 민주 권력을 사익집단에 굴복시키고, 실질적 의제가 아니라 뉘앙스만 서로 다른 정치엘리트를 양성해서, 기득권층은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을만큼 훼손했다. 기득권층은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고, 희망을 완전히 잃고,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물론 기득권 지배의 영속화를 돕는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7/382


 민주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혁명의 지지자들은 또한, 선동자들의 사례에서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전후 시대에 선동자들은 패배한, 별 볼일 없는 주변부였으며 역사의 행진에 짓밟혀 먼지가 된, 실패한 사상을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그 구성원들은 심히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고, 숫자도 적었다. 선동자들을 버티게 했던 것은 자기 사상에 대한 신념이었다(p348)... 민주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이 성공하려면 분열된 이들을 한데 모으고, 유능한 우리의 선동자를 만들어내야 하며, 그 한 조직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솜씨 좋은 싱크탱크의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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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 2022-05-27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안녕하세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글이지만, 요즘 한국 사회의 모습과도 겹쳐보이네요. 한국은 특히 기득권을 얻거나 중간 계급까지 올라 선 사람들이 경쟁을 통해 정당하게 얻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더 그 카르텔이 더 견고하고, 그 카르텔 밖에 있는 사람들 자신조차 경쟁에서 졌으니 내가 무능력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저항의식 자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20~30대는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경쟁을 겪으며 성장한 세대라, 공정에 민감한 한편 한번 사회에서 낙오되면 이렇게 자신을 경쟁에 내모는 사회구조에 저항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고 체념하여 재기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관심있는 주제라 흥미롭게 읽었고 답답한 마음에 제 생각도 남겨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7 22:1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베이글님. 저 역시 베이글님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 <차브>를 읽으며 우리 사회의 현재 문제를 옮겨놓은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기득권층이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기득권임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급투표를 당연하게 말하는 변화를 보면서, 정치성향에 따른 분화와 함께 경제력에 의한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분화가 교육과 자본세습을 통해 영구화된다는 것에 있겠지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별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미래가 아닌,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따른 계층이동이 자유로운 미래가 되어야 할텐데,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류에게 불평등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현상이 아닌, 신석기 혁명 이후의 거대한 흐름이라 본다면, 당장 해결되기를 바라고 쉽게 포기하기보다, 평등을 위한 거대한 물길의 일부가 되어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베이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