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금융 감독 기관들이 인종차별 정책을 드러내 놓고 펼치는 일반은행과 저축은행 들을 인가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미국 헌법이 부여한 의무를 스스로 방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즈음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거용 택지를 공원 용지로 수용하는 것은 백인만 사는 동네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1959년 미주리주 항소법원이 판결한 것처럼, 토지 수용의 목적이 공적인 것이라면, 사법제도는 그 수용의 동기가 무엇인지 따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원은 확실히 공적인 공간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집을 짓는 것을 막기 위해 사유지를 강제수용하고 토지의 용도를 변경하는 수법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의 일상적으로 쓰였다.

정부가 백인들이 사는 교외 지역에 흑인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막고, 흑인 가정을 몇몇 도심 지구에 집중시키는데 성공하자, 흑인 지역사회는 정말로 황폐화됐다. 대개의 경우, 빈민가 철거는 좋은 아이디어일 수 있었다. 소득이 적은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살고 있는 불결하고 불량한 건물들을 부수고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동네에 제대로 된 새집을 제공한다는 계획은 실로 적절하고 타당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정책 결정자가 생각하는 재배치는 그런 그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빈민가 철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빈곤화와 함께 그들의 공간적 분리를 더욱 강화하며 결국 더욱 더 흑백 거주 분리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궁핍해질수록, 이들을 환영하는 백인 중산층 동네는 점점 더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주인이나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세입자들이 내는 높은 재산세는 흑인 동네를 쇠퇴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구들은 높은 세금을 납부하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는 재산세 납부를 위해 하숙을 치거나 한집에 여러 세대가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의 게토 지역은 스스로 계속해서 또 다른 게토 지역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의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가처분소득이 줄기 마련이고, 그것은 그가 집을 팔고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사 가서 살 수 있는 곳이 제한되면서, 비슷한 규모의 주택임에도 백인이 주로 사는 동네보다 흑인 동네의 임차료와 매매가가 더 높아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도시 지역 어디서든 살 집을 구할 수 있었다면, 주택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그들이 내는 임차료와 주택 가격은 합리적인 선으로 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를 놓거나 집을 매매하려고 하는 집주인들은 주택 수요가 공급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약점을 자유롭게 악용할 수 있었다.

인종의 분리와 차별은 국가적 부의 분배뿐 아니라, 그 부를 만들어 내는 생산성에도 큰 악영향을 미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다른 문화적 배경 때문에 발생하는 관점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조직은 더 잘 돌아간다. 사회심리학자들은 흑백 주거 구역 분리가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우월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스로 도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우월감에 빠진 집단은 성취도도 낮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만일 연방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계획을 통해서 정부의 주택 보조금을 받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소득층이 정부가 확고하게 분리한 흑인 동네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됨으로써 인종 간 분리가 더욱 강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인종차별이 없는 지역사회들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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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수당의 이론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보수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수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중동’은 문재인정권 내내 기득권 수호, 곧 수구의 논리를 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진보 논객 리영희의 책 제목이 말해주듯,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해야 사회발전의 동력이 확보될 수 있다. 이때 필수요건은 진정성이다. 진정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또한 양립해야 한다.

서구 정당과 언론의 또 한가지 특징은 일관성이다. 유럽에는 ‘백년 정당’이 숱한데,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지면 정당 이름부터 바꾼다. ‘정론지’를 자처하는 우리 수구보수언론의 논조는 더욱 변화무쌍하다. 촛불정부의 최대 개혁과제였던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객관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종일관하는 것은 정파성이다.

대부분 종편은 ‘종합편성채널’이 아니라 편향적인 ‘정치전문채널’이 되어 선거 때면 거의 일방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편을 들고 민주당 후보를 적대시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이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회 180석을 가진 정치세력이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이라는 양대 개혁과제 중 특히 언론개혁에는 손도 못 댄 상황에서 또 표를 달라고 그 손을 유권자에게 내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 행태, 특히 이번 대선국면의 보도 태도를 보면 부정적 측면이 너무나 많이 드러난다. 선거판을 좌우한 것은 후보의 역량이나 정책 차이가 아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수로 뛰는 언론의 편파보도가 선거판을 흔들고 여론조사가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를 냈다. 일부 언론은 특정 정당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 몸처럼 움직이고, 선거전략을 제시하며 정당의 머리 구실까지 했다

모든 자유는 자유권의 내재적 한계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고, 특히 언론에는 책임성이 강조돼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주의 자유나 기자의 특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 발전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쪽으로 언론의 자유가 악용되고 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 언론의 자유를 너무도 갈망했기에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신화에 빠져버렸다. ‘남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 ‘가짜뉴스로 명예를 훼손할 자유’는 없는데도, 기득권 언론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언론개혁에 한사코 반대했다.

언론현업단체들이 주장하는 ‘자율규제’는 어찌 보면 형용모순이다. 대형 언론사들은 편파·왜곡·선정보도를 일삼는 조직인데다, 조선NS와 같은 온라인 뉴스 자회사까지 만들어 포털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이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자율규제로 극성스러운 상업주의를 제재하겠다는 것은 언론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을 좇는 것이다.

『르몽드』(Le Monde)의 전 발행인 콜롱바니(J. Colombani)는 "언론에 두 주적이 있는데 하나는 돈, 하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재정이 중요한 건 당연하고, 시간과 관련해서는 인터넷과 포털을 중심으로 속보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진지한 언론이 밀리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에서는 포털이 진지한 언론의 적이 되고 있다. 진지한 언론은 건전한 공론장을 조성하고 숙의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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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인지 능력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월한 사냥 능력과 더 정교해진 새로운 무기도 있었지만, 사냥감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사고였다.

적어도 1만 5,000년 전, 인간과 늑대의 관계는 친숙함과 존중에서 협력과 동료애로 발전했고, 그 후손은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 첫 번째 동물이었다.

약 1만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염소, 양, 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까지, 현재는 일반적인 가축이 된 동물들은 서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졌다. 역사를 뒤바꾼 동반자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가축 사육장과 실험실까지 확장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동물의 권리를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간이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동물을 억압하고 학대한다. 현재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을 종처럼 부리거나 먹거나 착취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과정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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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편린 - 수학의 눈으로 예술 바라보기 경문수학산책 30
이바스 피터슨 지음, 김승욱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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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편린》의 저자 이바스 피터슨은 위성수학의 기초를 통해 수학에 내재된 예술적 감성과 예술에 구현된 이성적 질서를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통해 순수사유와 법칙을 찾아내는 수학과 순수사유를 형상화하는 예술(특히 미술)은 뫼비우스 띠, 클라인 병과 같이 구분할 수 없는 두 세계의 연관성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발산‘이 아닌 한없이 ‘수렴‘하는 무한소의 특성은 현실에 수학의 개념을 형상화하는 반면, 시공간의 제약 아래에서 구간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대칭(프랙탈 구조, 망델브로 집합), 전체 구간에 적용되는 질서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수학의 다차원 이론을 3차원 이하에서 보여야하는 예술의 현실적인 문제는 이데아의 학문인 수학과 감각의 학문인 예술간 엄연한 간극이 있음도 함께 보여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술로서의 수학(또는 수학으로서의 예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기하학적 철골 구조물의 형태가될 수도 있고,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프리즘 구조의 조각품이 될 수도 있으며, 4차원으로 들어가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밝은색의 직사각형과정사각형 그리고 선들로만 만들어진 그림, 또는 컴퓨터 화면 위에 거친 산봉우리와 계곡이 나타나는  생생한 풍경화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다른 많은 예를 보면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수학의 창조성이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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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6-06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것 같습니다. 수학의 창조성과 예술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둘 다 임의적이란 측면에서요. ^^

겨울호랑이 2022-06-06 21:3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수학 역시 공리와 공준이라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약속에 기반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수학 역시 완전히 객관적인 학문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예술은 너우도 당연하겠지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다음과 같이 수학적 예술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대로 검증된 수학은 냉엄한 아름다움과 엄격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불분명한 자연에 의지하지도 않고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적 도구도 없이 오로지 최고의 예술가만이 나타낼 수 있는 장엄한  순수함과  빈틈 없는 완벽함으로 만들어진 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 P20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수학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여긴다. 수학에서 나타나는 차갑고 딱딱한 법칙과 논리적 엄격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열정과 같은 감정, 그리고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표현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 사이의 벽은 보기보다 그렇게 완고하거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지는 않다. 사람들이 수학과 예술 모두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강제성과 자유가 적당히 조화된 훈련과 안목이 둘 다 필요하다. - P29

"바흐를 듣기 위해서 마음을 여는 순간 아름답고도 자연스러운 규칙이내 마음속에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내 작품들은 마치 음악의 대위법처럼커다란 규칙에  맞추어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체 논리의 상호작용, 환경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혼합물이었다."고 페리는 말한다. - P183

구는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똑같이 보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대칭축이 있지만 사면체는 그 반대로 순수 조형물중에선 가장 적은 대칭축을 가지고 있다. 사면체에는 양면성도 있는데 스스로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면체에 있는 네 개의 삼각형 면의 중심이  또 다른 사면체의 꼭지점이 된다는 의미다. 대조적으로, 육면체에 있는 각 면의 중심은 팔면체의 꼭지점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 따라서 육면체는 팔면체와, 그리고 팔면체는 육면체의 양면을 이룬다. 비슷한 관계가 20면체와 12면체에도 해당된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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