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사 - 국망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거울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 2
박은식 지음, 김태웅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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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 망국의 처참함이 한민족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은 망망하고 쇠잔한 숨길은 깜빡깜빡 희미하여 아픔을 울부짖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그칠 수가 없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p27) <한국통사> 中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은 <한국통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면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한국통사>에서 말하는 나라의 정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라의 혼과 백


 역사가 보존된다는 것은 나라의 혼(魂)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최고의 나라를 들어 논한다면, 중국의 혼은 문학에 의탁하였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는 혼이 강한 나라이다. 선비, 거란, 몽고와 같은 나라는 바야흐로 번성할 때는 능히 큰 땅을 정복하여 위엄을 천하에 떨쳤지만, 무력이 한 번 쇠약해지자 나라의 수명도 다하게 되었다. 이는 백(魄)이 강한 나라이다. 대개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선함(船艦), 기계(器械) 등은 백에 속하는 것으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오호라! 한국의 백은 이미 죽었으나, 이른바 혼이란 것은 남아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p310) <한국통사> 中


 사람이 죽으면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나라 역시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특히, '혼'이 '백'보다 더 중요하기에, 우리가 역사를 통해 '혼'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부흥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한국통사>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 모두가 우리 조상의 피로써 골육을 삼고 우리 조상의 혼으로 영각(靈覺)을 삼고 있으며, 우리 조상은 신성한 교화가 있고 신성한 정법(政法)이 있고, 신성한 문사(文事)와 무공(武功)이 있으니. 우리 민족이 다른 것에서 구함이 옳겠는가.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체와 정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p27)  <한국통사> 中


 아픈 역사의 시작


 과연, 이러한 아픈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저자는 이러한 시원(始原)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찾고 있다.


[사진] 경주 척화비(斥和碑)[출처 : 위키 백과]


 무릇 그 자리는 할 만했고, 재주도 할 만 했으며, 시운 또한 할 만했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옛날과 지금을 두루 통하고 안과 밖을 관찰할 만한 학식으로 그 힘센 팔을 걷어붙이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여 문명 열강과 같이 바다와 육지로 함께 달리며 여유로워야 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배움이 없어 국내를 다스리는 데는 사사로운 지혜를 임의로 사용하여 움직임이 많고 거동이 지나쳤으며, 국외를 대하는 데는 배척을 주장으로 삼아 문을 닫고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마침내 변란이 매우 가까운 데서 발생하여 화가 나라에 미쳤으니 반도 중흥의 기운도 기어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픈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p57) <한국통사> 中


 세계 혁명사의 경험


 지도자가 배움이 부족하여 스스로 외부와 단절하고 고립의 길을 택한 결과로 근대 이후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인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통해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점진적이며 꾸준한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김옥균(金玉均, 1851 ~ 1894)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이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진개혁을 추구하였으나, 결국 3일 천하로 막 내리게 된 갑신정변. 이의 실패 원인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런 거사야말로 비록 폭발적이고 열렬한 행사라고 말할지라도 실은 하늘의 때[天時]를 따라야 하고, 인심에 응해야 하며,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을 차례대로 설치하거나 종교를 좇아 인심을 끌어내든가 혹은 학설로 말미암아 솔선하여 주장하거나 언론으로 인심을 고취한다든다, 문자로 정치의 이치[政理]을 발휘해서 공중(公衆)의 사상이 점차 여기로 기울게 해야 한다. 그 후에 정치 방면에 들어가 맹렬히 급격한 수단을 사용하되, 찬성하는 자가 많아지고 반대하는 자가 적어졌을 때 새로운 정치를 세워야 아무런 방해물이 없게 된다. 비록 하루 동안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실은 수십 년의 오랜 시일을 미리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 혁명사의 경험이다.(p126) <한국통사> 中  


 급진적인 개혁보다 지속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독립당(獨立黨)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지점에서도 드러난다. 


 무릇 사람의 작업도 늘 마음에 두고 오래 지나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면밀히 힘을 기울이는 자는 비록 약할지라도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나,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성사시키겠다고 하여 미친 듯이 뛰어 달리는 자는 비록 강할지라도 반드시 패한다. 하물며 독립당은 본래 강력한 힘도 없는데 빨리 성사하려 함에 있어서랴.(p196) <한국통사> 中  


 결국, 저자는 지도자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시작된 우리 역사의 불행을 바로 보고, 이러한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손들로 하여금 우리의 혼(魂)을 잘 보존할 것을 강조하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 <한국통사>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픈 역사를 돌아봐야하는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는 우리의 혼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일까?


 고통의 의미


 살다보면, 몸이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혹시 내게 잘못된 생활 습관은 없는지, 내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고통의 의미라 생각된다.


 <한국통사>에서 통(痛)은 '아픔'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라의 고통 역시 몸의 고통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 후에야 아플 통(痛)이 통할 통(通)으로 바뀌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끝나는 지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 혼은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반성과 꾸준한 준비에서 나옴을 우리는 최근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한국통사>를 다시 돌아봐야 하는 이유라 여겨진다. 


[사진]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출처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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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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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18-05-01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痛‘자는 발붙일 없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8-05-01 11:25   좋아요 0 | URL
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이상의 아픔은 없어야 겠지요...

AgalmA 2018-05-02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을 바로 세우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민족이나 국가에 일치시키는 건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죠. 이게 현대에서 큰 문제점이기도 하고요. 경제적 이득을 꾀하면서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많은 나라들 보십시오. 민주주의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죠.

겨울호랑이 2018-05-02 13:55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민족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개인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되어간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부분과 전체의 조화. 쉽지 않은 과제라 여겨집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지금 가장 주목받는 사안은 종전(終戰)과 평화체제 구축이라 여겨진다. 물론, 우리나라는 휴전협정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최종논의는 북미 회담에서 마무리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전쟁(韓國戰爭, 1950 ~ 1953)을 주변국들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바라보고자 한다.


1. 미국 : 반공(매커시즘)을 통한 국내 여론 통합과 세계 패권 유지 기반 마련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을 적으로 국내 여론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종전(終戰) 후에는 외부의 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해 미국은 외부의 강력한 적(敵)이 필요했고, 이는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실체화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목적을 달성했을까?

 

 전후 10년 동안 미국은 냉전(冷戰)과 반공(反共) 정책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공화당과 민주당의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연합은 공격적인 대외정책으로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자국에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자유주의자들을 매혹시키게 될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대통령에 의해 가장 잘 형성될 수 있었다... 반공의 분위기가 충분히 강력해진다면, 자유주의자들은 평상시라면 관용이라는 자유주의 전통을 위반하는 것으로 비춰질 억압적인 국내 정책을 지지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트루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벌인 한국 전쟁이 그것이었다.(p131) < 미국민중사 2> 中


 미국은 한국 전쟁을 통해 국내 여론을 통합시킬 수 있었고, 이러한 통합을 바탕으로 세계 패권국의 위치를 유지할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매카시즘'이 위치했다.


 한국 전쟁은 자유주의 여론을 전쟁과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집시켰다. 한국 전쟁은 해외에서의 개입정책과 국내에서의 경제 군사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연합을 만들어 냈다.... 자유주의자들은 조지프 매카시 Joseph MaCarthy 상원의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 전쟁은 "매카시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p132) < 미국민중사 2> 中


2. 중국 : 타이완 침공 저지에 대한 복수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쫓아낸 후, 티베트 침공을 통해 그 세(勢)를 확장시켰다. 그렇지만, 이어진 타이완 침공에서 실패를 맛보게 되었고, 미국의 개입으로 더 이상의 침공이 어려워지게 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감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중국은 미군이 북한군을 국경까지 밀어붙이는 순간에 이르자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규정(애치슨 선언) 속에 타이완과 1945년 이후 38도선을 기준으로 소비에트가 점령한 북한과 분리되어 미국의 보호 아래 독립국으로 부상한 남한이 포함되지 안은 점을 주목했다. 만일 타이완을 점령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미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이고 있던 유엔에서 당당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p110)... 미 제7함대의 배치로 타이완에 대한 공격이 완전히 불가능해졌음을 확실히 인식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푸젠 해안에서 훈련 중이던 제3군에서 3만여명 가량의 부대를 선양(瀋陽)으로 북상시켰다. 다른 군대들도 산둥반도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2> 中


 한국전쟁의 결과 수십 만명의 중국군이 사망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북한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혈맹(血盟)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이 중국 내에 미친 영향을 굉장히 컸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혹독한 겨울에 철지난 의복, 부족한 식량, 최소한의 무기를 가지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공군력과 화력을 지닌 적군과 싸워야 했던 수십만 명의 중국군이 당한 고통이었다. (p113)... 전쟁에서 경험한 사건들은 중국으로 하여금 서양 제국주의의 해악에 더욱 눈뜨게 해주었고, 특히 미국을 중국의 주된 적으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p114)  <현대 중국을 찾아서2> 中


3. 일본 : 한국전쟁을 통한 전후 경제불황 탈출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일본은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2차세계대전의 피해를 한국전쟁 3년을 통해 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그들의 근면과 성실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일본의 1945 ~ 1949년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급등했다.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한 미국인은 "인플레이션에 제동이 걸린 1949년까지 물가는 4년 만에 무려 150배나 뛰었다."고 술회했다.(p433)... 디플레이션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1년 뒤인 1950년 봄, 일본은 부흥은 커녕 더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지기 직전인 것 같았다. 연합국 최고사령관(SCAP :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의 처방이 일본을 고사시킬 것처럼 보이던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한해협 건너편의 비극이 일본에게는 엄청난 행운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본의 산업계에는 군수품 조달을 위한 미국의 주문이 쇄도했다. 1951 ~ 1953년에 군수품 조달액수는 약 20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대략 일본 총수출액의 60%에 해당했다... 기업체들은 패전 이후 처음으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설비와 시설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국민총생산 증가율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부흥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p434) <현대 일본의 역사> 中


4. 한국 : 그리고 바뀐 것은 없었다


 반면, 한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전 38선이 휴전선(休戰線)으로 바뀐 것 외에는 바뀐 것이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7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북한은 사실상의 대량학살이 그들의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1945년의 힘찬 기대를 악몽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목격했다. 기억할 점은 이 전쟁은 내전(內戰)이었으며, 한 영국 외교관이 언젠가 말했듯이 "모든 나라는 자신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끼리의 내부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이전의 현상(現狀)으로 복구되었을 뿐이며, 오직 휴전만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오늘날까지 긴장과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p418)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적을 만들 수 있었고,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타이완 합병을 저지한 미국에 대한 복수기회였으며,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군수품 수출을 통해 새로운 경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단지 아픔이었을 뿐이다.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세계 각국이 바라보는 입장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입장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한국전쟁은 상처이고 아픔뿐이었기에, 이번 회담이 이를 치유하는 계기가 될 것을 희망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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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6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4-27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일로 쓰려고 했는데, 벌써 오늘의 일이네요.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인데, 좋은 소식 있었으면 좋겠어요.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4-27 00:17   좋아요 2 | URL
네 서니데이님 정말 기대가 많이 되네요. 오늘 저녁에는 기대보다 더 좋았던 하루로 기억되길 바라게 됩니다. 서니데이님도 편안하게 하루 마무리 하세요^^:)!

NamGiKim 2018-04-28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한국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이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어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회담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고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서 부모님에게 제가 모은 월급으로 밥사줬습니다. 금강산이 열리고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4-28 17:49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저 역시 어제 눈물이 저절로 나더군요.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을... 저 역시 부모님 댁에 와서 요즘 유행인 냉면을 먹을 예정입니다. ㅋ NamGiKim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NamGiKim 2018-04-2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눈믈 흘린게 아니었군요. 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4-28 18:02   좋아요 1 | URL
^^:) 아마 많은 이들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받았던 많은 부분이 치유되었을 것 같네요^^:)

AgalmA 2018-04-2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국처럼 전쟁팔이 나라도 없죠;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등. 사안에 따라 경중은 있겠으나 경제 이권, 여론 통합, 세계 경찰 훈장 등등의 효과를 매번 노렸던 거 같은데 앞으로는 그게 먹히지 않을 듯(과연). 반미 네거티브 패널티가 많이 쌓여서 더이상은 좋을 게 없죠. 911로 크게 겪어 봤죠.
더 큰 문제는...그 행태를 수수방관하며 용인하는 세계 정세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텐데... 전쟁 자체보다 그걸 제지하는 통제력 상실이 가장 뼈아픈 인간성의 후퇴 같달까요. 폭력과 이익심리도 인간의 큰 욕구(?), 작용(?)이니 인간성이니 퇴보 운운은 긍정성만 바라는 관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성과 인간성이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가장 현저히 보여주는 게 전쟁 같은 사건이죠.

겨울호랑이 2018-04-29 08:33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역사 속에서 미국의 패권은 전쟁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전 역사 속에서 세계대전의 배경을 보면, 인간의 욕심이 그 배경임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생각 역시 하게 됩니다. 자본을 축적하려는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한 아마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에 놓여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깨어난다면,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AgalmA 2018-04-29 09:22   좋아요 1 | URL
오래전부터 전쟁이 인간의 먹고살이에서 중요한 역할이긴 했죠. 근데 이 전술을 활용하는데 미국이 참으로 적극적인... 폭력의 역사로 최근 건국된 영향도 있는 것일까요-_-?

1846년 멕시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징수된 세금 납부를 거절해 감옥살이한 소로 같은 기개를 가져야겠지요!
공부하는 연의야, 너희들이 희망이얌~ 겨울호랑이님 같은 부모들이 있어서 맘이 조금 든든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4-29 11:08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면 미국이 종교의 자유를 찾고자하는 청교도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이야기는 미화된 신화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미국이 걸어온 길이 달라졌어야 했겠지요... 빛바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우리만의 꿈을 이뤄가야겠지요.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우리 아이들의 두 눈속에 담기도록이요. 물론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ㅋㅋ

2018-04-3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30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에 스무 명도 넘게 아픈 아이를 만나 온 지 10여년째. 진료실 문을 조심스레 밀치고 아이와 함께 들어오는 엄마와 눈을 마주칠 때면 늘 가슴 한쪽이 아파 온다. 며칠 못 잔 듯 피곤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퀭한 눈. 거기에는 아이를 걱정하는 불안감과 함께 그 엄마가 겪어 온 좌절의 고통과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 엄마는 또 그 동안 얼마나 전쟁 같은 일상을 견뎌 왔던 걸까. 그 견딤 속에서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몰아세웠을까. (p55)「아이보다 더 아픈 엄마들」중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아토피•천식 안심학교라 학부모 중 많은 분들이 아토피 자녀를 두고 계십니다. 잠을 못 이루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가 지쳐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저절로 들지만, 아픈 자녀를 둔 부모의 고통은 주변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일 것입니다.

최근 이코노미 인사이트 4월호 기사에서는 ‘예민한 부모가 아토피를 키운다‘는 제목으로 아토피 어린이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리플러의 이론에 따르면 스트레스와 산만함,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과민 반응이 질병의 형태로 터져 나올 위험이 커진다. 리플러는 이것이 바로 심각한 아토피성 질환의 증가로 생각한다.(p32)... 리플러의 주장은 최근 활기를 띠는 ‘정신적 측면과 면역체계의 연관성‘ 연구 분야에서 발견된 사실과 일치한다... 오늘날 우리는 심한 스트레스와 피부 질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를 치료에 반영한다면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p32)... 임신 기간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산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천식•아토피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p33) 「이코노미 인사이트 4월호」- 예민한 부모가 아토피를 키운다 -중

기사에 따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같은 선진국에서는 전체 유아 중 최대 15%가 아토피를 앓는다고 하니, 아토피는 대표적인 선진국 질병 중 하나입니다. 산업화, 공업화로 인한 환경 오염과 더불어 스트레스 또한 아토피, 천식 발병의 주요한 요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토피•천식 치료에 사회도 책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라는 이유로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부모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운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개인이 살기 어려운 현대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시작은 개인에게 주어진 짐을 덜어주어야 하는 것부터 출발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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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6 0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동생이 어렸을 때 아토피 피부 질환에 걸려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지금은 증상이 거의 사라져서 무난하게 생활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건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가 동생의 아토피였어요. 아토피 자녀를 둔 부모도 스트레스를 받아요. 자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힘들어 해요.

겨울호랑이 2018-04-26 08:15   좋아요 3 | URL
그러셨군요...아픈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보다 속상한 경우는 많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토피 등 아이가 아픈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cyrus님 동생분께서는 지금은 완쾌되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른 아이들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쾌유되기를 바라 봅니다.^^:)

2018-04-26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6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6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6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6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은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 작업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시키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면서,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p306)... 벤담(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이러한 조합의 건축적 형태이다.(p309)... 수감자에게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 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상태가 만들어진다. 감시작용에 중단이 있더라도 그 효과는 계속되도록 하고, 권력의 완벽한 상태는 권력행사의 현실성이 점차 약화되도록하고, 건축의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권력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되도록 한다.(p311) <감시와 처벌> 中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속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 ~ 1832)가 구상한 판옵티콘에 대한 구상을 언급하고 있다. 중앙에서 수감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하는 '판옵티콘' 구상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 ~ 1950)의 <1984> 속에서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黨)이 만들어낸 '빅 브라더(Big Brother)'와 '텔레스크린'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1. <1984> 감시의 도구 : 텔레스크린


 층계참을 지날 때마다 엘리베이터 맞은편 벅에 붙은 커다란 얼굴의 포스터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은 교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눈동자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아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p10) <1984> 中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p11) <1984> 中


2. <1984> 통제의 도구 : 신어


 어느 한 순간이라도 기호와 의미작용을 대립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착각이다. 의미작용은 기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기호의 역(逆)경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정신에 속한 동일 개념의 두 형태들이며, 이는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로 이 종이를 가위로 자를 수 없는 것과도 같다.(p144) <일반언어학 노트> 中


 프랑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는 <일반언어학 노트 Ecrits de linguistique generale>에서 언어로 대표되는 기호와 의미작용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의미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소쉬르의 이론을 <1984> 속의 오세아니아 지배계급은 받아들인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신어(新語 Newspeak)를 보급하여 대중들을 사상적으로 제약을 가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정책을 택하고 있다.


 신어의 창안 목적은 영사(英社,  영국사회주의 English Socialism)의 신봉자들에게 걸맞은 세계관과 사고 습성에 대한 표현 수단을 제공함과 동시에 영사이외의 다른 사상(思想)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사상이 언어에 의존하는 한, 신어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구어가 완전히 잊혀지게 되면 이단적 사상, 즉 영사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상은 그야말로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무엇보다 비정통적인 의미를 지닌 낱말을 없애고 한 어휘의 제2차적 의미를 삭제함으로써 가능했다... 개념이 없으면 낱말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p419) <1984> 中


 신어는 사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줄이기' 위해서 창안된 것인 만큼 이것은 신어의 창안 목적을 간접적으로 달성시키는 역할을 했다.(p420) <1984> 中


  이렇게 만들어진 언어가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가. <1984> 속에서 언어가 표현하는 실재(實在)는 우리가 생각하는 실재가 아니다. '현재 당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과거의 기록도 왜곡되고, 미래는 통제된 언어를 통해 제약되면서 역시 당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게 된다. 언어를 통한 시간과 공간의 지배. 그것이 빅 브라더에 의해 통제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모습이다.


 실재란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네. 그것도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곧 사라져버릴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불멸하는 당의 마음속에 있지. 당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건 무엇이든 다 진실일세.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는 실재를 볼 수 없네.(p347) <1984> 中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모든 기록은 폐기되거나 날조되었고, 책이란 책은 모두 다시 쓰여졌으며, 모든 그림도 다시 그려졌어. 또 모든 동상과 거리와 건물에는 새 이름이 붙었고, 역사적인 날짜마저 모두 새롭게 고쳐졌지. 물론 이런 작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어. 한 마디로 역사는 정지해 버린 거야. 이젠 당이 항상 옳다고 하는 이 끝없는 현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p220) <1984> 中 


  1940년대 한 지식인이 그린 40여년 후의 미래 모습은 이처럼 음울했고, 우리가 피해야할 미래로 생각되어져 왔다. 시간적으로 1984년이 지나가고,  1980년대 말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1984> 속의 미래는 마치 '빗나간 예언'처럼 생각되어져 왔다. 그렇지만,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1984> 속의 통제받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된다.


 <미션 임파서블 Mission Impossible>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술을 중국 기술자들이 이미 만들어낸 것이다. 새로운 감시도구인 보행인식 시스템은 대상과 50m 떨어진 거리에서도 작동하며, 얼굴을 가려도 아무 소용이 없게 한다.(p36)...중국에 디지털 붐이 형성된 것은 최소 5가지 요소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한 통제, 수년간 쌓인 대기업의 자산, 데이터 수집과 처리에 대한 정부와 대기업의 적극성, 제조업 기반, 서구권에선 회의론이 커지는 새로운 기술을 열정적으로 환영한 대중이다.(p37) <이코노미 인사이트 Economy Insight> 2018. 4월호. <디지털 레닌주의의 빛과 그림자> 中 



 [사진] 5G와 사물인터넷(출처 : 데이터넷)


  5G로 연결된 사물인터넷을 통해서 일상생활이 연결된다면, 어느 특정한 불온한 개인을 감시하고, 그의 생활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물 인터넷'이 과연 편리한 생활을 가져다 주는 도구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최근 Facebook의 개인정보 유출 스캔들을 보면서, 우리는 편리해진 생활만큼 사생활 보호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1984> 속에는 이처럼 미래에 대한 우울한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에 따라 윈스턴과 줄리아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을 통해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소설 속에서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큰 그림은 '우울한 미래'가 되겠지만, 독자들이 가진 여러 배경 지식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과 인류(人類)의 영원한 과제인 '집단-개인'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고전(古典)이라 여겨진다.


 PS.<1984>를 읽은 후 드는 의문. 반당(反黨) 단체의 리더인 '골드스타인'이라는 존재 또한 당이 만들어낸 실재(實在)라는 이름의 허상(虛像)은 아닐런지... 골드스타인 속에서 우리 나라의 북풍(北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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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23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테크닉의 발전이 과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네요.

페이스북 사태는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바로 광탈해 버렸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4-23 15:51   좋아요 1 | URL
보이지 않지만 이미 우리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전자파들이 마치 오랏줄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요즘입니다. 저는 아직 페이스북 탈퇴는 하지 않았습니다만,페이스북만의 문제일까요... 이제는 제도에 대한 규제가 다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8-04-23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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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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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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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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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4 2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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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의 <팡세 Pensees>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일 것이다. 많은 경우 위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理性)을 가진 약한 존재'로 표현할 때 이 문장을 인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파스칼이 <팡세>를 통해 목적했던 바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팡세>를 통해 파스칼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인간의 본성(本性) : 본능(本能)과 이성(理性)

 

 파스칼은 본능과 이성이 인간의 두 본성이며, 이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 또는 사유(思惟)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사유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사유와는 조금 다르다.

 

 216-(344) 본능과 이성, 두 본성의 표시. (p115)

 

 162-(94)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없애지 못하는 자연적인 것도 없다. (p93) <팡세> 中 

 

데카르트 비판 : 사유의 한계

 

 232-(365) 사유(思惟).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사유는 그 본성으로는 경탄할 만하고 비길 데가 없다. 그것이 멸시받을 만하다면 무엇인가 야릇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유는 그보다 더 가소로운 것이 없을 만큼 결함을 가지고 있다.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p119) <팡세> 中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 명제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사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된다. 반면, 파스칼에 있어 사유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불과할 뿐이며, 파스칼의 사유 끝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p18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中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p137) <팡세> 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비판 : 회의(懷疑)주의 비판

 

 이와 동시에, 파스칼은 몽테뉴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역시 비판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은 자연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246-(434)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p126) <팡세> 中 

 

 파스칼의 몽테뉴 비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습관'에 대한 관점이다.  몽테뉴는 기존의 습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파스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 속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습관이 가지는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일이라고 믿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얼마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인가!(p128)... 습관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맹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p129) <수상록 Les Essais> 中

 

 241-(93) 사라질지도 모를 이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왜 본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 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p123) <팡세> 中


  245-(97)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이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자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p132) <팡세> 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생각(또는 사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갈대와 같지만,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에,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의 길이다.

 

 217-(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p115) <팡세> 中

 

 391-(347) H.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즐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p213) <팡세>

 

 중용(中庸) 그리고 신앙(信仰)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했을 때, '올바르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중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중용(moderation)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위치는 '한 점'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이 안에서 두 본성인 본능과 이성이 결합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이 점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58-(381)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p51) <팡세> 中

 

 289-(378)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한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 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p153) <팡세> 中

 

 462-(862)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웃을 때, 울 때 등등. Responde. Ne respondeas.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결합한 데 있다.(p241) <팡세> 中

 

 409-(433)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이해한 다음, 한 종교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위대와 비속을 알고 또 이것들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종교가 이것을 알았는가.(p222) <팡세> 中

 

 <팡세>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절대 진리임을 끌어내고 있다. 큰 줄기만 요약하면, 뛰어난 수학자인 파스칼의 '신 존재 증명'이 <팡세>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읽기에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인들이 신(神)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팡세>를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몽테뉴 사망한 해인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는 것이 그냥 생각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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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21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기분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2018-04-2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8-04-21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으면서 신. 인간. 존재. 사유. 습관.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바가바드 기타 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신다.‘
참 신기하죠? 강철 쇠사슬도 아니고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 이라니..

겨울호랑이 2018-04-21 22:29   좋아요 1 | URL
쉽게 끊어지는 명주실로 이어진 관계라면 조심스럽고 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곧 끊어지겠군요. 끊임없는 성찰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말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8-04-2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근간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큰 줄기가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주의자 파스칼이 ‘회의주의‘를 비판한 건 그런 연장선이라고 봐야할 거 같아요.
사실 ‘이성‘의 본질적 특징도 ‘믿음‘이잖아요^^;

겨울호랑이 2018-04-22 12:35   좋아요 1 | URL
그렇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해봤네요. 그런 면에서도 과학과 신학은 함께 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AgalmA님 덕분에 더 많이 배워갑니다. ^^:)

AgalmA 2018-04-22 12: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게 기본규칙이잖습니까^^; 주류과학이 되어서 뻗댈 때가 있지만 이건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 문제인 걸 테고요ㅎ;;

겨울호랑이 2018-04-22 12:40   좋아요 1 | URL
또한, 정치에서 ‘프레임‘으로 규정되는 것들과 과학에서 ‘패러다임‘으로 규정되는 것 모두가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인간 또는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oren 2018-04-2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와 파스칼을 두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주 재치있는 말을 남겼더군요.

˝몽테뉴는 인간의 슬픈 존재 조건을 흥미, 유머, 관용을 가지고 살폈고, 재치는 번뜩이지만 유머는 없는 파스칼은 전율과 절망 속에서 인생을 쳐다보았다. 그리하여 계시 종교의 품안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런 절망에서 가까스로 구제되었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작을 쓰기 위해 준비한 노트가 <파스칼>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니체가 파스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님의 페이퍼 덕분에 니체의『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파스칼‘과 ‘데카르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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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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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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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해 종교란 정상적인 인간이 만든 산물이며, 인간이 더욱 종교적일수록, 무한한 운명을 확신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진다.······ 인간은 선할 때, 미덕이 영원한 질서와 조응되기를 바란다. 사심 없는 태도로 사물을 관조할 때, 인간은 죽음이 불쾌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장 잘 보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귀와 습관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문장 옆에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내 최초의 분노를 적어넣었다. ㅡ 마지막 분노에 이르러 나는 거꾸로 뒤집힌 진리를 담은 이 문장이 심지어는 좋아지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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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도대체 현대 철학 전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데카르트 이래 ㅡ 사실은 그의 선례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에 대한 반항에서 ㅡ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ㅡ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든, 반(反)그리스도교적이다 :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ㅡ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간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ㅡ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은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ㅡ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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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

그리하여 교회의 가치평가를 위해 마침내 ‘탈세속화‘, ‘탈관능화‘와 ‘보다 높은 인간‘이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하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신 같은, 비웃는 듯하고 무관심한 눈으로 유럽 그리스도교의 기이하게 고통스럽고 조야하기도 하며 또한 섬세하기도 한 희극을 조망할 수 있다면, 끝없이 놀라워하며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결국 인간에게서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를 만들려는 의지가 18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왔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가 정반대의 욕구, 즉 더 이상 에피쿠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해머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인(예를 들어 파스칼)이 그런 것처럼 이렇게 거의 자의적으로 인간을 퇴화시키고 위축하게 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 한다면, 그는 여기에서 분노와 동정, 놀라움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 그대 바보들이여, 그대 오만하고 불쌍한 바보들이여, 그대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손에 맞는 작업이었던가! 그대들은 그대들에게서 무엇을 끄집어 냈던가!˝ ㅡ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이었다.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 ㅡ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 즉 마침내 왜소해지고 거의 어처구니없는 종족, 무리 동물, 선량하고 병들고 평범한 존재가 육성될 때까지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그들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62절


겨울호랑이 2018-04-30 07:45   좋아요 0 | URL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종교와 관련한 위의 내용이 있었군요!^^:) oren님 덕분에 유명하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와 연결하여 읽으면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와 ‘노예-주인‘의 내용이 파스칼과 연결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oren님 항상 좋은 내용과 과제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