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겠다. 너에게 너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운명의 여신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p70) <철학의 위안> 中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AD 480 ~ AD 524)는<철학의 위안 The Consilation of Philosopy>에서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아간다. 보에티우스가 스콜라(Scholar) 철학 선구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을 읽을 때 느낀 즐거움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철학의 위안>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용 안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려 한다.


 <철학의 위안>은 여러 가지 의문들 - 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정말 그가 기독교였다면 투옥과 죽음에 임박한 시간에 마땅히 그의 가장 큰 위안이 되었어야 할 신앙에 대한 언급이 어찌하여 <철학의 위안> 속에 전혀 없는가? -로 둘러싸여 있다.(p14) <철학의 위안> 서문 中


 <철학의 위안> 속에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며, 이들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플로티노스(Plotinus, AD 203 ~ AD 270)의 <엔네아데스 The Enneads>의 철학을 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 逆說)이며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행운보다 불운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행운은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소로 너희를 속인다. 반면에 불운은 변화함으로써 그 참된 모습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하다. 행운은 인간을 속이지만 불운은 인간을 깨우쳐 준다(p91) <철학의 위안> 中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런(고통스러운) 것들이 그때마다 그들의 경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 그러면 고통이란 어쩌면 우리 영혼의 나약함과 관련된 것이리라.(Enn, I 4, 8)


 <철학의 위안>에서는 불운이 행운보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물과 권력은 '결핍'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들로 인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위안>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일단 손에 넣게 되면 바랄 나위 없는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좋은 모든 것들의 완성이며 자신의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행복일 수 없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다면 여전히 그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상태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애쓰는 목표임이 분명하다.(p98) <철학의 위안> 中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베르길리우스' 나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역할을 <철학의 위안>에서는 의인화된 '철학'이 수행한다. 그리고, 여신 '철학'은 화자인 보에티우스를 산파술을 통해 행복의 정의로 끌고 나간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神)은 선(善)하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신보다 더 선한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신의 선함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이성(理性)은 신이 그토록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p133) <철학의 위안> 中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 self sufficient)인 인간, 강한 인간, 존경 받기에 합당한 인간, 영예롭고 유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행복입니다... 자족, 강함, 존경, 영예, 유쾌는 모두 같은 것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이 알고 있습니다.(p129)... 만물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초석(礎石)이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p130) <철학의 위안> 中


  <철학의 위안>에서는 결핍이 없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선은 바로 신(God)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결국, <철학의 위안>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신(神)=선(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결론의 뿌리를 <엔네아데스> 이전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향연 Sympo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위안>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영혼을 신(神)과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게끔 이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Enn, I 6, 6)...  참된 지혜가 존재요, 참된 존재가 지혜인 셈이다... 이때 지혜는 [많은] 이론적인 것들로부터 종합해 낸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다.(Enn, V 8, 5)


 우리는 이미 신과 행복이 하나이며 동일한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神)은 선(善) 그 자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p138) <철학의 위안> 中


  그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인간에게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건 만일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삶에서일 겁니다.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면서 살 때 말입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보는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즉 인간의 살이나 피부나 다른 가시적인 허접스레기에 물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단일 형상인,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를 그가 직관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떠하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까?(211 d ~ 212 a) <향연> 中


 다음으로 <철학의 위안>은 중세철학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우리는 이를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모놀로기온 Monologion>의 신 존재 증명 앞 단계에서 하나의 선(신)을 가정하는 논증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遵主聖範 De Imitatione Christi>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육체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정신의 이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무수히 많은 선(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 다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선한 것 unum aliquid, per quod unum sint bona quaecumque bona sunt 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각 사물들마다 다른 선이 존재하는가? <모놀로기온 Op.p.14(p17)>


 <하나>에게는 [자기 바깥에 달리] 선(善)이 없으니, 그 밖의 어떤 것을 원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하나>는 초-선(超-善)으로서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선이니, 물론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참여할 능력을 갖고 있는 의미에서 선이다.(Enn, VI 9, 6)


 모든 조성된 선한 것을 네가 다 가졌다 할지라도 다행하고 복될 수가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느님 안에 너의 모든 복이 있고 모든 낙이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미련한 자들이 무엇이라 하고 어떻다고 찬미한다고 그것이 행복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착한 신자들이 희망하는 그것, 천상적 생활을 하는, 마음이 조촐하고 경건한 영혼들이 어떤 때에 맛보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주 예수여,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하소서. 인간의 모든 위로를 즐겨 사양하는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준주성범 제3권 16장> 中


 이처럼 <철학의 위안>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함께 중세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보에티우스와 그의 저서 <철학의 위안>을 둘러싼 여러 논란(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왜 <철학의 위안>에는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충분히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볼 때, 지질학은 종(種)이 모두 변화해온 것을 뚜렷이 밝혀 주며 더욱이 종은 나의 이론이 요구하는 방법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변화해 왔음을 명백하게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연속되는 지층에서 나오는 화석유물이 서로 시간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는 지층에서 나온 화석보다 훨씬 더 서로 밀접한 유연관계를 갖는 것에 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p457) <종의 기원> 中


 <철학의 위안>을 통해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중세 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철학의 위안>이 '잃어버린 고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만, 이대로 마치면 철학이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아래의 문장을 옮겨본다. 아마도 아래의 문장이 그나마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어느 면에서든 현재 상태에 불만이 전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사(人間事)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사는 결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는 법이며 또한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일도 없다.(p68)... 운명의 여신이 내려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p69) <철학의 위안> 中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1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4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2-17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안, 두려움, 공포도 우리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 감정이죠. 나침반이 동서남북이 다 있어야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인 것을 적대시하며 ‘선‘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싶긴 합니다. 선-악을 나누는 종교적 관점과 사고의 결합이 ‘선‘의 위치를 이리 격상시킨 것도 같고.... 심리적으로도 이익적으로도 ‘선‘이 더 좋게 받아들여지는 건 이해가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일찍부터 음양의 조화를 말해온 동양철학은 참 깊은 혜안이죠.

겨울호랑이 2019-02-17 21:07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고 모든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최고선‘ 이 있다고 하기보다 ‘더 나은‘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2019-03-04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시리즈는 요즘 유치원 원아들과 저학년 아이들에게 인기 좋은 책입니다. 저희 집 아이도 많이 좋아하네요.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중이고, 아내 말에 따르면 학교 도서관에서도 서로 보려고 다툴 정도이니 그 인기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연의가 책을 보자고 많이 졸라 설 연휴에 1권부터 5권까지 사서 같이 읽었습니다. 책 주인공인 엉덩이 탐정이 조수인 브라운과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포맷으로 구성된 책 안에서 여러 추리 소설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탐정과 조수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기본 구조는 ‘셜록 홈즈‘에서 가져왔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의 특성상 엉덩이 탐정은 조금은 더 인간적인 ‘에르큘 포와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매회마다 극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러한 부분은 ‘명탐정 코난‘에서 축구공으로 범인을 잡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여러 탐정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친숙함을 주고, 잔인한 살인 사건 대신 가벼운 사건을 배경으로 하기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런 설정이 아이들에게 다가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야기 전개 도중 미로찾기, 다른 그림 찾기 등 추리적 요소가 아이들 흥미를 가져와 책이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책을 읽어주면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찾기 게임을 즐길 수 읽기에, 부모들 입장에서도 한숨 돌릴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만, 추리물과 게임물의 경우 흥미가 다른 책에 비해 크게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은 부모입장에서는 감안해야 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만, 아이들이 한 번이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좋은 책이겠지요? ^^:) 연의 입장에서 평점을 매기고 이만 리뷰를 마칩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12 0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0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리(天理)의 길은 아주 넒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여기에 두면 가슴 속이 문득 커지고 밝아짐을 깨닫게 되나, 인욕(인욕)의 길은 매우 좁아서 조금이라도 여기에 발을 들이면 눈앞이 모두 가시덤불과 진흙탕이 되고 만다.(p248) <채근담, 수신과 성찰 修省 14 > 中


 손이 가는 대로 골라 잡은 <채근담 菜根譚>을 펼쳐들고 몇 구절을 읽다보니, 위 구절에서 눈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의 성경 구절이 대구(對句)로 연결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고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고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 ~ 14>


 <채근담>과 <성경> 모두에서 추구해야할 가치를 말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다르다. 넓은 길과 좁은 문. <채근담>에서는 하늘의 이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를 넓은 길로 바라본 반면, <성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좁은 문으로 비유한다. 이들이 차이에는 '넓다'와 '좁다'라는 상태에 대한 차이 뿐 아니라, '이곳'과 '저곳'이라는 위치의 차이도 나타난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발 아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걸어가는 길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할 것이다. 하늘의 이치가 지금 이순간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서 하늘의 이치는 미래에 내가 가야할 곳이며,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나와 단절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정리하면, <채근담>에서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인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족한 반면, <성경>의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겨우 하늘의 이치에 닿을 수 있는 존재로 보여진다. 


조금 더 나아가 성경의 위 구절을 유명하게 만든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 ~ 1951)의 <좁은 문> 을 생각해보자.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소설이지만, <좁은 문>에 대한 해석을 조금 옮겨본다.


 <좁은 문>에서 알리사는 사촌동생 제롬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지상적(地上的) 사랑을 눌러버리고 혼자 쓸쓸하게 집을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 알리사의 이 행위는 불륜의 모친에 대한 괴로운 추억과 제롬을 남몰래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따뜻한 애정 등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진짜 원인은 그녀의 신비적인 금욕주의에 있다... 지드는 이 작품에서 비인간적인 자기 희생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츨처 : 두산동아대백과)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쓸쓸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드의 자기 희생 비판이 이같은 관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은 안타까운 사건이 된다. 그렇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그녀 죽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소녀가 쓸쓸하게 죽어갈 때 본 할머니의 환상이 소녀에게 미소를 준 것처럼, 알리사가 죽음의 순간에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신의 모습을 봤다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다 여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알리사가 제롬과 우리를 불쌍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었다면, 성냥팔이 소녀 미소의 의미를 주위 사람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자신을 넓은 길에 놓느냐, 좁은 문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두 문장을 잘 보면 서로 통하는 바를 발견할 수 있다.  <채근담>에서 언급된 넓은 길을 가는 이는 깨달은 자이며, 성령을 받은 자이고, 성인(聖人)이다. 반면, <성경>의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고, 범인(凡人)이라고 본다면, 지금 자신에 대한 긍정(肯定)과 부정(不定)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자기 자신을 어느 쪽에 놓고 살아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Choice)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일일신우일신) - 진실로 날로 새로워져라! 날로 날로 새로워져라! - 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살아간다면 넓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알리사 역시 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사랑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08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8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2-08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채근담』을 보니 그 책을 읽으면서 한자로 된 문장들을 일기장에 부지런히 옮겨 적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자를 거의 일상적으로 썼던 것 같은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벌써 37년 전의 일이네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2-08 12:37   좋아요 1 | URL
oren님의 필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군요! 필사가 고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oren님을 통해 새삼 느낍니다!^^:)

서니데이 2019-02-09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된 책들은 여러번 읽어도 다시 읽으면 새로울 때가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아직 한겨울인가봅니다. 날씨가 차갑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9 16:12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고전이 주는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대한민국 역사」는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해방이후의 현대사를 바라본 책이다. 개인적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뉴라이트 사관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했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역사관에서는 객관적 실증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유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을 역설하는 저자의 역사관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미시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바라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주체가 이 땅에서 성장한 근대문명세력임을 밝히는 저자의 글 속에서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주체로서 중앙아시아, 북간도,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과 중남미와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때문에 이 책의 논조를 찬성하기 어렵지만, 앞에서 말한 바처럼 대중을 대상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이 무엇인가 잘 설명한 점은 인정할만하다.

위에서 말한 저자의 뉴라이트 역사관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는 다른 역사책과의 대조를 통해 다른 페이퍼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요컨대 자유 이념에서 바라 본 역사의 발전은 타협적이며 개량적이며 점진적이며 진화적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를 성찰하면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둡고 부정적이고 정체적으로 비쳐진 대한민국의 역사가 밝게 긍정적으로 달리 해석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렇게 재해석된 우리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p39)

대한민국의 건국은 개항 이후 이 땅에서 성장한 근대문명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성리학의 전통사회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말하였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인간들의 삶의 원리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의미하였다. 그 대전환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사회의 혁명적인 파괴나 재편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회개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사회구조가 그대로 이어지고, 그 속에 성장한 계층이 그대로 지배적 지위를 누려서 신생 국가에 걸 맞는 혁명적 기풍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바로 그 속에 장차 한국인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를이끌어낼 문명의 잠재력이 듬뿍 담겨 있었다.(p147)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mGiKim 2019-02-05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개념은 미국식 반공주의에 국한되어 있다 봅니다. 이들은 항상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합니다. 그들이 해석한 자랑스러움이란 친일파를 앞세워 노동자 농민의 요구를 무시한 것과 유신독재의 역사입니다. 즉 북한이라는 제1의 적이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그런 전쟁의 위협속에서 버텨내 부국강병을 성취했다는 체제우월주의적 셩격이 강하죠.

그리고 이들은 역사라는 학문에서 말아야할 짓을 합니다. 북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며 그럴 것이다 라는 가정을 세우죠. 예를들면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공산화의 길이었다는 논리처럼요.

어떻게 보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상에 빠진거라 볼 수 있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5 14:02   좋아요 1 | URL
^^:) Nam Gi Kim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역사가 개인이 정치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역사가의 사명에서 어긋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사관뿐 아니라 독자의 역사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Nam Gi Kim 님 미국은 잘 다녀오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NamGiKim 2019-02-05 14:06   좋아요 1 | URL
네 미국은 잘 갔다왔습니다. 미국 동부(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워싱턴 DC), 캐나다(토론토), 서부(LA, 라스베가스, 센프란시스코, 그랜드 캐년)해서 총 1개월 간의 긴 여행이었죠.

참고로 12월엔 예상치 못한일로 그리스와 터키도 갔다왔습니다. 정말 많이 놀러갔다 왔네요.ㅎ 네 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5 14:24   좋아요 1 | URL
좋은 시간이었겠군요. 저도 오래전에 2개월간 미국 배낭여행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레이 하운드와 암트랙을 타고 다녔었는데 ㅋ Nam Gi Kim님 남은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NamGiKim 2019-02-05 14:29   좋아요 1 | URL
전 메가버스 이용했죠.ㅎ

레삭매냐 2019-02-0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랑케 실증 사학의 맹신적인 후예들이
우리나라 사학계를 망쳐 놓은 게
(어떤 면에서 보면 식민사학의 영향
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추의 한
이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 사관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호랑이님도 메리 설날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2-07 13:44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민족주의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과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현대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Joony2 2023-07-31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오래된 글이지만 혹 답장을 받을까 싶어 댓글 답니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입문자인데요. 부담이 안 된다면,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인 현대사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서중석 교수님에 대해서 좌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이영훈 교수의 이 책을 사볼까 했더니, 역시나 망설여지네요. 워낙 논란이 많은 분이라..

겨울호랑이 2023-07-31 09: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재웅님 부족한 글을 읽고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처럼 역사에 역사자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객관적인 역사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중석 교수, 이영훈 교수 책을 모두 읽고 이재웅님께서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그 전에 어느정도 기준을 마련한다면 가볍게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를 읽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큰 무리없이 사실 관계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쓴 책이라 이 책으로 큰 틀을 잡으시고, 세부 내용에서 보다 깊게 들어가신다면 좋은 독서라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재웅님께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비전공자분이시라면 이렇게 보는 것도 좋겠지만, 만약 전공자분이시라면 학계분들의 추천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참고만 하시고, 다른 분들의 의견을 모아 좋은 독서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

young026 2023-09-29 21:31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어떨까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1062700

겨울호랑이 2023-09-30 08:27   좋아요 0 | URL
제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를 읽어보지 않아 책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책 소개를 보니 작가들이 생각하는 주요 지점에 대한 상반돤 관점을 안내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논점을 정리하신 후 통사를 통해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라 여겨집니다. 하나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관점에서 역사를 보시려고 하는 노력을 응원합니다. 좋은 독서 되세요!
 

「신사와 선비」의 책 표지는 책 내용을 잘 표현한다. 당당한 표정을 짓는 옆 모습의 신사와 용맹한 기사 그 사이에 백과사전이 한 편에 있다면, 반대편에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선비의 뒷모습과 붓이 그려져 있다. 앞 모습의 서양문화와 뒷 모습의 선비. 이 표지는 저자의 역사관을 잘 드러낸다.

「신사와 선비」에서 저자의 입장은 명확하게 아래의 문장들로 요약된다. 중세 서양의 기사도 정신은 근대 신사도로 변화, 발전되어 현대선진유럽 문명의 정신근간을 만들어냈다. 반면, 우리 선비정신은 성리학에만 치중해서 합리성을 잃어버렸고 그 결과 근대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동서양 문화 차이라는 것이 주요 골자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타당한 것인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신사와 선비」에서는 기사도 정신의 기원을 난폭한 기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보급되었다고 말한다. 즉, 기사도 정신이 기사의 윤리로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다. 외부에서 강제된 이 윤리는 결코 기사들의 정신을 대표하지 못함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에서 자행된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세를 통해 기사도 정신은 결코 기사들의 사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사도 정신에 의미가 부여된 것은 중세 이후 문학의 보급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 과정에서 기사도 정신은 낭만적으로 미화되었다. 결국 기사도 정신은 실패한 사상이었다. 오히려, 기사도 정신의 실패로 기사로 대표되는 군사력과 과학, 자본(신사도), 종교가 결합하여 서구 문명의 진출이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표출되었다면, 기사도와 신사도는 계승관계가 아닌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에 반해 선비 사상은 조선 유교 사회의 지배 사상이었다. 성공적으로 사상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에 조선은 반세기를 존속했고,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조선의 비극이었음을 놓고 본다면 문제는 선비사상이나 기사도의 내용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책의 내용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상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사회가 수탈당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는 편이 더 설득력있지 않았을까. 여기에 ‘우리가 근대화할 역량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까지 던지자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니, 근대화와 관련된 한 문장만을 짚도록 하자.

이 나라는 사실상 선비공화국이라서 자발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p234)

「신사와 참배」에 나오는 위의 문장은 저자의 역사관을 잘 나타내는 한 문장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일이 너무 커지니 여기서 일단 논의를 멈추겠지만, 개인적으로 저자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 기회에 밝히는 것으로 일단 미룬다. 다만, 「신사와 선비」는 이러한 단점에도 블구하고 역사의 단편적인 사실을 핵심적으로 잘 제시한하고 있으며 이는 책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신사와 선비」는 책의 장점이 단점을 덮을 정도는 못된다는 개인적인 의견과 함께 이번 리뷰를 마친다.





돌이켜보면 유럽인들은 중세 이후 수백 년동안 많은 역사적 경험을 축적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기사도와 신사도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계승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과 기독교 신앙의 영향 아래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웠다.  그리하여 현대사회는 시민의식(Consciousness)이라 불리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내가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서구 시민사회는 여러 가지 역사적 경험을 겪으며 점차 ‘저항적 존재‘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현대 시민사회의 미덕으로 부각된다. 21세기 서구의 시민권(citizenship)은 대략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p124)



 조선은 책으로 일어났으나, 책으로 망했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지식의 독점이 깨지고 각계각층이 선비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오직 성리서만을 고집하는 구태의연함 때문에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안타깝지만 19세기 말의 우리 역사는 이렇게 평해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p205)

유헙의 최상층 지배자들(왕과 교회의 최상층 사제들)은 기사들의 난폭한 행위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사회질서가 혼란에 빠지면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로마교황청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황청은 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하달했다... 교황청의 거듭된 요구는 점차 기사들의 행동강령으로 자리 잡았다...(p3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05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5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2-07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미쿡으로 선비 문화 견학하러
가신 어느 의원 나리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민중들의 삶과 괴리된 성리학 질서를
신봉한 조선 선비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7 13:46   좋아요 1 | URL
바른 선비상을 세우고 본받아야하는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모습 또한 문제라 여겨지네요...

cyrus 2019-02-10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교, 선비만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단조로워요. <신사와 선비>를 안 읽어서 판단하기가 이르지만, 중세 기사도 정신이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껄끄럽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문명의 중심은 늘 남성이었다는 점과 주변부의 여성이 문명 발달에 기여한 일을 은폐하기 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0 17:51   좋아요 0 | URL
cyrus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물론 과학에서 모형화가 단순화, 추상화의 과정을 거치는 작업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이 책에서 변수 설정이 잘 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사를 남성과 여성을 기준으로 하는 관점에는 제가 익숙하지 않아 쉽게 말하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