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즉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실 전쟁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조건들이 처음으로 전쟁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_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中


 1910년대 후반 조선인 지주와 상인의 자본 축적과 여기에 힘입은 무역회사 설립 붐이 제1차 세계대전 전쟁특수와 이것이 촉발한 물자부족과 가격 폭등, 투기라는 식민지 본국 일본 경제와 동일한 시스템의 작동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1920년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후 불황 도래'의 상황에서도 재차 확인이 가능하다.(p34)... 갑작스럽게 전후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회사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규모의 손실이 단기간에 발생한 것은 선물 투기 때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37


 조선에서도 전 세계적인 독감 유행 양상과 비슷하게 1918년 3월에 처음 독감이 발생해 1918년 9 ~ 11월까지 두 번째 유행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세 번째 유행은 1919년 1월부터 봄까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p50)... 1919년 당시 도별 인구수를 통해 1,000명당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식민지 조선 전체에서도 1,000명당 441명의 환자와 8.2명의 사망자가 나와 1918년 독감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56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에서 보여지는 1919년 전후 사회상은 극심한 혼란 그 자체였다. 1918년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의 유행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의 종결로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 불황은 식민지 조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특수는 조선인 지주와 상인 등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일부 일본의 정치, 사회 세력이 3.1운동의 원인으로 인정한 이른바 '무단통치'에 의한 억압과 차별은 조선인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도 성장시켰을 것이다.(p42)... 물론 (노동자의) 명목임금은 올랐다. 그러나 전쟁특수와 함께 가파르게 상승한 물가는 명목임금의 상승을 상쇄한 것을 넘어서 실질임금을 줄였다. 결국 조선인 내부에서도 전쟁특수는 부의 격차를 키웠으며, 폭등하는 생활물가는 식민통치에 대한 기층민의 분노를 가중시켰을 것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43


 비교우위(比較優位)에 있는 일본 본토는 제조업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상업 자본이 발달하게 되면서 조선의 경제는 외형상 성장한 듯 보였다. 그렇지만, 명목소득은 증가하였으나,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하는 화폐환상(monney illusion) 현상이 일어나 중산층은 붕괴되고 소득의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 자본가들은 산업자본가로서의 성장을 바랬으나, 일본 본토의 이익을 우선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조선인 자본가들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경제적으로 전쟁특수로부터 소외된 하층민(프롤레타리아)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조선의 자본가들(부르주아) 모두 불만을 갖고 있는 상황. 마치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삼부회의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상황이 1919년의 식민지 조선 사회 모습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조선총독부에 보호장려책을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인 자본가들은 국가의 보호장려책이 산업 진흥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즉, 산업자본가로의 성장이, 특히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국가적 보호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p128)... 아무리 조선인 자본가들이 보호장려책을 요구해도 조선총독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921년 개최된 조선산업조사위원회, 1923년 이입세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관세 개정 등의 사안에서 잇달아 보호장려책의 관철이 무산되자, 조선인 자본가들은 물산장려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중의 자각에 의한 사회적 경제운동을 통해 조선인 경제를 진흥시키려는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129


 여기에 더해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1918년 스페인 독감(Spain Flu)가 닥치면서 사회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 내에서도 조선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욱 심했는데, 조선총독부의 방역 실패와 조선인에게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은 민중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일본이나 타이완의 독감 방영 활동과 비교해도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방역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특히 일본과 타이완에서 시행되었던 예방접종이나 마스크 보급 같은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p66)... 또한 조선에서 독감으로 인한 환자와 사망자가 많은 것을 조선인들의 관습과 미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방역당국에서는 조선인들의 환자 발생이나 사망률에 대해 조선인들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했으며, 이러한 책임 전가는 독감에 대한 방역당국의 소극적 대응과 더불어 방역당국에 대한 불신 및 불만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70


 이처럼 식민지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경제불황과 대규모 전염병 유행이라는 위기를 맞은 조선 사회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생각하며, 과거를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잃어버린 서러움과 함께 더 열악해진 삶의 조건이 이들을 만세 현장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3.1 항쟁의 구호 안에는 추상적인 이념뿐 아니라 민생(民生)에 대한 외침의 의미도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를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 ~ 1968)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 <조선의 귀신>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의 민간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이로 인해 조선이 근대화될 수 없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수백 만의 신(神)을 믿는 신도(神道)의 나라 일본에서 우리 나라를 미신을 믿는다고 폄하하거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일왕을 절대군주로 만들었던 나라에서 근대화를 말한다는 것 모두가 가소롭기 그지 없다. 무라야마 지쥰이 조선의 민속을 잘 정리해 준 것은 고맙지만, 민족 문화에 대한 평가는 사양하게 된다.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라는 말은 적어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단어는 아닌 까닭이다.


 조선의 민중은, 옛부터 그들의 생활에 작용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자의 존재를 믿어왔다. 이는 조선의 민간에 예나 지금이나 천지자연 내지 목석충어 木石蟲魚의 정령이 모두 인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귀신신앙의 강고한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이 귀신에 대하여 주력을 미치므로써 그 힘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무격 巫覡의 활약이 성하였으며, 또한 널리 보급되어 왔다... 조선의 민중은 이렇게 점복과 연계하여 그 긴 사회생활을 영위해왔고, 이로써 점복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강력한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대개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이 기력이 성하지 못하므로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숙명관의 인생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닐까.... _조선총독부촉탁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조선의 점복과 예언>


 일본에서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도 천황이 입법권을 위임할 수 있다고 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요컨대 국가 주권을 인민이 갖거나 군주와 인민이 나누어 가진 서구 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천황이 유일한 주권자이므로, 제국헌법 제정 당시 영토가 아니었던 내지 이외의 영토에 헌법을 적용해 그대로 통치할지 말지는 제국의 주권자인 천황의 의사 표명에 달렸다는 것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p140





 



1910년대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철도 및 기타 사회기반시설을 정비하고, 육지면/소/쌀/누에고치의 개량에 착수하는 등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920년에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급속도로 진행된 일본의 공업화에 따라 급증한 도시 노동자계급에게 저렴한 식량을 공급하고자 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4 공간과 사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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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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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 19: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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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 3.1운동 100주년 총서 4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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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에서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배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일본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전쟁특수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게 경제호황인 상황에서 이미 1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독립을 외칠 수 있었을까? 또한, 세계적인 질병의 유행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낸 직후 상황에서 거대한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인식된 1910년대 전후 한국사회는 농토개혁으로 빼앗긴 농민 또는 지식인/학생들의 활동이 거의 전부지만, <3.1운동 100년 4 : 공간과 사회>에서는 전쟁특수로 급성장한 상업자본과 도시의 노동자 역할에도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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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1번째 주제는 위기(krisis)다. 한자로 위기(危機)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합쳐진 의미라면, krisis 역시 이 안에 위험과 기회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다만, 이것은  krisis의 세 가지 해석 중 하나인 신학적 해석에 따른 것이다.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위기'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위험'을 통해서 얻어진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이 된다.


 다가오는 위기 Krisis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삶으로의 해방을 보장하는 은혜의 확신 속에서 선취된다. 신의 심판이 예수의 고지 告知를 통해 이미 저기에 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긴장 속에서 기대 지평이, 즉 다가올 역사적인 순간을 신학적으로 특징짓는 기대지평이 그려진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18


 이러한 신학적 해석 외에도 위기 krisis를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올바름과 통치질서를 조율하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법률적 해석, 환자의 완치에 따라 위기 krisis의 성격을 규정하는 의학적 해석등이 역사 안에서 교차하고 있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병의 진행에서 규칙성을 진단하려면, 발병일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위기 Krise가 완치로 귀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들은 완전한 위기와 재발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위기를 구분했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19 


 이처럼 '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중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단연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1729 ~ 1797)과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이다. 각각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과 <상식, 인권 Common Sense, Rights of Man>을 통해 혁명에 대한 논쟁의 전형을 코젤렉은 '위기 crisis'에서 찾는다.


 '위기'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진단과 예측적 기능은 페인과 버크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진단 내용과 기대와 관련해서 그 둘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버크는 의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페인은 신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세계사적인 대안들을 해석 내지 제시할 수 있는 '위기'의 새로운 의미론적 특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 개념은 공통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그러나 서로 대립적으로 적용된 투쟁 개념 Kampfbegriff이 된다.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6


 최후의 심판 이후 얻어질 구원에 대한 희망이 '신학적 해석'이라고 했을 때, 혁명(革命) 이후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의 붕괴와 새질서의 도래를 전망한 것이 페인의 예측이라면, 혁명 이후 정립되는 새로운 질서가 안정궤도에 들어선 후 혁명을 평가하는 '의학적 해석'은 버크의 것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페인은 진보적 입장에, 버크는 보수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코젤렉은 '위기'라는 단어를 통해 이들의 사상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은 '위기 The Crisis'라는 표현을 자신의 잡지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1776년부터 1783년에 일어난 사건들에 도덕을 강제하는 도덕을, 즉 덕과 부덕, 자연법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부패한 전제정치 사이에 필요한 도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추세들이다."... 식민지의 붕괴는 그에게 있어서 단순히 정치/군사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사적인 심판이 실현된 것이었다. 독재의 몰락, 생지옥에 대한 승리... 위기는 더 이상 혁명의 전조가 아니다. 페인에 있어서 그것은 미국혁명을 통해 실현됐으며, 미국혁명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전무후무한 특징을 획득한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3


 버크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페인이 주문 呪文한 동일한 현상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버크는 종교의례처럼 물려받은 모든 사회 조건들과 정치 규칙들을 파괴하는 유럽 내전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5


 코젤렉의 개념사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비로소 자리잡혔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12권은 <혁명 Revolution>이다. 코젤렉의 개념사를 읽다보면, 개념어가 의미를 확장하면서 최초의 의미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의미마저도 흡수하며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때로는 상충되는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담여 있는 모순된 상황. 마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언어 안에 녹아든 것과 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근대사의 극심한 혼란을 간접적으로 나마 실감하게 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12권에서 논의되는 '혁명'은 '반혁명'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서, 11권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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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10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위기는 선택 (받는)을 통해 기회이군요
상평형에서 상전이의 그 때로도 볼 수 있고요

겨울호랑이 2021-03-10 00:25   좋아요 1 | URL
이번에 개념어 사전을 통해 crisis를 위기로 번역한 것에 몇 번을 감탄했습니다. 정말 의미를 잘 살린 것 같아요.^^:)

초딩 2021-03-10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한, 신 중심에서 인본으로 가면서 그 선택당함이 선택함으로 태가 바뀌어 해석해서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10 00:26   좋아요 1 | URL
^^:) 초딩님 말씀처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프랑스 <보편백과전서 Encyclopaedia universalis>의 1973년도 네 번째판의 광범위한 ‘근대성Modernite‘ 항목은 ‘근대적‘ 개념의 세 번째 의미가 언어규범 속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해준다.
이 항목은 마지막 현재로 우리의 근대성을 과거와 질적인  단절을 통해  규정하는  작업을  시도하지  않는다. 근대성은 오히려 운동 범주로, "변화에 대한 표준적인 도덕 morale canonique du changement"으로 정의된다. 변화의 필연성은 미래를 향한 과도기로 일시적인 현재에 대한 의식의 결과이다. 이러한 의식은 문명 타입의 토대로 전통에 대한 순응과 정반대로 대치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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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9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정말 중요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태반이 이 중요한 행복의 요소를 매우 불완전하게 향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접근이 아예 봉쇄되고 있다. 그런 것이 없다 보니 많은 여성들의 삶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성공하는 모든 남성들의 삶 뒤편에는 실패에 신음하는 여성들의 삶이 있다. 사회가 아직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그와 같은 실패가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사회가 그런 실패를 더 키워서는 안 된다. 부모는 무지하고 젊은이들 자신은 경험이 부족해서 또는 마음에 맞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외부 기회가 없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수많은 남성도 마지못해 그런 일을 하면서, 결국 무능한 존재로서 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_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中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은 <여성의 종속 The Subjection of Women>에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여성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남성에게도 좋지 않다는 점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어떤 근거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가?


 먼저 사회 전체적인 불이익 문제는 <여성의 종속>에서 인류의 절반이 자신이 불행하다는 감정을 갖고 산다는 것이 사회 전체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관점에서 설명된다. 또한 남성에 대한 불이익의 경우 여성의 불평등은 자신의 덕성(德性)에 해롭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점을 말한다. 간략하게,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능력이 부족한 남성의 지배를 받는 부조리한 상황은 결국 그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에 기반한 밀의 주장의 근거는 대체적으로 추상적인 윤리 위에 놓인다.


 이에 반해,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은 <자본론 Das Kapital>을 통해 남여간의 불평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산업자본재의 발달로 노동의 난이도가 낮아지면서, 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어린이로 대체되는 과정은 '동일임금 동일노동'이라는 원칙이 깨졌을 때 생겨나는 중산계급의 붕괴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남여 간 임금격차의 불평등 문제가 어떤 결과를 갖게 되는가는 <자본론>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저렴한 노동력(여성)이 있다면 왜 굳이 남성을 써야 하는가? 결국 끊임없이 실질임금 하락의 상황에 몰린다는 것이 <자본론>이 주는 교훈일 것이다.


 밀과 마르크스가 사회를 바라보는 접근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은 각기 다른 방법을 통해 불평등 문제의 현실 인식과 개선방향을 조명이라는 큰 틀에서는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불평등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시기적으로 하루 늦었지만, 어제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불평등의 문제가 직접 당사자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우리의 문제임을 생각한다. 당장 남성들의 어머니, 아내, 자매, 딸로서 관계를 맺는 이들이 불행하게 느낀다면 가족으로서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월평균 가구 소득이 줄어든다는 현실적인 문제까지 들지 않더라도 불평등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 뿐 아니라, 연령,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등 여러 문제로 차별받는 이들이 사회에 없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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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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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3-09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에서 밀이 말한 ‘행복=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추구’는 ‘공리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의 전형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결론이 마르크스와 같을지라도 본질은 크게 다를 수 있다고 생각듭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09 19:36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밀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생존에 대한 처절함보다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 기록은 처절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에서 다소 이론적이고 당위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지향해야할 평등과 불평등이 가져온 비극이 밀과 마르크스의 차이 중 하나는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바람돌이 2021-03-09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의 얘기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감을 받기는 좀 어려워보여요. 그럼에도 머나먼 19세기에 평등에 대한 논의를 저만큼 제기할수 있었던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훨씬 더 와닿지만요.

겨울호랑이 2021-03-09 19:3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밀의 주장을 들으면서 조금은 진부한 논리 전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비참한 마르크스의 기록이 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이론과 현실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