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독립국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단지 오늘날 한 가닥 명맥만이 겨우 이어지거나 없어지는 사이를 맴돌고 있다. 무슨 연유든 실로 조선은 동양의 발칸반도와 같다.(10/214) - P10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개화 정권을 출범시켰다. 남의 나라에서 이른바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16/214) - P16

마지막으로 일본이 역사에서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일본측 기록에는 왜곡된 기술이 많았고, 공식 보고에도 사실과 어긋나게 기록했으며, 신문 보도도 통제했다.(25/214)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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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지러운데 고칠 수 없고 임금이 위태로운데 구제할 수 없으면서 각기 숨어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려고 한다면 어찌 신하라고 하겠소!"(18/102) - P18

"무릇 큰일을 일으키려면 당연히 천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군사가 이기는 것은 화합하는데 있으니 의당 달라서는 안 됩니다."(21/102) - P21

오늘날의 일과 형편은 의로운 사람들이 뒤좇아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비유컨대 호랑이 등을 탄 형세인데 어찌 중간에서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공께서 만약 무리들의 생각과 달리 홀로 돌아가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반드시 다치게 할 것이며, 무리의 마음이 다치고 일이 실패하면 의로운 깃발은 장차 돌아서 공을 지향할 것입니다."(32/102)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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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받드는 유교적 충성심이 깔려 있는 포고문은 바로 민씨 정권을 향한 전면적 선전포고였고 벼슬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는 양반 유림을 향한 질타였다.

황현의 기록은 고부 봉기와 의사 봉기를 묶어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과 난민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동학이라는 종교 주도의 봉기가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농민군의 성격을 잘 규명한 분석으로 눈길을 끈다

이렇게 집강소를 통한 자생적인 신분타파운동, 상하존비 곧 계급의식을 타파하고자 한 예절개선운동은 인권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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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을 가진 왕의 군대는 반드시 하늘의 때와 인간의 사정이 서로 맞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일으키는 것입니다."(31/99) - P31

"위대하신 우(禹)임금은 성인이신데도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보통사람들은 응당 분초를 아껴야 할 것이오. 어찌 다만 편히 놀면서 황당하게 술에 취하여 살아서는 그 시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죽어서는 뒤에 아무것도 들려주지 못하니 스스로 포기할 것인가?"(15/99)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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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야겠구나! 땅은 황폐하고, 백성들의 수는 적으며, 형세는 외롭고 원조는 끊어졌는데, 장차 어떻게 이를 헤쳐 나가랴! 그러나 죽어서 충성과 의로움을 얻는다면 무릇 다시 무엇을 더 찾을 것인가?"(15/91) - P15

무창이 이미 평정되고 나면 그곳에 있는 군사물자를 점거하여 두 주(州)를 진무하며 은혜를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사졸들을 불러들여 품어주고,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향에 돌아간 것처럼 해주시는데, 이러한 것이 여몽(呂蒙)이 관우(關羽)를 이겼던 이유입니다.(21/91)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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