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단히 말하려고 그저 ‘죽음’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만큼 많은 죽음이 있다. 전속력으로 모든 방향에서 달려오는 죽음, 이런저런 사람을 향해 운명이 보낸 능동적인 죽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없다.(p7/339) - P7

알베르틴과의 삶은 내가 질투를 느끼지 않을 때는 권태로웠고, 질투를 느낄 때는 고통스러웠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해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베크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의 방문이 있은 후 그렇게도 행복했던 저녁에 내게 영감을 주었던 그런 현명한 정신에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 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헤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녀에 대해 간직할 추억은, 피아노 페달에 의해 연장되는 일종의 진동과도 같은 이별의 순간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감미로운 이별의 순간을 택하고,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p253/339) - P253

사건이란 사건이 일어난 순간보다 훨씬 거대해서, 그 순간 속에 완전히 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건은 물론 우리가 간직하는 기억을 통해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시간에도 그 자리를 요구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때 우리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겠지만, 추억 속에서도 사건은 변경되지 않던가?(p262/339) - P26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1-08-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7 - 내년 또는 내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죠. 가능한 일인데 말이죠.

P253 -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하는 이별, 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P262 - 살면서 과거의 사건이 마음속에서 많이 변경되는 걸 경험하죠. 특히 제가 특별한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옳았던 게 틀린 게 되고, 틀렸다고 여긴 게 옳았음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다, 입니다.

문장을 잘 뽑으신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6 15:45   좋아요 0 | URL
모든 종교의 기원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군가 말했던 생각납니다. 죽음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결국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죽음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도 연관됨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 속의 사건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 문장이 독립적인 듯 유기적으로 잘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페크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8-06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겨울호랑이님!
자치통감도 매일 읽으시고 이 책도 매일 읽으시고...
어려운 책은 다 읽으시면서 다른 책도 만만치않고, 도대체 이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

겨울호랑이 2021-08-06 16:49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한 번에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정리해 둔 것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긴 하지만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아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무릇 열매가 아직 익지 않았거나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줍는 것은 불과 열흘 차이인데, 그러나 어렵고 쉬운 것과 그리고 맛이 있고 없는 차이가 아주 많습니다."(p25/103) - P25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십니까!"(p26/103) - P26

참군인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 사람 조겸(趙謙)이 모용농에게 말하였다. "석월의 갑옷과 무기는 비록 정예하나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쉽게 격파됩니다. 의당히 급히 그를 공격하여야 합니다."
모용농이 말하였다. "저들의 갑옷은 바깥에 있고, 우리들의 갑옷은 마음속에 있으니, 낮에 싸우면 병사들이 그 겉모양만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므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여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p37/103) - P3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1-08-06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는 듯합니다. 특히 세 번째가요.

겨울호랑이 2021-08-06 15:48   좋아요 0 | URL
자치통감은 비록 기전체로 씌여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끊어짐없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 여겨집니다. 저자 사마천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사기열전처럼 보다 자세히 서술하는데, 여기에 사마천이 생각하는 역사의 교훈이 실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겔 철학의 전통은 욕망을 인정과 연결하면서, 욕망은 언제나 인정을 향한 욕망이고 우리 모두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존재로 구성되는 것은 오로지 인정받는 경험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매력적이며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 관점은 사회적으로 표명된 것이고, 변화할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한 개인에게 '인간됨 humanness'을 부여한 바로 그 관점이 다른 개인에게서는 똑같은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박탈하기도 한다. 인간과 덜된 인간 less-than-human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1


  <젠더 허물기 Undoing Gender>에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의 '욕망'과 뒤를 이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욕망 - 인정' 도식으로부터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보자.

 

 이미 전작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이야기 되었듯, 버틀러에게 '젠더는 수행적'이다. 반복적이며 의례적인 행위를 뜻하는 수행성이 젠더의 특징이라면, 젠더의 원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젠더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얽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원인-결과' 또는 '최초의 관념'을 구분해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치 스피노자의 용어처럼 '자신이 원인이 되는 존재 causa sui'처럼 우리는 '젠더'를 인식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causa sui'는 신(神)의 속성이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면 그것은 젠더의 실제 자체가 그 수행의 결과로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실제적인지 아닌지, 무엇이 인식 가능한지 인식 불가능한지를 지배하는 규범이 있지만, 수행성이 인용 행위를 시작하는 순간 그 규범은 의문시되고 반복된다. 우리는 분명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이런 규범은 인용을 통해 상당히 탈영토화될 수 있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43


 만약, '젠더'가 규범이라면 규범으로서 '젠더'는 중세 '신' 중심의 문화가 중세인을 만들었듯 권위를 갖고 사람들을 만들고, 스스로도 변화될 것이다. A -> A' -> A'' -> A'''... 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드백(feedback) 속에서 점점 사람들에게 '젠더'는 어떤 인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없었던 어떤 인식의 '경계'이 만들어진다.


 규범성이 이중성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숙고해보자. 규범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인도하는 목적과 열망을,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거나 말하게 되어 있는 수칙을, 또 우리가 지향하게 되어 있고 우리 행동에 방향성을 주는 일상적 전제를 지칭한다. 다른 한편 규범성은 규범화 과정을, 특정한 규범과 사상과 이상이 체현된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상적 '남자'와 '여자'라는 강제적 기준을 제공하는 방식을 지칭하기도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25


 젠더가 어떤 규범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이 다가가고자 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젠더는 주체가 인식될 수 있는 장을 생산하는 사회 권력의 형식이고 젠더 이분법이 제도화되는 장치이다. 젠더에 지배되는 실천들과 무관해 보이는 규범으로서 젠더의 이상성 ideality은, 바로 그런 실천들이 다시 제도화한 결과물이다. 이 말은 실천과 그 아래서 실천이 작동 중인 이상화의 관계는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상화 자체도 어쩌면 잠정적인 것으로 탈이상화나 권위 박탈을 겪으면서 문제와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3


  규범은 바로 그 규범의 결과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조건 설정을 통해 현실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가능한 최대치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규범은 그것이 적용된 장 외부에 있지 않다. 마슈레에 따르면 규범은 그 적용의 장 생산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의 장을 생산하면서 스스로를 생산하기도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9


 인식들은 '경계'를 만든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짓는 경계가 생겼다는 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구조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남녀의 이분법 구조 안에서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구조' 이전에 '억압의 대상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 바깥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여성'의 문제가 아닌 '성소수자'의 문제가 본격화된다.


 이런 경계들은 불편해져서 때로 서로 마찰을 빚는 접촉면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계들은 오래 머물 수 있는 딱히 어떤 장소도 아니고, 누군가 차지하기로 택할 만한 주체의 위치도 아니다. 이곳은 무심코 자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비-장소 nonplace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5


 만일 욕망이 바라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젠더도 욕망으로 인해 작동되는 한 인정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인정 도식이 인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허물거나 undo' 아니면 인정을 거두어서 그 사람을 '허무는' 도식이라면, 인정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장이 된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규범에 개입되어 있는 만큼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고, 또 누가 인정받을 만한 인간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의 자격을 정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2


 억압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특정 부류의 주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주인 주체에 대해 가시적 타자, 억압된 타자로서, 어떤 가능하거나 잠재적인 주체로서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억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부터 가능해야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54


 버틀러에게 허물어져야 할 '젠더'가 이분법적 구조라면, 이를 대신해서 새롭게 '젠더'를 존재 be시키기 위한 행위 doing 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평적 관점을 갖는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행위다. 기존의 관념의 틀에서 경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면, 비평적 활동을 통해 '경계'를 살피고, '문화 번역'을 통해 경계 양 편을 모두 '수행적'으로 변화시키며 결국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버틀러가 제기한 '(기존)젠더 허물기'의 해법이다.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탄생이기도 하다.


 내가 행위 doing 없이는 존재 be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행위의 조건은 부분적으로 내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나의 행위가 내게 행해진 행위에 달려 있다면, 아니 그보다도 규범이 내게 작동한 방식에 달려 있다면 내가 '나'로서 지속될 가능성은 내게 행해진 것과 밀접히 관련될 수 있는 나의 존재 my being에 달려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3


 우리가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과정을 따른다면, 존재론의 기본 범주, 즉 인간이 되는 것, 어떤 젠더가 되는 것, 성적으로 인식 가능해지는 것의 기본 범주를 재표명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 번역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는 다시 말해 가능한 에피스테메 episteme의 경계선, 즉 알 수 없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의 경계를 마주할 때 이 범주들이 어떻게 왜 부서져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다... 문화 번역은 경계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통일된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이 아니다. 그보다 번역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양쪽 언어 각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67


 비평적 관점이 없다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동 영역이 시작되는 힘의 관계의 미지성에, 또한 탈정치화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성 critiality이란, 이미 경계가 정해전 영역에 있을 만한 딱히 어떤 위치도, 어떤 장소나 자리도 아니다. 비평적 활동의 하나는 경계 설정 행위 자체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험이나 에포케 epoche 혹은 어떤 의지 행위를 통해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토대 자체의 열개 dehiscence와 파열을 겪어야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4


 동전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이나 저쪽 편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염두에 두는 비평적 실천을 개발하려 한다. 합법화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즉,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89


 전반적으로,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간 느낌을 준다. <젠더 트러블>이 '젠더'라는 범주에 대해 버틀러의 생각을 밝히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의 '젠더'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해야할까. 거칠게 요약해서 '젠더는 만들어진다' 는 수행성을 전편에서 강조했다면 '만들어진 젠더는 경계를 고려치 않는다'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강조되는 수행성이 연극적 수행성이라면, <젠더 허물기>에서의 수행성은 언어적 수행성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수행성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선순환(善循環)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말을 저자는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이라는 범주는 자기 안에 인종 간 권력 격차 작용을 자신의 역사성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범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은 결코 파악될 수가 없다. 인간 범주가 시간 속에 만들어지며 또 광범위한 소수자들을 배제해야만 작동된다는 말은, 그런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범주에 대해, 그 범주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범주에 대한 새로운 표명이 시작할 것임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29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젠더 허물기>은 여러 주제들을 다룬다. 성전환 문제, 게이 결혼 문제, 근친애 문제, 타자의 문제 등등. 얼핏 보면 각각 별개의 문제로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가로지르기'의 주제로 수렴될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주제에서는 경계가 이분법구조, 국가, 상징계로 모습을 다르게 하여 나타나지만, 이들이 갖는 문제는 수행성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듯하다. <젠더 허물기> 안의 현실 주제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을 아는 즐거움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젠더 허물기>의 전체적인 얼개를 살피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라캉은 이폴리트의 공식을 재해석하면서 다의성을 만들기 위해 소유격을 이용한다. 즉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욕망하는 욕망이 욕망되는 욕망과 다른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최소한 동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쇄신을 모색하지만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욕망은 단일한 욕망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을 취하면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욕망이 또한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여기서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로 생각된다. - P221

이 논쟁(게이 결혼)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또한 국가의 위상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성적 결합의 형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국가 권력에 관심이 있다. - P179

여성의 구조적 지배를 다른 모든 젠더 분석이 나아가야 할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틀은, 젠더가 특정 집합의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여러 방식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페미니즘 자체의 존속 가능성도 위험에 빠뜨린다... 페미니즘이 항상 여성에 대한 성적/비성적 폭력에 대항해왔다는 점은 다른 운동들과 연합할 기반으로 작용해야 한다. 몸에 대한 공포증적 phobic 폭력은 반-동성애공포증, 반-인종차별, 페미니즘, 트랜스 및 인터섹스 행동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P22

말하기가 행하기의 한 형식이라면 그리고 행해진 부분이 자기라면 대화는 뭔가를 함꼐 행하는 양식이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양식이다. 이런 교환 과정 중에 뭔가가 성취되겠지만 그게 다 완성될 때까지는 무엇이 혹은 누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표지(王彪之)가 말하였다.
"무릇 천하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된 사람은 마땅히 나라를 보호하고 집안을 편안하게 하며, 다스리는 일은 환히 빛내야 하는데 마침내 궁실과 가옥을 수리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p33/122) - P33

"무릇 공이 있음에도 상을 내리지 않고 죄가 있음에도 주살하지 않으면 비록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라도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인 경우에야! "(p50/122) - P50

《서경(書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위엄(威嚴)이 아끼는 것을 누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아끼는 것이 위엄을 누르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 《시경(詩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속이거나 교활한 사람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삼가 망극하게 하며, 노략질하고 포학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그에게 간특한 짓을 못하게 하라.’ 지금 부견이 이러한 말들을 어겼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p51/122)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릇 이런 사람을 얻는 것은 쉽지 않고 이를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데, 진실로 그에 걸맞지 않은 사람에게 맡기면 걱정거리가 생기고 염려할 것이 드러나면 어찌 홀로 짐(朕)만의 걱정이겠소? (p33/112) - P33

왕맹은 강직하고 밝고 맑고 정숙하여 선하고 악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시소(尸素)를 쫓아내고 그윽하게 묶여 있는 사람을 드러내 발탁하며,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과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관리는 반드시 재능만큼 일을 담당하고, 형벌은 반드시 죄만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서 나라는 부유해지고 군사는 강하게 되었으며, 싸우면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진(秦)은 크게 잘 다스려졌다. (p44/112) - P44

부견이 불러서 만나보고 기뻐하였고, 잘 다스리는 근본을 물었다. 대답하였다. "잘 다스리는 것의 근본은 사람을 얻는데 있으며, 사람을 얻는 것이란 살펴서 뽑는데 있고, 살펴 뽑는 것은 진실한데 있으니, 관직에서 그에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국가는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말은 간단한데 이치는 넓다고 말할 수 있소."(p46/112) - P46

무릇 잘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잘 완성하는 것은 아니며, 처음을 잘 시작한 사람이 반드시 끝을 잘 마치는 것은 아니니, 이리하여서 옛날의 훌륭하신 왕들은 공업(功業)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마치 깊은 골짜기 앞에 간 것처럼 하였습니다. 폐하께 엎드려 생각하건데 앞에 가신 성인들의 발자취를 뒤쫓으신다면 천하가 아주 다행이겠습니다."(p62/112) - P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