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광복절 밤에 의미있는 행사가 있었다. 독립투쟁의 장군 홍범도(洪範圖, 1868 ~ 1943)의 유해 봉환식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상징으로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1920)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운 인물, 그렇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이후 잊혀져간 장군. 쓸쓸하게 중앙아시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홍범도>가 상영되는 고려극장에서 경비를 서다 괴한과의 격투 후 며칠 뒤 사망한 인물. 이 정도가 일반에게 알려진 홍범도에 대한 대강이 아닐까 싶다.


 1920년대 일본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부대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과 '북로군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일본군의 가장 중요한 추적 목표가 되었던 인물은 홍범도였고 독립군 부대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도 그였지 않은가? 후일 북로군정서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군정서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배경이 있다. 반면에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2월 중순 이후 상하이 임정과 불편한 관계가 되자 아무래도 홍범도는 임정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242/348 


 홍범도와 상해임시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더해 그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없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유해봉환식에 사용된 사진 속의 권총 역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 ~ 1924)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일정부분 레닌,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 ~ 1940)과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했으며, 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범도는 매우 기뻤다. 그는 레닌에게 합리적 한인정책을 펴달라고 했다. 면담이 끝난 뒤 범도는 레닌, 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p278)... 1927년 10월 범도는 소련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증번호는 578492번.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82/348 


 다만,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 1953)과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과 달랐던 듯 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입장을 인정한 레닌에 대해 홍범도가 우호적인 마음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으로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일본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차르 러시아와 전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 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레닌의 아류들,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 오류다.(p756)...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_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 p757


 <홍범도>에서 저자 역시 '홍범도'라는 인물을 바라볼 때 지나친 영웅주의가 아닌 사회적 인물로 평가하길 당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를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 행동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과거 독립투쟁가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31 착한 스승(베르길리우스)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 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133 그를 우러러 모든 이가 그에게 영광을 드릴 때

누구보다도 먼저 그이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거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보았노라. _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4곡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7) 과 같은 인물들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그나마 림보(Limbo)에 머물러 최소한의 벌을 받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던 이들도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설정은 오늘날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이러한 구원관과 일제 하 독립투쟁가들의 사상을 문제삼는 것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최근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 ~ 1947),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 ~ 1958) 등에 대한 재평가도 분명 이뤄져야할 것이다. 늦은감이 있지만 이들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가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는 다행이라 여겨진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홍범도의 투철한 생애와 민족운동을 개인적 관점이나 '영웅사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와 민족, 국가가 요구하던 시대적 과제와 모순을 척결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홍범도라는 뛰어난 인물을 사회와 고립된 한 개인의 입장이 아닌, 민족과 사회 등 여러 분야와 관련을 맺으며 존재하는 '사회적 인물'로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323/348


 민족을 사랑하고, 일본에 적극 저항한 인물. 192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대파했지만, 바로 뒤이어 일어난 간도참변(경신참변 庚申慘變, 1920)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에 큰 피해가 생기자 자유시로 건너간 그의 행적 속에서 위엄있지만 자애로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다.


 농부로서 홈범도 대장은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또는 기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나간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아, 선생님. 어찌 그렇게 일하십니까? 시넬을 입고 가방을 멘 채......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먹는다오 하는 그는 조선 낫으로 그냥 가을을 하였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 왜놈들을 벨 때 돕자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조를 벨 때 돕자는 건 그리 반갑지 않어. _ 장세윤, <홍범도> , p288/348


 나(홍범도)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 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 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_ 장세윤, <홍범도> , p161/348


 이제 18일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장군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될 것이다. 편히 쉬시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같은 곳에 위치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과 같은 이들이 이웃이라 선뜻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장군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이 편히 쉬실 수 있을 때가 오도록 우리가 항상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장군의 귀환https://www.mpva.go.kr/hongbeomdo/selectBbsNttList.do?bbsNo=325&key=1651)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를 출판한 출판사 역사공간에서는 <홍범도> 개정판에서 아래의 문장 다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크즐오르다에서 고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인 1962년 3워 1일 한국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뀜)에 소설 <홍범도>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묘지에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9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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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16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명문에 감동받았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7 10:18   좋아요 3 | URL
독립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의 삶에 비할 데 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ini74 2021-08-16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해봉환식을 보는데 훌쩍거리게 되더라고요. 자유시참변과 그 후의 고된 삶들. 현충원의 잘못된 이웃들은 빨리 이사가길 바라며~ 이렇게 글 남겨주셔서 참 좋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6 22:1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눈물이 나더군요... 너무도 뒤늦게 모셔온 것에 대한 죄송함, 감사함 그리고 다행이라는 안도감 등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비록 누추한 곳에 모셨지만, 현충원 자리가 과분한 이들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줘야 겠지요... mini님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1-08-16 1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유해를 모시는데도 결정되기 전까지 북한과 물밑 신경전을 벌였더군요.

겨울호랑이 2021-08-16 22:18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처럼 직전까지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이 있었다지요. 국력에서 앞서서 장군의 유해를 남쪽으로 모셨지만, 장군의 고향이 평양인 점과 카자흐스탄이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북측의 주장도 이해할만하다 여겨집니다. 장군을 모셨으니 잘 모셨다는 평가를 받도록 이후 처리를 잘 해야겠습니다...
 

탁발규가 박사 이선(李先)에게 물었다.
"천하에 어떤 물건이 가장 좋아서 사람의 정신과 지혜에 보탬이 될 수 있겠는가?"
대답하였다. "책만한 것이 없습니다."
탁발규가 말하였다. "서적은 무릇 어느 정도나 되며 어떻게 모을 수 있겠느냐?"
대답하였다. "문자가 나온 이래 대대로 더욱더 증가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셀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인주(人主)가 좋아하신다면 어찌 수집하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p18/94) - P18

사마원현에게는 좋은 스승과 친구가 없었는데, 친하게 믿는 사람들은 모두 아첨하는 사람들로 어떤 사람은 한때의 영웅호걸이라고 여겼으며 어떤 사람은 풍류 명사라고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사마원현은 날이 갈수록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졌으며, 예관(禮官)에게 넌지시 의견을 내서 자기의 덕이 높고 명망이 두텁다고 하며, 이미 그리하고 백관을 임용하니 백관이 모두 공경을 다해 응대하였다.(p34/94)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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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최신의 혁신 기술과 그런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매료된다. 그러나 가벼워진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스티칭, 디지털 모핑 등 ‘제작 후 기술‘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체 그림을 만들어 내는 감독의 선택이다. - 마틴 스코세이지 -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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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9 ~ 08.13 SNS 미션 (8월 15일 자정까지)

'토지박경리' 5행시로 감상평을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여

신청서에 적어주셨던 개인 SNS에 남겨주세요.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 미션은 5행시다. 여태까지 미션이 한 주동안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이 주제였다면, 이번 미션은 연휴를 맞아 쉬어가자는 운영자님의 배려로 읽혀진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은(?) 이 미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시(詩) 감각이 없는 내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ㅜㅜ  결국 어찌어찌 만들었지만,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참 공개하기가 꺼려진다. 부족한 5행시는 페이퍼 끝에서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한 주 독서를 페이퍼로 간단하게 마무리 짓는다.

 

 콜레라는 인간이 유일한 숙주이지만, 동물 숙주 없이도 인간의 몸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바실루스에 감염될 때 발생한다. 오염된 식수를 통해 전염되며 내장 기관에 문제를 일으키고 탈수 증세를 초래한다. 초기의 콜레라는 건강한 성인의 치사율이 50퍼센트 정도였는데, 어린이와 노인은 더 높았다. 이 질병은 갠지스강의 하류 지역에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19세기 초에 전 세계로 퍼졌다. _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 , p274/534


 "그 뱅은 걸리기만 하믄 죽는다!" 빙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불거져 나온 두 눈, 관골과 코만 댕그랗게 솟아오른 해골, 김서방의 그런 모습은 순간 이들에게 다른 뜻으로 비쳤다. 암담하고 침울하고 슬펐던 눈빛은 일제히 공포로 변했다... 집안의 일상은 무너졌다. 마을의 일상은 무너졌다. 불안과 공포는 시시각각 검은 구름같이 마을을, 최참판댁을 엄습해오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3>, p260/518


 <토지 3>에서 갑작스럽게 닥친 호열자(콜레라)는 평산리를 덮치고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면서 사신(死神)의 불길한 기운이 온 마을에 퍼져 나갔다. 성별, 나이,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호열자의 파도에 쓸려가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파국이 시작되었다.


 병이 그런 방어를 겁낼 리는 없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형상으로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면서 골목을 점령하고 마을을 점령하고 방방곡곡을 바람같이 휩쓸며 지나가는 병균. 그들의 습격대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인심은 흉년의 유가 아니었다. 난리가 났다면 피난이나 가지 하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희망을 미신에 걸어보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3>, p296/518 


 질병으로 인해 생기는 절망, 그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뀌려는 노력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 ~ 1960)의 <페스트 La Peste>에도 잘 표현된다. 천형(天刑)과도 같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좌절 후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마치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의 모습처럼 페스트가 퍼져가는 오랑의 시민들은 변해간다.


 그때에 그들의 용기와 의지, 그리고 인내의 붕괴는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그들 스스로 영원히 그 수렁에서 다시 기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워질 시기를 결코 생각지 않고, 이제는 더는 미래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하자면 늘 두 눈을 내리깔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p134)... 이와 같이 그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든 유형수의 깊은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되새기곤 하는 그 과거조차도 후회의 쓴맛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_ 알베르 카뮈, <페스트> , p135/574


 그들은 까닭 없이 괴로워하기도 하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은 바랄 수 없어서 각자가 혼자서 근심해야만 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우연히 자기 속내를 털어놓거나 모종의 감정을 말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 대개 불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_ 알베르 카뮈, <페스트> , p140/574


 <페스트>의 오랑 시민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고립된 곳에서 죽음의 공포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 ~ 1375)의 <데카메론 Decameron> 속 주인공들은 사뭇 다른 처지에 있다. 피렌체에 흑사병이 닥쳤을 때 이들은 질병을 피해 멀리 시골로 떠나 다른 세계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 <엘리시움 Elysium> 속의 피난처와 같은 곳으로 떠난 7명의 귀부인과 3명의 청년은 올림푸스 산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는 불멸의 신과 같이 필멸의 인간들의 사회를 마음껏 비웃으며 즐겁게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어갔다.


 집착인지 오만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앞서 그랬고 그러듯이 이 지역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p23)... 그곳에서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쾌락을 맛보자는 것이지요. _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1> , p24/335


 유쾌한 10일간의 이야기와 함께 하면서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을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를 주었지만, 이러한 여유의 끝이 어땠는가는 분명치 않다. 개인적으로 <페스트>와 같은 지옥도와 같은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다면, 10일간의 천상생활이 가져다 준 여유는 하룻만에 날라가지 않았을까. 그들의 여유는 언제까지나 죽음의 파도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나온 것이었을테니까.


 인간의 지혜란 단순히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거나 현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지혜로 평가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앎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무서운 흑사병의 계절이 시작된 뒤로 우리는 음울하고 고통과 불안으로 가득 찬 거리를 피해 피렌체에서 도망쳐 나왔고, 우리의 건강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처를 구해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이에서 정숙함과 화합 그리고 친밀함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저는 보고 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여러분과 저의 참으로 소중한 명예이자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_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3> , p280/318


 카뮈의 <페스트>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흑사병)이 가져다 준 공포와 이로 인해 고립된 인간이 느껴야 하는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희망의 끈을 잡으려 하지만, 계속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을 잊을 때 뿐이고, 이를 정면으로 맞아야할 때 인간과 공동체는 과거와는 다르게 변화할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어머니와의 이별로부터 연속적으로 닥친 불행에 고스란히 몸을 맡겨야 했던 <토지>의 어린 서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슬픔과 함께 자신 또한 느꼈을 호열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을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등  복잡한 감정을 어린 서희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음 깊이 자리잡은 이러한 마음이 이후 최씨 문중의 증흥을 위해 친일(親日)까지도 꺼리지 않았던 그의 행보를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몇 해 동안 연이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바우 내외만은 명대로 살다 갔다 할 수 있었으나 최치수의 죽음, 귀녀의 죽음, 집안 식구는 아니었지만 불에 타죽은 또출네 하며, 죽음치고도 비참한 그들 비명을 보았건만 새로이 직면하는 죽음은 여전히 하인들 가슴에 전율을 일게 한다. _ 박경리, <토지 3>, p260/518


앞서 말한 독서챌린지 미션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 <토지>를 읽으며

: 지나간 우리네 삶과 수난을 씁쓸하게 맛본다

: 박경리 작가는 작품 안에 이들을 잘 녹여냈구나

: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다시 꺼내든다

: 리해(이해)를 하려면  아직 멀었지. 가다보면 가까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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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14 2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행시 훌륭하십니다 ㅎㅎ 데카메론. 짠돌이 오빠가 돈 주고 사와서 몰래 읽던 책이 데카메론과 즐거운 사라? 였지요 ~ 민음사에서 데카메론이 나왔군요.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08-14 22:5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mini님. 그런데 정말 미션 아니었으면 공개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 삼행시 등을 보면 바로 잘도 짓던데... 저도 예전에 동서문화사 판으로 읽었는데, 민음사에서 나온 것으로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mini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되세요! ^^:)

붕붕툐툐 2021-08-14 22: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행시 정말 너무 좋은데요?😍
저도 페스트 읽어서 리뷰 남기려고 했는데 괜히 너무 반가워요~헤헤~
(데카메론은 넘사벽!ㅋ)
저도 토지에서 호열자로 사람들 죽어나갈 때 너무 안타까웠어용~~ 그걸 또 이렇게 엮어 읽으시다니~👍
한 수 배워갑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4 23: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이번 미션은 저도 5행시만으로 넘기려 했는데, 읽은 부분이 또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주인공 서희에게 매우 결정적인 장면인지라 페이퍼를 쓸 수밖에 없었네요. 또 전염병하면 빠질 수 없는 두 작품을 함께 펼쳐봤습니다. 이런 기회 아니면 또 언제 해볼까 싶기도 합니다. 붕붕툐툐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잠자냥 2021-08-14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해가 아주 잘 되는 5행시였습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8-15 00:16   좋아요 1 | URL
제가 봐도 마지막 글자는 상당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두음법칙 피해서 ‘리본으로 책을 잘 묶어야지‘ 도 생각했습니다만 더 이상하더라구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