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 기근을 발생시킨 자연재해는 유목 생산 양식 자체의 태생적 약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목 사회는 정주 농경 지역에 비해 자연환경의 변화가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정주 지역에 비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 번 초원이 파괴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거의 없었고, 다시 복구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31


 이번 페이퍼에서는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를 통해 약 3세기에 걸친 유목제국의 역사를 정리해보려 한다. 돌궐 제국과 위구르 제국은 시대를 달리해 서역(西域)을 지배한 유목제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같은 지리환경을 공유한 나라였기에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자연재해에 취약하고, 척박한 토지의 적은 인구를 가질 수 밖에 없던 이들이 선택한 부국(富國)의 방식은 바로 무역이었다. 이들은 동서무역을 중개(仲介)하며 제국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와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소그드 상인과 마니교도를 활용하고, 불교와 마니교를 통해 정신적 일체감을 가지고자 했던 이들 유목민족의 역사를 잘 설명한다.


 이렇게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22


 두 거대 제국을 잇는 동서무역의 발전 속에 그 통로의 일부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위구르는 과거와 달리 보다 많은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위구르 내부에 도시, 즉 정주민을 위한 취락 건설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위구르가 서방의 오아시스 지역을 지배하고 경영하고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그 이전에 받았던 통행세 성격의 공납과는 달랐다. 이렇게 확보된 이익은 유목 사회 내부의 분배 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유목 군주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는 기제였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81


 이처럼 유목제국은 상업(商業)을 통해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역사는 또한 이들 제국의 한계도 보여준다. 유목제국이 위치한 초원이라는 자연 특성상 생산품이 축산품이나 농산품 등 한정된 품목에 불과했기에, 식량과 생필품의 조달을 외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과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활동의 큰 부분을 소그드(Sogd) 상인 등 외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분명 이들 제국의 한계였으며, 그들의 문명이 영속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유목민들이 처한 자연지리적 및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그들이 창조한 유목문명에서는 다른 문명들과 구별되는 일련의 특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이성은 첫째로, 순수성이 결여된 혼성문명(混成文明)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유목문명은 항시 불완정성(不完整性)을 면치 못한다... 또한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주변 농민이나 도시민들로부터 생필품이나 무기를 얻어야 하는 의존성(依存性)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유라시아 유목기마민족들은 나름대로 문명을 창조하고 문명권을 형성하였지만, 이러한 문명의 혼성과 불완전성, 의존성 때문에 그들이 창조한 문명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유목문명으로 완결(完結)될 수는 없었다. _ 정수일, <실크로드 도록 - 초원로편>, p17


 축산물을 제외한 별다른 특산품이 없고 상업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 유목제국의 경제활동이었다면, 또다른 유목민족의 중심지 요동(遼東)지역을 돌아보자. 김한규의 <요동사>는 홍산문명(紅山文明) 이후 요동지역의 역사를 중국(漢)과 한국(韓)과 분리된 별도의 역사공간으로 서술된다. 저자는 '요동'이라는 공간을 예맥(濊貊)- 동호(東胡) - 숙신(肅愼) 등의 역사공동체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력교체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와 함께 각 왕조 안에서 이들 세력이 또다른 역사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도 함께 보여준다.


 요동은 조선, 부여, 고구려 등 예맥계, 선비(鮮卑), 거란, 몽고 등 동호계, 말갈, 여진, 만주 등 숙신계 등 요동에서 거주한 여러 군소 역사공동체들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연, 북위, 발해, 요, 금, 원, 청, 만주국 등을 차례로 건립한 터전이었다. 그것은 중원, 즉 중국이라는 터전에서 연, 진(秦), 한, 진(晉), 당, 송, 명 등 일련의 국가들이 성립한 것과 현저히 대비된다. _ 김한규, <요동사>, p68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 즉 예맥계와 말갈 즉 숙신계가 함께 힘을 모아 건립한 전형적인 요동 국가였다. 그러나 발해는 예맥계가 참여해 건립한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그 까닭은 발해를 건립, 운영한 주도적 힘은 예맥계가 아니라 숙신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발해라는 국가를 통해 융합함으로써, 발해 시대는 예맥계가 그 역사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간 시기가 되었고, 동시에 숙신계가 그 역사공동체적 정체성을 강화해간 시기가 되었다. _ 김한규, <요동사>, p348


 거란이 요(遼)를 세워 요동과 중국의 일부를 통합, 지배한 시기의 요동은 동호계가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요동에는 동호계 인구만 존속했던 것은 아니다.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으로 형성된 '발해인(渤海人)'이 발해의 멸망 뒤까지 여전히 존속했고, 발해에 예속되지 않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중심으로 여진(女眞)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역사공동체가 출현해 숙신계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요동은 거란과 함께 발해와 여진이 공존하면서 '요'라는 국가에 통합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_ 김한규, <요동사>, p424


 요서의 몽고, 혹은 몽고화한 거란과 요동 동부의 여진은 고유한 문화 양식이 근사해서, 서로 용이하게 융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의 요동도사가 요동에서 완전히 퇴각하고 여진이 요동 전역을 완전하게 장악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동호계와 숙신계의 융합뿐만 아니라 숙신계와 중국계의 융합도 신속하고 광범하게 이루어질 정치적 조건이 갖추어지게 된다. _ 김한규, <요동사>, p556


 <요동사>는 하나의 독자적인 역사공간으로 '요동'은 산정한다. 북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문명과 또다른 별도의 문명권으로 '요동'을 설정하고, 이를 지배한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서술한다. 이같은 역사적 공간으로서 요동은 앞선 유목제국들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갖는다. 요동 지역과 서역의 공통점은 이들이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지라는 점이다. 북부 초원 지대와 황하 유역 또는 환동해 문명권과의 중간 지대에서 소금, 철, 모피 등의 중개 무역의 독점은 여기에 위치했던 고조선과 고구려 강성함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한은 먼저 중국계 왕권과 토착 월계(越系) 상권(相權)의 타협적 결합 체제가 파괴되어 심각한 모순을 드러낸 남월을 군사적으로 침공해 멸망시킨 뒤, 바로 그 침공군을 되돌려 이듬해인 무제 원봉(元封) 2년(BCE 109)에 조선을 침공케 했다. 조선 침공은 흉노의 오른팔을 잘라내어 흉노와의 남북 대결에서 전략적 우위를 점하겠다는 무제의 적극적 세계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_ 김한규, <요동사>, p138


 <위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사실은 한대의 한국은 중국과 직접 교섭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립된 국가가 요동에 설치한 변군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섭했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요동은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역사공동체를 이어주는 환절, 혹은 매체의 역할을 수행했다(p230)... 요동의 군현을 매개로 한 한중 간의 정치 외교적 관계는 대체로 평화적 관계로 유지되었다. 양자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책봉과 조공이라는 정치적 제도로서 꾸며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문화적 의미가 강해, 정치적 이해가 충돌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책봉조공 관계가 정치적 의미를 회복하게 되면,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된다. _ 김한규, <요동사>, p233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생계경제)과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이들은 크게 예맥계, 흉노계, 말갈계 등으로 나뉜다. 쉽게 설명하면 밭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을 이루던 농경민(예맥계), 몽골에서 시작해서 호룬뻘 초원 등 만주의 서북쪽에 발달한 초원지대에서 주로 목축을 하던 유목계(선비계), 그리고 수렵/어로/채집을 중심으로 산악 지역과 동해안 일대에 살았던 수렵채집민(말갈계)이다.(p24)... 수렵과 채집에 주로 종사하던 읍루계는 숙신/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졌고 청나라 때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연해주와 송화강 일대에 사는 나나이, 니브흐, 울치 등은 바로 이 읍루계 주민들의 후예이다. 한편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예맥계는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이 이에 해당한다. _ 강인욱, <옥저와 읍루>, p26/290


 그렇지만, 요동에 위치한 제국들은 단순히 중개무역에 그치지 않았다. 농경의 중심지였던 환동해 문명권이나 삼한 지역 또는 중국지역으로의 진출을 통해 이들은 3차 산업인 서비스 산업 뿐 아니라 1차와 2차산업의 역량도 보유할 수 있었기에 하나의 독립된 천하관(天下觀)을 가진 독립된 세계를 수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본다면 고구려가 작은 왕국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신장위구르, 티벳지역, 내몽골 자치구가 중국에 편입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임을 생각해본다면 중국과 독립된 독자문명으로서 요동문명을 산정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북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의 천장석 벽화에 등장한 북극삼성은 고구려가 중국과는 다른 갈래의 천문 전통을 수립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더욱이 그것이 고려시대 왕릉과 귀족 벽화 무덤으로 온전히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적 동질성은 한층 분명해진다... 고구려는 또한 후기 벽화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한당대 벽화묘에서 발견되지 않은 오신도 벽화 양식을 새롭게 개진하고 있었다. 천문으 ㅣ중심인 북극삼성과 더불어 묘실 천장석 중심부에 제왕의 신수인 제5황룡도를 안치함으로써, 사신도 벽화의 단계를 넘어선 오신도 우주론을 표명한 것이다. _ 김일권 ,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 p113


 흉노와 한이라는 제국의 격돌에 배후 안정을 위해 한-고조선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청(淸)의 대규모 서역 원정 직전에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 역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병자호란의 원인을 인조(仁祖, 1595~1649)의 무능이나 사대부들의 명(明)에 대한 사대의식 때문에 일어났다는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1621년의 랴오둥(遼東) 정복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한인(漢人) 사이의 갈등이 더 극심해지고, 더 심각한 생존 위기로 이어졌다. 불평등한 대우에 항거한 한인들의 반란도 식량 공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p164)... 팽창하던 국가는 새로운 노역과 곡물세를 한인들에게 더 광범위하게 부과함으로써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랴오둥에서 새로운 빈 땅은 드물었고 서쪽 랴오시(遼西)에서 전쟁을 피해 한인들이 몰려들자 더욱 귀해졌다. 피난민들은 자신이 '먹을 양식과 소금이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아민처럼 한인 자문역에 대한 국가의 편애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약탈하고 습격하던 옛날의 호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아민은 1627년 칸의 명령을 거스르고 조선을 침략하여 영토를 약탈했다(p165)...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 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만주족은 군사적 침략 위협으로 조선에 곡물을 제공할 것을 강요하고, 이윤이 나던 조선과 중국 간의 조공 무역을 금해서 그것을 자신이 독점하려 했다. _ 피터 C. 퍼듀, <중국의 서진> , p167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Empires of the Silk Road: A History of Central Eurasia from the Bronze Age to the Present>의 저자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Beckwith)는 이런 관점에서 고구려를 실크로드의 끝단으로 설정하고, 실크로드의 종점으로 산정한다. 중앙유라시아의 제국으로서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고구려, 백제 vs 당나라, 신라'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를 사이에 두고 유목제국과 정주제국간의 치열한 다툼은 서쪽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해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고, 마치 장마철의 오호츠크해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국사를 바라보는 것은 지역사를 보는 것과는 또다른 깨달음을 주지 않을까.


 돌궐과 위구르 유목제국사 페이퍼는 이상으로 줄이지만, 유목제국사는 대략 다음의 책들을 함께 정리해야 거칠게나마 훑어봤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리스트를 올려본다. 지금 개최된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보이콧 원인이 된 신장위구르 지역의 역사와 최대의 유목제국인 몽골제국의 역사, 우리와 관련된 유목제국인 금나라와 요나라 역사는 시간을 두고 정리하는 것으로 하고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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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2-04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동의 지리학적 위치가 저렇게 유리할 줄 몰랐어요.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한번 검색해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천문에 약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료가 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2-02-04 23:34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지도상으로만 보면 단순히 ‘요하의 동쪽‘이지만, 역사 안에 담긴 의미는 그보다 크다는 것을 <요동사>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는 ‘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우리나라만의 세계관을 주로 담고 있고, 조선편에서는 이러한 세계관의 변경과 민속신앙에 자리한 세계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억의집님의 마음에 들 내용이 담겼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2-05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크로드 동쪽 끝이 중국 서안이 아니라 신라였다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요동 반도가 무역 중간지로 핵심이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2-05 20: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 조상들은 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근대 국가 체계의 국경선과 민족 문화라는 우리 인식의 한계가 과거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행복한 토요일 밤 되세요! ^^:)
 

사람들 가운데는 물건을 싸가지고 시장으로 갔다가 심지어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름은 궁시(宮市)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을 빼앗았다. 상고(商賈)들은 좋은 재화를 가지고 있으면 모두 이를 깊이 숨겼는데, 매번 칙사가 나가면 비록 장(漿)을 팔거나 떡을 파는 사람들일지라도 모두 일을 거두고 문을 닫았다.

신라왕(新羅王) 김경칙(金敬則)이 사망하여, 경인일(22일)에 그의 적손(嫡孫) 김준옹(金俊邕)을 책봉하여 신라왕으로 삼았다.

애초에, 발해(勃海)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가 사망하였는데,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사망하여 친척동생인 대원의(大元義)가 섰다. 대원의는 의심이 많고 사나워서 그 나라사람들이 그를 살해하고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서(大華嶼)를 세웠는데, 이 사람이 성왕(成王)이며 연호를 고쳐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대화서가 사망하자, 다시 대흠무의 어린 아들인 대숭린(大嵩?)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강왕(康王)이고 기원을 고쳐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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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수렵 및 채집으로부터 출발하여 농업을 거쳐 문명으로 나아가는 경로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내륙 지역의 고고학에 근거한 추론이었다. 새로운 연구는 해안 환경 또한 대규모 정주 공동체를 뒷받침하고 복잡한 문명 활동을 촉진시켰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세계는 ‘광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들(islands in a far sea)’이 아니라 ‘섬들로 구성된 바다(a sea of islands)’다. 실제 과거에 태평양 주민들은 광대한 바다를 이용하며 살았다.

광대한 대양 세계를 작게 분할한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바다에 가상의 선을 그어 식민지 경계로 삼은 후 그야말로 좁은 세상에 사람들을 가두었다. 이제 여권이 없으면 과거처럼 자유롭게 항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현재 태평양 오세아니아 국가들에 부여된 운명처럼 보인다. 현대 문명은 장구한 기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펼쳐지던 해상 공간을 완전히 텅 빈 무의미한 공간으로 변화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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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반드시 간사하게 뇌물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여 변명하고 따지지 않으며, 그 공적으로 논의할 것을 사사롭게 하여 그 사람의 이름은 드러내지 않고, 허물이 없는 사람을 의심하며 보고, 죄가 있는데도 놓아주며 굽어진 것과 곧은 것을 함께 꿰뚫어 놓는 것이니,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식량이 부족한데 재물은 남으면 쌓아 놓은 재화를 풀어 곡식창고를 힘써 채우고, 식량은 남는데 재물이 부족하면 쌓아 놓은 식량을 느슨하게 하고 재물을 아껴 쓰도록 해야 합니다.

무릇 헐뜯으며 일러바치는 일은 대부분이 실제로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중상(中傷)하는 것을 이롭다 생각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을 꺼립니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조사하며 찾을 수 없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일의 본질에 방해가 되니 모름지기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한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사악한 흔적을 아직 드러내지 않고 마땅히 다른 일을 빌려서 명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단지 그 사람을 버리면 되는 것을 어찌 반드시 말을 밝혀 꾸짖으며 욕을 보여야 하느냐고 합니다.

대저 송사(訟事)를 들으면서 헐뜯는 말을 분별하려면, 반드시 정황을 찾아내고 흔적을 드러내 밝혀야 하는데, 정황이 보이고 흔적이 나타나면 말로 자복하고 이치에 막히게 되니, 그런 뒤에 형벌을 가하며, 이렇게 하여서 아래로는 억울한 사람이 없고 위로는 잘못되게 듣는 일이 없게 됩니다."

무릇 장수를 뽑아 임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품행과 능력을 조사하며 살펴서, 가능한 사람이면 이를 파견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이면 이를 물러나게 하며, 의심스런 사람이면 시키지를 말고, 시킨 사람이면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하니, 그러므로 장군은 군대에 있으면서 주군(主君)의 명령이 있어도 받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왕 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성의로써 하며, 꾸짖고 화를 내도 시기하며 싫어하는 것이 없고, 징계하며 막으나 원망하며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없습니다. 멀리 내치는 것은 그가 조심하지 않았음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며, 면제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새로워진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차츰차츰 조금씩 스며들어 권위와 형벌에 이르게 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다시 쫓아내고 벼슬을 깎이는데 비록 여러 차례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더라도 모두 아끼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시행하여서 마침내 잠시 좌천시키는 것이고, 재목을 생각하여서 점차 등급을 올리면 또 다시 채용될 것을 알 것이니 누가 더욱 수양을 늘리지 않겠습니까! 어찌 정상적인 것을 어지럽힐까를 걱정하며, 어찌 한이 쌓이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대저 등용하여 끌어 올리는 것은 공적을 이루도록 힘쓰게 하는 것이고, 물리쳐 내쫓는 것은 잘못을 징계하는 것이니, 두 가지를 번갈아 쓰는데 그 이치는 순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제정한 부역(賦役)의 법은 조(租)·조(調)·용(庸)
입니다. 정남(丁男) 한 사람은 전(田) 100무(畝)를 받고 매년 속(粟) 2석(石)을 내도록 하였는데, 이를 조(租)라고 하였습니다. 매 호(戶)마다 각각의 토지에 따라서 의당 산출되는 비단, 예컨대 능(綾)이나 시(?)는 함께 2장(丈), 면(綿)으로는 3량(兩)을 내도록 하고, 양잠을 못하는 토지에서는 포(布) 2장(丈)5척(尺)·마(麻) 3근(斤)을 내도록 하였는데, 조(調)라고 하였습니다.
매 정(丁)은 매년 노역을 하게 하여 그 용(庸)을 거두어들이는데, 하루 기준을 견(絹) 3척(尺)으로 하고 이를 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유통(流通)하여 이자를 늘리는 재물은 숫자가 비록 적어도 날을 헤아려서 늘어나는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사는 집과 쓰는 용기(用器)의 자산은 가격이 비록 높다 해도 해가 다가도 이자는 없습니다. 이처럼 비교해 보면 그 흐름은 실제로 번잡한데, 일률적으로 값을 셈하고 민전(緡錢)을 계산하니, 마땅히 그것은 공평함을 잃은 것이고 거짓을 늘리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벼운 재물 얻기에 힘을 쏟으며 즐겨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은 항상 요역(?役)과 부세(賦稅)를 벗어나고, 본업(本業)에 힘쓰며 사는 곳에 뿌리를 박고 생산하는 사람은 매번 거두며 요구하는 것으로 피곤해집니다.

법은 반드시 시행하는 것을 귀하게 하고, 깊이 각박한 곳에서는 신중하게 하는 것이고, 통제하는 것을 여유 있게 하여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법령을 엄하게 하여서 어그러진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니, 여유있는 것을 조금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조금 우대하십시오.
잃는다 해도 부유함을 잃지 않으며, 우대하여야 궁핍함을 구휼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유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는 좋은 길이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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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서남동양학술총서 31
정재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 유목국가의 군주는 정주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보다 정기적인 공납(貢納)이나 교역(交易, 즉 互市) 등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이른바 '정복왕조'와는 달랐다. 유목 군주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직접 주변 지역을 약탈해 물자를 확보하거나 정주 지대에서 유입되는 물자를 입수, 재분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자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3

정재훈의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돌궐 제국(552~745)의 뒤를 이은 위구르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돌궐 제국의 뒤에 출현한 유목 제국이지만, 역사 속의 위구르 제국은 돌궐 제국의 강성함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돌궐 제국과 위구르 제국과의 결정적 차이는 '서역무역권 확보'여부라고 여겨진다.

위구르는 몽골 초원을 지배하면서도 기존의 유목제국들과 달리 서방의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에 대한 진출 역시 당조와 토번이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전제해야만 했다. 따라서 770년대 이후 뵈귀 카간이 당조로부터 공급되는 재화를 기초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켜온 상황하에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구르의 당조에 대한 경제적 의존 관계는 해소될 수 없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35

돌궐 제국은 일찍이 서방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며 상업 제국의 지위를 쌓을 수 있었던 반면, 위구르 제국의 초기에는 당(唐)이 돌궐 제국을 대신하며,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상황이었기에 오아시스 상업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상업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위구르 제국은 경제적으로 당나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국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태생적인 한계였다. 어쩌면 당나라와 무역에 의존해서 살아야했을지도 모를 위구르 제국에 변화가 찾아 온것은 8세기 중반의 일이다.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주변 민족에 대한 기미지배는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또한 당조의 지배력 약화에서 그치지 않고 10여 년에 걸쳐 지속된 반란 과정에서 막남의 여러 유목 세력 역시 약화되었다. 740년대에 돌궐이 붕괴하자 남하해 막남에서 활동하던 돌궐 항호와 7세기 중반 이후 당조의 기미지배를 받고 있었던 많은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들, 즉 대표적으로 복고회은과, 당조에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 사사명 집단이 모두 이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반면 위구르는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되었고, 경쟁 관계에 놓였던 토번 역시 복고회은의 난을 통해 당조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후 당조를 중심으로 토번과 위구르가 경쟁을 벌이는 새로운 삼각관계의 형성을 의미했다. 이렇게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동란으로 몰아넣었던 안사의 난은 중국사의 전개만이 아니라 유목 세계의 세력 재편, 즉 기존 투르크(돌궐) 세력의 몰락과 위구르의 성장을 가져왔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95

이런 상황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 ~ 763)은 위구르에게 큰 전환점이 된다. 과거 돌궐제국이 수 양제(隋 煬帝, 569 ~618) 직후 혼란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것처럼, 위구르와 토번은 안사의 난을 기반으로 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을 압박했고, 당은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으며 중앙아시아 정세는 급변한다.

위구르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토번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약화되자 천산남로부터 중국으로 이어지는 하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가 당조와 토번이 대립을 벌이던 하서 지역에 진출하려고 하자, 토번은 그에 호응하려던 사타 돌궐의 움직임을 막아서 그에 적응 대응했다. 따라서 토번은 위구르의 하서 지역에 대한 세력 확대를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문 기록에 나타나듯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를 중심으로 서로 경쟁을 벌어야만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88

당시(8세기 중반) 유목 세계는 과거 돌궐의 지배하에 있었던 많은 세력들이 그 나름의 영역을 지배하면서 세력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당조 역시 돌궐의 붕괴를 계기로 각 지역의 분열을 조장해 거대한 유목제국이 재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의 카를륵 카간은 몽골초원의 중심인 외튀겐을 차지하고 돌궐을 대체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먼저 이념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2

위구르 제국은 당의 쇠퇴를 계기로 서역교역권을 놓고 토번(吐蕃)제국과 경합하게 된다. 때마침 당나라의 소그드 상인 탄압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상업 세력의 마음이 당(唐)조에서 떠난 것 함께 서방에서 쫓겨난 마니교도의 가세를 통해 위구르 제국은 마니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고, 상업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의 결합을 통해 위구르 제국은 중기 이후 돌궐의 뒤를 잇는 유목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듯했다.

중앙아시아와 당조에서 억압을 당하던 마니교도들에게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자유로운 선교와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때 그들이 주목한 존재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성장한 위구르였다... 반면에 마니교도의 활동을 지원한 뵈귀 카간의 경우에도 안사의 난을 통해 당조와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오아시스 출신의 마니교도들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외교 및 무역의 매개로 인식하였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24

마니교는 카간의 권위를 강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목국가에 수용된 고등 종교의 역할이 이념적으로 '내적 통합 이념'으로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기초로 성전(聖戰)을 전개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까지 제공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니교는 유목 세계의 패자로서 이념적 분식과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했던 위구르 카간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18

그렇지만, 돌궐 제국과 마찬가지로 위구르 제국의 붕괴 역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과거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 BC209 ~ BC174), 훈족의 아틸라(Attila, 406~453)의 경우에서 보듯 유목민족은 강력한 지도자를 만났을 때,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위협하지만, 그 지도자가 죽는 경우에는 승계 문제 등으로 그 힘이 소멸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목제국의 정치적 위기 상황과 맞물려 3년, 5년 단위로 닥쳐오는 가뭄, 폭설, 전염병 등 조원지역의 자연 재해는 제국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제국의 존망을 가르게 되는데 위구르 제국 역시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위구르의 붕괴는 말기에 지배 집단 내부의 내분과 키르기즈의 개입, 그리고 자연재해에 따른 유목 생산 구조의 파괴에 기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몽골 초원을 버리고 카를룩, 토번, 안서, 막남, 동몰골의 거란 등의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44

유목 사회 내에 정주적 요소가 수용되고 그 지역 출신들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은 카간의 권력 강화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유목 사회 내부의 기존 세력들에게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반발 원인이 되었다. 카간은 자신의 권력을 무한대로 강화할 수 없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일정 정도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지배 집단과 평형 관계를 이루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유목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내적인 통합력은 카간의 권위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능력 부족으로 권위가 강화되지 못하거나, 권위가 너무 강해 집권화로 치달으면 약화될 수도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25

이상과 같이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1세기 남짓한 유목제국 위구르의 흥망성쇠를 통해 유목제국의 특성과 한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독자들은 책을 통해 유목제국은 약탈을 통해 성장한 무력으로 만들어진 나라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실은 안정적인 교역권 확보를 위한 상업제국이라는 사실과 함께 유목 제국의 흥망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에 영토확보를 위한 투쟁을 했던 정주형 제국(로마, 한나라 등)과는 달리 인간 중심의 정치가 이뤄졌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끝없는 장성을 쌓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을 희생하는 문명과 자신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외부와 교섭하고 외부인과 외래사상을 포용하는 문명 중 과연 어느 문명을 더 고등한 문명이라 할 수 있을까. 맹자(孟子, BC372 ? ~ BC 289)는 일찍부터 민(民)본위의 정치를 외쳤지만, 과연 오랜 영토형 제국의 역사에서 그의 사상이 얼마만큼 실현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백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했던 유목민족의 노마디즘(Nomadism)이 더 앞선 문명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국가 건설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전통(회뤼)이 회복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bodun보둔), 즉 유목 세계의 부족민들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적 범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공간적 범위인 영토 (지배 영역은 그리(하늘, 신)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인 백성(보둔)을 채우는 것이 카간 자신의 개인적 능력, 즉 현실적인 몫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 국가(일)는 영토보다 백성(보둔)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영역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 국가의 회복을 선언하기 위해 텡그리의 수명과 함께 그를 현실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해야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68

초원에 기근을 발생시킨 자연재해는 유목 생산 양식 자체의 태생적 약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목 사회는 정주 농경 지역에 비해 자연환경의 변화가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정주 지역에 비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 번 초원이 파괴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거의 없었고, 다시 복구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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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2-0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렸던 리뷰입니다^^ 재미있네요.
안사의 난이 당 내부 왕조만이 아닌 주변 국가들 모두에 영향을 끼쳤군요.
서방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으로 위구르를 이끌고 갈 수 있었구요.
유목 사회에 대한 우리 안의 편견도 돌아보게 됩니다. 백성을 확보하고 자연 환경이 상대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속에서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테니까 그만큼 대단한거지요!
읽지 못하는 책이라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대리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2-03 09:44   좋아요 0 | URL
연휴 잘 보내셨지요?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안사의 난은 안록산, 사사명들 자신이 이민족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나라 내부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마치 로마제국 말기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군단의 다수가 게르만족 출신이었고, 이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 것처럼,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은 북방민족의 세력 확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사건의 영향력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과 큰 재난은 여러 요인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임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를 국사, 서양사, 동양사 등으로 구분해서 바라보는 지역사의 관점도 중요하겠지만, 사건의 세계사적인 의미와 해당 문명권에 대한 이해도 더불어 살펴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