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는 아시아적 샤마니즘을, 그 원초적 바탕 이데올로기 -인간으로 하여금 천상계 상승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최상계의 절대신에 대한 신앙—가 불교의 침투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기나긴 외래 문화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온 고대의 접신술로 이해해야 한다. 외래 문화와 함께 들어온 신비스러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조상신 및 "영신"과의 관계, "빙의 " 에서 단절되었던 이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탈혼의 현상 구조도 그 대부분이 접신의 성격이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많은 개량과 개악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과 개악이 참 샤만의 접신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동서양의 위대한 신비주의에 필적하는 명상의 방법을 통해 준비되고 이루어지는, "영적인" 상승 형식의 진짜 샤만의 신비 체험의 사례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 P430
자유는 이성적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이고, 도덕법칙은 이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한 것, 자율적인 것이고, 그런 한에서 자기강제성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의지란 바로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를 말한다. 자신의 법칙에 종속하지 않는 의지는 한낱 ‘자의(意)‘일 뿐으로, 그것은 실은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의지로서 순수한 실천이성의 존재자인 인간은 응당 도덕법칙에 복종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자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GMS, B98=IV447) 의지의 자유가 자율이라는 것, 곧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바로 정언명령의 정식(定式)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와 윤리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가지이다." (GMS, B98=IV447)EL malu - P224
법 의무는 인간에게 무엇이 옳은가, 정당한(recht)가를 말해주므로 그거은 인간임의 정당성, 곧 인간의 권리에 관련되어 있고, 덕 의무는 인간에게서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 곧 인격성, 인간의 목적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의무 모두 그것을 규정하는 법칙수립자인 실천이성의자율에 기초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또한 양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자는 일단 법칙을 통해 규정되면 외적 강제가 가능한 반면에, 후자는 오로지 자유로운 자기 강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법 의무의 이행 여부에 대한 심판은 외부 재판소에서 가능하지만 덕 의무의 이행 여부에 대한 심판은 궁극적으로는 내부재판소, 곧 양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 P272
나는 이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반대들을 논의함으로써 칸트가 보여주려고 한 요점으로부터 주의를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요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칸트가 준칙이라고 부른 것에 따라 행위한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유한한 의지는 그것이 보편적 법에 대한 존경에 의해 발동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준칙들 혹은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들이 보편적인 법이 되도록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준칙들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즉 우리의 준칙들이 원칙으로서 보편적인 도덕적 입법의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다면, 이성은 우리가 법 그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하여 그 준칙들을 인정해야 하고 존경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 P238
외로운 군대가 깊이 들어가니 사람들은 모두 죽기에 이를 것이니 싸우게 되면 스스로 배(倍)의 힘을 내었다. 무릇 멀리 보는 사람은 가까운 것을 돌아보지 않고,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상세하게 보지 않는 것이니, 만약에 조금 이긴 것을 자랑하고 조금 실패한 것을 걱정하게 되면 먼저 스스로를 묶는 것이니, 어느 겨를에 공을 세우겠는가?" 무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소는 자기를 받드는 일에서는 검소하였고, 병사들을 대우하는 데서는 풍성하게 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알아서 의심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단안(斷案)을 내릴 수 있었으니, 이것이 그가 성공한 이유였다.
애초에, 발해왕(渤海王) 대언의(大言義)가 죽자 동생 간왕(簡王) 대명충(大明忠)이 섰고 기원(紀元)을 고쳐서 태시(太始)라고 하였는데, 1년 만에 죽자 숙부 대인수(大仁秀)가 서고 연호를 고쳐서 건흥(建興)이라고 하였다. 을사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상사(喪事)를 알렸다.
배도가 대답하였다. "바야흐로 종류별로 모이는 것인데, 사물은 무리로써 나누어지는 것이며 군자와 소인 가운데 뜻과 향하는 것이 같은 사람은 형세로 보아 반드시 서로 모이는 것입니다. 군자가 무리를 이루면 이를 동덕(同德)이라고 하고, 소인들이 무리를 이루면 붕당(朋黨)이라고 합니다. 밖으로는 비록 비슷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현격하게 다르니, 성스러운 주군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이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뿐입니다."
전국(戰國)시대부터 노·장(老·莊)은 유자(儒者)와 다투어 비교하면서 서로 옳고 그르다고 하였다. 한의 말기에 이에 불교가 덧붙여졌는데,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적었다. 진·송(晉·宋) 이래로 날로 번창하여 제왕에서 사민에 이르기까지 높이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랫사람은 죄짓는 것과 복 받는다는 것을 사모하고, 높은 사람은 ‘공(空)’과 ‘유(有)’를 가지고 논란(論難)하였다. 다만 한유는 그것이 재물을 좀먹고 무리들을 현혹시키는 것을 싫어하여 힘써 이를 배척하였고, 그 말은 대부분 격렬하게 만들어졌고 너무 지나쳤다.
오직 ‘송문창사서(送文暢師序)’만이 그 요점을 가장 잘 드러냈다. "무릇 새란 머리 숙여 쪼아 먹고 우러러 사방을 돌아보며, 짐승은 깊은 곳에 살면서 가끔 나오는 것은 다른 물건이 자기에게 해가 될 것을 두려워 하지만 오히려 면치 못한다. 약한 것의 고기는 강한 것의 먹이이다. 지금 나는 문창(文暢)과 편안하게 살며 한가하게 먹으며 넉넉하게 놀면서 살고 죽는 것이지만 금수(禽獸)와 다른 것인데 정녕 그것이 나온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할머니와 함께 사는 홍지(홍시)와 엄마, 아빠와 함께 살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송이. <첫눈 오는 날 찾아온 손님>의 두 주인공이다. 이들의 부모 자리를 대신해서 찾아온 손님은 홍지와 송이의 아쉬움을 채워주는 두 손님 아가씨와 털뭉치.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엄격하고, 항상 피곤해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함께 부모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를 알려준다. 휴일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자는 대신 눈 오는 날 함께 나가 눈사람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아빠, 물건을 잃어버려 야단치는 대신 위로해 줄 수 있는 엄마가 있다면 첫눈 오는 날 손님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을까. <첫눈 오는 날 찾아온 손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비밀친구가 내게도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동감을, 부모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하는 책으로, 독자들은 김리리 작가의 대표작 <떡집> 시리즈와는 다른 색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