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평전 - ‘진리’라 불리던 사악한 사제가 예수였을까?
조철수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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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엣세네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진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을 사제가 교만하게 되어 공동체를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교만한 것은 공동체의 가르침에 준하지 않고 자신의 성경해석을 주장한다는 뜻이다.(p127)... '진리'라는 그 사악한 사제는 엣세네 공동체의 재판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한 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가 선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선동자는 죽어가면서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그의 살에 상처를 받아 시체가 되었다는 해석이다.(p128)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의 저자 조철수의 관점은 새롭다. 일반적으로 인간 예수의 생애는 바리사이(Pharisees) 파와 많은 갈등을 일으킨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는 사건 후 사두가이(Sadducees)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어,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진 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예수 평전>에서는 예수와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집단은 에세네 파(Essenoi)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닌, 에세네 파의 구원자(Messias)인 예수. <예수 평전>에서 그려지는 예수의 모습이다. 


 '진리'라고 불리는 사악한 사제가 속임으로 공동체를 설립한다고 해석하는 엣세네 해석자의 관점을 예수의 전기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들은 예수가 사악한 사제며 거짓 메시아임을 성경에서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하바국서에서 그 실마리를 잡아 예수가 유다의 입맞춤으로 붙잡히게 된 과정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을 때까지를 해석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p136)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은 에세네 파와 '진리'라는 이름의 사제가 만든 에세네 공동체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예수가 '진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임을 주장하면서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탈무드, 미드라쉬와 에세네 파의 전승 기록을 통해 해석한다.



[그림] 에세네 생명의 나무(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139682025918538049/)


 예수 당시의 이야기로 생각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가 자신을 '에메트(진리)'라고 부르는 점이다. 복음서에 전해진 한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이 내 말에 서 있으면 여러분은 진리(에메트)안에 내 제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여러분을 (속박에서) 풀어줄 것입니다.(요한 8 : 31 ~ 32) <예수평전> 中


 예수는 '진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고 바리새와 사두개뿐 아니라 엣세네와 성경해석에 있어 서로 다른 견해로 자주 논쟁을 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는 하바국서를 해석하며 '진리'라고 불리는 사제를 주목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엣세네 공동체는 자신들을 유다 지파의 자손들이라고 불렀다. 엣세네 사람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노고와 엣세네 창시자인 '의로운 교사'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해석이다.(p126) <예수평전> 中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이 사실은 '토라에 대한 지식'의 은유적 표현임을 밝힌다. 본문에서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율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랍비의 모습이다. 다만, 폐쇄적인 에세네 파의 해석을 비판하고 개방성을 강조하는 차이만 있을뿐, 책속의 예수는 유명한 랍비 아키바(Akiva, AD 50 ~ AD135)의 수준으로 그려졌다.


 밀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을 뜻한다. 초기 유대교 현자들은 이러한 지식은 토라 공부를 함으로써 습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p633)...  밀 빵을 먹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토라에 무뢰한이 될 수밖에 없다.(p634) <예수평전> 中


 '생명의 물'은 토라의 가르침이다. 사해문헌에 나오는 '생명수의 우물'과 비슷한 표현이다. 초기 랍비 유대교의 문헌에도 생명의 물은 토라(하느님의 가르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예수가 말하는 생명의 물도 토라를 뜻하지만 그 토라는 바리새나 엣세네처럼 모세오경뿐 아니라 모세오경에 대한 성경해석을 포함한다.(p267)...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빵은 종종 토라를 은유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사람들에게 빵을 먹였다는 이야기는 토라를 가르쳤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p281) <예수평전> 中


 나아가, 책은 예수가 강조한 많은 내용이 남을 위하는 사랑이 아닌, 고도로 계산된 내용임을 당대의 문헌을 통해 논증한다. 마치, 노자(老子)의 '무위(無爲)'가 목적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당대 시대에서 볼 때 가장 현명한 처신이었음을 저자는 밝힌다. 


 예수가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고 말하는 배경을 '솔로몬의 재판'과 비교해서 읽어볼 수 있다. 속옷을 훔쳐갔다고 고소했지만 그것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을 찾지 못한 경우에 재판관은 그 속옷을 반으로 잘라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을 낸다면 그 속옷은 속옷의 가치가 없어진다...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자기 겉옷을 준다고 한다면 재판관은 누가 양심적이며 그 속옷의 주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p363) <예수평전> 中


 본문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평전(評傳)'이라는 말처럼 여기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인간 예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신약성서 내용만을 근거로 예수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당대 다른 역사적 기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전승된 복음서(gospel)를 탈무드와 미드라쉬 해석을 통해 재조명한다는 것이 인간 에수의 삶을 바라보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책에서 밝힌 것은 인간 예수의 모습이 아닌  복음서 사가들의 관점과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영지주의(gnosis)로 향하게 된다. 출발이 '예수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였다'는 가정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와 에세네 파의 대립은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치환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예수 사후 로마 제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던 예수 운동(또는 초기 기독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교리 해석상의 차이가 아닌, 예수 가르침 안에 무엇이 당대인들에게 다가왔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엣세네 문헌에서 '빛과 어둠'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단락에서 빛의 자식들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은 '하느님의 진리'에 있다... 요한복음서나 고린도후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읽어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엣세네의 언어에 익숙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진리'라고 부르는 점은 '진리'의 핵심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권능에 있다는 엣세네의 규례와 비교해 볼 수 있다.(p739) <예수평전> 中


 이와 같이 이 책은 인간 예수의 삶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책이지만, 인간 예수와 예수 공동체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또, <신약성서> 중 복음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이에 대한 해석을 하는 모습에서는 '신앙고백'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영지주의 복음서와 같은 결론에 이른 느낌을 받게되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위와 같은 부분은 아쉽지만, 독창적인 저자의 시도와 당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름의 소득이라 생각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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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4-2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못알고 있는 예알못들이 문제라 봅니다. 퀴어축제때 우리에게 무차별 폭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그들 말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10:57   좋아요 1 | URL
Nam Gi Kim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수는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다‘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기독교(가톨릭) 신자인만큼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적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정말 초기 교회가 지향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고민해야겠지요. 마침 오늘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부활절‘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의미가 있는 오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9-04-2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4-2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님의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로마제국 쇠망사』 생각이 납니다.

여느 역사책과는 다르게,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유대인 민족종교와 신흥 그리스도교 사이에 있었던 ‘교리 갈등‘ 때문에 파생된 다양한 분파들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나사렛파, 에비온파, 그노시스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몬타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 에세네파 등등 문외한인 저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종파들도 참 많더군요.

이뿐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교부, 호교가, 사제들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락탄티우스, 유스티누스 등등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굉장히 자주 언급하는데, 제가 ‘로마의 역사‘를 읽고 있는지 ‘교회사‘를 읽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상세히 다루고 있어서 놀랍더군요. 관심이 있으시면 그 부분(제1권 15장 및 16장, 541쪽 ∼691쪽)을 한번 참고하셔도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20: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oren님. <로마제국 쇠망사>를 축약본으로만 접했는데, oren님 말씀을 듣고 보니 완역본 정주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를 탄압하는 주체에서 제국의 종교로 바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쇠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겨집니다. 로마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복수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전체를 포용하는 세계 종교로서 기독교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역사학자인 기번의 답변이 기대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이 걸어가는 범위만큼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걸어가는 속도 정도로 세상 이치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느낀다. 반면, 내가 속한 사회는 비행기로 갈 수 있는 범위만큼 보여주고, 인터넷 속도로 정보를 뱉어내니 내가 느끼는 한계와 무기력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걷기 예찬」에서 말하는 도시의 사회성을 경험하게 하는 대표 수단인 ‘시각‘을 통해 나는 ‘책을 읽는다‘를 경험하기에, 내 삶 그리고 도시인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걷기 예찬」을 통해 ‘걷기‘와 함께 내가 마주한 현실의 한계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 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p9)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p98)

길을 걷는 사람이 자신의 도시, 혹은 가로나 동네와는 관계는 무엇보다 먼저 어떤 정서적 관계인 동시에 전체적 경험이다... 여러 가지 감각들이 올실과 날실처럼 짜여진 이 조직은 그가 가로를 통해 걸어가는 동안 상황에 따라 도시에 유해하거나 불쾌한 톤을 부여한다. 도시를 걷는 경험은 우리의 몸 전체의 반응을 촉발한다. 매순간 몸의 센스의 감각들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도시는 이리하여 인간의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p187)

 도시 안에서 각종 예배의 장소들, 공원, 묘지 등은 소음으로 포위된 침묵의 영토를 형성하여 주변의 소란을 벗어난 짧은 휴식과 묵상의 순간을 얻게 해준다. 우리는그런 곳에서 가쁜 숨을 돌려 마음을 가다듬고 장소의 혼이 마련해주는 품안에 안겨본다. 침묵은 세계 속에 그 고유한 차원을 마련하고 사물들을 어떤 밀도로 감싸서 그 사물들을 바라볼 때 각 개인의 시선이 갖는  몫을 망각하지 않도록 해준다.  흐르는 시간은 서두름을 모른다.(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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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0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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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4-20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세먼지가 오는 날이 많아진다면 걷기가 구식 행위로 여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은 되도록 걸어가는 편인데요, 걸어간다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해요. ^^;;

겨울호랑이 2019-04-20 10:34   좋아요 1 | URL
예전에 cyrus님께서 맨발로 걸으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생각납니다. 다소 마르신듯한데, 독서를 많이 하심에도 몸매관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cyrus님은 걷기의 건강 전도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cyrus 2019-04-20 10:37   좋아요 1 | URL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꾸준히 하는 운동이 ‘걷기‘입니다. 그것마저 안 하면 몸이 약해졌을 거예요... ㅎㅎㅎ 나이 들면 허벅지 근육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안 줄어들려면 많이 움직여야죠.. ^^;;

겨울호랑이 2019-04-20 10:41   좋아요 0 | URL
^^:) 정말 멋진 생각입니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도 좋겠지만, 현실에서 많이 사용하는 근육을단련 단련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북프리쿠키 2019-04-2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걷는다는 것과 독서는 참 많이 닮았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9-04-20 10:42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책 읽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ㅋ

페크pek0501 2019-04-20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걷는 것 좋아해요. 걸으면서 여러 풍경을 보면 상상력이 발전한다고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0 21:26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 역시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에 치이다 보면 그럴 여유를 내지 못할 때가 있어 아쉽습니다.^^:)

2019-04-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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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와 철학 - 근대 과학의 혁명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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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과 상대성이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합리론과 경험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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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1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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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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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평전 - ‘진리’라 불리던 사악한 사제가 예수였을까?
조철수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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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라쉬」와 「탈무드」를 통해 신약성서를 바라보고, 신약성서를 통해 ‘사제 예수‘의 삶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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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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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은 사랑, 정확하게는 젊은 연인(戀人)들간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모습은 '욕망'에 다름아니다. 내가 느끼는 '욕망'과  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 이를 인식하는 '결핍한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이를 채워주는 상대로서의 ''난 널 사랑해 Je-t-aime'의 '너', 그리고 욕망을 매개하는 언어(sinifiant).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단상>의 배경이 된다.


 마음은 욕망의 기관이다. 마치 상상계의 영역 안에 사로잡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은 내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바로 거기에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마음의 모든 '문제점'이 집결되는 불안이 있다.(p85)... 내가 실제로 충족될까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 해도 괜찮다). 오직 파괴될 수 없는 충족에의 의지만이 찬연히 빛난다.(p89) <사랑의 단상> 中


 욕구불만의 문형은 현존일 것이다.(p34)... 그런데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욕망(desir)이 욕구(besoin)에 짓눌린다. 바로 거기에 사랑의 감정의 집요한 사실이 있다.(p35)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사랑하는 나'는 '욕망의 주체'가 될 것이고, 상대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와 대상은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言語)를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담긴 언어 행위를 통해 사랑은 이루어지기도, 깨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intraitalbe) 것을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p13) <사랑의 단상> 中


 이런 담론의 파편들을 우리는 문형(fingure)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생동감 넘치는, 즉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아닌 행동하는 상태에서 포착된 몸짓이다.(p14)... 우리를 스쳐가는 담론 속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 즉 언젠가 읽고 듣고 느꼈던 것에 의해 문형은 차려진다...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안내자 외에는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p15) <사랑의 단상> 中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p7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에서 낱말이 중요하지 않다. 낱말과 낱말이 모여 만들어낸 문장. 그리고,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 행위의 시간 속에서 오가는 감정을 저자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등과 같은 고전의 지지를 받는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p30)... 하나의 (고전적인)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한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남여양성겸유자(androgyne)의 두 반쪽은 서로를 갈망한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Hiimeros)'가.)(p33) <사랑의 단상> 中


 육체의 모든 주름(plis)에 대해 나는 '근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근사해란, 그것은 유일하기 때문에 내 욕망이야란 뜻이다... 그렇지만 내 욕망의 특이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이름짓기는 힘들어진다. 과녁의 정확함에 이름의 흔들림이 대응한다. 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p41)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은 연애와 관련한 여러 모습이 담겨 있다. 떠난 이에 대한 아쉬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과 상황. 만남에서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과정에서 중심은 내 자신이며, 사랑은 '욕망'으로 표현된다. '욕망'을 통해 연애의 사랑을 쫓아가는 <사랑의 단상>의 접근법은 연애 경험이 있는 또는 연애중인 이들에게 추억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단상>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렇지만, 만약<사랑의 단상>의 사랑에 대한 접근법에 동감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충족시키고(충족되고), 축적한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여분(trop)을 만들어 내며, 바로 이 여분 속에서 충족이 내도한다.(p87)... 모든 '만족감(satisfaction)'을 뒤로 한 채, 과음(soul)이나 포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포만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겨움, 구역질, 취기 대신에 일치(Coincidence)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침'이 나를 알맍은 것으로 인도한다.(p88)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실의 범주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이다.(p97)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첫 고백 이후 모든 언어 행동은 무의미하다. 이미 '사랑'의 뜻은 전해졌으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받고 싶기에,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또한, 말을 하는 이 역시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일종의 '자기 강화'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어를 단순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번 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 널 사랑해 Je-t-aime'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 말을 그것의 관여성(pertinence) 여부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되풀이할 따름이다. 그것은 언어에서 나와 어디로 배회할 것인지?(p21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p197) <사랑의 단상> 中


 또한, 우리가 사랑할수록 더 모호함에 빠진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보자.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알아가지만, 또한 우리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연인의 이데아(idea)를 깨나가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짝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할수록 자기 자신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함에 빠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내면에 있는 비밀이 사랑을 통해 외부로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비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체험이겠지만.


 정보 제공자는 나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하나의 비밀을 드러나게 한다. 이 비밀은 심오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에게 감추어졌던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이 외부이다. 막은 거꾸로 열린다. 내밀한 장면이 아닌 관중석에서,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p203)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인내심은 그 출발부터 자체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이나 자제력, 속임수,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격심해도 닮지 않는 그런 불행이다.(p20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사랑이 좋은 결실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닐것이다. 변하지 않고 바래지 않는 '영원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욕망하고 그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거나, 그것을 가질 수 있어서(욕망의 충족) 행복하다는 것은 말그대로 사랑의 단면(斷面)이라 여겨진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p213) <사랑의 단상> 中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 한 편의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면, 헤어짐 역시 완성된 사랑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해석을 믿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말은 모두 진실의 기호로 받아들여, 내가 말할 때 그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지 어떤지는 의문시하지 않으련다. 바로 여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무엇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야만 하고, 또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p307) <사랑의 단상> 中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는 약속이다. 이 말에 담겨진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의 무게는 현재가 아닌 미래(未來)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라본다면, 연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사랑을 알고 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유한한 인간 삶을 통해 궂은 일, 좋은 일을 함께 겪고 '영원(永遠)의 상' 아래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단상>이 대상으로 하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림] Prince and princess(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65564531992133/)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대부분의 동화가 위와 같은 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결혼식 이후'부터 시작된다. 아쉽게도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에서의 사랑과 욕망.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범위의 한계라 여겨진다.


 사람과 관련한 많은 예술 작품이 있지만, 그 안의 어느 작품도 온전하게 사랑을 담지 못하고, 담아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하는 사랑 역시 그런 점에서 사랑의 일부일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해 일관점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오랜 추억으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단상>은 좋은 책임을 확인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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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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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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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16: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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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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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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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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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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