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흔들리는 분단체제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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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라는 낱말이 한갓 수사를 넘어 개념의 수준에 이를 때 비로소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라는 표현은 -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 이라는 동어반복과는 달리 -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된다.(p11)... 세 가지 의미의 '체제'를 동일선상에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일견 복잡성을 더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란을 제거하는 데 이바지 한다. 곧, 세계체제와 그 속의 분단체제 그리고 후자를 구성하는 두 분단국가의 '체제'는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하면서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4/172

일국 사회 역시 사회분석의 기본단위일 수는 없고 '세계체제'의 하위체제(sub system)에 해당한다는 것이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등의 세계체제분석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시각인데, 그렇다고 이것이 일국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근대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토대를 지닌 사회이면서 많은 수의 일국사회들이 모인 열국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경제적 실체로서의 계급은 엄밀히 말해 세계체제 전체 차원에서 규정되지만, 그 자기형성과정이나 정치투쟁의 전개는 일국사회 차원의 고려를 떠나서는 무의미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급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해질 수 없는데, 단지 그 점이 한반도처럼 분단체제라는 특이한 중간항이 끼여들었을 때에 더욱 도드라질 따름인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25/172

분단체제라고 할 때는 그 대랍항을 분단되어 있는 남과 북으로 잡기보다는 남과 북의 수구세력이 극과 극으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교묘한 공생관계에 있는 그러한 체제와, 그 공생관계에서 소외되고 그로부터 고통을 받는 남북한의 다수 민중, 이 둘이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견해입니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94/172

저자는 분단체제를 '세계체제-분단체제-남북 내 체제'의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세계체제의 흐름이 90년대 이후 '자본주의(資本主義)' 일방으로 흐르는 반면, 분단체제의 흐름은 남북 수구 세력의 현실고착화 움직임으로 유지되고, 각 체제 내부에서는 생태, 계급, 민족, 여성 문제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가 대두되는 상호연결적 관계. 저자는 분단 문제를 단순한 남북의 대립 구조 안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각기 완결된 체제가 못 되는 이유가 이처럼 단순히 세계체제의 하위범주라서만이 아니고, 분단이 되지 않은 국가들과는 달리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하위체제의 경우에는 그들이 세계체제에 참여하고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그 내부에 작동하는 방식이 일정하게 구조화된 분단현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단체제'라는 또 하나의 체제 개념이 끼여들 수밖에 없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5/172

'운동'이라는 말은 일상성과의 미묘한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일상성의 틀에서 벗어난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이 운동이면서, 다른 한편 그 노력이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고 그야말로 하나의 운동으로 지속되자면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1/172

이처럼 분단의 문제를 체제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힘들이 충돌로 해석한다면, 이것을 화해로 이끄는 과정은 단순한 방적식이 아닌 복잡한 방정식의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보다 안정적인 세계경제상황 아래에서 남북 양측의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복지사회가 사회적, 인류적 차원에서 합의된다라면 각 체제의 모든 변수(變數)를 만족시킬 해(解)가 되겠지만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해찾기 방법은 '시행착오법 trial and error'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남북 정권이 각기 얼마만큼 장애가 되고 얼마만큼의 이바지를 할 수 있을지는 민중의 입장에서 판별하여 대응할 일인바, '민중의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남북 민중들의 때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포괄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는 만큼 남북의 정권 및 정부에의 대응도 다원고차방정식(多元高次方程式)의 일부로 지혜롭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이 다원방정식에는 당연히 분단체제의 상위체제인 세계체제의 작동이 반영되어야 하고,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을 중요한 변수로 대입해야 한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7/172

남북민중의 일차적 과제는 남북 각각의 현장에서 벌이는 독자적인 현실개혁운동 겸 분단체제변혁운동이다. 또한 분단체제가 스스로 완결된 체제가 아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하위체제 가운데 하나이므로 남북 민중이 연대한 이 운동은 곧바로 세계적 차원의 현실개혁운동이며, 현존 세계체제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세계 민중의 욕구를 실현할 수 없을뿐더러 생태계파괴를 통한 인류공멸의 운명을 재촉하는 체제임을 인식하는 모든 사람들과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가능케 하며 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65/172

모든 조건이 충족된 최선(最善)의 해를 찾는 대신, 분단과 맞닿아 있는 모든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개선을 이루어가면서, 그때마다 상황에 맞는 해를 찾아가는 방식. 이 방식이 저자가 말하는 '변혁적 중도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책 자체는 1998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다. 그렇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 - 분단을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차원에서 파악하지 않고, 1953년 판문점 체제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다 영속적인 체제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이해집단들의 견제와 균형이 만들어 낸 세계체제의 일부로 파악 - 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분단이라는 상황과 사회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상황을 인식해야 할 것인가.

불안정성 또한 하나의 운동으로 인식하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이전 과는 다른 해법을 우리는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통일 이전에 분단체제의 문제를 풀기 위한 준비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지난 20대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사회적 갈등을 단순히 위기상황으로 보는 대신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시행착오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잘못된 풀이가 훗날 해찾는 묘수가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중요한 것은 물론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당장에 선택할 방어적 전략의 내용도 여기에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하위체제요 세계체제의 수명은 이 하위체제보다 길 것이라는 전망이 정확하다면, 분단체제가 극복된다 해서 우리가 곧바로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48/172

'정신'으로 근본을 삼자는 정산의 주장을 단지 종교인의 '거룩한 말씀'으로 치부하기는 어렵겠다. 물론 사람마다 수양이 완벽해진 후에야 통일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면 이는 통일이건 건국이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선후관계가 아니라 일의 본말로서 어느정도의 정신자세 확립이 근본이 된다는 주장이라면 이는 얼마든지 용납할 만한 주장이며, 그 실제 내용이 얼마나 사리에 맞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p146)... 다수 민중의 수준높은 정신수양이 갖춰지기 전에 강압적으로 물질적 평등부터 구현하고 보자는 '현실사회주의식'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바로 평등사상의 그러한 '진실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결과라는 해석이 오늘날 적지 않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4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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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사람들이 구상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체적 역사체험에 걸맞은 새로운 연방적 구조이며, 그같은 구상이 없이는 ‘국가연합이라는 에움길’마저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 새로운 연방 구상에 반영될 체험은, 한편으로 적어도 10세기에 걸친 정치적 통일성과 아울러 예외적으로 높은 인종적·언어적 동질성을 지금껏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 분단의 오랜 지속과 엄혹함 탓에 이미 상이한 국민형성의 몇몇 단초적 양상을 보이고 있기도 한 주민집단의 경험을 당연히 포함한다. 동시에 그 구상은 국가연합적 ‘에움길’의 체험 그 자체도 반영해야 할 텐데, 국가연합의 성립은 영구분단론자들에게는 십중팔구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가하는 한편, 현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인구이동의 적절한 통제 및 점진적이고 상호협상에 의한 군비축소를 위해 ‘민족에 대한 공화주의적 또는 민주적 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안되지 않는 합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남북의 기득권세력들이 분단의 유지에 어느정도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분단체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분단이데올로기는 남한의 극우반공논리로 한정될 수 없다. 북한식 통일지상주의 역시 그것이 북쪽의 분단정권 유지에 필요할뿐더러 객관적으로 남쪽의 반공세력을 강화하는 작용마저 한다는 점에서 북한판 분단이데올로기라 하겠으며, 이렇게 극좌와 극우를 오가며 변신할 수 있는 것이 분단이데올로기라면 상황에 따라 또다른 변종도 낳을 수 있다고 보아야 옳다.

굶주리는 동포를 우선 돕고 보자는 공감대는 이제 남한에서도 뒤늦게나마 확산되고 있다. 이때 제시되는 가장 흔한 논리는, 기근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는 인류애와 동포애가 먼저고 이런저런 정치적 고려를 개입시킬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논리인 동시에, 극우세력 일부가 최소한의 인도적인 조치에 대해서조차 ‘군량미로의 전용’ 운운하면서 아직도 제동을 걸려고 하는 작태를 볼 때 이 ‘비정치적’ 논리가 그나름의 정치적인 효험을 지니기도 한다.

따라서 변혁의 전망은 분단체제를 넘어 당연히 그 상위체제인 세계체제까지도 대상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이 경우에도 일정한 역사적 여건이 무르익기 전에는 부분적인 개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요,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의 혁명조차도 세계체제의 맥락에서는 개량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개악일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분단체제의 변혁 또한 세계시장의 논리 자체를 철폐하는 세계사 차원의 변혁에는 미달하리라는 것이 냉엄한 현실인데, 그러나 이 부분적인 개선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쨌든 인류사회의 개선이지 개악이 안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세계체제의 실상에 근거한 변혁의 비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다수 민중의 수준높은 정신수양이 갖춰지기 전에 강압적으로 물질적 평등부터 구현하고 보자는 ‘현실사회주의식’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바로 평등사상의 그러한 ‘진실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결과라는 해석이 오늘날 적지 않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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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무기와 침도(針刀, 의술용)는 모두 반입될 수 없었고, 황상이 전(錢)과 비단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얻지 못하였으며, 종이와 붓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주지 않았다. 당시 날씨가 대단히 추웠는데 빈어와 공주들은 의복과 이불이 없었으니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유계술 등은 조서를 고쳐가지고 태자에게 감국(監國)하게 하고, 태자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왔다.

무릇 인주(人主)께서 중시할 것으로는 신뢰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이미 이러한 조서가 내려졌다면 그를 지키는 것이 마땅히 견고해야 하고, 만약 다시 한 사람이라도 도륙한다면 사람마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무릇 제왕(帝王)의 도리란 당연히 중후(重厚)함을 가지고 그들을 진정시켜야 하며, 공정(公正)함을 가지고 그들을 제어해야 하는 것이고,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교활한 음모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쪽에 계기가 생기면 저쪽에 계기가 호응하게 되어 끝내 큰 공로를 이룰 수 없게 되니, 이른바 누에고치의 실을 잘 정리하려 하다가 오히려 더욱 헝클어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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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세 가지 의미의 ‘체제’를 동일선상에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일견 복잡성을 더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란을 제거하는 데 이바지한다. 곧, 세계체제와 그 속의 분단체제 그리고 후자를 구성하는 두 분단국가의 ‘체제’는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하면서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이다.

남북한이 각기 완결된 체제가 못 되는 이유가 이처럼 단순히 세계체제의 하위범주라서만이 아니고, 분단이 되지 않은 국가들과는 달리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하위체제의 경우에는 그들이 세계체제에 참여하고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그 내부에 작동하는 방식이 일정하게 구조화된 분단현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단체제’라는 또 하나의 체제 개념이 끼여들 수밖에 없다.

남북한에 걸친 분단체제와 이에 맞선 남북한 민중을 대립의 기본축으로 잡을 경우, 남북한 당국의 합의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민중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증대하게끔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고, 이 과정에서 쌍방 정권들의 입장이 얼마나 대등하게 반영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분단체제극복 구상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물론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지는 사태다. 전쟁재발은 설혹 그 결과가 6·25보다 더욱 심한 한반도의 초토화와 민족의 대살상까지는 안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민중의 창의력이 발휘되는 통일에는 결정적인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전쟁의 가능성은 단순히 기득권세력의 선동이나 협박으로 돌릴 일이 아니고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할 문제이다.

일국사회 역시 사회분석의 기본단위일 수는 없고 ‘세계체제’의 하위체제(subsystem)에 해당한다는 것이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등의 세계체제분석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시각인데, 그렇다고 이것이 일국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토대를 지닌 사회이면서 많은 수의 일국사회들이 모인 열국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경제적 실체로서의 계급은 엄밀히 말해 세계체제 전체 차원에서 규정되지만, 그 자기형성과정이나 정치투쟁의 전개는 일국사회 차원의 고려를 떠나서는 무의미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급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해질 수 없는데, 단지 그 점이 한반도처럼 분단체제라는 특이한 중간항이 끼여들었을 때에 더욱 도드라질 따름인 것이다.

그는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의 영국, 2차대전 이래의 미국 등 세 개의 패권국가가 그때그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큰 틀 안에서지만─세 개의 상이한 ‘근대’를 경험해왔다고 주장한다. 그중 첫 단계의 특징을 중상주의, 둘째 단계를 산업주의라고 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제3단계는 ‘대량소비’의 세계요,

중요한 것은 물론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당장에 선택할 방어적 전략의 내용도 여기에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하위체제요 세계체제의 수명은 이 하위체제보다 길 것이라는 전망이 정확하다면, 분단체제가 극복된다 해서 우리가 곧바로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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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이전 해(기원전 217년)에 집정관과 그의 병력을 트라시메네 호수에서 잃었고, 이젠 그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 강도는 훨씬 더 큰 참사를 당했다. 두 집정관의 군대가 전멸했고, 두 집정관도 전사했다. 로마는 전장에 내보낼 병력이 없었다. 지휘관은 물론 병사 한 사람도 없었다. 아풀리아와 삼니움은 한니발의 손에 떨어졌다. 이제 거의 모든 이탈리아가 그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참사를 연달아 겪으며 압도당한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11/1584


 칸나이의 대패가 이전 패배들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건 이후 로마의 동맹이 보인 행동에서 드러났다. 운명의 날 전만 해도 그들의 충성은 확고했다. 하지만 이젠 그 충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이 앞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35/1584


 그런 상황에서 등장했던 젊은 청년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235~BC183)였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고국에서 젊은 청년 스키피오는 체제를 정비하는데 앞장서고, 히스파니아(Hospania, 현재 에스파니아)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대신해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Hasdrubal Barca, ? ~ BC207)을 견제하고, 훗날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202)에서 한니발을 패퇴시키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마무리한다.


 만장일치로 지휘권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무척 젊은 청년인 스키피오에게 돌아갔다. 네 명의 천인대장은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어떤 조처를 해야 할지 논의했는데, 이때 전직 집정관의 아들 필루스가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그는 많은 귀족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툴루스를 따라 바다로 눈을 돌려 이탈리아를 버리고 타국 군주에게 도망칠 계획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모든 걸 잃었기에 희망을 간직하는 일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장차 고통과 절망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07/1584


 그때까지 시민들은 막중한 지휘권을 충분히 맡을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입후보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자 전사한 두 장군의 공백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들이 겪었던 패배의 고통이 되살아났다(p797)... 그런 분위기가 팽배할 즈음에 갑자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즉 스페인에서 전사한 푸르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24세 가량의 젊은이가 자신이 사령관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평민은 함성을 지르며 만장일치로 입후보를 허락하며 행운이 함께할 것이며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성원했다... 하지만 일이 끝나서 갑작스러운 충동이 사라지고 머리를 식힐 여유가 생기자 어색함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건전한 상식보다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른 게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키피오의 나이가 시민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798/1584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2030의 표심이 모처럼 정치권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표심에 따라 대선의 결과가 크게 요동친 것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을 배제한 정치는 이제 자리잡기 힘들다는 인식이 점차 퍼져나가는 듯하여 반갑다. 일찌감치 젊은 당대표를 선출하여 선거에 임한 국민의 힘과 선거 패배 이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에 '불꽃' 박지현을 비롯한 청년들의 참여가 대거 이뤄졌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정치 역량 등에 대해 정치전문가들의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 관점에서 대선패배가 선거 후폭풍으로 당권을 장악하려는 내부싸움 대신 새로운 인재 영입과 청년정치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면, 보다 더 의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한가지 우려되는 지점은 대선으로부터 불과 2개월 남짓 후에 치뤄질 선거의 패배를 이들에게 지우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 비대위의 청년 정치인들이 스키피오처럼 극적인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은 분명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이번 지방선거에서 숨지 않고 전면에 나선 젊은 청년들에게 다음 선거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자리가 되고,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정치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기원하고 그들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스키피오의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무모했던 것이, 당시 스키피오도 잘 알고 있던 바, 하스드루발 바르카스는 정부로부터 갈리아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스키피오의 귀환이 지체된다면 이베르강에 남았던 군대로는 카르타고 공세를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사령관이 기습 공격을 위해 긴급한 임무를 방기한 채 뛰어들었던 위험한 장난은, 스키피오와 넵투누스 신이 합작하여 거둔 전설적 성공 덕분에 가려졌다. 기적에 가까운 페니키아인의 주요 도시 함락은 비범한 청년에게 걸었던 기대 전체를 정당화했거니와 다른 말은 있을 수 없었다. _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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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3-14 1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침에 했던 걱정을 정말 깊이 풀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거의 승패여부를 떠나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유능한 청년들이 기성정치속에서 선거용이 아니라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자리 잡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2-03-14 16:36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께서 같은 생각을 해주시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어쩌면 이번 선거에서 0.8% 차이로 이겼다고 하더라도 청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고 그들만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더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아쉬운 선거결과지만, 결과가 가져온 영향이 긍정적일 때 훗날 정치사에서 의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시무스님 행복한 저녁 되세요! ^^:)

레삭매냐 2022-03-14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를 통해 386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시절이 지나갔음을
받아 들이고, 말 그대로 쿨하게
용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청년들에게 문호
를 개방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를
외친 그들이 신예 정치인들을 양
성하지 않은 후과에 대해서도 반
성하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4 16:42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386의 결집이 노무현을 만들었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이제는 586이 된 세대들의 공과라 생각됩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과제를 넘겨주고 역사의 주역이 아닌 조연의 자리로 내려가야 할 시기임을 이번 선거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치인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