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건대,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부드러운 권력 장치(agencement)이다. 수직적 착취나 수탈을 노골화하지 않고, 인권과 노동권을 배려하는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더 많은 존재의 필요와 욕망을 연루시키며 자가발전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를 계속 질문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세계 존재들의 삶과 상상력 자체를 제약하고 포획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일의 현장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와 포스트-포드주의의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공간을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을까. 이곳에서 노동자/자본가(사업자)/소비자 식의 구획된 정체성은 이전보다 쉽게 무화된다.

플랫폼 배달노동자가 법적으로는 자기사업자(사장님)이지만 실제로는 고된 작업현장의 노동자라는 이중구속적 상황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당사자 자신마저 분열시킨다.

오늘날 통치술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오지 않은 시간을 현재의 비관에 접합해 ‘현재의 것’으로 선취하고 전유하고자 한다. 자주 사용되는 ‘선제(先制, pre-emption)’와 같은 말도 그와 관련된다. 통치술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득한 목적지로서의 희망을 맹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미래를 암흑으로 선취하려는 힘의 속임수는 정확히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체계다. 압도적인 것, 바깥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맹목적 믿음에 의해 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믿음 혹은 오인의 구조를 질문하지 않는 상상력이 오히려 질문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묻는 대신에, 거꾸로 우리가 자본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생태 담론은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세계와 환경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와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풍부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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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향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거버넌스의 본질과 우리가 스스로를 사회적 유기체로 보는 방식에 대해 신선한 사고가 부상하고 있다. 회복력 시대에 거버넌스는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에서 지역 생태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된다.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대륙권과 수권과 대기권을 포함하는 19킬로미터의 지구 생물권, 즉 생명이 펼쳐지는 지구의 권역에 적응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훨씬 더 확산될 것이다.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효율성이 그렇게 현대성의 시간적 동력이 되었다. 효율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이용을 재정립했다. 그 이용에는 효율성이 시간을 절약하고, 축적하고, 구매하고, 연장하며 이렇게 연장된 시간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에까지 임대한다는 전제가 함축적으로 담겼다.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면서 인류는 지구의 거대한 권역은 물론이고 화학과 물리학, 생물학을 구성하는 지구의 여타 작용까지 인클로저의 대상으로 삼고 부분적으로 사유화하고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종은 그렇게 지구에 존재한 그 짧은 기간에 유례없는 효율성이 주도하는 쾌락주의적 열정으로 모든 것을 사로잡고 약탈하고 소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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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W. D. 로스 지음, 김진성 옮김 / 누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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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Theaitetos>에서는 제기된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난관(aporia)에 봉착되고, 소크라테스는 테오도로스와 동틀 녘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밤사이 무너져 내린 대화의 논리 대신 떠오르는 햇살이 비친 후 드러나는 것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데아(idea)이며, 필멸의 감각 너머에 있는 불멸의 형상(形像) 그리고 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유(思惟)와 상기(想起)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이 사실상 기대고 있는 근거들을 아주 풍부하게 서술하는 곳은 <테아이테토스>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론은 감각과 앎[인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고, 앎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존재들을 그 자신의 대상들로 요구한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각과 앎의 차이에 관한 가장 정교한 증명을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곳도 <테아이테토스>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명시적으로 <티마이오스>에서 말하듯이, 그의 이론은 앎과 참인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가장 정교한 증명이 <테아이테토스>에 제시되어 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20


 

 형상은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동굴 안의 우리는 동굴 밖 태양과도 같은 불변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魂)이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논증에 실패하며 마무리되는 <테아이테토스>의 논리 붕괴는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긍정을 의미한다.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자체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플라톤)는 [정견] 인식= 인식에 의거한 바른 견해라는 관점에 이릅니다. 가능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지각도, 바른 견해도, 이성에 의한 정견도 인식일수는 없을 겁니다. _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외 (유고 1864 가을 ~)>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 p120/387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로서 진리에 근접하는 경계면은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면서 판단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데는 실패할 지라도, 동굴 속의 흐릿한 불로 간접적으로 형상을 인지하듯 개별적인 특징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며 더듬으며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는 수많은 은유를 통해 논리를 끌어가는 방식은 이데아가 드러난 구체성으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형상의 세계로의 여정 - 양극과 유비- 이라 할 것이다.


 그(플라톤)는 한 가지 감각만의 대상들인 소리와 색과 같은 대상들과, 우리가 여러 감각의 대상들에 공통된 것으로 인정하는 특징들 - 존재와 비존재, 다름과 같음, 둘임과 하나임, 비슷하지 않음과 비슷함, 짝수임과 홀수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 모두' - 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뒤의 것들은 감각이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두 가지 접근 관점으로부터 플라톤은 아주 폭넓게 미치는 속성들의 부류를 따로 뽑아내는 데에 이른다. 이것을 이후 사상가들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로 인정하게 되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19


 현실 속에서 이데아는 서술된다. 그 서술은 언제나 거짓되지 않고 참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가 연결되며, 이러한 세계관은 고대를 넘어 중세로까지 이어지며,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로 대체된다. 


 196c  왜냐하면 이런 일을 겪는 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린 거짓된 판단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사실은 거짓된 판단이 없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87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의 신 존재 증명은 순수 사유에 의한 이데아의 인식과 언제나 참인 판단에 의한 논증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 거칠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존재성에 대한 판단 유무로 존재성을 부여하며, 이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증명하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테아이테토스>의 깊은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6


 그런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실재는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의 하느님인 당신입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8


 이러한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은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논박한다. 플라톤의 논리- 서술 자체가 참이며, 실존을 증명한다 - 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형상의 세계가 감각의 세계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네가 "실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것은 황금 산이야"라고 말할 경우, 나는 황금산이라는 구에 일종의 실존 existence을 돌리고 있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플라톤의 이데아는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어는 동사와 형용사로 설명된다. '스콧은 스코를랜드인이다', '스콧은 1771년에 태어났다', '스콧은 아이반호도 썼다'와 같이 스콧은 여러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된 문장 하나하나가 스콧의 존재성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존재성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존재성에 대한 별도의 기술로만 참/거짓 판단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논증에서와 같이 서술되었다는 것만으로 실증되거나, 사유만으로 실재를 파악한다는 안셀무스의 논증은 기술이론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사유는 결코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더욱이 형상의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것 the so-and-so'이라는 형식의 구를 포함한 진술은 올바르게 분석될 때, '그러한 것'이라는 구가 사라진다. "스콧은 <웨이벌리>의 저자였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기술 이론은 이러한 진술을 "한 사람이,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이 <웨이벌리>를 저술했으며, 그 사람은 스콧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는 더 충분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x가 c라면 'x는 <웨이벌리>를 썼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된 존재 entity가 있고, 더욱이 c는 스콧이다." '더욱이'라는 낱말 앞에 첫 부분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혹은 실존했거나 실존할 것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정의한다. 따라서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의미한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적 존재는 없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기술 이론에 따르면 '실존'은 기술구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스콧이 실존한다"라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되어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1/1474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를 통해 아포리아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감각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며, 이로부터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여백으로 제시했다면, 러셀은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사실은 '존재에 관한 서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서술의 집합으로서의 '감각의 이데아'를 보여주며 고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형상의 속성이 실은 감각의 연장임이 드러났다. 실존은 과연 서술 안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페이퍼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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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는 일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점에 와 있다. 거시적인 시야로 참사 이후 떠오른 과제 및 질문을 차분히 추리고 벼려보는 동시에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여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연속적인 현상이라 말할 근거도 여기서 재차 확인된다. 둘 다 ‘전체’의 쇠락을 불가피하다고 보되 다만 그것을 향수 어린 비애감으로 돌아보느냐 아니면 긴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경축하느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총체성 개념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빈틈없이 완결된 전체로 물신화하지 않느냐는 우려에 관해서는,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라 강조한 지젝의 설명이 적실하다.

이행은 예시와 다르게 지금-여기에서 출발하여 심연 같은 간극을 한걸음씩 채워야 하고, 이 과정이 참된 이행이기 위해서는 또한 ‘전체’를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가갈 ‘도래하기 어려운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만큼이나 다양하게 제출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이르러 돌봄활동 속 젠더 역학이 뚜렷이 폭로되었다. 동시에 돌봄이 여성이나 주변인의 일로 간주된 채 급격히 시장화하고 공공 시스템이 부재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조밀하게 드러났다.인물, 계층, 세대 간 갈등이나 시장 안의 수요자와 제공자 사이의 갈등이 전경화하는 가운데, 돌봄을 둘러싼 ‘가부장×자본’의 문제가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음도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런 폭로는 돌봄이 시장의 교환체계 속에 고착해 있다는 착시를 만들거나 고된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활동의 특수성과 정동을 망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돌봄 혹은 소외된 노동은 시민권을 얻는 동시에 여전히 폄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갇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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