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을 도입하기 위해 시인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아울러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 관한 담론을 ‘가능한 세계’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가 역사 서술보다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했다.

연민은 불행에 빠진 주인공을 향한 연민이며 공포는 재난의 잔인함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감정에 참여하면서 관객 혹은 독자는 카타르시스 혹은 정화를 경험한다. 즉 주인공의 고통에 참여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그가 메타포에 ‘인식의 기능’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포를 이해하는 것이 "유사한 개념" 혹은 "비슷한 것들을 포착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방 이론에만 집착한다면, 예를 들어 새들이 화가 제우시스Zeusis가 그린 포도 알들을 쪼아 먹으러 모여 들었다는 전설만 중요시한다면(이것이 바로 예술을 모방의 모방으로 보고 비판하던 플라톤이 예술을 이해하던 방식이다) 『시학』의 핵심적인 내용, 즉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방과 관련된 부분은 놓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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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42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진인혜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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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법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시민법은 소유권을 가져다주었다. 소유권에 관한 법으로만 결정해야 할 것을 자유의 법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자유의 법은, 우리가 말했듯이, 단지 국가의 지배권에 불과하다. 개인의 이익은 공익에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1


 앞서 논의에 이어서 샤를 드 몽테스키외 (Montesquieu Charles Louis de Secondat, 1689~1755)는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3-3>에서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만민법,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를 확립하는 정치법, 시민들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시민법이 서로 충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정치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야 할 때, 시민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국가의 소유권에서 유래하는 규칙과 국가의 자유에서 비롯되는 규칙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의 핵심이 보일 것이다(p93)... 계승 순서를 확정하는 것은 지배 왕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왕가가 있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속을 규정하는 법은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법이다. 왕위계승을 규정하는 법은 국가의 이익과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법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3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사안에 따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국제법, 헌법, 민법의 적용 부문이 서로 다르며 이들은 서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법의 규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을 때 법은 지나친 자유와 목적에 맞지 않게 되는 두 극단을 오가게 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중용'의 정신이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용(中庸)의 정신이 입법자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선(善)은 도덕적 선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 있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29


 몽테스키외의 정체는 플라톤(Platon, BCE 427~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와 달리 확정적이지 않다. 풍토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宗敎)와 정체(政體)가 자리하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최선의 정체는 저마다 다르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풍토에 따라 자리할 수 있는 종교가 결정되고, 종교의 성격에 따라 더 적합한 정체가 결정된다. 전제정체는 이슬람교에 더 적합하고, 제한된 정체는 기독교에 더 적합하지만 보다 독립적인 개신교에는 공화정체가, 가톨릭은 군주정체가 더 어울린다.


 풍토에 토대를 둔 종교가 다른 나라의 풍토와 몹시 충돌할 때, 그 종교는 그 나라에 수립될 수 없었다. 그곳에 도입되어도 곧 사라졌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경계를 정해준 것은 바로 풍토인 듯하다. 그러므로 종교는 특수한 교리와 일반적인 종교의식을 갖는 것이 거의 언제나 적당하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5


 기독교가 2세기 전에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는 불행한 분열을 겪었을 때, 북쪽의 민족은 개신교를 선택하고, 남쪽의 민족은 가톨릭을 유지했다. 북쪽 민족은 남쪽 민족이 갖지 않은 독립정신과 자유정신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텐데,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는 종교는 그런 지도자가 있는 종교보다 독립적 풍토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5


 법에 의한 통치(法治)가 이루어지지 않는 전제정을 제외한 군주정체와 공화정체는 법을 필요로 하는데 법의 지향은 바로 훌륭한 자질을 보존하고 계승시켜 국가의 힘을 보다 강대하게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적절한 법의 규칙 적용이며, 입법의 정신 - 중용 - 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러한 자신의 논거를 로마와 프랑스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뒷받침한다.


  프랑스에서 대머리왕 카롤루스의 나약한 정신은 나라도 똑같이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독일인 루도비쿠스와 그를 계승한 몇몇 사람들은 더 훌륭한 자질을 가졌으므로, 그들 국가의 힘은 더 오래 유지되었다. 아니, 어쩌면 독일 국민의 차분한 기질, 그리고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들 정신의 불변성이 프랑스 국민의 기질보다 그런 추세에 더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00


 이처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삼권분립에 대한 주장만을 담고 있지 않다. 정체와 관련하여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는 다르게 자연 풍토까지 고려한 최선이 아닌 최적의 정체를 말하고, 이를 위해 플라톤의 <법률>에서처럼 중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 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국론 De civitate Dei>과 같이 로마와 프랑스 역사를 갖고 온 점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온다. <법의 정신>과 함께 이상의 책들을 읽는다면 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기독교는 단순한 전제정체와는 거리가 멀다. 복음서에서 온화함이 그토톡 권장되고 있으니, 기독교는 군주가 벌을 주고 잔인함을 행사하는 전제적인 분노와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인간적이다. 그들은 법을 만들려는 의향이 더 많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p22)... 기독교 덕분에 통치에서는 정치법을, 전쟁에서는 만민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제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만민법 덕분에, 우리는 승리를 해도 패배한 민족에게 생명, 자유, 법, 재산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그대로 남겨준다. - P23

종교에 관한 정치법의 근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라 안에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새로운 종교를 정착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가 나라 안에 정착하면, 그것을 관용해야 한다. - P60

법의 문체는 간결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단순해야 한다(p243)... 법은 미묘해서는 안 된다(p245)... 충분한 이유 없이 법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p246)... 법에는 순수함이 필요하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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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건축은 일본 국내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건축가가 동아시아의 일본 식민지에 파견돼 공부한 결과를 일본 바깥에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 도달한 건축물 몇몇은 중국 내 세계적 수준의 건축물들을 접하면서 쌓은 견문과 지식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정금은행 다롄지점이나 초대 대만은행 본점 등 식민지 은행의 점포는 대부분 지배 지역에 거점을 둔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것이 식민지 건축의 본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대만은행 본점과 만주중앙은행 본점만 도쿄에 거점을 둔 니시무라 요시토키가 설계했는데, 이는 만주사변 발발과 만주국 성립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변하고 일본과 지배 지역 간 결합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설할 수 있다.

식민지 은행 건물은 은행 조직이 변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례가 많다. 조선은행 본점은 1950년 한국은행 본점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쓰였다. 한국은행이 기존 건물 서쪽에 고층 빌딩을 새로 지어 본점을 이전한 후에 구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노무라가 대만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은 그의 대만총독부 영선과장 경력에 조선총독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 설계에서 보여준 노무라의 업적을 고려해 당시 설계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그의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오노기가 대만총독부에서 만철로 옮겨 간 일이다. 이는 만철 건축 조직이 지배 지역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의미를 띠었다. 즉, 이민족 지배나 일본과는 다른 기후나 풍토를 겪어보지 못한 만철의 일본 건축가·건축기술자들이 만철 본사가 다롄으로 이전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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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2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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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어떤 시대의 철학보다 중세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중세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려 한다면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장애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언어상의 장애물, 전문성과 관련된 장애물, 종교적 장애물 그리고 소속 교단과 관련된 장애물이 존재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머리말, p15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 )는 <중세철학 Ancient Philosoph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2>에서 중세철학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한다. 학자들에게는 어려움이겠지만, 일반독자들에게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심리적 장벽으로 작동한다. 중세철학이 라틴어와 로마 가톨릭이라는 공통 분모 위에서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에, 이 시기 철학을 일반적으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로 요약되며, 이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관심을 가지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렇지만, 중세철학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흐름 아래 무수히 많은 여러 갈래의 흐름이 있으며,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바람이고 이 바람은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어느 시기보다 중세철학이 서양철학에서 보다 세계적이었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종교적 세계관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전통 안에 놓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가능한 한 성서를 플라톤, 키케로와 조화시키려 애쓰며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만 반기독교적인 철학적 주장들을 상세히 언급하고 이를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화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후 라틴어권에서, 심지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넘어서까지도 철학적 논의의 기본 체계를 제공한 성서적이고 고전적인 요소들을 처음 생각해 내었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머리말, p44


 

 중세철학의 큰 흐름을 결정 지은 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였다. 그가 <신국론 De Civitate Dei>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대조하면서 로마의 역사를 히브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플라톤(Platon, BCE 427~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의 철학 또한 성경 해석의 틀로 들어오게 된다. 다만, 이 시기 그리스 문화 유산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로 나뉘어 전승되었고, 서구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다 자세히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군 원정 시기 이후였다. 


 이븐 루슈드는 플라톤의 저술들도 알고 있었지만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만큼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오직 아리스토텔레스만을 최고 수준의 인간 지성을 드러낸 천재로 여겼다. 사실 그는 플라톤의 <국가>를 의역하기도 했는데 - 이는 어쩌면 당시 스페인에서 구할 수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대용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는 <국가> 중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등장하는 중요한 대목들을 생략하기도 했으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더욱 가깝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곳을 변형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주석가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그는 자신이 깨달았던 것 이상으로 플라톤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95


 그렇지만, 서구 세계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비롯한 자연과학은 온전히 그리스 문화의 유산만은 아니었다.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  이븐 루슈드 Ibn rushd, 1126~1198), 알 가잘리(Al ghazali, 1058~1111) 등에 의해 해석된 사상이 서구 세계에 전해지면서 로마 가톨릭 교리 또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점은 이 시기의 철학이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라는 중세철학의 논제를 성격으로 갖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플레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비교하는 강의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라틴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을 더욱 선호하여야 한다. 플라톤은 단지 최초의 운동을 일으킨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었으며 또한 영혼의 불멸을 진정으로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잘못 파악하였으며, 덕을 중용으로 잘못 생각하였으며, 행복을 관조와 잘못 동일시하였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74


 <중세철학>을 통해 우리는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유명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교도의 철학으로 배척되었지만,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철학과 갖는 공통분모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뒤이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되며, 이와는 별도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와 윌리엄 오컴(Gulielmus Occamus: 1287~1347) 등의 일단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에 의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는 등 기독교 신학이라는 흐름 아래 무수히 많은 소용돌이가 일었음을 확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한 스콜라철학자들 대부분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지복을 누리면서 신을 바라보는 일정의 지적인 과정으로 생각한 반면 스코투스는 천상에서 축복받은 자들이 신과 하나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자유로운 행위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스코투스는 인간과 신의 의지 모두를 이전의 그 어떤 철학자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폭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48


 또한,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1384)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사회주의 사상은 중세철학이 고립된 '신학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근대혁명의 씨앗을 내부적으로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중세철학이 갖는 보편성과 후대 철학과의 연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철학에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끝에 신(神)이 있다는 것과 이를 위해 삼단논법과 같은 쓸데없이 어려운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세철학의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매달릴 수 있는가'와 같은 내용을 오늘날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를 위해 사용한 방법론까지 무시한다면 뒤이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과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를 이해하기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 점에서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인 동시에 '근대철학의 씨앗'이 아닐까 하는 요약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위클리프의 혁신적 생각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의 소유권(dominium) 이론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제안한 점이다... 신의 모든 재화는 모두가 공유하여야만 한다.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모든 사람이 은총 받은 상태라고 생각해 보자. 만일 누군가가 은총 받은 상태라면 그는 세계와 세계에 포함된 모든 것의 주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우주 전체의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른 모든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많다면 이는 일종의 모순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반드시 공유되어야만 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67


 유명론과 실재론 모두 어떤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결과로 등장한다. 단어들이 지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단어들은 사물을 의미하기도 하며, 사고를 표현하기도 한다. 단어들은 적절한 사고를 일깨움으로써 사물을 정확하게 의미하는데 이때 적절한 사고는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세계 안에 있는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로 이런 개념들을 통하여 사물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며, 우리 목에서 나는 소리 또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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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12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니의 중세철학은 정말 좋죠!

겨울호랑이 2023-09-12 21:05   좋아요 0 | URL
네 특히 전반부에서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한 후 뒤에서 주제별로 보다 깊이 있게 들어간 구성이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

2023-09-12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2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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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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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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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성장애 등 발달장애 학생들은이른바 ‘도전행동(challenging behavior)‘을 하는 경우가 있다. 도전행동이란 발달장애 아동처럼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찢거나, 자해하는 등의 문제 행동을 말한다. 대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하는 어려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는 행위도 대표적인 도전행동에 속한다. - P11

특수교사들은 도전행동 중재가 잘 이뤄지지 않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말한다. 하나는 교사가 직무상 어디까지학생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정서적·신체적아동학대로 신고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특수교사노조는 교육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도전행동 중재 매뉴얼을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행동중재 전문가나 의료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P13

특수반으로분리한 것을 교육적 조치로 보긴 어렵다.사람들은 ‘장애가 있으니 배려했다‘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차별‘을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안이 그렇다. 특수학급이 분리 수용소인가? 특수학급은 누가 뭔가를 잘못해서 분리되는공간이 아니라 배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필요한 지원을 받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능력이 떨어지거나 수업에 방해가되면 쫓겨나는 차별과 배제의 공간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이는 다시 특수교육대상자에 대한 낙인을 강화한다. 통합교육이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기에 이모든 일들이 일어났다고 본다. - P17

핵심은 오염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도쿄전력은 2017년 10월부터 2023년 2월까지 4년 3개월 동안 1000개가 넘는 오염수저장탱크 중 3분의 1에서 표본을 채취해 방사성 물질의 농도를 측정한 자료를이 전문가들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총 62개에 이른다는 오염수 내 방사성 핵종 중에서 실제로 도쿄전력이 측정한 핵종은대부분의 경우 7개에 불과했다.  - P37

<나비부인>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환상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 취향의 전형이다. 푸치니는 <토스카> 초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00년 6월 무렵, <나비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미국 해군장교가 일본에서 게이샤와 결혼하고 자식도 낳지만, 진짜 아내와결혼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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