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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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동일한 기술 사료를 두고서 역사가의 해석은 다양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비생산적이게도 소양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숫자로 표시된 단면이나 시계열은 그러한 차이를 허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한다. 여기서도 해석이 갈라질 수는 있으나 실제의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심지어 거꾸로이기도 한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7


 이영훈(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목 그대로 계량경제방법론을 사용해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일부의 시기를 조망하는 책이다. 공동연구자들의 대표인 저자의 말처럼 정량적 데이터라는 객관적 자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최대한 해석을 자제하고자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갑작스런 주장의 비약이 일어나는 책이기도 하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약이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경제성장은 20세기의 식민시기부터이다. 근대적 소유제도가 정비되고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발달에 의해 전국적으로 잘 통합된 상품시장이 성립하고, 나아가 노동시장 및 금융시장이 20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성숙하였다. 그러한 새로운 토대 위에서 한국의 시장경제와 산업사회가 발달해 왔지만, 그 발달의 구체적 양상, 그 한국적 유형의 특질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19세기 말까지의 전통 경제체제가 전제로 또는 제약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한국 경제사학적으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정량적 데이터를 통해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론이 거의 없었던 당시 실증적인 접근법은 분명 학계에 충격이었고, 방법론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저작이다. 일례로 막연하게 조선의 삼림황폐화가 일제의 무단벌채에 의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이미 1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음을 토지생산성의 계량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 연구는 정량분석의 장점을 잘 활용한 분석이라 생각된다.


 19세기 농업생산성 하락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산림의 황폐화였다. 오늘날 식량위기하의 북한이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생태학적 기아현상을 볼 때, 산림황폐화가 어떻게 농업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 관계가 선명하다. 북한과 달리 조선에서 산림의 약탈을 초래한 것은 17, 18세기에 걸쳐 증가한 인구압력이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는 조선 후기 최성기(最盛期)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번영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후 대가를 치러야 할 산림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60


 이처럼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의 장점은 시계열 분석과 변수 간 상관관계분석에 있다. 그렇지만, 토지생산성과 산림황폐화와 같이 비교적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이러한 분석방법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한계를 머리말에서 밝힌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여러 논문이 모두 수량경제사의 취지와 방법론에 적합한 것들은 아니다. 시계열 자료를 제시했다거나 두 수량변수 간의 상관계수를 따져 보았다는 정도로는 수량경제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량경제사의 방법론에 꼭 들어맞는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두 편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마치 수량경제사에 충실한 듯이 이 책의 제목을 단 것은 원자료로부터 시계열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비교 분석함에 있어서 통계학과 경제학 이론에 우리 모두가 엄격하고자 했음이 조선후기에 관한 지난 40년 간의 경제사 연구에서 전례가 드물어서 나름으로는 커다른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6 


 저자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통해 18세기, 19세기를 통해 조성경제사를 생산 측면에서 정체하거나 퇴보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이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전반적으로 주장한다. 그렇지만, 생산요인으로서 조선경제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산, 분배, 소비의 측면에서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림자 경제(shadow Economy) 영역은 더 크게 누락되어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선의 19세기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면 당연하게도 이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미가변동을 생산충격에 대해서만 회귀분석하는 모형은 1744~1881년 동안에는 높은 설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기에 들어서는 설명력이 사라졌다. 식민지기에는 조선의 미곡시장이 일본의 미곡시장에 통합되어 있어 이출량이 주요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어서 국내의 수요충격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25


 또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자본주의 금융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대부자금시장 균형이자율의 방법론을 통해 의미를 해석한다. 현대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이 즉각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의 연계가 느슨한 조선 후기를 분석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방식일까. 이러한 해석이 무리하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 뒷부분에서 밝히지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은 최종목적지 식민지 근대화론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과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이 그래프상으로는 동일한 하락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은,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이 성립한다면(이러한 것을 가정할 수 있다면) 공급은 감소하고 수요는 증가하여 이자율이 상승할 시점에서 계원들의 악화된 경제 사정을 반영하여 이자율을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은 농촌의 미가의 계절적 변동이 감소하고 대부시장에서의 공급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1

 

 그러나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이자율을 단순히 대부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920년대부터 이자율이 하락하기 이전에 농촌의 계 이자율은 장기간 매우 경직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거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암의 19세기 초 이자율의 하락은 정상적인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6


 

이러한 해석의 한계 이전에 분석의 한계도 존재한다. 인구 추이 변동분석과 관련하여 두 가구(家)의 족보를 분석하여 조선 후기 인구변동을 추정하는데, 질적 연구방법인 정성분석도 아니고, 정량분석에서 지나치게 적은 표본수는 표본의 대표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오히려 데이터를 등에 업고 더 강고해졌다. 

 

 물가변동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화폐량, 생산성과 물가변동간의 정합성을 각각 검토한 결과 어떤 요인도 18, 19세기를 관통하여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을 통해 중장기 물가변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가의 추이를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만으로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가변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어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성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16


 예를 들어 보자.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린다. 상관분석 수행 시 '1년 중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계절'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게 나타날 것이다. 즉,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로부터 '아이스트림 판매가 많아지면 기온이 올라간다'와 결론을 내린다면 올바른 분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한된 데이터, 분석방법의 한계가 보이는 계량경제사학의 시험적인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않는다. 아직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가 결여된 데이터 분석이 내린 식민지근대화론의 결론은 자체 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18세기부터 사회적으로 실세로 등장한 경화사족과 시폐(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도시를 중심으로 독점화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 초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bourgeois)계층과 신분제 사회의 붕괴, 후대의 동학농민혁명 등에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가능성도 함께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로부터의 데이터는 그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앞서 연구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한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우리가 확인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지방에 걸쳐 시장이 분열하였다는 사실이다. 분열은 내륙부보다 해강부(海江部)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심각하였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경제가 정체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적신호는 켜져 있었다.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있었으며, 서울 상인의 특권이 강화되면서 유통경로가 점차 독점적으로 경직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미가 자료들이 동시에 전하는 장기에 걸친 생산성의 악화가 근본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사회의 경제적통합을 지지한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체제가 1840년대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그렇다면 이 두 족보 분석을 바탕으로 인구 전체의 변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추론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인구 전체의 규모는 추정할 수 없으나 18세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19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이었던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들조차 1830~90년간 인구감소를 경험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인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 오랜기간에 걸쳐 감소했을 가능성이 놓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P27

품목별 구성비는 당시의 시가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시가에 따라 화폐로 환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8~19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대전가나 가격비를 이용하여 환산하였다. 쌀과 전미 1석은 동전 4냥, 콩 1석은 동전 2냥, 마포와 면포 1필은 동전 2냥, 은자 1냥은 동전 3냥으로 환산하였다. 이 중 전미와 콩과 마포는 그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전미와 콩은 쌀에 포함시켰고, 마포는 면포에 포함시켰다. - P54

우리나라의 토지수익률은 19세기에 대략 20% 정도였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리스크의 크기도 고려해야겠지만, 농촌지역에서 관행되는 높은 지대율과 함께 그에 비해서 저평가된 토지가격에 의해서 높아진 토지수익률이 이자율의 수준을 높이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자율은 대부자금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아주 원론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인구변동, 토지생산성 등 기본적인 요인과 함께 대차계약에 수반되는 위험과 이자의 실질가치를 변화시키는 물가가 주요한 경정요인이 될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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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이념은자유민주주의다. 틈날 때마다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내뱉었다. 윤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는 4·19 혁명 정신이었고 5·18 민주화운동 정신이었다. 광복절에도 언급하는 독립운동 정신이었다.  - P10

진보 성향에 속하는 몇몇 정치학자들은 대통령이 표출하는 보수적 이념 자체보다 그 활용 방식을 더욱 경계한다. 진보와 보수, 성향이나 역사관과 무관한 ‘정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세우는 이념은 자유로운 시장원리나 강한 안보와 같은, 보수의 전통적 가치를 역설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는다. ‘적‘을 지목하고 그들의 책동을 경계하라는 수사에, 필요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동원된다.  - P12

당내 반발과 여론의 외면 속에 치르는 대통령의 성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2021년 11월5일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된 윤석열 후보의 수락사는 음미할 만하다. "문재인) 정권은 이 나라를 이념으로, 국민 편가르기로 분열시켰습니다. 진보의 대한민국, 보수의 대한민국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낡은 이념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자유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국민과 함께하겠습니다." 당선 뒤 윤석열 대통령의언행을 돌아보면 후보 시절 그가 어떤 뜻으로 ‘낡은 이념‘과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P13

한국은 연합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당당한 서명국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은근하고 지속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힘으로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자조 섞인 반성은 요시다 시게루의 논리대로 우리 독립투쟁의 역사조차 성과 없는 것으로 변이되어버렸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 강점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게 해주었다. - P18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범국 일본에관대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기반해 전후 재건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망한 아베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재무장을위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을 꿈꾸었고, 그것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트럼프전 미국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고, 바이든대통령도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 - P20

교사들은 수업을 방해하거나 폭력적행동을 하는 학생을 교사가 어디까지 저지할 수 있는지, 즉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직무상 권한‘이 명확하지 않다고 호소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사에 대한 일부학생이나 학부모의 인권 침해, 노동권 침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 P24

성범죄 사건을 다뤄본 판사 출신의 한변호사는 이균용 후보자의 판결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극단적인 상황의 강간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렸지만, 피를 흘려야지만 성범죄가 성립하는 건 아니다. ‘아동·청소년을 협박해서 강제로 음란물을촬영하게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들며감형을 해주는 등의 판결은 퇴행적이다. 대법원 판례와도 맞지 않는다. 사회 변화와 인권 의식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대법원장이 돼 이끌 ‘이균용 코트(법원)‘가 앞으로 더욱 변화할 한국 사회에서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 P30

세수는 부족하고, 국채도 발행하지않는데 올해 정부가 쓰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의구심 끝에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가 찾아낸 것이 ‘한국은행(은) 일시차입금‘이다. 한은 차입은 한도가 50조원이며 10~13일짜리 초단기 대출이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한은에서 일시차입금을 빌렸다 갚기를 반복하며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처럼 빈번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P40

 비용을 떠나 병원 진료 예약이 민간 기업에의해 좌우되는 이 상황이 옳은지는 사회전체적 측면에서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서비스 초반에 무료로 서비스를 풀어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이후 유료로 전환하는 방식은 플랫폼 기업의 공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구서를 받는이들은 언제나 플랫폼이 개입한 생태계안에서 가장 절박하고 취약한 사람들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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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이 없어져도 식민지 건축이 존재했던 사실은 엄연하게 남아 있고 연구에 끝은 없는 것이다. 야외에 전시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끝나지 않은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했다.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이 같은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만총독부 청사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에 유럽과 일본 사이에 생긴 동아시아 지배 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유럽과의 협조와 인정을 통한 것이었고, 유럽의 지배틀에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 능력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건축 규범의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재료 면에서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 벽돌이 주재료가 되어 벽돌 구조 건축이 널리 사용된 상황은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조적 구조가 드물었지만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벽돌의 내화 성능, 저렴한 가격, 재래의 벽돌 제조 기술 등의 요인 덕분에 보편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다롄의원이나 창춘 야마토 호텔을 비롯한 만철이 지은 일련의 건물이 그 전형이고, 종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적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물건·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조선·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포틀랜드 시멘트처럼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 밖으로 수출되거나 세계의 건축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배경에 일본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방법과 공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건축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적 건축의 하나로서 식민지 건축의 문화적 가치 또는 사회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특히 재개발에 돌입한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식민지 건축을 둘러싼 어제와 오늘의 움직임을 보면 지배의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건축을 말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지 건축이 지배를 상징하는 이상 그것의 말살은 일제의 지배 사실을 역사상에서 없애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 일부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에서 야외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지배의 사실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식민지 건축을 마주하는 것은 지배국과 그 국민에게, 즉 일본과 일본인에게 지배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식민지 건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과거 피지배 국가와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씨앗이다. 식민지 건축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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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회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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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여기곤 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고발장의 취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첫째, 나라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그와는 다른 새로운 신적 존재들을 들여옴으로써 둘째,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1장, p14


  <소크라테스의 변론 Apologia Sokratous>이 소크라테스(Scrates, BCE 470~399)이 자신에 대한 변론이라면, 크세노폰 (Xenophon, BCE 428~354?)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Apomnemoneumata>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제자의 변론이라 하겠다. 크세노폰은 신들에 대한 불경(不敬)과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장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로 반증한다. 평소 신들에 대한 공경에 대한 본인의 말과 평소 자신에게 엄격한 소크라테스의 생활태도로 볼 때 고발장의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17) 신들을 공경하되 자기 능력 이하로 해서는 안 되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신들을 공경하지 않음이 확실하니까. 능력껏 신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신들이 가장 큰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자신하고 기대해도 좋네. 가장 큰 복을 줄 수 있는 분들 말고 다른 데서 더 큰복을 기대하는 것도,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더 큰 복을 기대하는 것도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니까. 또한 신들에게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겠는가?"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4권 제3장, p218 


 (1)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말에 설득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또한 놀랍다. 앞서 말한 것에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우선 성욕과 식욕에 관한 한 가장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다음 그는 추위와 더위와 온갖 노고를 가장 잘 참고 견뎠다. 그 밖에도 그는 절제가 몸에 배어 아주 조금만 가지고서도 아주 쉽게 만족했다. (2) 그런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불경한 자나 범법자나 욕심쟁이나 호색가나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겠는가?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2장, p21


 <소크라테스 회상록>은 철학자이자 역사가, 군인이었던 크세노폰의 강직함과 간결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여러 면에서 또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BCE 427~348)의 대화편들과 비교하게 된다. 플라톤의 작품들이 주제를 향해 치밀하게 계획된 구조로 짜여져 있다면, 크세노폰의 작품은 다소 느슨한 구조로 (플라톤에 비해)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살핀다. 만약, 스승 공자(孔子, BCE 551~479)의 제자 중 말 잘하는 자공(子貢, BCE 520~456?)이 플라톤이라면, 강직한 자로(子路, BCE 542~480)에 크세노폰을 비할 수 있을까.


 (1) 나는 앞서 소크라테스가 솔선수범하고 대화를 나눔으러써 실제로 제자들을 이롭게 했다고 말했는데, 나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억나는 대로 그런 일을 기록하려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제물을 바치거나 조사의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과 관련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델포이의 퓌티아가 주는 조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3장, p41


 그렇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자로'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기, 절제, 정의, 국가 등 주로 형이상학적 논의를 펼치며, 불멸의 영혼과 이데아에 대해 말한다. 독자들이 대화의 주요 내용에 담긴 플라톤의 목소리에 주목하면서, 소크라테스는 구석으로 밀려난 것이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 위상이라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중심에 세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관념과 추상에 대한 논의 대신 일상 생활에서의 도덕에 대해 말하면서 세계 4대 성인(聖人)의 모습을 보여준다.


 (10)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래서 네 어머니가 네게 호의를 베풀고, 네가 몸이 아프면 정성껏 돌보고, 네게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보살필뿐더러,  너에게 복을 많이 내려달라고 늘 신들에게 기도하고, 너를 위해 서약한 것을 이행해도 너는 어머니가 드세다고 말하는 게냐? 내 생각에, 그런 어머니를 참고 견딜 수 없다면 너는 네게 좋은 것들을 참고 견딜 수 없을 것 같구나(p82).... (14) 그러니 아들아, 네가 분별력이 있다면 어머니를 홀대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신들에게 기도할 것이다. 신들이 너를 배은망덕한 자로 여기고 네게 잘해주기를 거절하지 않도록 말이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2장, p83


 (4) 하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자란 이들은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되네. 야수도 함께 자란 경우 서로에게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니 말일세.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형제가 없는 사람보다는 형제가 있는 사람을 더 존중하고 덜 공격한다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3장, p86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지는 인간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플라톤의 작품에서의 주제와는 조금 다르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 그는 수학 대신 도덕철학을 말한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기하학 증명을 통해 상기설을 주장하며, 탁월함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면,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는 육체의 단련과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주제 뿐 아니라 내용까지 충돌하는 면이 한 인물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소크라테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39) 크리토불로스, 자네가 어떤 일에 훌륭해 보이기를 원한다면 실제로 유능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네. 그게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훌륭한 길일세.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들 사이에서 미덕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학습과 연습으로 증대됨을 알게 될 걸세. 크리토불로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자네에게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해주게.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6장, p107


 (4) 하지만 체력단련을 한 결과와 하지 않은 결과는 정반대일세. 체력단련을 한 사람은 건강하고 강하기 때문일세. 그리하여 그들 중 대다수가 싸움터에서 무사히 귀환하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네. 또한 대다수가 친구들을 도와주고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명성을 크게 드날리고 명예가 크게 드높아지며, 그래서 여생을 더 즐겁고 더 훌륭하게 살고 자식들에게는 더 훌륭한 살림 밑천을 남겨놓는다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3권 제12장, p180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드러난 인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그가 고발당한 이유를 알게 된다. 산파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논박과 결과적으로 상대가 느낀 모멸감. 우리는 이러한 감정이 쌓여서 결국 인간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은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나오는 플라톤의 주장 대신 인간 소크라테스를 중심에 놓으면서 그의 삶에 대해 함께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40)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자기가 이렇다 할 인물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뒤로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우 말고는 소크라테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소크라테스의 습관 가운데 일부를 모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의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더는 그를 놀리지 않았고, 그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식이나 지키는 것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4권 제2장, p211


 천병희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에는 그외에도 <향연 Symposion>과 <소크라테스의 변론  Apologia Sokratous>도 함께 실려있다. 뒤의 두 작품은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실려있는데, 이들 작품에도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의 자공과 자로를 서로 비교해 읽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7)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들이 자유민이고 자네 친척이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겐가? 자네는 다른 자유민 가운데 그런 식으로 사는 자들이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할 줄 아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더 행복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자네는 게으름과 무관심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며 신체를 건강하고 강하게 하고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을 획득하고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근면과 세심함은 아무 쓸모없다고 느끼는가? - P111

(1) 한번은 용기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떤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보다 노동에 선천적으로 더 강하듯이, 어떤 사람의 혼은 다른 사람의 혼보다 위험에 선천적으로 더 용감하다고 생각하네. 같은 법률과 관습 민테서 자란 사람들도 용기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보기 때문일세. (2)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학습과 훈련에 따라 더 용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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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13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스승을 두고도 제자들이 이렇게나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워요^^

겨울호랑이 2023-09-13 15:49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에 조금씩 다른 형태와 색깔로 남은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재밌는 지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