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한 채 포기하고 검술을 배웠다. 이 또한 다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노하자 항우는 말했다. "글은 이름과 성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할 따름입니다. 검 또한 한 사람만을 대적할 뿐이니 깊이 배울만 하지 못합니다. 만인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 항량이 병법을 가르치자 항우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대략 그 뜻만 알고는 또한 끝까지 배우려 하지는 않았다.'<사기본기 史記 本記 >(항우項羽 p317) 


 마지막 문장은 사마천(司馬遷, BC 145 ~ BC93)이 항우의 인물됨을 비판하기 위해 넣은 문장일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항량이 항우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만약, 항우가 만인(萬人)이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 보다 구체적인 수치을 제시해서 뜻을 명확히 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수학(數學)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여 통해 우리로 하여금 양(量)을 가늠케 한다. 이러한 수학의 위상은 서구 문명에서 더욱 크다.


 '수학은 방법, 예술, 그리고 언어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철학자, 논리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 그리고 정치가와 신학자들의 교리에 영향을 주는 내용, 천체를 조사하는 사람들과 음악의 달콤함에 대하여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내용, 그리고 비록 때로는 잘 지각되지는 않지만 현대 역사의 과정을 형성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지식의 총체이다.'(p24)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Mathematics in Western Culture>는 모리스 클라인(Morris Kline) 교수가 저술한 수학이 서구 문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책이다. 음악, 미술, 물리, 경제 등 여러 분야와 수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서술하고 있다.  수학이 서구 문명에서 다른 분야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이번 페이퍼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미술 안의 수학 : 원근법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에서는 미술의 원근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주 소멸점'이라고 불리는 한 점을 통해서 그림 감상자는 수직으로 그림과 만나게 되고, 주 소멸점을 중심으로 지평선이 뻗어가면서 구도를 잡게 된다. 또한, '주 소멸점'과 '대각선 소멸점' 사이의 관계 사이에도 원칙이 있는데, '등거리'와 '평행'의 원칙이 적용된다. 이러한 원칙하에서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원근법을 통한 그림의 전체 구도가 잡히게 된다. 


[그림] 원근법


 '원근법의 수학적 주요 정리 또는 규칙은 무엇인가? 캔버스가 수직으로 놓여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눈에서 캔버스까지의 수직면은 주소멸점이라고 불리는 한 점에서 캔버스와 만난다. 주 소멸점을 통과하는 수평으로 된 선을 지평선이라 불린다. 그림에서 점P가 주 소멸점이며 선D2-P-D1이 지평선이 된다 ... 첫 번째로 핵심적인 정리는 그림 속에 있는 캔버스의 평면과 수직인 모든 지평선들은 주 소멸점과 만나도록 캔버스 위에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AA', EE', DD'와 다른 선들이 P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두 번째 정리는 AB'와 EK와 같은 선들은 실지 장면에서는 평행이며 캔버스의 면과는 45도의 각도로 점 D와 만나게 되는데, 이를 대각선 소멸점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거리 PD2는 거리 OP와의 거리, 즉 눈에서 주 소멸점까지의 거리와 같아야 한다... 세번째 정리는 캔버스 평면과 평행하는 장면의 평행 수평선들은 수평이면서 평행하게 그려야 하며 수직 평행선들은 수직이며 평행하게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p199)


[사진] 최후의 만찬( 출처 : https://brunch.co.kr/@bookfit/907)


 주 소멸점이 눈에서 캔버스까지의 수직면이라는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대표적인 원근법 적용 작품으로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을 우리는 현장에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아래에서부터 올려다 보는 관점은 원근법의 수학적 원칙을 위반한 감상관점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2. 음악 안의 수학 : 푸리에 변환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 남작(jean Baptiste Joseph, Baron de Fourier, 1768 ~ 1830)은 물체를 가열했을 때의 열의 전달 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열이 퍼져 나가는 상태도 파동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푸리에가 관찰한 파동은 매우 복잡했지만 주기를 갖고 있었다. 즉, 같은 형태의 파동이 거듭하여 나타나는 것이었다. 같은 형태를 반복하는 주기를 가진 파동은,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도 단순한 파동이 결합해 이루어진다.'<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p24)


 <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은 푸리에 법칙에 대해 그림과 함께 설명했기 때문에 푸리에 급수에 대해 보다 이해를 쉽게 한다. 주기를 가진 파동은 단순한 파동의 결합이라는 푸리에 법칙이 음악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순수 수학의 정리라고 말하기에는 푸리에의 공헌이 너무나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그 정리에 따르면, 주기적인 음을 나타내는 공식은 a sin bx 형식에서 단순한 sin 항들의 총합이다. 게다가 a sin bx의 형태로 나타난 간단한 사인 항들의 빈도는 두 배, 세 배처럼 가장 낮은 것의 정수 곱으로 나타난다.(p413)... 그렇다면 푸리에의 정리는 물리학적으로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가? 수학적 언어로 보면, 이 정리는 어떤 음향의 공식이든 모두  a sin bx의 형태로 된 항들의 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항들은 각각 적절한 진동과 진폭을 지닌 소리굽쇠의 소리와 마찬가지로 단순 음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정리에 따르면 아무리 복잡한 음향이라도 모든 음향은 소리굽쇠가 내는 소리인 단순 음향들의 결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p414)


[그림] 악기와 푸리에 변환(출처 : http://fluorf.net/lectures/lectures3_2.htm)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음(音)은 옥타브(octave : 주파수가 두 배 차이 나는 두 음 사이의 음정)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는 음을 sin과 cos함수로 분석할 수 있으며, 이는 음악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음악과 AI(artificial intelligence)이 결합할 경우 '예술적 영감(靈感)'없이도 작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음사이의 수학적 관계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 ? ~ BC 497 ?)가 최초로 제시하였으며,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에 의해 동일하게 조율된 음계가 제기된 이후 서양의 기본 음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피타고라스의 발견에 따르면, 가장 듣기 좋은 코드, 즉 화음은 그 진동수가 단순 정수들의 비율이 되는 소리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장음 3도는 그 진동수의 비가 4대 5인 한 쌍의 음, 즉 음정이 된다. 4도는 그 진동수가 3 대 4인 음정이며, 5도는 2 대 3인 음정이다. 이들 화음이 우리 귀에 즐겁게 들리는 것은 화음의 고저 사이에 이와 같은 산술 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잘 설명된다... 각 음의 진동수가 고정되어 있는 피아노와 같은 악기들로부터 무한한  또는 아주 넓은 범위의 진동수를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조율한 음계를 구성함으로써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하였다. 바흐와 그의 아들 카를 필립 에마누엘이 이 음계를 주창하였으며, 이후 서구 문명은 이를 영구히 채택하기에 이른다.'(p420)


 동일하게 조율된 음계(평균율 平均律, Equal temperament)는 완전한 협화를 포기하고 모든 음의 간격을 동일하게 만든 음계를 말한다. 이러한 평균율을 사용하여 만든 대표적인 곡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Well-Tempered Clavier)>다.



 '동일하게 조율된 음계에는 12개의 음이 있다. C에서 한 옥타브 높은 C'까지는 12개의 음정이 있게 된다. 11개의 중간 음들의 진동은 고정되어 있으며 각 음들은 앞선 음과 일정한 비율을 가진다. C에서 C' 사이에 12개의 음정이 있고, 이 두 음의 진동 비율은 2이기 때문에 연속한 음들의 진동 비율은 (1.0594의 12승 = 2) 1.0594이다. 그러므로 반음으로 불리는 동일하게 조율된 음계에서 각 음정은 동일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음이든 작곡할 때 조로 사용될 수 있다.'(p420)


  20세기에 들어 12음계를 사용한 기법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 ~ 1951)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12음계의 수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음악의 패턴들, 특히 음의 높낮이와 리듬은 수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대수적 논리로 다룰 수 있었다. 특히 12개의 똑같은 평균율의 음표체계는 자연스럽게 모듈러 연산을 이용하여 모형화되었고, 이는 조합론 명제들과 함께 20세기 음악이론에 사용되었다.(p439)...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12음계 작곡 기법은 1920년대 시작되었는데, 12음계 음악에서는 12음계를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다고 가정한다. 특히 장조나 단조에서 으뜸음처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단음이 없다. 12음계 곡의 기본 요소는 음렬(tone row)로 반음계의 12음의 어떤 치환에 의해 주어진 수열이다. 일단 음렬이 선택되면, 네 가지 유형의 변환, 즉 조옮김, 전위, 역행, 역행, 역행전위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음악의 조옮김은 수학에서 평행이동에 해당한다.'<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2(p445)

3. 경제 속의 수학 : 상관관계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과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 ~ 1665)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분면과 방정식을 결합시키는 아이디어를 고안한다. 이는 기하학과 대수학이 결합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이 아이디어는  '일대일대응 一對一對應'에 기반한 수학적 사고다. 


 '데카르트와 페르마가 행한 아이디어의 핵심은 명백하다. 각 곡선에는 다른 점이 아닌, 그 곡선의 점만을 유일하게 나타내는 하나의 등식이 존재한다. 역으로 x, y와 관련된 각 등식은 x와 y를 점의 좌표로 해석함으로써 곡선으로 나타낼 수 있다. 공식화 하여 말하면, 어떤 곡석은 등신은 다른 점들의 좌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곡선상의 모든 점들의 좌표에 의하여 만족되는 대수식과 동일하다. 이제 등식과 곡선의 관련이 바로 새로운 사고의 핵심이다. 대수의 최선과 기하학의 최선을 결합함으로써, 데카르트와 페르마는 기하학적 도형을 연구하는 새롭고, 엄청나게 가치있는 방법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p244)


 '일대일대응 一對一對應'의 관계가 유지되는 자연법칙과는 달리 사회과학 속에서는  '일대다대응 一對多對應'의 관계가 성립되어 일반적인 공식을 유도하기 어렵다. 이러한 경우 수학적으로 '상관관계(Correlation Analysis)'를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상관관계 분석은 폭넓은 자료의 활용을 가능케하여 사회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 


 '골턴(Francis Galton, 1822 ~ 1911)은 상관관계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두 변수간의 상관관계는 둘 사이의 관계를 측정한 것이다. 이 측정치, 혹은 수치는 -1에서 +1까지의 값을 갖는 특별히 고안된 상관계수를 말한다. 1의 상관이 있으면 이것은 정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1의 상관이 있다는 말은 한 변수가 정확히 다른 변수가 변화하는 것과 반대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p490)... 상관관계라는 개념은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다. 가령, 미국의 산업 생산 수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산업 생산과 주식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식의 수량 사이에 높은 상관 관계가 있다면, 그 중에서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 즉 주식의 수량을 이용할 수 있다.'(p491)


4. 물리 속의 수학 : 상대성 이론


 현대 물리학은 수학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은  그의 '상대성 이론 (theory of relativity)'을 적절한 함수의 선택을 통해 훌륭하게 증명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행성의 위치는 네 개의 좌표를 사용함으로써 구체화된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네 개의 좌표 중 세 개는 공간 속의 위치에 해당하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 위치를 사건이 점유하게 되는 시간을 뜻한다. 연속적인 위치는 4차원 수학적 세계의 곡선상에 놓여 있다. 아인슈타인이 각 행성의 "경로"가 그 결과로 형성된 기하학에서 최단 거리를 나타내는 선이 되도록 공간-시간차에 대한 공식을 선택했다는 데에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p607)


 '산맥 속에 있는 산들의 형태 차이가 지구 표면상의 최단 거리를 나타내는 선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듯이, 공간-시간 간격에 대한 공식 속에 적절한 함수를 선택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은 물리적 세계의 질량의 존재가 그 질량 주변의 공간-시간과 최단 거리를 나타내는 선의 성격을 결정하도록 자신의 공간-시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 표면 근처의 물체들은 이 지역의 공간-시간의 최단 거리를 나타내는 선을 따르는 것뿐이므로, 그 경로를 설명하는 데에 만유인력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게 된다.'(p608)

 

<상대성 이론>에서 각 행성의 경로가 최단 거리를 나타낸다는 선이 되도록 아인슈타인이 설명했으나, 현대 양자 이론에서는 행성의 경로(빛의 경로)가 확률적으로 결정됨을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 ~ 1988)의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강의>를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이처럼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에는 수학이 서구 문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쉽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영문 제목과 다른 제목 번역은 책 내용과는 다소 떨어진 느낌이 들어 아쉽다. 또한, 수학자인 저자의 한계일까. 수학이 발달하지 못한 로마 문명은 창조적인 문명이 아니라 빌려온 문명이라는 저자의 비판은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


 '경영과 관리 및 정복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아름다운 아치 밑을 통과하는 군대의 개선 행진으로만 상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둔감한 사람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로마인들은 실용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으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로마 문화는 빌려온 것들이다. 로마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업적들은 모두 로마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p28)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속에서 우리는 수학이 서구 문명의 근원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서구 문명에 대한 수학의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추상화를 통한 관념(觀念)화와 동떨어진 이론화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를 읽으며 떠오른 우화하나를 옮겨본다. 


'수학의 추상적 정리들과 그것들을 적용하는 것과의 관련에 대하여 또 다른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추상적 정리들은 이상적인 경우를 진술하는 것인 반면에, 그것이 적용되는 물질적 상황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p84)


'어떤 사람이 황금 알을 낳는 예쁜 암탉 한 마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암탉의 몸속에 금덩이가 들어있는 줄 알고 암탉을 죽였다. 그러나 그 암탉은 여느 암탉과 똑같았다. 그는 단번에 부자가 되려다가 가지고 있던 작은 이익마저 잃고 말았다.'<이솝 우화> 황금알을 낳는 암탉 (p313)


 원래 위의 우화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를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달걀을 낳는 닭도, 황금을 낳는 닭도 결국 같은 닭이었던 것처럼 음악, 미술등의 예술,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서구 문명에서의 여러 분야가 '수학'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수렴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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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5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5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5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이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랑 친하지 않아서 수학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고 해요. 그래서 수포자가 되어 물리학 공부에 전념했어요. 수학 성적 때문에 졸업을 못했어요. 상대성 원리에 수학의 원리가 들어있는 걸 보면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천재’인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9-05 18:3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수학을 그렇게 싫어하고 못했던 사람이 수학으로 자신 사상의 체계를 설명한 것을 보면 수학이 생각보다 가까운 학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AgalmA 2017-09-08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아름다운 남성 나체상으로 가십처럼 회자되지만 현장에서 보면 각도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보입니다. 표정이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사뭇 위협적이죠. 시선이 향하는 방향도 의미가 있고요. 자세한 내용은 <우아한 관찰주의자> 참조ㅎ 본문에서 겨울호랑이님이 최후의 만찬을 공간까지 가져와 설명하셨듯이 많은 경우 공간을 감안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예술을 감상할 때 애초에 예술가가 의도한 것과 매우 달라질 수 있죠. 우리는 손쉽게 감상의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작품의 제반적인 정보뿐 아니라 실재에서도 협소한 단면만 소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단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 가장 추상적이라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죠. 수학처럼 확고한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한한 의미를 품는다는 것이....

그나저나 바꾸신 연의 사진 보니 맘도 환해지네요 :) 성공!

겨울호랑이 2017-09-08 21:45   좋아요 1 | URL
^^: 그렇겠군요. 그래서 미술 작품 감상을 직접 발품을 팔면서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네요..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은 연주자에 따라 달라지기에 시간과 공간 제약을 미술보다 더 많이 받기도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성적인 면에서부터 감성적인 면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음악의 옥타브와 미술에서 색채가 통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장난꾸러기 연의지요 ㅋㅋ

2017-09-09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9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태백산맥 >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대로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이 발생한 1948년 벌교 지역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뛰어난 몰입감을 주는 소설 속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몇 부분을 옮겨본다.


1. 선(善)과 악(惡)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방의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p68)


 <태백산맥>에서 묘사된 인간 본성(本性)의 문제는 여러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이러한 오래된 철학적 질문에 대해 주인공 범우는 인간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김범우의 생각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주(註)를 단 왕필(王弼, 226 ~ 249)의 의견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것 같다.

 

'왕필이 선(善)과 불선(不善)을 '시(是)'와 '비(非)'에 상응시킨 것은 바로 잘 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핵심적인 것은 즐거움과 성남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옳음과 그름이 한곳에서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불이(不二)"의 사고입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양자가 심층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통념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들을 같은 뿌리로 소급시키는 것은 곧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선(善)과 악(惡)의 구별의 피안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para-doxa"의 사유이기도 합니다.'<개념-뿌리들>(p558)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범우의 말속에서 전통적인 동양사상을 확인하게 된다. 동양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유입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생긴 사상대립. 한국전쟁과 이념 대립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상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상이 극단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2. 남로당과 칼 마르크스


 <태백산맥>1에서는 남로당(南勞黨)과 군정(軍政)간의 대립이 잘 묘사되고 있다. 남로당은 어려운 경제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하는 민중의 열망을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했던 반면 군정은 이를 좌절시키려 한 것이다. 


 '남로당은 어쩌면 남쪽 전역에 걸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열렬한 지지였지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존보호와 불만표현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남로당은 군정과 정치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고, 민중들은 군정과 경제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은 민중들의 경제투쟁을 조직화하여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교활할 만큼 영리한 군정이 그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무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박살을 내고는 한 것이다.'(p238)


이러한 남로당의 투쟁 노선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기반한 것임을 우리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 ~ 1970의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1883)의 변증법은 법칙의 불가피성을 제외하면 앞서 말한 헤겔 변증법의 특성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추진력이다. 그러나 물질은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말살된 원자론자들의 물질이 아니라 우리가 고찰해온 독특한 의미를 갖는 물질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에게 추진력은 실제로 인간이 물질과 맺는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생산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질상 경제학이 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이든 정치, 종교, 철학, 예술은 속한 시대의 생산 방법과 비중은 조금 낮지만 분배 방법의 산물이다.' <러셀 서양철학사> (p990)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하부구조가 보다 형이상학적인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일제(日帝) 하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등 경제적 평등을 약속한 남로당의 약속은 가난했던 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로당의 투쟁이 현실의 삶과 다소 거리가 있는 정치 투쟁으로 이어졌을 때도 먹고사는데만 관심있는 민중들의 지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혁명이론으로 현실적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문화와 제국주의


 <태백산맥>속에서는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대한 비판이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었던 손승호라는 인물을 통해 가해진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가 과연 인도(印度)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가? 라는 물음에 대한 손승호의 비판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가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p240)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思想)이라고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중요성은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제국주의 종주국들에게는. 이에 대한 내용을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 Said, 1935 ~ 2003)의 작품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을 통해 살펴보자. 

 

'만일 중요한 종주국 문화의 몇 가지 -가령 영국, 프랑스, 미국의 문화-를 제국을 추구하는(그리고 제국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지리적 배경 속에서 연구한다면, 명확한 문화 지형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가령 영국 문화에서 스펜서, 셰익스피어, 디포, 오스틴이 집요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먼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권력의 거점을 종주국인 영국 또는 유럽에 설정하고, 이어 작품의 구상, 동기, 전개에 의해 그러한 권력 거점을 원격의 "주변"세계,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세계(아일랜드, 베네치아, 아프리카, 자메이카)에 접속하는 것이다.'<문화와 제국주의>(p132)


 셰익스피어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다면, 셰익스피어가 존재하는 한  지금 당장 인도를 잃는다하더라도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4.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외에도 <태백산맥> 속에는 민족주의의 입장과 공산주의의 입장이 각각 김범우와 염상진의 말과 생각을 통해 나타나 우리는 당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체감할 수 있다.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p85)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북조선의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힘은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면 남조선의 오합지졸인 비조직화된 힘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한반도 전역에 공산혁명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왔다. 그런데, 하늘처럼 믿었던 북조선의 조직화된 힘은 뻗쳐오지 않았고, 오합지졸인 줄만 알았던 남조선의 힘에 쫓기게 된 것이다. 왜 북조선은 힘을 쓰지 않은 것인가. 남조선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럼 북조선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p125)


 한국 현대사의 이념대립을 다룬 <태백산맥>은 이처럼 인물과 사건을 통해 선과 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 대립적 요소가 잘 제시된다. <태백산맥>이 현대사를 다룬 뛰어난 문학작품인 이유는 작품이 주는 몰입감과 더불어 당대의 이념들간의 대립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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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7-09-04 0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통학시간이 길었던 덕에 태백산맥을 빌려 지하철에서 읽었었는데... 그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 구매해 두었으나 읽을 엄두를 못 내고 방치 중입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17-09-04 04:09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께서는 일찍 태백산맥을 읽으셨군요^^: 저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현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생깁니다^^:

2017-09-04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4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저 보고서 - 악당들의 시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시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평가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지음, 김병년 엮음 / 레드북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프레이저 보고서 Fraser Report>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에서 1978년 10월 제출된 <한-미 관계 조사 보고서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Report>가 원제다. 원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레이저 보고서>는 당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숨겨진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보고서의 많은 내용이 보고서가 작성된 후 약 40년이 지난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에 대한 위협 강조와 현실


 이미 1978년에 한국군의 능력은 북한을 능가한다는 국방부 부차관보의 증언을 보더라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결코 북한보다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기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의 위협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왜 1970년대 미군 철수를 그토록 반대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국방예산 지원금과 생필품이 박정희 정권에게 돈벌이의 수단이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태극기 집회(출처 : 뉴스1)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외국세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더욱 안정된 억제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상의 역할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아브라모위츠(Morton Abramowitz)는 대한민국은 지금(1978년 현재) 북한과 더욱 대등하게 걷고 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동맹국의 주둔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p124)


 '이곳 사람들은 매우 격양되어 있다. 만일 한국인들이 최근 수년 간 말해왔던 것처럼 북한의 위협이 그렇게 엄청나다면,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것들을 해외에 팔려고 하는가?'(p144)


 '한국의 국방 능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군사정책 역시 경제원조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한국정부는 미국이 한국의 국방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한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금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p257)


2.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 : 농촌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


  박정희 정권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 성장이 국내 곡물 가격 억제로 인한 인플레이션 요인 통제, 그리고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공급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경제에 있어 농촌 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불안요인이 되었고, 정권의 정당성이 결여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1960년대 PL480 프로그램은 식량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대규모 방위시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한국정부에 공급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농업분야는 산업분야만큼 급속히 성장하지 못했는데, 한국정부가 농업분야로 재원들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업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1970년대 초까지 PL480은 농업 성장률과 생산성, 그리고 수입을 꽉 억눌렀던 것으로 보인다.'(p339)


 '1960년대 중반 경, AID는 한국정부가 일부 국내 식량 곡물에 대한 가격을 시장가격 이하로만 허락하는 정책 때문에 농촌 소득은 최소한의 증가만 이루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책과 함께 농촌 소득이 낮은 성장을 초래하는 이유는, 한국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과 도시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싼 생필품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이었다.(p288)...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도 도시노동자의 소득은 증가했다. 그러나 1975년과 마찬가지로 도시노동자의 월 평균소득은 월 가계지출보다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정부는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유순하게 했고,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지했으며, 고용주의 협력을 얻는 정책을 지속했다.'(p296)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낮은 임금 강요는 4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최저임금제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경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임금은 수출 경쟁력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고, 조직된 노동자는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1960년대의 대부분과 1970년대 초반을 통해 농산물 가격 또한 도시의 불만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낮게 유지되었다. 이것은 농촌과 농업의 발전을 방해했다. 모든 영역에서의 사회복지는 경제 개발의 뒤편으로 밀려났다.'(p328)



3. 무능한 한국 정부


 이러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정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는 재정 확대책을 펼칠 수 밖에 없고, 항상 재정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정권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재정지출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한국경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국 경제를 낙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만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의 경제정책은 단지 무책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낮은 외환보유고와 함께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고 단기 신용 역시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긴축보다 팽창을 선택했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운용이다. 재계 지도자들은 그 위험을 명확히 알고 우려하지만, 이미 어려워진 정치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성장과 고용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 1975년 5월 美 재무부 보고서 - '(p315)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 원조 없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 경제적 의존 양상이 뿌리 깊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국민소득이 약간이라도 증대되면 그에 상응해서 미국이 원조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로 한국군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염려는 특히 컸다.'(p267)


 오히려, 한국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보이고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적시된 한국의 미개발 자원이 '인적 자원(人的 資原)'이라는 사실을 박정희 정권은 알고 있었을까. 결국, 한국경제 성장의 실질적인 주역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國民)이었음을 우리는 다른 나라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장점을 우리가 모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몇몇 거대한 정부소유 기업들은 부실한 관리와 비경제적 요금 구조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해외 부문에 있어서 엄청난 지불 격차의 균형은 오로지 미국원조에 의해서만 지탱되었다.... 1950년대의 토지개혁은 비록 가난했지만, 농촌 부문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비록 비효율적인 수입대체전략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1950년대 동안 산업 능력은 꾸준히 발전되었고, 보다 효율적인 용도로 전환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근면하고 교육받고 훈련된, 엄청나다고 표현될 만한 미개발 자원이었다.'(p260) 


4. 정치 기부금 : 베트남 전쟁과 기업 뇌물


 박정희 정부는 통치 자금 마련을 위해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만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약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를 한국 정부에 지불했으며, 그 금액은 당시 한국의 외화 수령액을 고려한다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또한, 당시 유력한 한국의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는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최근 K-재단과 미르 재단 문제의 뿌리는 이미 반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사진] K-재단, 미르재단(출처 : SBS뉴스)


 '미국정부는 최근에 합의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연계하여, 양국 대통령 간에 합의된 1억 5천만 달러의, 또는 그 이상의 개발차관을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다음 5년에 걸쳐 한국에 상당한 액수의 재원을 차관으로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p272)... 미국정부는 특히 통화 정책의 개혁을 원했다. 선거 시기에 자금 공급을 확대시키려는 한국정부의 경향은, 만성적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어야만 했다.'(p274)


 '1973년에 회계감사원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한국군의 베트남 모험의 결과에 지불한 금액을 산정하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어렵다. 1970년에 국방부는 미국의 해외 안보협정과 공약에 관한 소위원회의 사이밍턴(Symington) 상원위원에게 추정을 제출했는데, 다음과 같이 복사되어 있었다. 9억 2,700만 달러였다.(p281)... 미 회계국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소득이 연간 2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대충 잡더라도 그 금액은 1966년에는 한국의 외화 수령액의 40%를 차지했으나 1970년도에는 1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만성적인 외화부족을 고려한다면, 15%조차도 중요했다.'(p282)


 '1971년에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정치자금의 필요는 더욱 심화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1970년 6월에 민주공화당에 십만 달러씩을 기부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직접 김성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명단에는 한국의 거대한 재벌들, 럭키 그룹, 현대 건설, 삼성 그룹, 김성곤이 경영하는 쌍용 그룹 등이 포함되었다.'(p370)


5. 정치 자금의 활용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모은 정치 자금을 이용하여 미 상하원 의원들을 설득하였으며, 친(親) 정부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선거구에 회사 본부가 소재해 있는 하원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미 한국에 투자해 온 거대기업들(Gulf, Caltex, American Airlines, Fairchild)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은 외부의 출처들과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예를 들어 쌀 수수료는 박동선의 조지타운클럽과 다른 프로젝트들의 재정을 도왔다. 한국문화자유재단과 그 계획인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한국정부는 미국 내 출처로부터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친정부 활동들을 지도, 통제할 수 있었다.'(p170)


6. 개인적 뇌물 수수 


 정부 정치자금 중 일부는 개인 재산으로 축적되었고, 이중 일부는 박정희에게도 전달되었다. 박정희에게 전달된 자금은 청와대 금고와 스위스 계좌에 예치되는 형태로 보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자금과 관련한 중심에는 한국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사진]김-오히라 메모(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logId=minlovemuch&blogNo=100093008276)


 '1969년 이후 모든 형태의 대출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그것은 정부 정치자금의 기본적 원천들 중 하나의 감소를 재촉했다. 세금 체계를 통해 자금을 증가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하려는 노력이 명백히 착수되었지만 -그것은 제도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노력들은 부패의 일반적 수준이 반영된 한국정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 뇌물 수수의 범위가 방해받는 것이었다. 1970년 경에는 이후락, 김성곤, 김혁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p369) 


 '이후락에 의해 수집된 자금들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예치되었고, 원칙적으로 대통령에 의한 용도였다고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후락과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에 있는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계좌의 존재는 은행 기록들로 구체화되었고, 이동훈(이후락의 아들들 중 한 명)에 의해,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다수의 청와대 고위관리들 중 최측근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본 소위에서, 스위스의 그 돈들은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p370)


 '워커힐 리조트 건설과 일본에서 자동차 수입과 같은 상업적 거래들에 한국중앙정보부가 깊이 빠져들었다는 믿을만한 표시들이 있었다. 그 후 한국중앙정보부가 워커힐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추정되었다. 1963년 봄 기간 동안 한국중앙정보부는 주식시장의 은밀한 조작에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공작으로 거의 4천만 달러를 챙겼다고 추정되었다...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으로 사용될 선금조로 1억3천만 달러,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를 위한 민주공화당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김종필이 일본에서 받았다는 혐의들의 가죽 끈을 풀어버렸다.'(p361)


7. 한국중앙정보부(KCIA)와 감찰


 한국중앙정보부의 권한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한국 내 국민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을 감시하는등 민간인 사찰을 통해 언론 통제 등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반(反)정부 활동을 억압했음을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진] 군 기무사 민간인 사찰(출처 : 통일뉴스)


 '전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것이 미국의 CIA와 FBI의 기능을 합친 것이라고 말했다. 전 한국외교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실제로 한국중정은 한국인들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p147)


 '한국교민 담당관으로서 김상근의 다른 책무들 중 하나는, 유신헌법에 대한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반정부 활동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그는 영사관 관리들과 협력했고 한인교포들을 이용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정보를 위해 지역 한국 언론의 기사들을 읽었다.'(p152)


 '한국 법에 의하면, 비록 미국에서 발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서울사무소가 미주 동아의 내용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976년 1월 13일자 편지에서 김남은, 만약 정부의 비상계엄령을 위반한 기사가 앞으로 발행된다면 소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에 비판적인 편집 정책을 가진 미국 내 다른 한국어 신문의 발행자들을 괴롭히고 협박하려고 했다.(p468)... 때때로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와 정책을 유리한 관점에서 제시하는 출판 및 방송매체를 공개적으로 설립하거나 혹은 자금 지원하려고 시도했다.'(p469)


 이외에도 프레이저 보고서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통일교와 한국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교주 문선명이 이끄는 통일교 조직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폐지된 범세계적 단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이 한국 정부와 어떤 영향이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이 농촌과 도시 빈민의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는지 그리고 개인자산을 만들었는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한 한국중앙정보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깊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중심이 '한-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정 부문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후의 극우 정권이 '왜 미국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라는 한계로 읽기에 다소 지루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기간의 납득하지 못할 정부의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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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씨......
얼추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게 되니 더 열받네요.

겨울호랑이 2017-09-02 14:38   좋아요 1 | URL
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하는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시대를 거슬러 살고있는가를 실감하게 되네요...

AgalmA 2017-09-02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금 꼼수 부리려고 통괄로 걷을 수 있는 부가가치세를 지금처럼 마련한 게 박정희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계 세금 걷는 거 가지고도 여당인 민주당 의원이 나서서 만류하는 모양새 하며... 세금 조정만 잘 해도 문재인 정부가 국회에 예산 굽신 안해도 될 텐데 세금 조정할라치면 국회며 야당이 포퓰리즘이다 어쩐다 또 얼마나 발목 잡을지ㅎ;;

겨울호랑이 2017-09-02 16:19   좋아요 1 | URL
내년 지방 단체장 선거에서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줘야할 것 같아요...한동안 구체제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나와같다면 2017-09-02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열세인가 우위인가?

리영희 선생님은 1980년대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이미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셨죠..

겨울호랑이 2017-09-02 21:51   좋아요 1 | URL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풀려진 공포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을 보면 그들의 저의에 대해 의심할 수 밖에 없네요..

2017-09-03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국 -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김종원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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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 1873)이 의도했던 대로 상업(Commerce), 문명(Civilization), 기독교(Christianity)가 아프리카에 주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네 번째 "C" 즉 정복(Conquest)과 함께 올 것이다.'(p231) 


<제국 Empire>은 영국 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다룬 닐 퍼거슨(Niall Ferguson)의 저술이다. <제국>은 영국이 다른 유럽 열강보다 강대한 제국(帝國)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인을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에스파냐, 포루투갈에 비해 늦게 제국으로 출발한 영국이 어떤 방식으로 최대 제국으로 발돋움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국이 해체되었는지 분석하는 <제국>을 통해 영국 제국주의의 특성을 살펴보자.


1.  제국의 시작 : 뒤늦은 출발 그리고 남다른 발전


 영국은 다른 유럽 제국보다 늦게 식민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에스파냐, 포루투갈과는 달리 달리 금, 은 등의 귀금속이 산출되는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대신, 사탕수수 등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을 식민지로 개발하게 되었다.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식민지 개발을 통해  화폐(money)를 가져온 반면, 영국은 식민지에서 원재료를 본국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영국 본토는 제조업이 발달할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모건이 약탈한 은화를 갖고 행한 일이었다. 그는 자메이카의 부동산에 투자하여 리우미뉴 계곡(오늘날의 모건 계곡)에 100만 평 가량의 땅을 취득했다. 나중에 그는 성 엘리자베스 교구에 500만 평을 추가했다. 중요한 점은 그곳이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해외 팽창의 특성이 낳은 일반적인 변화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제국은 금을 약탈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설탕 재배와 더불어 발전했다.'(p47)


[그림] 플랜테이션 농업(출처 : http://blog.daum.net/_blog/)


2. 자본 시장 : 선진 금융제도


 1688년 명예 혁명은 당시 금융 선진국이었던 네덜란드의 금융 기법이 잉글랜드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선진 금융 기법을 통해 동원된 자금력의 우세는 영국이 경쟁국보다 앞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전해진 주식회사 제도를 통해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게 되었다.


 '신용이 전쟁을 낳고 평화를 낳으며 육군을 육성하고 해군을 무장시키고 전투를 치르고 도시를 포위한다. 그리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군자금이라고 불린다... 신용이 보수 없이 군인을 싸우게 하고 식량 없이 육군을 행군하게 하고, ... 그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그것은 대부 허가증이 되고... 수요가 있을 때는 즉시 재무부와 은행을 충분한 자금으로 채운다.'(p62)


 '(7년 전쟁의 승리는) 해군의 우위에 기반을 둔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영국이 프랑스보다 결정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바로 돈을 빌리는 능력이다. 영국의 모든 전쟁 경비의 3분의 1이상이 대부금으로 조달되었다. 윌리엄 3세 치세에 네덜란드 것을 모방한 제도가 이제 본래의 특성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피트 정부로 하여금 투자하는 대중에게 낮은 이율의 채권을 판매하여 전쟁 비용을 늘릴 수 있게 했다. 대조적으로 프랑스 인들은 구걸을 하거나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주교 버클리가 썼듯이, "신용은 잉글랜드가 프랑스보다 우위에 있는 주요한 강점"이었다.'(p76)


[그림] 동인도회사(출처 : http://mediapen.com/news/view/183191)


3. 노동 시장


 또한, 영국의 식민 정책은 노동 시장에서도 다른 제국들과 차이가 있었다.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등을 추구하던 이들은 해외로 진출했고, 마치 '잡초를 뽑듯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귀금속 대신 설탕산업을 육성해야 했던 식민지는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이 제공되고, 카리브해에서 설탕이 제조된 후 이 제품을 팔아 자본이 영국으로 유입되는 산업 구조가 마련되었다.


 '1660년대 초에서 1950년대 사이에 2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국 섬을 떠나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소수만이 돌아왔다... 영국을 떠나면서 초기 이주민들은 그들의 전 재산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걸었다... 영국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기초가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량 이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국 탈출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전 대륙을 하얗게 변화시켰다.'(p104)


 '식민화에 대한 그들의 용어는 "플랜테이션'이었다. 존 데이비스의 말에 의하면 정착민들은 "좋은 곡식"이고, 원주민들은 "잡초"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원예술 이상의 것이었다. 이론상 플랜테이션은 식민화, 즉 정치적 변경 지역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을 내보내 정착지를 건설하는 고대 그리스의 관행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사실 플랜테이션은 오늘날 우리가 "인종 청소"로 알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p108)


 '뉴펀들랜드 어장은 오랫동안 영국 어부들을 멀리 대서양으로 이끄는 유인이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 그 어장에 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뉴잉글랜드 근해 역시 물고기가 가득했다. 마블헤드 앞바다에는 물고기가 풍부해서 "발을 적시지 않고도 물괴의 등을 밟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p114)


 '1770년에 이르자 영국, 서아프리카 그리고 카리브 해 사이의 삼각 무역은 플랜테이션에 지속적으로 노동이 공급되게 했다. 아메리카 본토 식민지들은 지속적으로 그곳에 식량을 공급했다. 설탕과 담배는 영국으로 흘러들어가 상당 비율이 유럽 대륙으로 재수출되었다. 그리고 이 신세계 상품들로부터 이윤은 제국의 아시아 교역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쳤다. '(p139)


[그림] 노예무역 (출처 : https://0jin0.com/tag)


4. 과학


 19세기 영국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해군의 지배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국 해군의 지배력은 산업 혁명 이후 발전된 과학인 '증기기관', '전신 케이블' 그리고 '철도' 등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한편, 영국 육군은 지도를 만드는 '지구 과학'의 뒷받침으로 제국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예 제도에 반대한 전쟁과 아편을 위한 전쟁의 공통점은 영국 해군의 지배력 덕분에 가능했다. 증기력은 영제국을 접합시켜 주었다. 185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2일에서 19일로 줄었다. 증기선은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외양도 커졌다. 그래서 같은 기간에 평균 총 용적 톤수는 대략 두 배가 되었다. 1870년대에 이르면 인도에서 오는 전보가 몇 시간 안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여왕은 전보를 주의 깊게 읽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 동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세계는 축소되었다... 1840년대 말에 이르자 전보가 육상 통신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1850년대에 이르면 인도의 건설 공사는 전신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했다. 전신 케이블과 증기선 노선은 세계를 일제히 단축시키고 통제를 더 쉽게 만든 세 개의 금속 네트워크들 가운데 두 가지였다. 세번째는 철도였다.'(p242)


 '빅토리아 시대에 일어난 세계 통신 혁명은 "거리의 소멸"을 완수했다. 단거리뿐 아니라 장거리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쟁시에 거리는 극복되어야만 했다. 단지 영국 군사력의 주요 원천이 세계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p243)


 '빅토리아 중기 제국의 모든 구성 요소처럼, 인도 육군 역시 과학 기술(총을 생산하는 기술뿐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기술에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배적 기술에서 경위의(經緯儀)가 전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p246)


[사진] 증기선(출처 : http://qumalog.tistory.com/entry)


5. 교육


 영국이 발달된 금융 제도,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의 약 25퍼센트에 해당하는 육지와 대양을 지배하는 제국을 유지하는 것에는 자체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효율적인 제국을 통치하는 수단이 필요했으며 이는 관료 집단에 의한 통치로 현실화 되었다. 효율적인 제국의 관료집단은 어떠한 방식으로 양성되었는가? 이는 '주입식 교육'으로 제국의 이념을 공무원에게 입력시키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키플링은 <오티스 이어의 교육>에서, "제국의 작업에서 증기가 인력을 대체할 때까지", 항상 "단순 기계적인 일에 혹사당하고 소모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런 사람들은 "라이어트(ryot, 소작농민)나 쟁기를 끄는 수소와 더불어 국가의 기초가 되는 초석이라는 영예를 공유하는 일반 시민(열병의 희생양)이었다." 오티스 이어는 "공식적인 풍자에 의하면" 전형적으로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으로, 스스로를 돕기에는 무력하지만 남을 해치고 훼방 놓고 괴롭히는 데에는 강하며, 불평불만으로 들끓는 나약한 군중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었다.'(p259)


 <제국>에는 영국 제국이 다른 경쟁 제국(프랑스 제국, 에스파냐 제국 등)보다 앞설 수 있었던 이유를 위와 같이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영국인인 저자의 주관적 한계 또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 윤리적 측면에서 일어난 심오한 변화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수익성이 없게 되자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고 주장되곤 하지만, 모든 증거는 이와 다르다. 실제로 노예 제도는 여전히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폐지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집단의 심정 변화다. 모든 위대한 변화들처럼, 그것 역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아메리카에서 소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감리교가 발흥하면서 그러한 이념은 더욱 광범위한 프로테스탄트 집회로 확산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계몽주의의 가르침으로 인해 노에 제도 반대로 돌아섰다.'(p179)


  우리는 미국 남북 전쟁(美國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 ~ 1865)을 대표적인 노예 해방 전쟁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예 해방이 남북전쟁 모두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노예 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의 주(州)와 북부의 주(州)간의 대립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경제체제의 대립이었다. 산업화를 통해 북부는 노예제가 필요없어진 반면, 농업에 의존했던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미국남북전쟁이 발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이라는 아름다운 가치의 실현을 위해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1세기 이전에 일어난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 역시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는 영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종교에 기반한 박애정신의 확대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저자가 경제적 체제 대립이라는 해석방법을 모르지 않았을테고,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과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림] 남북전쟁(출처 : http://www.kamerican.com/GNC/new/)


 또한, 이슬람 포로를 학살하는 영국군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는 부분을 보면 제국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그래도 영국 제국주의가 다른 곳보다는 인도적이었다는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십보 백보'차이정도 아닐까. 


 '이 내용을 읽으면 독일군 SS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 인들에게 행했던 방식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이 살인을 목격한 영국 병사들은 처음에는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쳤고, 총이 발사되었을 때는 "분노와 야유의 함성"을 터뜨리며 장교의 행동을 큰 소리로 비난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독일 병사들이 공개적으로 상급자를 비난한 일은 있다 하더라도 아주 드물었다.'(p221)


 <제국>에서는 영국 제국주의가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와 달랐던 점을 상품시장, 노동시장, 문화, 정부, 자본시장 등의 분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고, 이를 통해 영국이 가장 강력한 제국을 만든 원인에 대해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원재료 공급지로서의 식민지 역할, 네덜란드와의 합병으로 인한 선진 금융 기법의 전수, 종교적/경제적 이윤을 추구한 자발적인 식민지 이주, 과학기술의 적절한 적용, 효과적인 제국 통치를 위한 교육 시스템 구축. 이러한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영국을 제국주의 시대의 승자(勝者)로 만들었음을 <제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저자 자신이 영국인인 관계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다소 우호적인 목소리는 영화 <덩케르크 Dunkirk>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하는데 이 부분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영국을 이어 새로운 제국인 미국(美國, America) 순서다. 다음은 저자의 또다른 저서인 <콜로서스 Colossus>를 통해 미국 제국주의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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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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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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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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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2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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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15: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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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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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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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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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01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9월입니다. 즐겁고 기분 좋은 날들로 이어지는 한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편안한 금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09-01 19:23   좋아요 1 | URL
^^: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상쾌한 9월 출발과 한주 마무리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1. 현악 4중주(Quartet)


'고전적인 콰르텟(Quatuor)에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악기 편성은 두 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죠.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소나타나 교향곡의 일반적인 진행 - 알레그로, 안단테, 미뉴에트, 피날레 -를 따르죠. 따라서 현악 4중주의 독창성은 형식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소나타와 교향곡도 진행은 똑같으니까요. 그보다는 같은 족 族에 속하면서도 각기 개성이 있는 네 개의 악기들에 그 형식을 적용했다는 점이 독창적이죠.'(p265)


'현악4중주를 처음 쓴 작곡가는 일반적으로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 ~ 1809)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든이 현악 4중주를 완성된 형태로 만든 것은 사실이에요. 이 분야에서 하이든의 첫 시도들은 1755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그때까지는 조곡 형식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죠...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그를 현악 4중주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p267)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 1791)는 1782년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의 음악을 접하고서 여섯 편의 현악 4중주를 만들었죠. 이 여섯 개의 경이로운 작품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되었습니다. 하이든은 첫 곡, 현악 4중주를 듣자마자 모차르트도 있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지요.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건대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입니다.'(p270)



2. 종교음악


 '모차르트를 생각해봐요 바로크 시대 사람이자 바로크 양식의 영향하에 있는 예술가죠. 하지만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곡이나 <아베 베룸 코르푸스 Ave Verum Corpus>가 팔레스트리나의 모네트보다 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술은 경건과 고양이라는 상반되는 두 효과를 통해 종교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예술이 감성의 경건에 부응한다면 바로크 예술은 감성의 고양에 해당하죠. 전자는 말을 삼가게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후자는 기쁨을 불러일으켜 <마그니피카드 Magnificat (마리아의 찬가)>를 낳는 겁니다.'(p284)



3. 깊이 읽기 : 그리고리오 성가의 탄생

 

'새로운 성가는 모든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 에서 적용되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갈리아 지방의 성가와 로마 지방의 성가가 점차 융합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성가의 권위를 확정 하기 위해 서유럽의 여러 지역 교회의 전통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음악가들은 성가들의 기원을 그레고리오 1세라고 언급하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이 여러 필사본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장크트 갈렌 수두원에 보관되어 있는 <하르트커 수사의 교창 성가집 Antifonario Hartker>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며, 여러 성가가 성령에게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탄생"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실행한 전례의 자유와 관련해서 보자면, 서유럽의 종교 곡의 역사 중 마지막 페이지를 구성한다.'(p881)



 한동안 가을을 부르는 비가 내리더니 기온도 많이 떨어지고 하늘도 푸르러 졌습니다. 초가을이 되었군요. 이웃분들 모두 여유롭고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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