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의 <팡세 Pensees>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일 것이다. 많은 경우 위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理性)을 가진 약한 존재'로 표현할 때 이 문장을 인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파스칼이 <팡세>를 통해 목적했던 바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팡세>를 통해 파스칼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인간의 본성(本性) : 본능(本能)과 이성(理性)

 

 파스칼은 본능과 이성이 인간의 두 본성이며, 이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 또는 사유(思惟)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사유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사유와는 조금 다르다.

 

 216-(344) 본능과 이성, 두 본성의 표시. (p115)

 

 162-(94)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없애지 못하는 자연적인 것도 없다. (p93) <팡세> 中 

 

데카르트 비판 : 사유의 한계

 

 232-(365) 사유(思惟).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사유는 그 본성으로는 경탄할 만하고 비길 데가 없다. 그것이 멸시받을 만하다면 무엇인가 야릇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유는 그보다 더 가소로운 것이 없을 만큼 결함을 가지고 있다.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p119) <팡세> 中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 명제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사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된다. 반면, 파스칼에 있어 사유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불과할 뿐이며, 파스칼의 사유 끝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p18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中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p137) <팡세> 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비판 : 회의(懷疑)주의 비판

 

 이와 동시에, 파스칼은 몽테뉴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역시 비판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은 자연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246-(434)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p126) <팡세> 中 

 

 파스칼의 몽테뉴 비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습관'에 대한 관점이다.  몽테뉴는 기존의 습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파스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 속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습관이 가지는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일이라고 믿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얼마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인가!(p128)... 습관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맹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p129) <수상록 Les Essais> 中

 

 241-(93) 사라질지도 모를 이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왜 본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 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p123) <팡세> 中


  245-(97)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이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자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p132) <팡세> 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생각(또는 사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갈대와 같지만,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에,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의 길이다.

 

 217-(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p115) <팡세> 中

 

 391-(347) H.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즐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p213) <팡세>

 

 중용(中庸) 그리고 신앙(信仰)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했을 때, '올바르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중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중용(moderation)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위치는 '한 점'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이 안에서 두 본성인 본능과 이성이 결합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이 점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58-(381)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p51) <팡세> 中

 

 289-(378)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한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 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p153) <팡세> 中

 

 462-(862)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웃을 때, 울 때 등등. Responde. Ne respondeas.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결합한 데 있다.(p241) <팡세> 中

 

 409-(433)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이해한 다음, 한 종교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위대와 비속을 알고 또 이것들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종교가 이것을 알았는가.(p222) <팡세> 中

 

 <팡세>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절대 진리임을 끌어내고 있다. 큰 줄기만 요약하면, 뛰어난 수학자인 파스칼의 '신 존재 증명'이 <팡세>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읽기에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인들이 신(神)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팡세>를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몽테뉴 사망한 해인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는 것이 그냥 생각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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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21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기분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2018-04-2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8-04-21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으면서 신. 인간. 존재. 사유. 습관.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바가바드 기타 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신다.‘
참 신기하죠? 강철 쇠사슬도 아니고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 이라니..

겨울호랑이 2018-04-21 22:29   좋아요 1 | URL
쉽게 끊어지는 명주실로 이어진 관계라면 조심스럽고 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곧 끊어지겠군요. 끊임없는 성찰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말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8-04-2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근간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큰 줄기가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주의자 파스칼이 ‘회의주의‘를 비판한 건 그런 연장선이라고 봐야할 거 같아요.
사실 ‘이성‘의 본질적 특징도 ‘믿음‘이잖아요^^;

겨울호랑이 2018-04-22 12:35   좋아요 1 | URL
그렇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해봤네요. 그런 면에서도 과학과 신학은 함께 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AgalmA님 덕분에 더 많이 배워갑니다. ^^:)

AgalmA 2018-04-22 12: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게 기본규칙이잖습니까^^; 주류과학이 되어서 뻗댈 때가 있지만 이건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 문제인 걸 테고요ㅎ;;

겨울호랑이 2018-04-22 12:40   좋아요 1 | URL
또한, 정치에서 ‘프레임‘으로 규정되는 것들과 과학에서 ‘패러다임‘으로 규정되는 것 모두가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인간 또는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oren 2018-04-2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와 파스칼을 두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주 재치있는 말을 남겼더군요.

˝몽테뉴는 인간의 슬픈 존재 조건을 흥미, 유머, 관용을 가지고 살폈고, 재치는 번뜩이지만 유머는 없는 파스칼은 전율과 절망 속에서 인생을 쳐다보았다. 그리하여 계시 종교의 품안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런 절망에서 가까스로 구제되었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작을 쓰기 위해 준비한 노트가 <파스칼>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니체가 파스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님의 페이퍼 덕분에 니체의『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파스칼‘과 ‘데카르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됩니다.^^

* * *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 * *

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 * *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해 종교란 정상적인 인간이 만든 산물이며, 인간이 더욱 종교적일수록, 무한한 운명을 확신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진다.······ 인간은 선할 때, 미덕이 영원한 질서와 조응되기를 바란다. 사심 없는 태도로 사물을 관조할 때, 인간은 죽음이 불쾌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장 잘 보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귀와 습관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문장 옆에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내 최초의 분노를 적어넣었다. ㅡ 마지막 분노에 이르러 나는 거꾸로 뒤집힌 진리를 담은 이 문장이 심지어는 좋아지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8절

* * *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도대체 현대 철학 전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데카르트 이래 ㅡ 사실은 그의 선례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에 대한 반항에서 ㅡ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ㅡ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든, 반(反)그리스도교적이다 :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ㅡ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간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ㅡ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은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ㅡ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54절

* * *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

그리하여 교회의 가치평가를 위해 마침내 ‘탈세속화‘, ‘탈관능화‘와 ‘보다 높은 인간‘이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하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신 같은, 비웃는 듯하고 무관심한 눈으로 유럽 그리스도교의 기이하게 고통스럽고 조야하기도 하며 또한 섬세하기도 한 희극을 조망할 수 있다면, 끝없이 놀라워하며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결국 인간에게서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를 만들려는 의지가 18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왔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가 정반대의 욕구, 즉 더 이상 에피쿠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해머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인(예를 들어 파스칼)이 그런 것처럼 이렇게 거의 자의적으로 인간을 퇴화시키고 위축하게 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 한다면, 그는 여기에서 분노와 동정, 놀라움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 그대 바보들이여, 그대 오만하고 불쌍한 바보들이여, 그대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손에 맞는 작업이었던가! 그대들은 그대들에게서 무엇을 끄집어 냈던가!˝ ㅡ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이었다.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 ㅡ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 즉 마침내 왜소해지고 거의 어처구니없는 종족, 무리 동물, 선량하고 병들고 평범한 존재가 육성될 때까지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그들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62절


겨울호랑이 2018-04-30 07:45   좋아요 0 | URL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종교와 관련한 위의 내용이 있었군요!^^:) oren님 덕분에 유명하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와 연결하여 읽으면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와 ‘노예-주인‘의 내용이 파스칼과 연결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oren님 항상 좋은 내용과 과제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문은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고백의 형태이다. 신문은 사건을 이용해서, 또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도 사건들을 채색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 복잡한 <인간적 흥미 위주의 기사>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것은 매일 다양한 기사들이 배열되어 대중 앞에 제공되기 때문이다.(p288) <미디어의 이해> 中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 1911 ~ 1980)은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를 통해서 신문(新問)이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 고백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문은 최근 경쟁 매체들의 등장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움베트르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그의 저서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을 통해 신문의 생존법을 제시한다.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 (p35) <미디어의 이해> 中


 에코에 따르면 이미 1960년대부터 신문의 기능은 뉴스의 제공이 아니라, 다른 권력 기관과 결탁을 위한 메세지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할은 1990년대까지도 이어지지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주도권은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넘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던 신문의 기능과 성격에 관한 논쟁은 두 개의 테마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습니다. (1) 뉴스와 논평 사이의 차이, 그러니까 객관성에 대한 관심의 환기, 그리고 (2) 신문은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었지요.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은 의도적으로 비밀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의 진짜 기능은 시민들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머리 위를 지나 다른 권력 집단에 암호화된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p1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예전에는 신문들이 맨 처음 뉴스를 전했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들이 개입하여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것, 신문은 <편지가 뒤따름>이라는 말로 끝나는 전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에는 이미 전송(電送) 뉴스가 저녁 8시에 텔레비전 신문에 의해 전달되고 있었습니다.(p21)...풍자, 격렬한 논쟁, 특종의 제작은 이제 텔레비전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p23)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그렇다면, 신문과 텔레비전은 미디어로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맥루언에 따르면 신문과 텔레비전 모두 '모자이크 적 형태'로 참여를 요청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텔레비전이 보다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두 매체의 차이가 된다. 최근 인터넷이 보다 보편화되어 실시간 동영상 서비스 (streaming service)와 시청자의 댓글 참여는 정보 제공과 참여의 주기를 더욱 짧게 만들고 있다.


 신문이란 애초부터 책의 형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 적 형태, 즉 참여를 요하는 형태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쇄와 취재의 가속으로 인해 이러한 모자이크적 형태는 인간 공동 사회의 지배적 양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 형태란 <분리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297)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 시대 10년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깊은 관여를 향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문화가 지닌 먼 앞날의 시각화된 목표는 그 충동 때문에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것처럼, 더 나아가 무기력하고 활기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p464)... 텔레비전 어린이는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학습에서든 인생에서든 간에 단편적이고 단순히 시각화되어 있기만 한 목표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p465)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은 보다 효과적으로 미디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신문은 텔레비전의 보조 수단으로 위치가 격하(格下)되었다. 그리고, 에코는 신문들이 보다 지역화(localization)하거나, 보다 객관화된 정보의 제공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 이상의 두 가지 대안을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신문은 이제는 이미 텔레비전의 시녀입니다. 소위 말하듯이 신문의 일정표를 확정하는 것은 바로 텔레비전입니다.(p31)... 신문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앞장서서 텔레비전을 특권적인 정치 공간으로 설정하였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경쟁자를 지나칠 정도로 선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문은 과도할 절도로 공연을 정치화하였습니다.(p3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이러한 모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신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길은 <피지 Fiji 방식의 길>입니다. 지극히 초라한 신문들은 단지 통신사의 메시지들에 의존하면서도 그 전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들을 단 몇 줄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피지 방식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신문의 경우 판매 부수의 엄청난 격감을 암시합니다.(p50)... 또 다른 길은 제가 <확산된 관심>이라 정의한 길일 것입니다. 즉 일간 신문이 버라이어티 주간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p51)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에코는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속에서 엄격하고 신빙성 있는 정보 제공자로서의 신문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신문이 선택한 길을 이와는 달라 보인다. 


 신문이 <주간지화>되었습니다. 일간지는 점점 더 주간지와 비슷하게 되었고, 버라이어티, 풍습, 정치 생활과 관련된 소문들에 대한 논의, 공연 예술계에 대한 관심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였습니다.(p24)... 일간지들은 주간지화 하기 위해 페이지 수를 늘이고, 페이지 수를 늘리기 위해 광고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더 많은 광고를 싣기 위해 페이지 수를 더욱 늘리고 부록들을 고안해 내고... 때로는 뉴스가 아닌 것을 뉴스로 만들기도 합니다.(p27)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생존을 위한 신문들의 노력은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기사의 생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언론이 대기업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진] 4대 재벌의 언론사 광고 지배력(출처 : JTBC)


 사회 내에서 자동화가 지배적일수록, <정보>가 중요한 상품이라는 점과 형태를 갖춘 상품은 정보 이동에 뒤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광고주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시간과 공간을 산다. 광고주들은 독자나 청취자나 시청자의 일부를 사는 것이다. 그들은 그 방법만 안다면 기꺼이 독자, 청취자, 시청자에게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준 대가를 직접 지불할 것이다.(p292)... 광고란(그리고 주식 시세란)은 신문의 기초를 지탱하고 있다.(p293) <미디어의 이해> 中


  또한, 뉴스의 반복-확대 재생산의 고리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거짓 뉴스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현실 속에서 점점 신문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 신문으로 대표되는 언론이 처한 위기의 단면이다.


[사진] 세월호 오보 사례(출처 : MBC) 

 

 신문이 뉴스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해 비평적으로 말하는 것과, 이미 공개된 뉴스를 마치 새로운 뉴스처럼 사용하는 것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저널리즘의 질병처럼 보인다. 어느 권위있는 사람이 나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문들이 더 잘 팔린다고(그리고 분명 비용은 더 적게 들 것이다.) (p58)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20년 전 1월 14일의 신문이 가장 최근의 1월 14일 자 신문과 동일한 뉴스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문사의 잘못일까?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당시 일어난 것을 기록했으며, 동시에 현재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나라에서는 20년 전부터 많은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똑같은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p70)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에코가 20년 전에 지적한 이탈리아 신문과 언론의 문제점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가 말한 신문의 생존 방법이 더 깊이 와닿는다.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公論)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 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433 ~ 441)  <탄원하는 여인들 > 中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5 ~ BC 406)는 <탄원하는 여인들 Hekabe> 속에서 테세우스(Theseus)의 말을 빌려 민주정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문과 언론이 처음으로 돌아가,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있는 원천이 되어, 민주주의의 자유와 평등에 기여했을 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며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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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9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은 텔레비전의 시녀’라는 에코의 시각이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TV와 언론은 SNS의 시동(侍童)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시녀’라는 표현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일부 기자들은 SNS에 공유되는 게시물을 허락 없이 가져오고, SNS 게시물의 진위 여부를 살피지 않고 기사에 올립니다. 기자라는 명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아이들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죠.

겨울호랑이 2018-04-19 15:11   좋아요 0 | URL
cyrus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동시에, 에코가 이 글을 쓴 시점이 아직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이라는 점을 감안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18-04-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0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의 쇠퇴는 우리가 정보를 운용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 있어요. 인터넷 등의 발달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고, 지금처럼 신문이 광고주나 그들 사익 추구로 변질되면서 더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죠. 정보의 질도 떨어지는데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죠^^;;

겨울호랑이 2018-04-20 11:44   좋아요 1 | URL
^^:) 그렇겠지요. 아마 정보 저장 매체로서 tape나 LP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최근 LP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것처럼 신문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신영복의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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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서 이웃분들로부터 감사하게도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영복의 엽서」역시 이웃님의 선물입니다. 영인본은 작성자의 필체를 느낄 수 있기에 저자와 교감하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런 면에서 영인본으로 작성된 「엽서」는 또다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을 해석하는 저자의 해석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북이를 얕보고 잠을 잔 토끼도 나쁘지만 그러나 잠든 토끼 앞을 살그머니 지나가서 1등을 한 거북이도 나쁘다. 화용이와 민용이와 두용이는 공부를 잘 한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토끼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공부 못하고 친구를 얕보는 토끼같은 사람이 되어서느 안된다. 친구를 따돌리고 몰래 혼자만 1등을 하는 거북이 같은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잠든 토끼를 깨워서 함께 가는 거북이가 되자. 그런 멋진 친구가 되자.(p274)

하얗게 언 비닐 창문이 흐미하게 밝아오면, 방안의 전등불과 바깥의 새벽빛이 서로 밝음을 다투는 짤막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 때는 그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더 어두워지는듯한 착각을 한동안 갖게 합니다...저는 이 짧은 시간에... 작은 고통들에 마음 아파하는 부끄러운 자신을 청산하고 더 큰 아픔에 눈뜨고자 생각에 잠겨 봅니다.(p178)

영인본 속의 글 속에서 ‘있읍니다‘와 같은 예전 표기법을 보면서 글 속에서 세월 또한 느끼게 됩니다. 내용 전달 이외에 저자의 일상생활에 초대받은 느낌을 전해 주는 영인본의 아름다움을 이번 선물을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예쁜 파우치 역시 선물로 받았습니다. 마침 여권을 보관할 파우치가 없던 차에 여권을 넣으니 색과 잘 어울리네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다소 쌀쌀한 요즘이지만, 이웃님들 덕분에 봄의 아름다움을 더 풍성히 느끼게 됩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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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15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이 선물을 주셨는지 누군지 알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8-04-15 11:58   좋아요 0 | URL
^^:) 네 cyrus님께서 예상하시는 그 분 입니다.

서니데이 2018-04-15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선생님의 책은 소개페이지를 보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영인본이네요.
작은 엽서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글씨가 예쁘고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좋은 선물 받으셨네요.^^

저희집 파우치를 예쁘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도 제가 찍었을 때보다 더 예쁘고, 여권이 들어가는 크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흐린 오후예요.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4-15 18:1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좋은 선물 감사합니다. 잘 사용하겠습니다.행복한 하루 되세요! ^^:)

oren 2018-04-15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님의 엽서를 보니 예전에 국한문을 열심히 혼용해서 썼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불과 1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소에 자주 한자를 써 봤고, 헷갈리는 때가 많아서 옥편도 자주 들춰보곤 했는데, 이제는 한자와는 너무나 멀어져 버린 듯해서 화들짝 놀랄 정도가 되었더군요.

겨울호랑이 2018-04-16 06:48   좋아요 0 | URL
oren님 말씀처럼 예전에는 신문에 한글과 한문이 같이 표기되어서 어린이 신문이 별도로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한문이 어려워 한글으로만 표기된 신문이 반가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별도의 과목으로서 하는 공부보다 생활의 일부인 한문이 보다 우리 삶에 도움이 많이 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8-04-16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6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8-10-09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의 엽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한껏 느끼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18-10-09 15: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애정을 갖지만, 제가 충분히 선생님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북프리쿠키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인기가 많은「고 녀석 맛있겠다」시리즈는 각 권의 구성은 비슷하지만, 많은 여운을 남기는 책입니다.

난폭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는 육식 공룡입니다. 때문에 다른 공룡들은 티라노사우루스를 피하기 바쁘지만, 어린 초식공룡들은 티라노사우루스가 자신들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티라노사우루스는 ‘덩치 큰 어른‘일 뿐이기에 티라노사우루스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 초식 공룡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티라노사우루스는 당황하지만, 이들과 어울리면서 사랑과 우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됩니다. 동화책으로는 드물게 죽음과 이별을 다루면서도, 등장하는 공룡들 서로가 아름다운 존재로 기억되며 이야기가 마무되기에 시리즈 전체가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영원한 사랑을 말하기보다 생명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순수함‘으로 사랑과 우정이 꽃피우는 것을 그려내는 이야기는 아이보다 읽어주는 부모가 더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지만 이야기에는 공통된 장치가 하나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치는 서로 대립되는 육식공룡과 초식공룡 세계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책에는 그러한 장치로서 ‘빨간 열매‘가 등장합니다. 이 열매는 초식 공룡들의 먹이가 되지만, 육식 공룡에게는 먹이가 되지 못하는 식량입니다. 그렇지만, 티라노사우루스는 빨간 열매를 먹음으로써 트리케라톱스나 스테고사우루스와 같이 공감하면서 사랑과 우정을 찾아가게 됩니다.

빨간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말해주지 않아, 저 스스로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이 이야기 전체가 큰 ‘은유‘라 가정해 봅니다.

밖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육식 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른‘ 또는 ‘부모‘이고, 어린 초식 공룡이 ‘어린이‘, ‘아이‘들이라면 이들이 어울릴 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순수‘ 또는 ‘동심‘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어른과 어린이가 교감했을 때 이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시간이 흘러 어린 초식공룡이 자란 후에는 이들은 더 이상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런지.

‘빨간 열매‘를 통해 「고 녀석 맛있겠다」시리즈 ‘부모-자식‘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 - 자식 관계가 공룡들처럼 서로 잡아먹는 관계는 아니기에, 제 해석이 무리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를 위해서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자식을 이해하기 위해 어른들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메세지가 있는 것은 아닌지 멋대로 추측해 봤습니다...

아마도 틀릴 가능성이 많지만, 부모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책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고 녀석 맛있겠다」는 아이를 위해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동화책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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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2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2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2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14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룡 나오는 책에 제목이 저러니까 사랑스럽고 친근해서 좋아요^-^ 아이들에게 다른 해석할 여지도 주는 것 같고.
연의는 공룡을 좋아하나봐요? 전 어렸을 때 공룡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ㅅ-;

겨울호랑이 2018-04-14 15:47   좋아요 1 | URL
유치원에 남자 아이들이 많아서... 축구나 칼싸움 등을 좋아한답니다..ㅜㅜ 아들같은 딸이지요 ㅋ

페크pek0501 2018-04-14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책을 무지 좋아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4-15 00:13   좋아요 1 | URL
^^:) 동화책임에도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책이라 여겨지기에 pek0501님께서도 좋나하실 책이라 여겨집니다^^:)

2018-04-1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7 0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투퀴티데스(Thoukydides, BC 460 ? ~ BC 400 ?)는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o Polemos ton Peloponnesion Kai Athenaion>를 통해 BC431 ~ BC404 사이에 발생한 펠로폰네소스(스파르테)인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전쟁은 '헬라스(그리스)인들뿐아니라 일부 비(非)헬라스인들에게도,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제1권 1.2)이었다. 이후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BC 429)로 대표되는 50년간의 황금기가 막내리게 되었고,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에 의존한 패권(覇權)을 잠시 누리다가 이후 테바이에게 헬라스의 패권을 넘기는 등 두 강대국 모두 몰락의 길을 걷게 었다. 헬라스 전체로도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 ~ BC 323)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에 이 전쟁은 헬라스인들에게는 진정으로 파멸적인 전쟁이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30여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서 '투퀴티데스(투키디데스) 함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기에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예일대 교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The Peloponnesian War>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통해 전쟁 전체를 조망해 보자.



[지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처 : http://m.blog.daum.net/picodrim/9873968)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 전쟁의 배경 


 투퀴티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페르시아 전쟁(BC 499 ~ BC 450) 이후 해군력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한 아테나이 제국(델로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테의 견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케이건 교수는 이와 관련한 공포, 명예, 이익이 현대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기본동기라는 점에서 이 전쟁이 현대에도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두 도시 사이의 대립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아테네가 성공적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점차 제국적인 야심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p3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 (1권 23,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아테나이의 국력이 누가 보아도 절정에 이르고 아테나이인들이 자신들의 동맹국들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자, 라케다이몬인들은 마침내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되 가능하면 아테나이의 세력을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1권 118,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투키티데스의 이 세 가지 설명 방식은 모두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한다. 공포, 명예,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p7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러한 배경하에서 일어난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가 해군(海軍) 중심의 아테나이와 육군(陸軍) 중심의 스파르테였기에 이들은 서로 다른 전략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줄 수 없었기에 이 전쟁은 장기전(長期戰)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쟁 양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 발생한 포에니 전쟁(Bella Punica)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몸젠의 로마사>에서 다루도록 하자.)


나.  아테나이의 전략 : 페리클레스 전략


 아테나이의 장점은 해군력과 스파르테를 압도하는 경제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스파르테에 압박을 가한다면, 아테나이가 승리할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판단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을 때 상황은 아테나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아테나이는 패배에 몰리게 되었다.


아테네의 핵심자원은 도시를 지키는 성벽, 바다를 장악한 함대, 해군을 부양할 돈을 공급하는 제국이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남겨둔 채로 거둔 승리의 가치는 제한적이었으므로 스파르타는 공격에 나서야 했다. (p8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았고, 전쟁에 관한 그의 선견지명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하고,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점에서 정반대로 했으며, 분명 전쟁과 무관한 다른 업무에서도 개인적인 이익이나 야망에 이끌린 나머지 아테나이에게도 그 동맹국들에도 해로운 정책을 추구했다. (2권 65,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페리클레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테네에서 계속 유지되었던 그 전략은 비록 어느 정도의 제한된 공격적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p7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다. 스파르테 전략 


 반면, 헬라스 최고의 육군을 보유했던 스파르테는 이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제1차 펠리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군대는 조기에 아테나이를 포위하였으나, 아테나이인들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뒤에 숨으면서 장기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핵심은 펠로폰네소스인과 보이오티아인으로 구성된 그 찬란한 중무장 보병이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보다 두세 배 더 컸고, 세계 최고의 군대라고 널리 인정되었다.(p85)...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431년에 아티카를 침공한 스파르타 군대가 6만 명이었다고 한다.(<페리클레스>33,4) 그 숫자는 너무 크지만, 분명히 스파르타의 군대는 아테네의 전투 중장 보병보다 2:1 또는 3:1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p8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 시칠리아 원정 : 아테나이 파멸의 시작


 전쟁이 계속되면서 스파르테 군대에 의해 포위된 아테나이는 좁은 지역에 밀집하면서 발생한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에 의해 인구가 격감하게 되고, 도시 밖 경제활동이 제약됨에 따라 주변 제국에 대한 세금을 올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포위의 결과 발생한 아테나이 내/외부의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아테나이는 전황(戰況)을 변화시킬 필요가 생겼으며, 이 결과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원정의 결과 아테나이는 파멸에 이를 정도의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곡물이 펠로폰네소스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욕망은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사태였다. 스파르타인의 아티카 유린의 기간과 강도는 어느 정도 침공군의 식량 공급에 달려 있었다. 시칠리아의 수확물을 상실하면 미래의 침공은 단축될 것이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전시에 제국을 확장하지 말라는 페리클레스의 충고를 명백하게 어기는 것이었다.(p15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이 사건(시켈리아 원정)은 이번 전쟁 전체를 통틀어, 아니 내가 보기에는 기록에 남은 헬라스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이긴 자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패한 자들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재앙이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전선에서 완패했고, 그들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보병이며 함대며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 많던 자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상이 시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7권 87, 5 ~ 6)<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마. 페르시아의 등장


 시켈리아 원정의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서서히 힘을 다시 키워가면서 스파르테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아테나이 해군의 힘을 꺾기 위해 스파르테는 지날날 살라미스 해전(Salamis batle, BC 480)에서 자신들을 적대했던 페르시아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의 해군을 봉쇄할 힘을 얻게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아테나이의 붕괴를 위해서는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필요했다.


밀레토스를 차지했다는 소식에 티사페르네스는 급히 그곳으로 가서 스파르타인과 대왕의 동맹을 맺었다. 이 일방적인 문서는 다리우스에게 그나 그의 조상들이 보유했던 모든 영토와 도시들을 반환했고, 페르시아인과 스파르타인은 이 지역들에서 아테네에 대한 세금 지급을 중지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페르시아인에게 살라미스 이전에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그리스 영토를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페르시아인이 스파르타인에게 제공할 지원에 대해서는 재정적이건 그 어떤 것이건 명문화된 것이 없었다. (p39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특히 현재 상황에 비판적인 리카스는 칼키데우스가 맺은 협정도, 테리메네스가 맺은 협정도 잘못되었다면서, 대왕이 자신과 자신의 선조가 전에 지배한 모든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든 섬들과 텟살리아 지방과 로크리스 지방은 물론이고 보이오티아 지방에 이르는 모든 헬라스 땅이 다시 노예가 되고, 라케다이몬인들은 헬라스인들에게 자유 대신 페르시아의 지배를 안겨주었음을 의미하게 되리라고 했다. (8권 43, 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티데스 中


왜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은 또 하나의 불리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일까? 그것은 스파르타의 협상 위치가 너무나 불리했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아테네인 앞에서 페르시아의 돈과 지원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스파르타인이었기 때문이다.(p412)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바. 아테나이의 몰락


 아테나이의 몰락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정에서 체제의 수호를 원한 자들과 과두정을 원한 이들의 대립은 아테나이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며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투퀴티데스의 저서에는 전쟁의 후반부를 다루지 않았기에, 이 부분은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354)의 <그리스 역사 Hellenica>를 참고해본다.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함대의 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층 계급들과 그들의 민주파 지도자들과의 협력에 의지해야 가능했다.(p448)...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정의 복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적군을 끌어들이고, 배들과 성벽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아테네에 관련된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8,91.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中


라케다이몬인은 헬라스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헌한 헬레네스의 도시를 파괴하는 데 찬성하지 않고, 대신 장벽을 허물고, 페이라이에우스에는 12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포기하고, 추방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라케다이몬과 같은 친구와 적을 가지며, 뭍이거나 바다거나 어디든지 라케다이몬인들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강화했다... 이미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 다수가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스 역사 2권(p51)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헬라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스파르테, 그 뒤를 이었던 테바이 모두 두 번 다시 페리클레스 시대 만큼 헬라스를 번영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런 면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전쟁 당사자 모두를 파멸로 이끈 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제, 투퀴티데스 함정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기사출처 : http://www.hankookilbo.com/v/2538a200b1e94befaa0d19e9bccec112/


 아테나이의 번영에 대한 스파르테에 대한 시기, 질시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두 강대국 모두에게 독(毒)이 되어 모두를 쓰러뜨렸다.  최근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질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이 세계 석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투퀴티데스 함정'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이상의 투퀴티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을 종합해 보면,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미국이 경제적 선두의 위치에서 내려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경제적 선두를 필요하지만, 중국은 아직 경제적 선두를 받을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킨들버거 함정) 세계 경제 공공재로서의 경제적 선두가 없다는 현실 자체도 위협적이지만, 만약 미국이 최근의 중국의 눈부신 성장에 시기와 질투를 느껴 이를 견제하려 한다면 파멸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투퀴디데스 함정)


 세계 석학들은 미국의 고립주의와 중국의 부상(浮上)에 대해 '킨들버거 함정'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군사적 충돌보다는 관세 전쟁을 통한 경제면에서의 충돌이 더 우려되기도 하지만,  어느 면에서의 충돌이든 세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다 현명한 선택과 대응이 요구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번 페이퍼의 주제와 관련하여 맹자(孟子, BC372 ~ BC289)의 한구절이 떠르게 되는데, <맹자>의 해당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孟子曰 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맹자왈 이력가인자패 패필유대국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이덕행인자왕 왕불대대

湯以七十理 文王二百里 탕이칠십리 문왕이백리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이력복인자 비심복야 역불섬야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이덕복인자 중심열이성복야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실제로 힘에 의지하면서도 겉으로는 인仁의 명분을 빌어 정벌을 일삼는 자는 패자 覇者이다. 패자는 반드시 강대한 국가를 소유해야한다. 자기 내면의 덕에 의지하면서 인정 仁政을 행하는 자는 왕자 王者이다. 왕자는 반드시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임금은 사방 7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고, 문왕은 사방 100리의 나라를 기초로 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힘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내면적 도덕의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은 마음속 한가운데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246) <孟子 맹자 公孫丑 공손추  上 상 2a-3> <맹자 사람의 길 上>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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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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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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