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퍼시 스노우(Charles Percy Snow, 1905 ~ 1980) 남작은 <두 문화 The Two Cultures>를 통해 서구 문명을 이루는 두 문화의 오랜 갈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두 문화>를 통해 '과학자'들과 '인문계 지식인'들 간의 불통(不通)을 서구 사회의 문제로 지적한다. 

 

 선진국인 우리 서구 사회는 공통의 문화라는 것을 요구하는 소리마저 잃고 말았다. 우리가 아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주된 지적 관심의 분야에서는 상호간에 의사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의사 소통이 결여된 가장 두드러진 예를 내가 이름붙인 이른바 [두 문화]라는 것을 대표하는 그룹의 사람들이라는 모양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그 한쪽은 과학자들로서 그들의 중요성, 업적, 영향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또 한쪽은 문학적 지식인을 말한다.(p75)  <두 문화> 中


  전문화(專門化)와 분화(分化)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과학자들과 인문계 지식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말해왔고, 그 결과 공통의 문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스노우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육(敎育 education)을 통한 제3의 문화의 창출을 통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두 그룹, 즉 과학자와 인문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고, 상호 이해보다는 일종의 적의 같은 것을 품고 있다.(p75)... 우리들의 시대, 또 우리들이 예측할 수 있는 시대에 있어서의 여러 조건 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을 찾는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진 중요한 수단은 교육이다.(p76) <두 문화> 中


 제3의 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듯이 말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나타나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에 따르는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결국은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화는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도 과학적 문화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p86) <두 문화> 中


 그렇지만, 이러한 '과학 - 인문학'의 이분법적인 접근은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 ~ 1936)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부족함이 있다. 그는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Kulturwissenschaft und Naturwissenschaft> 속에서 과학을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먼저 자연과학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두 종류의 경험과학적 작업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에는 자연과학이 있다. '자연'이라는 말은 대상의 측면뿐만 아니라 방법의 측면에서도 자연과학의 특생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자연과학은 자신의 대상을 모든 가치 연관과 무관한 존재와 사건으로 보고 있고, 자연과학의 관심은 이러한 존재와 사건에 타당한 보편 개념과의 관계나,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보편 법칙을 인식하는 것을 향해 있다.(p174)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中


 리케르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현상으로부터 보편법칙을 이끌어내는 과학인 반면, 문화과학은 특수성과 개성을 발견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소 거칠게 리케르트의 문화과학을 사회과학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추구. 이것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역사적 문화과학이 있다. 이 과학을 지칭하는 말과 관련해, '자연'이라는 표현에 상응하면서 동시에 대상의 측면이나 방법의 측면에서 이 과학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 우리에게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에 조응하는 두 가지 표현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 과학은 문화과학으로서 보편적인 문화 가치와 연관된 객체, 즉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객체를 다루고, 역사적 과학으로서 이 객체의 일회적 발전을 특수성과 개성에서 서술한다.(p175)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中


  결국, 스노우가 서구 문명을 이루는 두 문화를 '과학'과 '인문학'으로 나누었다면, 리케르트는 '과학'을 '문화과학'과 '역사과학'으로 다시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끝없이 학문을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분화의 부작용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학문의 분화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계열'와  '자연계열'로 나뉘면서 학생의 향후 진로가 크게 갈리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수학'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수학을 좋아하면 자연계열로, 좋아하지 않으면 인문계열로 진로를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절을 보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학 - 인문학'의 갈등을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스노우의 주장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히려, 교육을 통해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스노우의 해결 방안을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제시한 제3의 문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교훈을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 ? ~ 1645)의 <오륜서 五輪書>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니텐이치류(二天一流)에서는 두 자루의 검, 즉 장검과 단검을 이용한 병법을 가르친다. 이때 장검과 단검은 각자 편할 대로 양손에 나눠들면 되는데, 장검과 단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병법을 가르치는 까닭은 양손에 힘을 길러 검을 한 손으로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p15) <미야모토의 무사시의 오륜서> 中 - 병법 35개조 중 1조 - 


 일본의 전설적인 검술가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두 개의 검을 사용한 검법(劍法)으로 이름을 떨쳤다. 긴 칼과 짧은 칼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것을 강조한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우리가 만든 한계상황을 이제는 깨나가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 따라 어떤 분야가 장검이 되느냐는 달라지겠지만, 우리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양쪽 모두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은 우리 공부의 평생 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그림] 미야모토 무사시 (출처 : 위키백과)


 장검(長劍)을 선호하는 유파가 있는가 하면, 단검(短劍)을 선호하는 유파도 있다. 이들 역시 진정한 병법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부터 검은 길이에 따라 장검과 단검으로 나누어 사용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힘이 센 사람은 장검을 가볍게 다룰 수 있어 굳이 단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파에서 단검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은 단검의 길이가 짧다는 점을 이용해 상대방이 검을 휘두르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빨리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134)...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므로 무사라면 장검이니 단검이니 한쪽에 편중하지 말고 올바른 병법과 바른 도리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p136) <미야모토의 무사시의 오륜서> 中  


PS. 물론 베르세르크처럼 큰 칼 하나를 아주 잘 써서 성공할 수도 있긴 하다. 드물겠지만...


[그림] 베르세르크 (출처 : http://blog.artlords.com/2018/03/22/the-art-of-berserk-kentaro-mi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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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5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야모토 무사시도 켄신 혹은 오타니처럼
이도류였나 봅니다.

만화 <배가본드>로 보다말다 한 기억이
나네요.

균형 잡힌 학문에 대한 추구, 듣기만 해도
멋집니다. 저로서는 불가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8-08-05 23:20   좋아요 0 | URL
네... 미야모토 무사시도 말씀하신 것처럼 이도류였습니다. 균형잡힌 공부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8-08-06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8-1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베르세르크! 끝이 나긴 했나요? 도서대여점이 사라진 이후 끝을 못 봤어요ㅋ

그리스 철학 전후만 해도 서양은 ‘자연철학자‘라고 불렀잖아요. 과학적 탐구부터 인문학까지 두루 공부했으니까요. 다빈치나 괴테(<색채론>: 야매라고 좀 혹평을 받긴 하지만ㅎ;)까지만 해도 인문-자연과학 공부를 확연히 나눠서 한 것도 아닌 거 같고요. 개인의 역량에 따라 차이가 날 뿐. 학문 분과가 시초였겠으나 기술 혁신이 사회 변화를 본격화한 산업혁명 즈음 이후부터 이 분리가 심화된 게 아닌가 싶어요? 동양도 지덕예체 하며 분야를 그리 나누지 않았던 거 같은데(기술, 무예를 아래로 본 문화부터는 문제) 근대 이후부터는 서양 문화 때문에 이리 된 거겠죠.
최근 통섭이니 하며 과학과 인문학적 사고의 조화와 결합을 논하는 건 일종의 회귀일까요ㅎ 많은 걸 겸비하는 게 좋긴 하겠으나 이젠 지식의 총량이 너무 방대하여... 한 300년 뒤에 태어났으면 좀 더 공부하기 편했을라나 싶네요ㅎㅎ 그러나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 거나 지구가 이미 없을 지도ㅋㅋ;;;

겨울호랑이 2018-08-11 15:37   좋아요 1 | URL
<베르세르크>는 아마 작가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완성할 계획인 듯 합니다. <유리가면>과 더불어 끝을 보기 힘든 작품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알아야할 지식도 많아지면서 ‘전문화‘라는 이름하에 극히 일부만 알게 된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통하는 법칙이랄까 원리는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면을 바라보는 안목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돌아가는 추세라면 300년 후에는 AgalmA님 말씀처럼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롭게 변화해야하겠지요...^^:)
 

판교현대백화점에 약속이 있어 온 가족이 나왔습니다. 더위에 피서를 백화점으로 많은 분들이 오신 듯 하네요.

식사 후 현대어린이책미술관으로 나왔습니다.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았네요. 바깥으로는 도라에몽 전시회가 있어 예쁜 풍경이 보입니다.

「헤엄치는 집」을 읽고 도서관에서 「어린이 마하바라따」를 보니 집으로 가서 「마하바라따」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더운 여름 일요일 입니다. 이웃분들 모두 건강하게 오후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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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5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8-05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도서관 출입
도 쉽지 않더군요.

아마 비용도 들지 않고 최고의 피서지로
입소문이 나서 일까 싶네요 :>

백화점의 순기능도 있군요.

겨울호랑이 2018-08-05 23:23   좋아요 0 | URL
백화점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보니 아이들을 둔 가정에서 유용한 강좌도 제법 있더군요. 잘 활용한다면 의미있는 피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로 2018-08-06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에 있었을때 백화점에서 수영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이랑 저도 배우고 했는데 여긴 그렇게 한 공간에서 다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한국은 정말 천국이에요. 맘만 먹으면 백화점을 비롯한 주변에 좋은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 듯요. 강좌도 많고...그립네요. ^^;

겨울호랑이 2018-08-06 09:20   좋아요 0 | URL
때로는 백화점이 너무 커서 쇼핑체력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공간으로 백화점은 분명 의미있는 공간이라 생각됩니다. 라로님 말씀을 듣고 보니, 백화점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제게는 ‘너무도 먼 당신‘이지만요. 라로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아트 2018-08-07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걱 가족 모두 함께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넘 보기 좋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8-08-07 11:59   좋아요 1 | URL
김유나리님 감사합니다. 아이 덕분에 저 역시 좋은 곳을 가봤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널리 알려진 빅터 플랭클(Victor E. Frankl, 1905 ~ 1997)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The Will to Meaning : Foundations ans Applications of Logotherapy>에서 자신의 이론인 로고테라피 Logotherapy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의지 意志 와 삶의 의미 意味, 그리고 이들의 관계라 생각된다.

 

 로고테라피의 인간에 대한 개념은 다음 세 개의 기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자유 의지 freedom of will,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will to meaning, 그리고 삶의 의미 meaning of life이다.(p34)... 인간의 의지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의지이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그것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p3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상황을 바꿀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다. 의지를 통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시킬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의지만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무너지는 과정이 잘 묘사되고 있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저자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3의 원리란 의지의 자유와 함께 의미, 즉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삶의 의미 - 인간이 찾으려고 노력해 왔던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이 의미를 성취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p11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자신을 통합시킬 것을 주문한다. 세상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지어 이원론(二元論, dualism)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종합적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변증법의 합(合)의 단계가 여기서도 요구되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짓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을 생물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에 투사를 하면 그 결과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나는 그 결과가 생물적인 유기체 biological organism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기제 psychological mechanism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신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하더라도 차원적 인간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 모순이 더 이상 인간의 통일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p46)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신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 수준을 초월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차원이란 순수 지성 noetic에 입각한 차원, 생물적인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과는 구별되는 noological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차원이다.(p37)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이렇게 인간이 통합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부산물로 얻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 자아 실현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빅터 플랭클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 ~ BC 271)와 반대 위치에 서 있는 저자의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쾌락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로부터 빗나가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행복의 추구' 그 자체가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순리적으로 쾌락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목표의 달성을 통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목표의 성취가 행복을 느낄 이유를 만들어낸다.(p58)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자아 실현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제일 우선시 되는 의지도 아니다. 자아 실현 자체에 목표를 두게 되면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적인 특성과 모순을 이루게 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아 실현도 하나의 결과, 즉 의미를 성취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p64)... 나는 자아 실현을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p6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나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선 agatb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탁월함 arete 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p40) <쾌락> 中 -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쾌락을 주는 것은 좋은 것(善)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인간이 가진 의지의 힘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만 가능하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을 동기의 목표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심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해야 할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행복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p59)... 행복과 쾌락은 모두 성취의 대체물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쾌락 원리가 권력에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다.(p6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행복과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라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피해야할 악 惡이다. 오직, 행복과 쾌락이 아타락시아 ataraxia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선이라면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의 삶의 의미는 시련을 통해서도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궁극적인 의미는 더 이상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실존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 믿음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p228)... 낮은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높은 차원에서는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p23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빅터 플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가 말한 의미는 '가치중립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의미는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그것 자체로는 중립적인 것들에 우리가 투사시킨 어떤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중립성의 견지에서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투사되어 있는 하나의 스크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97)...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p99)... 의미란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런 질문을 수반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p10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내용 전체를 통해서 저자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을 통해 하나된 자신을 바라봤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가 말한 불안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불안을 통해서 개인이 신앙을 지향하도록 교육 받을 때, 불안은 바로 그 자신이 낳는 것을 뿌리뽑을 것이다. 불안은 운명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바로 개인이 운명을 신뢰하기를 원할 때, 불안은 일변하여 운명을 없앤다. 왜냐하면 운명은 불안처럼 그리고 불안은 가능성처럼 마녀의 편지 Hexenbrief, magic picture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운명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에 의해서 그렇게 변형되지 않을 때, 그는 항상 그 어떤 유한성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변증법적 앙금을 남길 것이다.(p404) <불안의 개념> 中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의 의미를 개인 신앙의 고양 高揚에서 찾고 있듯이,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믿음의 차원으로 극복하자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전편 <죽음의 수용소에서>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독자들은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렇지만, 저자의 체험이 어떻게 이론으로 녹아들어갔는가를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나름의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명파 시인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 ~ 1967)의 시 詩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운명 運命에 대하여 (2연)


 운명 運命이란 산 山처럼 엄숙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낙엽 落葉같이 흔하고 값 없어 거리에 굴르는 그 어느 하나를 주워 네 것이라 하여도 매 마창가지 - 외롭고 슬프고 의지 없게 마련이거늘 오늘 너보다 더욱 크낙한 것의 당차한 조락 凋落의 계절에서 너는 마땅히 배아 胚芽를 갖지 못한 무수한 낙엽 落葉의 그 한 이파리임을 깨쳐야 할 것이다.(p142) <청마시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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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8-0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시원하고 즐거운 일들 가득한 주말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기분 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19:40   좋아요 1 | URL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있네요. 다음 주만 넘기면 더위가 가시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18-08-04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무더운 날씬엔 책 어디서 읽으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21:52   좋아요 1 | URL
저는 집에서 주로 읽습니다. 손에 익은 책을 보는게 좋아서요 ㅋ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시원한 도서관을 가시나요?^^:)

2018-08-05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 20여년 중 가장 덥다는 요즘입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밀어 닥친 폭염 속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아직 40대 한창때임에도 이처럼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한다면, 나이 드신 분들 특히 에어컨을 갖추지 못한 분들에게 이 더위는 어떤 의미일런지 생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 ~ 2002)의  <세계의 비참 La Misere du Monde>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할머니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생각해 봅니다.


 

[사진] 쪽방촌의 무더위(출처 : 뉴스1)


 내가 또 한 번 넘어졌지 뭐요. 6월에 팔을 다친 이후로 몇 번씩이나 깁스를 할 일이 생겼는지 모른다오. 그 상태에서 어느 날 또 넘어졌으니까.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때가 8월 15일이지. 그런 식으로 자꾸 넘어지고 다치고 한거라오.... (웃는다) 하기야 웃을 일도 아니지. 그때가 8월 바캉스철이니 누구 부를 사람이 있어야지, 모두들 휴가를 떠나고 없으니...(p1455)... 내 일을 하는 동안 서로를 귀찮게 하는 일이란 게 어떤 건지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오. 다 늙은 노인네를 도대체 어떻게 도와 줄 수 있겠수? 이것 보우, 우릴 살려 두려고 하는데... 하기야 이걸 산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웃음) (p1459) <세계의 비참 3> 中

 


 '고독'이라는 주제의 인터뷰를 하신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혼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버티는 독거노인의 슬픔을 느끼면서,  무더운 여름날에는 더위를, 추운 겨울날에는 추위를 혼자서 견뎌야 하는 이분들의 어려움 또한  인터뷰 뒷면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 이분들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나라 노인문제의 현주소가 아닌지도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최선의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선의 정체가 추구하는 목표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차 말했듯이, 전쟁의 목표는 평화이고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므로, 개인이나 국가나 여가 선용에 필요한 탁월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가 선용과 마음의 계발에 필요한 탁월함 중 어떤 것은 여가를 선용할 때 작동하고, 다른 것은 노동할 때 작동한다.... 용기와 끈기는 노동에, 철학(philosophia)은 여가에, 절제와 정의감은 노동과 여가 모두에 필요한데, 여가를 즐기며 평화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특히 철학과 절제와 정의감이 필요한데, 축복이 넘치는 가운데 여가를 많이 즐길수록 이 세 가지에 대한 필요도 그만큼 커진다. (1334a11) <정치학> 제7권 15장 中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는 <정치학 Politika>을 통해 여가의 중요성을 위와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가 선용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탁월한 인간이 되기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속에서 휴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더위를 피하면서 재충전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나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이웃분들 모두 즐거운 휴가보내시고 건강하게 재충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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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18-08-02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취약층인 노인과 아이들이 걱정되더군요. 없는 사람은 여름 나기가 낫다더니 그것도 옛말이 되려나봐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8-08-02 23:15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짧은 생각입니다만,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더 큰 문제인것과 맞닿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에어컨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이 더위보다 그분들을 더 힘겹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2018-08-03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8-03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동의 궁극적 목적이 여가이고,
그 여가 활용을 통한 탁월한 인간이 되는 것

독서야말로 가장 근사치에 도달한 여가를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8-03 11:25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에는 휴가를 보낼 때 빠듯한 일정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 가장 좋은 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숨을 내쉰 후에야 다시 들이쉴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독서를 통해 다시 채운다면 그보다 더 좋은 여가 선용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레삭매냐님께서는 이번 여름을 로맹 가리를 통해 의미있게 채우고 계신 것 같아 많이 부럽습니다. 더운 날 건강하게 보내세요!^^:)

2018-08-04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4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 영성으로 이끄는 교육
얀 우베 로게, 안셀름 그륀 지음, 장혜경 옮김 / 로도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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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Kinder Fragen nach gott>는 안셀름 그륀(Anselm Grun) 신부와 독일 교육학자 얀 - 우베 로게(Jan - Uwe Rogge)가 어린이 교육과 부모의 영성(靈性)에 대해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교육학자인 얀 - 우베 로게의 교육관에 뼈대를 두고 여기에 안셀름 그륀 신부의 영성을 살로 입힌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앞서 얀 -우베 로게 교수의 교육관을 살펴보자.


  저 책에 관한 서평을 보니 저의 교육관이 주요한 4가지 개념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경계의 경험과 규정, 인내, 여유, 위대한 감정의 경험. 아이들의 삶에 동행하는 사람은 위대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때 교육의 측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경험하는 갖가지 감정을 지지하는 것입니다.(p9)... 또한 교육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란 지금 이 순간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한편 인내는 여유와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허용하는 것입니다.(p10)... 끝으로 아이들에겐 경계가 필요합니다. 경계는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정해줍니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p11)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얀 - 우베 로게 교수는 자신의 교육관을 위대한 감정의 경험, 여유, 인내, 경계로 크게 정리한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부모들 또한 아이들과 함께 여러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위대한 경험의 과정을 부모는 어떠한 마음올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안셀름 그륀 신부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들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아이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아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의미이다. 또한 두려움에 직면한 아이와 동행한다는 건 그 아이가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내는지 지켜본다는 의미이며,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p102)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그렇지만, 많은 경우 부모들은 이 과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아이의 경험의 의미를 아이와 함께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과거에서 의미를 끌어와 공감하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자신의 바람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진] 화목한 가정(출처 : https://kor.pngtree.com/)


 부모는 항상 자신의 바람을 아이에게 투영할 위험이 높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모든 길을 열어주었다고 믿지만, 사실 아이는 부모의 삶을 대신하는 것일 뿐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p72)... 아이와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교육적인 격려와 아이의 유일성에 대한 경탄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p73)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는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를 삶의 동반자 관계로 바라본다. 같은 위치에 있는 동등한 가정의 구성원들이기에 모두의 목소리는 소중하다. 그리고, 이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바라는 부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이 원하는 부모는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지지해주는 부모다.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둔 부모, 모든 문제에 대해 서둘러 대답해주는 부모가 아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는 없다.(p41)... 완벽주의를 버리라는 건 아이가 무엇을 원하든 상관하지 말고 무관심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완벽주의의 반대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걸로 됐어!' 하는 식의 인간적 태도를 키우는 것이다.(p42)... 불완전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자의식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강점을 깨닫고, 더불어 자신의 약점과 문제점을 인정해야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불완전함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p43)... 아이들은 자신에게 뭔가 기대하는 관계를 원치 않는다. 조건 없는 인정과 사랑을 원한다.(p46)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아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은 끈기 있는 지혜의 스승이다. 말로 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에 어른들이 금세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p23)... 사회적 병폐가 만연한 세상에서 방향을 잃은 채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다 보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p26)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나를 닮은 아이가 보이는 행동 속에서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아이의 행동이다 보니 좋은 모습도 있지만, 내가 부족한 모습 또한 발견되기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기쁨. 슬픔. 반가움, 안타까움 등 수많은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느낄 때가 많다. '이 점은 고쳤으면 싶은데...' 하는 부분에 대해 부모가 안타까움을 느끼거나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거의 모든 부모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풀어낸다면 아마 자녀와의 관계가 위태로워질 것이기에 많은 부모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순간을 넘길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우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내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나와 아버지 나이 차이는 30년 나는데 반해 나와 연의 나이 차이는 35년도 넘게 난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겪으신 셈이니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아이 문제를 바라보면 아버지보다는 형님되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어 조금은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동시에 아버지를 조금씩 더 이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아이가 지혜의 스승이라는 말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교육학자 카타리나 마르틴과 헬무트 베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디엔가 도착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기 위해 발을 옮겨놓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길을 희생하는 건 삶을 희생하는 것과 같다. 교육도 이와 같다. 배우고 알아가는 것은 길이지 목표가 아니다.(p27)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는 우리에게 자녀를 어떻게 키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빨리 태어난 사람이 늦게 태어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 가정(家庭)이고, 함께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이 교육(敎育)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완전한 희생 대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내용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책의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사진] 황혼 무렵 노모와 아들(출처 : 위키트리)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자식이 부모의 심적 균형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부모에게는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부부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가 남게 된다. 많은 가족 구성원이 함께 살다가 다시 부부만 남게 된다. 이때 부모는 다시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한다.(p221)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中


 언젠가 자녀들은 독립할 것이고 부모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때 다시 신혼때처럼 남자와 여자 둘 만이 남았을 때, 우리는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저자 중 한 명인 안셀름 그륀 신부의 다른 저작 <황혼의 미학>을 통해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이는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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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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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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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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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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