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는 제목 그대로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와 함께 만든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입문서다. 수학을 기호논리학을 통해 재구성한 <수학 원리>처럼 이 책은 주로 집합론(集合論, set theory)과 논리학을 연계하여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 페이퍼에서는 이를 알아보려 한다. 러셀의 주장을 들어보기 전 우리는 먼저 다른 수학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는 바로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 ~ 1918)다.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었다.(p1013)... 칸토어는 각각의 닫힌 집합(closed set)에 대해 Xα = Xα+1을  만족하는 가산 순서수 α가 있음을 증명했다.(p1013)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中


 집합론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은 칸토어의 업적은 '적어도 둘 이상의 다른 종류의 무한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과 '초한기수'의 도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수 [0,1] 사이에 있는 소수의 개수와 { 1,2,3,4....n,,,}과 같은 집합은 둘 다 무한 집합이다. 이처럼 무한 집합은 무수히 많이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지만, '초한기수 transfinite cardinal number'라는 개념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보자.


 

귀납적 수와 이 새로운 수 사이에서 가장 뚜렷하고 놀라운 차이점은 이 새로운 수에 1을 더하거나 1을 뻬거나, 또는 2배를 하거나 반분하거나, 혹은 그것에 그 수를 반드시 크거나 작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연산을 해도 그 수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1을 더하여도 변치 않는 점을 칸토어가 '초한기수 transfinite cardinal number'라 부르는 수를 정의하는 데 이용하였다.(p90)... 어떤 집합이 1을 더하여도 변하지 않는 수를 갖는다는 것은, 그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항 x를 들었을 때 정의역이 그 집합이고, 역정의역이 그 집합에 x를 더한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1대1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p91)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정의역이 그 집합이고, 역정의역이 그것보다 꼭 한 항이 작은 집합으로 이루어진 1대1인 관계가 있다. 바로 이 같은 것이 성립하는 경우와 겉보기는 더 일반적인 것같이 보이는 "'한 부분(전체가 아닌)'과 '전체' 사이에 1대1 관계가 주어진다"는 경우가 내용상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같은 대응이 성립할 경우, 우리는 그 대응을 만드는 매개자는 전체를 그것의 한 부분에 '반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같은 집합을 '반사적 집합'이라 부른다. 즉 반사적 집합 reflexive class이란 자신과 자신의 진부분 집합이 대등한 집합을 뜻하며, 반사적 기수 reflexive number라 함은 반사적 집합의 기수를 말한다.(p91) <수리 철학의 기초> 中


  그렇다면, 칸토어의 주장처럼 Xα = Xα+1을  만족하는 가산 순서수 α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진부분집합이 대등한 반사적 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러셀의 반론이 유명한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다.


 "최대기수에 관한 모순 contradiction of the greatest cardinal"에서도 논리형에 관한 이론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개체, 개체의 집합, 집합의 집합 등을 모두 하나로 묶으면 그것의 부분집합은 자신의 원소가 된다. 어떤 것이든 셀 수 있는 것은 모두 한데 묶어 하나의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 집합이 최대의 기수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그 집합의 부분집합은 모두 원래 집합의 원소이므로 그것의 부분집합의 수는 그들 집합의 원소의 수보다 크지 않다. 이는 하나의 모순이다...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한 매우 큰 집합은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한다. 즉 '모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자신 역시 그 '모든 것' 중의 하나이므로, 그 '모든 것'의 집합의 원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서는 집합이 그 자신의 원소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집합, 즉 인류라는 것은 절대로 그것의 원소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집합 전체를 생각하자. 틀림없이 이는 한 집합이다. 그러나 이 집합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 (p156) <수리 철학의 기초> 中

 

 당시 칸토어를 좌절시킨 이러한 러셀의 공격이었지만, 현대 수학에서는 칸토어의 초한기수나 러셀의 역설 모두를 집합론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만 간단히 참고하도록 하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 보자. (칸토어와 러셀의 이야기는 만화 <로지코믹스>에서도 쉽고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순서수이다'라는 성질을 생각해보자. 만약 이 성질로 결정된 집합은 모든 순서수의집합이 될것이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보면 이 집합은 정렬집합으로서 모든 순서수보다 더 큰 순서수에 대응되어 모순이므로 존재될 수 없다. 비슷한 논리로 '자기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성질'도 집합을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A가 그러한 집합일 때 A가 A의 원소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니라는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의 모임이 어떤 한 성질에 의해 결정되더라도 이 모임을 항상 집합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p1018)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中


  <수리철학의 기초>는 초중반에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해 논박을 가하지만, 후반부에는 공격방향을 살짝 돌리는데, 그 대상은 바로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8)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의 일절에 다음과 같은 논법이 있다.  만일 1과 같은 하나의 수가 있다면 그 수 1이 존재를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수와 존재가 같은 것이 아니므로 1과 존재는 둘이 된다. 따라서 수 2가 된다. 이 2와 1의 존재를 합하면 3개의 원소를 갖는 집합이 된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이 논법을 끝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어떤 정해진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일정한 의미를 주었다 해도 수는 존재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이 논법은 잘못이다.(p158)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수리 철학의 기초>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라톤의 '존재' 증명 방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저자는 기술(description)에 대한 논의를 잠시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한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비교해야 한다. 즉 (1) 이름, 이는 단순한 기호이고 그 기호가 의미하는 개체를 직접 가리킨다. 그리고 다른 낱말의 의미와는 완전히 독립해서 오직 그 자신의 권리에서 그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기술, 이는 미리 뜻이 정해진 몇 개의 낱말로 구성되며, 그 기술의 의미에 의해 생각되는 것은 모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낱말의 의미에서 도출되는 것이다.(p202)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여기까지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게 무슨 플라톤 비판이야?' 책을 보다 즐기기 위해 우리는 두 권의 책을 곁들어 읽을 필요가 있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와 <철학의 문제들>이 두 권의 책인데, 해당 책들에서 '기술'과 관련한 부분을 옮겨본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가령 외국어로 번역될 잘 모르지만 어쨌든 실제의 언어가 매개물이 되고, 언어 자신이 그 부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름이 단지 이름으로만 쓰였다면 "스콧은 바로 그 월터이다"라는 명제도 "스콧은 스콧이다"라는 명제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사실을 공연히 반복해 표현하는 것이 된다.(p203) <수리 철학의 기초> 中


 기술 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닌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p1033) <서양철학사> 中


 저자에 따르면 '스콧'이라는 존재는 소설가, <웨이벌리>의 작가, 영국인 등등 그를 설명하는 많은 기술 어구에 의해 설명된다. 때문에, "스콧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기술함수'에 의해 맺어진 관계로 분석되고, 이는 "황금산이 존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명제가 된다. 반면,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의 명제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명제함수에 의해 맺어진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가 된다.


 

복합체가 요소들이 아니라면 복합체는 요소들을 제 자신의 부분들로 가지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복합체가 요소들과 동일한 것이라면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거나 할 게 필연적이지 않나?... 사태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복합체를 요소들과 다른 것으로 놓았던 것 아니겠나?... 다음은 어떤까? 요소들이 복합체의 부분들이 아니라면 자넨, 복합체의 부분들이지만 그러면서도 복합체의 요소들이 아닌 그런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럼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이렇게 될 걸세. 즉 지금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체는 부분으로 나뉠 수 없는 어떤 단일한 형상일 걸세.(205b) <테아이테토스> 中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복합체는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단일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1:1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지만, 러셀에 따르면 이들은 '스콧은 존재한다'라는 틀린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복합체의 존재성은 기술에 의해 설명되기에, 결코 단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러셀이 <수리철학의 기초> 나아가 <수학의 원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러셀과 화이트 헤드는 <수학의 원리>를 통해 모호한 언어 대신 수학의 질서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보다 명료하게 가져가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수리 철학과 관련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기술구들을 가진 명제들의 분석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오성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명제는 우리가 직접 대면에 의해 인식한 요소들로 전부 구성되어야만 한다."(p97)... 기술구에 의한 간접적인 인식의 일차적인 중요성은 이러한 인식 방법이 우리의 사밀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우리가 직접 대면하여 경험할 수 있는 용어들로만 전부 구성된 진리들은 우리가 직접 인식할 수 있다 해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물들에 관해서는 기술구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98) <철학의 문제들> 中


 PS. 이로써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1장 집합 부분만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집합은 쉬운 분야'라는 30년 동안 지속된 근거없는 내 자신감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나는 집합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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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9-02-23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학의 정석> 1장 집합. 집합이 이렇게 아름답고 심오한 학문이라니..
요즘 수학의 정석을 다시 풀고싶은 생각이 들어요. 수학의 논리적 아름다움을 느끼며..
근데 사실 고등학생때는 수학과 안 친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19-02-23 00:45   좋아요 1 | URL
^^:)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같다면님과 같지 않을까요? 성적의 부담이 없다면 생각보다 수학이 재밌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나와같다면님 평안한 주말 밤 되세요!

2019-02-23 0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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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3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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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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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 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 <역사 제7권 135> 中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 ~ BC 425)가 그의 저서<역사 Histories apodexis>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페르시아 전제정으로부터 그리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한 이후, 후세 서양사가들은 이러한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이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하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이민족'이라 불렀다... 마라톤 전투는 아태네 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에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강대국에 대한 굴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후에도 누차 강조하게 되겠지만 대왕의 군대도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거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자유는 끝내 지켜질 것이었다.(p339) <페르시아 전쟁> 中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여 정복하려 한 과정은, 크세르크세스가 잡동사니 테러국이라 칭한 나라들의 독립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어쩌면 외국인 왕의 백성이 되어 아테네 고유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영영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 된 여러 가지 요소들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서구는 독립과 생존을 위해서 싸운 최초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구 the West'라는 실체 자체를 탄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p34) <페르시아 전쟁> 中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가의 설명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심지어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세토폰(Xenophon, BC 431 ~ BC354)의 <헬레니카 Hellenika>에서는 페르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테바이와 아테나이의 모습이, <페르시아 원정기 Anabasis>에서는 페르시아 용병으로 고생하며 퇴각하는 그리스 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서구(Europe)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린다.

 

"전우들이여, 내가 지금 상황에 괴로워하더라도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오. 퀴로스는 내 친구가 되어, 조국에서 추방당한 나의 명예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높여주었을 뿐더러 내게 1만 다레이코스를 주었소. 그리고 나는 그 돈을 받아 내 개인 용도를 위해 빼돌리거나 탕진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썼소.<페르시아 원정기 제1권 제3장 (3)> 中


 테바이인들은 어떻게 하면 헬라스의 패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만일 페르시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알고 아테나이도 티마고라스와 레온을 파견했다...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레온은 왕이 듣는 데서 "맙소사, 이제 아테나이 인은 왕 대신 다른 우방을 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하고 말했다. <헬레니카 제7권 1:33 - 37> 中


 그렇다면, 당대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이스퀼로스(Aeschylos, BC 525 ~ BC 456)의 <페르시아인들 Persai>에서는 다리오스의 입을 빌려 살라미스 전쟁의 패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이스퀼로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패배는 휘브리스(hybris 오만)의 결과로 해석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820 ~ 827) <페르시아 인들> 中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페르시아 왕은'세계정복'을 꿈꾸는 야망가의 모습이 아닌 단순히 '막대한 부'를 원하는 탐욕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당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이 탐욕에 의해 일어난 결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페르시아 전쟁'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유민주정 VS 전제정'의 구도로 이 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페르시아 전쟁>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이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더라도, 이 전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의 실마리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의 <정치학 Politika>을 통해 그리스 폴리스(Polis)를 살았던 여성과 노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헬라(Hella) 공동체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성임과 노예임은 자연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비(非)헬라스 사람들에게서는 여성과 노예가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공동체는 남성 노예와 여성 노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정치학 제1권 5 - 9>中


 페르시아는 전제 군주정으로서 1인 군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평등(平等  Equality)한 사회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유와 평등'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집단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서, '자유'는 전체의 자유가 아닌 소수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 하다. 즉, 오늘날 소수 글로벌 대자본에 의한 체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은 어떨까. 


 톰 홀랜드(Tom Holland)의 <페르시아 전쟁 Persian Fire>를 훒어보다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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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를 마치고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티마이오스 TImaios>에 대한 강의를 청강하고 왔습니다. 플라톤의 우주론(Cosmology)가 담긴 <티마이오스>를 읽었지만, 상당히 어려운 대화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강의를 듣고 나니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강의 자료와 함께 개인적인 내용정리도 함께 올려 봅니다.(이하 반말)


 <티마이오스>는 화자인 티마이오스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다른 대화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 역시 티마이오스의 입을 빌려 설명되는데, 우주론은 크게 다음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1. 존재와 생성/소멸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유'와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반면, '생성'되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감각'과 '의견'에 의해 파악된다. 그렇다면, 생성된 것이 분명한 우주는 소멸되는 것이며,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그렇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필멸의 존재)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e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non ari)'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on)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 하는 의견(판단 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 생성/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7d - 28a) <티마이오스> 中


 그렇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완벽한 존재를 모상으로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는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주는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무질서에서 질서가 있는 상태로 이끌리게 된다. 정리하면, 우주는 생성된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의 모상이기 때문에,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의 변화된다. 그리고, 이 우주는 몸통과 혼을 가진 존재이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에 이어진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匠人, 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면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28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Kosmos)가 과연 아름답고 이를 만든 이(demiourgos) 또한 훌륭하다면, 그가 영원한 것(to aidion)을 바라보고서 그랬을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주는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기에, 그것은 합리적 설명(logos)와 지혜(phronesis)에 의해 포착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이러할진대,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상(模像 : eiko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29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를 구성한 이(ho synistas)는 훌륭한(선한 : agathos) 이였으니, 훌륭한 이에게는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그 어떤 질투심이든 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는 질투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질서 상태(ataxia)에서 질서 있는 상태(taxis)로 이끌었습니다. 질서 있는 상태가 무질서한 상태보다는 모든 면에서 더 좋다고 생각해서였죠.(29e -30a) <티마이오스> 中


 2. 우주의 몸통


 우주는 물체적인 것으로 시각적인 '불'과 촉각적인 '흙'을 재료로 한다. 그렇지만, 이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비례'라는 질서가, 중간재료로 '물'과 '공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불, 흙, 물, 공기의 비례적 관계에 의해 우주의 몸통이 구성되는 것이다.


 생성된 것은 물체적인 것이며 볼 수도 있고 접촉할 수도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불 없이는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될 수 없고, 단단한 어떤 것 없이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될 수도 없지만, 흙이 없고서는 단단한 것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신은 불과 흙으로 우주의 몸통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셋째 것 없이 이들 둘 만으로는 훌륭하게 결합될 수가 없습니다. 양쪽 중간에서 결합해 주는 어떤 끈(desmos)이 생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도 묶여진 것들도 최대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이 일은 등비 비례(analogia)가 그 성질상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31b)... <티마이오스> 中


 우주의 몸통은 실상 입체적인 형태로 되는 것이 적절하거니와, 입체적인 것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은 결코 하나의 중항(mesotes)이 아니라, 언제나 두 개의 중항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神)은 물과 공기를 불과 흙 사이의 중간에 놓고서, 이것들을 가능한 한, 그것들이 서로에 대해 같은 비례 관계를 갖게 하여... 천구(ouranos)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리고 수에 있어서 이와 같은 네 가지인 것들에서 우주의 몸통이 그 비례 관계로 인해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겨났으니..(32c) <티마이오스> 中


3. 우주의 혼(魂)


그렇다면, 우주의 혼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주의 혼은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기본적 존재(ousia)의 결합을 통해 혼(魂)으로 결합된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는 이들을 잘라내어 운동을 만들어 내는데, 이들 중 '타자성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행성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그(우주를 구성하는 이)는 불가분적이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존재(ousia)와 물체들에 있어서 생성되고 기본적인 존재, 이들 양자에서 그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존재를 혼합해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동일성(he tautou physis) 및 타자성(he tou heterou physis)과 관련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의 불가분적인 것과 물체들에 있어서 가분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것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셋인 이것들을 갖고서 이 모두를 하나의 형태(idea)로 혼합했는데, 동일성과 섞이기 힘든 타자성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게 결합했죠. 그리고는 [이것들을] 존재와 함께 섞어서, 셋으로 하나를 만들고, 다시 이 전체를 그가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었지만, 나뉜 각 부분은 동일성(tauton), 타자성(thateron) 그리고 존재(ousia)로 혼합된 것입니다.(35a -35b <티마이오스> 中


 그는 혼합된 것, 즉 거기에서 그가 이것들을 잘라 냈던 그것을 이렇게 해서 어느새 마저 마저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이 전체 구조(systasis)를 길이로 둘로 가르고서, 그 둘을 'X' 모양으로 중점이 서로 교차하도록 한 다음, 그 각각이 원형으로 하나를 이루게 구부렸습니다. 이것들이 [처음의] 그 교차점과는 반대편에서 또 한 만나게 한 거죠. 그리고선 그것들을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전하는 운동으로써 에워싸서는 이들 원(kyklos) 가운데 하나는 바깥쪽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안쪽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깥쪽 운동을 '동일성의 운동(phora tes tautou physeos)'이라 부르고, 안쪽 운동은 '타자성의 운동(phora tes thaterou physeos)라 불렀습니다. 그는 동일성의 운동은 평면으로 오른쪽으로 돌게 하되, 타자성의 운동은 대각선으로 왼쪽으로 돌게 하지만, 주도권은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운동](periphora)에 주었습니다.(36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타자성과 동일성의 궤도(출처 : <티마이오스>)


 4. 시간


 본래 형상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생성된 존재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을 추가적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별(star)'이다. 


 본(paradeigma)이 살아 있는 영원한 것이듯이, 그는 이 우주도 그처럼 가능한 한 그런 것이도록 만들어 내려고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on)의 모상(eiko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구적인 모상(aionion eiko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chronos)이라 이름지은 것입니다.(37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행성의 운동(출처 : <티마이오스>)


 본이 영원토록 있는 것인 반면에, 천구는 그것대로 일체 시간에 걸쳐 언제나 '있어 왔고' '있으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한 시간의 창조(genesis)와 관련되는 신의 이러한 숙고와 의도로 해서 태양과 달 그리고, 떠돌이별들(행성들 astra planeta)이라는 이름을 갖는 그 밖의 다섯 별(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이 시간의 수치들의 구별과 수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38b) <티마이오스> 中


 결국 <티마이오스>의 창세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데미우르고스는 '영원한 존재인 형상의 모상'으로서 '우주'를 만들었기에 우주는 생성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것으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질료는 4원소(불, 흙, 공기, 물)이며, 우주의 혼은 동일성, 타자성과 기본적 존재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회전 운동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러한 우주의 혼과 몸통은 유한한 것(그렇지만, 매우 긴)이기 때문에, 우주는 '과가-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을 알기 위해 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티마이오스>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강의에서 말했다.) 그것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이 말하는 바가 '인간이 우주와 같이 혼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면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티마이오스> 강의에서는 여기까지 강의되었지만,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파이드로스 Phaedrus>라는 연결 고리를 가지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티마이오스>의 대화는 <국가 The Republic>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최선의 정체(政體)가 무엇인가?'를 묻는 <국가> 다음에 '우주(宇宙)'론이 나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될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중간에 넣는다면, 이 관계는 더 명확해진다. 우주의 혼은 질서있는 회전 운동을 한다.(티마이오스) - 인간도 혼이 있으며, 이 혼은 불멸한다.(파이드로스) - 인간들이 모여서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생성되었지만, 영원한 형상의 존재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치 우주처럼(국가).  이것이 강의에서 말하는 도식이었다고 정리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티마이오스>를 정치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전에 먼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과연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만의 고유한 사상일까 부터 살펴보자. 발터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 1931 ~ 2015)의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Babylon, Memphis, Persepolis>에 따르면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오리엔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카드 문헌에서도 생성 혹은 창조(바누), 파괴(훌루쿠), 존재(바슈)의 세 개념이 만물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체계 속에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는 신이 파괴나 생을 명할 수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그리스어로 변형된 옛 천지창조론은 새로운 토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을 넘어 합리적인 논증으로 드러나는 '존재'의토대이다. 훗날 플라톤은 이 논증에 아프리오리 개념이라는 수학적 기초를 놓았다.(p94)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中


 그리스의 창조론이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천문학 역시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천문학의 목적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천문학 역시 지배층들의 지배수단이었다고 바라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문명화의 길로 접어들던 한 종족이 시대적으로 틀림없이 농사를 지었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곳에 우리 스스로를 놓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대부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언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풀을 베어내는지'를 꿰뚫은 사람들만 진정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은 천체를 관측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p17) <천문학의 새벽> 中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읽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정치 행위였다는 사실은 이집트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수양할 것과 천리를 알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도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정치수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則知天矣니라

存其心하여 養其性은 所以事天也요

天壽에 不貳하여 修身以俟之는 所以立命也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지극히 하는 사람은 그 본성 本性을 알게 되니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그 천리 天理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수양 修養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사 夭死하는 것과 장수 長壽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서 몸을 수양하여 천명 天命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잘 수양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맹자 진심장구 상 孟子 盡心長句 上> 中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국가>라는 정치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은 무리한 설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는 별도로 플라톤과 비슷한 시기에 맹자(孔子, BC 372 ~ BC 289)가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 '천명 天命'을 강조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 멀리 플라톤과 맹자 시기까지 거슬러갈 것도 없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 철학의 지향점이 정치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철학이 철학의 종착점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글이 매우 길어졌기에, <티마이오스>와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가 담긴 이번 페이퍼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PS. 창조신인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분신인 '크리슈나'가 등장하는 <마하바라따>를 생각하면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인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일단 넘기자... 이렇게 곁가지로 새니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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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7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19-02-1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은 박홍규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추천해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7 15:5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플라톤의 대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황금모자님의 추천을 받게 되니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황금모자님 감사합니다!^^:)

AgalmA 2019-02-17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목적론적 지향, 즉 인과적 사고가 사실상 우리 사고의 브레이크 혹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라리도 지적하듯이 농경생활은 그 지역에서 그 작물이 재배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간이 농경을 위해 그 작물을 재배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죠. 물론 후대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걸 벌이고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정작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경로의 발전도 많죠.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이라든지, 실험 중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들이 다른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우(탈모 문제를 연구하다 만들어진 비아그라 같은ㅎㅎ;;)도 많고.
인간은 인과적 사고를 하는 특성이 있어 원인 결과를 따질 수밖엔 없긴 하지만, 그런 식의 사고 때문에 이해하기 너무 큰 것에 ‘이것은 신이 만든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식도 나온 것이라 참...

요즘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읽으면서도 한숨을 계속 쉬었는데요. 그는 신경과학이 인간을 뇌로 설명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을 한계로만 치부하며 철학적 관점을 고수하려는 확증 편향 아닌가 싶은 대목이 참 많아요. 인간은 뇌의 어느 부부만 잘못되어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교란을 많이 받잖습니까. 여기서 ‘진짜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본질적인(?)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게 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주관/객관‘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고 모형일 뿐입니다. 합리적 설명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톺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사고가 불완전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 만큼.

겨울호랑이 2019-02-17 18:40   좋아요 3 | URL
^^:) AgalmA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생겨난 이유가 있다는 말은 우리 삶을 부품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로 기억됩니다만, 인간은 ‘뇌‘가 아닌 ‘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살 수 없다는 그의 말 속에 현실이 잘 녹아있다 여겨집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요. 우리 안의 유전자도 그걸 원할 거라 넘겨짚어봅니다 ^^:)

2019-02-18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8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