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에서 처음으로 하늘에 맞닿는 지붕.
「한국의 지붕, 선」에서는 지붕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발견한다. 지붕 너머 하늘과 멀리 보이는 산에서 도가의 자연미를, 중첩된 처마의 모습에서 유교의 위계 질서를 찾는다.

우리 전통의 진, 선, 미가 구현된 공간으로서 지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 여겨진다.

공리적 이유로 한 공간 안에서 다른 계급이 공동 생활을 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계급의 위계가 밀집하게 관계를 가지며 농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붕은 다시 이것을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는 매개였다. 지붕은 각 채가 갖는 높낮이와 스케일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매개이다. 특히 멀리서 여러 채가 군집된 전체 구성을 읽어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작용을 통해 지붕은 유교 건축에서 위계 질서를 표현하는 사회미를 획득했다(p93)

장미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연을 모방한 것이 산 닮기이다. 지붕은 이것을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개이다. 지붕을 통해 산의 볼록한 외관 형상을 모방한다. 주로 초가의 둥근 지붕을 통해서이다. 지푸라기나 너와 같은 자연 재료라도 사용하게 되면 자연미는 분명해진다. 기와 지붕에서는 박공이 이 역할을 한다. 건물은 자연을 닮게 되어 있다. 한국의 자연은 나지막한 동산들이 겹겹이 중첩되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한국의 전통 건축은 이런 자연 환경을 닮았다. 지붕은 산을 닮는다.(p123)

장식은 선·면·색·형상의 복합 작용의 결과이다. 인문의 의미로서의 장식은 사회 생활 속에서 등급의 차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각종 미적치장을 의미한다. 인문 장식은 자연미로서의 천문 장식을 번안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문 장식은 사회미의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 사회의 위계와등급은 자연 현상을 좋은 결과라는 것이 주역적 세계관의 핵심이다.(p67)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9-03-31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붕이 계급을 표현한다는 해석이군요.
지붕은 남방 한계 고도를 표현하는 줄 알았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31 19:21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작가는 인문 문명의 상징인 건축물에서 지붕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지붕과 외부와의 경계에서는 도가적인 자연미를, 지붕 아래 건축물은 인문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건축물을 보호하는 지붕의 속성을 생각했을 때,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 등을 중첩된 처마 등을 통해 해석하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얇은 책이라 처마의 과학적인 의미는 이 책에서는 담기지 않았습니다^^:)

2019-04-01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쾌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피아노로 바흐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굴드의 연주곡을 올려봅니다. 마침 얼마 전부터 연의가 이모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어서일까요. 피아노에 더 관심이 가게 되네요. 3월 마지막 주말입니다. 이웃분들 모두 좋은 날 되세요!


 2차 대전 직후 잠시 바흐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음악학이 대두하면서 모든 음악가들은 바흐음악을 피오노로 연주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하프시코드(harosichord)의 여왕으로 군림한 반다 란도브스카(Wanda Landowska)를 선두로 하프시코드주자들이 전성기를 맞았다.피아노로 바흐음악을 연주하던 시대는 사라졌다.(p633)... 그러다 1955년 글렌 굴드(Glenn Gould)가 등장했다. 1955년에 나온 전설적인 그의 첫 번째 음반 골드베르그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은 많은 음악가드에게는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 연주는 개성, 품위, 새로운 아이디어, 생기 있는 리듬, 빠른 템포 그리고 견고한 테크닉, 이 모든 것을 겸비한 것으로서 바흐연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고, 권위가 있었다.(p634)...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 연주에는 선적으로 흐르는 흐름이 있다. 굴드는 다성부를 분류, 각 성부의 경중에 차증을 두고 각 성부가 서로 대조를 이룬 채, 동시에 나란히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다. 연주를 다 듣고 나면 과연 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얼마나 정통성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p635) <위대한 피아니스트> 中


*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양장 합본)> (나남, 2008)이라 페이지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굴드는 삼차원의 영역에서 작업을 했다. 하나의 프레이징에서 표현된 것(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의 첫 부분)은 선과 색채의 관점이 아닌. 공간 속에서의 기하학과 시간의 곡선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페달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음은 연장되지 않고 건반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소멸되지만, 대신 공간 속에 각인된다. 또 이 공간, 층, 깊이에 대한 인식이 시간의 작용으로 은폐되거나 변질되는 일도 없다.(p124)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


PS. 어린 시절 피아노는 남자가 연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진도를 체르니 40번에서 멈췄습니다만, 진짜 멋있는 남자는 자신의 악기를 하나 정도 다룰 줄 알아야한다는 진리를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의가 피아노를 즐기되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노래방 탬버린 수준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 소질이 아빠를 닮았다면 이마저도 쉽지 않은 과제라 여겨집니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3-31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르니 40번 우아!!!! 대단하십니다 전...코드만 튕기는 수준인데 그래도 밴드활동을 했지요 무식한게 용감하다고! 기타는 치는데 참 그것도 너무 방대하네요 음악은 바다같이 깊고 넓네요 고 김진영 철학자의 ‘아침에 피아노를 듣는다’는 건 살아있음을 느끼는 또 하나의 표시(sign)로 받아들이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피아노...우아!👏👏👏

겨울호랑이 2019-03-31 10:1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이야말로 정말 왕성한 활동력을 보유하고 계시는군요. 축구에 밴드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하신 애국자이십니다. 저의 현실은 그저 ‘한 때 체르니를 쳤던 탬버린치는 야옹이 집사‘입니다.ㅋㅋ

카알벨루치 2019-03-31 10:26   좋아요 1 | URL
고딩때 밴드했죠 지금은 다 과거지사 입니다 ㅋㅋ

겨울호랑이 2019-03-31 10:33   좋아요 0 | URL
^^:) 카알벨루치님의 다양한 경험이 폭넓은 독서로 나타남을 느낍니다. 예전 제가 알던 HOT열혈팬이 HOT 해체 당시 제게 한 말이 생각나네요. ˝HOT는 해체하지 않고 내 가슴속에 남아있어요.˝ 별 관계는 없지만 카알벨루치님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떠오릅니다. 카알벨루치님 가족분들과 함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2019-03-31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3-31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아노를 치셨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음치에 박치라 ㅠㅠ

굴드에 대한 책을 좀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흔적을 남겨두었더라고요.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76쪽,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CD는 55년판, 81년판 해서 두개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좋아하는 것과 수준은 달라서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3-31 20:52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어머니께 등떠밀려 억지로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저도 지금은 손가락이 굳어서 치지를 못합니다. ㅜㅜ 말씀하신 대목이 와닿습니다. 피아노에게 귀속말을 속삭이듯이 고개를 건반에 붙이고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을 잘 묘사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굴드 CD를 2장이나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우향님께서는 클래식 애호가시군요!^^:)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친구, 선후배에게 갑자기 전화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많은 분들도 알고 있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반가움도 있지만, 동시에 부탁에 대한 부담감도 가져다 줍니다.  어제 오랫만에 걸려 온 후배의 전화도 안타깝지만, 부탁의 전화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많이 부끄럽지만, 힘든 부탁을 한다는 후배의 말로 오랫만의 통화는 이어졌습니다. 후배와 통화를 잘 마친 후 밤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의 생각을 이번 페이퍼에 올려봅니다.

 

 孟子曰:惻隱之心,人皆有之;羞惡之心,人皆有之 ... 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측은지심은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수오지심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측은지심은 인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발로이며,,, 인/의/예/지라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맹자 孟子> <고자장구 告子章句 상 上 6a-5> 中 (p620) 


  맹자(孟子, BC 372 ~ BC289) 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각각 인 仁과 의 義의 단서이며,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경우에 비춰보면,후배의 딱한 처지를 들었을 때 저는 '측은지심'이, 후배 마음에는 '부끄러움(수오지심 ?)'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도 있기에 이것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를 포함한 누구나 후배처럼 어려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삶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주고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사단'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사단' 하면 우리에게는 '사단칠정논쟁 四端七情論爭'이 익숙합니다.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 ~ 1571)에게 보낸 편지안에서 사단과 칠정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사단 四端 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넓히고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단이 이 理의 발현임은 확실합니다. 칠정 七情이란 것이 타올라 더욱 번져나가서 그것을 붙들어 묶어서 중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칠정이 기의 발현임은 또한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칠정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초에 사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긴 해도 이는 분명히 저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하늘이 준 성이요, 본래부터 그러한 실체이니, 어찌 그것을 기의 발현이라 하여 사단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p479)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中


 기대승은 사단뿐 아니라 칠정 -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 모두 이 理의 발현이라 주장합니다. 이 理와 기 氣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200여년 동안 계속된 논쟁이니만큼,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서 '이'를'보편 법칙', '기'를 '보편법칙의 구체적 표현(또는 가능성)'으로 정리하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요. 

 

 '만물제동 萬物齊同'이란 만물을 기 氣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기라는 평등 위에서 만물의 차등이 성립합니다. 기라는 보편성 위에서 만물의 개별성들이 성립합니다. 기는 무이죠. 없음이 아니라 아무-것도-아님 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의 이런 성격을 장자는 즐겨 '허 虛'로 표현합니다.(p726) <개념-뿌리들> 中


 제가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안타까움 역시 '기 氣'의 표현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측은지심은 일종의 동감이겠지요. 이번에는 '동감(同感, sympathy)'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감과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저작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타인의 환희에 동감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시기심(猜忌心)이 환희에 대한 동감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기꺼이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비탄(悲歎)에 공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비록 우리가 공감하는 경우에도 항상 마지 못해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비극 공연을 볼 때 우리는 그 연기가 주는 동감적 비애에 가능한 한 저항하다가, 더 이상 그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도어서야 비로소 동감한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동석자(同席者)에게 우리의 관심을 숨기려고 애를 쓴다.(p83) <도덕감정론> 中


 그렇지만, 애덤 스미스의 동감은 '기쁨에 대한 동감'과 '슬픔에 대한 동감'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에 대한 동감은 자발적인것에 반해, 슬픔에 대한 동감은 수동적이며, 위선(僞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양상의 동감에 대해 독일 현상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 ~ 1928)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 혼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체험과 의지 그리고 행동과 자기의 존재에 대한 윤리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관찰자의 판단과 태도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편견 없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동감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의 증오, 분노, 흥분, 복수심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서 자기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판단의 흐름이 생긴다는 것이다.(p37)...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착각이며 사회적 암시 soziale Suggestion 때문에 스스로 느낀 가치를 은폐한 것이 아닌가?(p38)<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막스 셸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기론 理氣論의 관점에서 본다면 셸러의 이론을 본다면, 칠정이 이의 발현이라고 본 기대승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합하면, 우리의 감정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이성 理性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지각의 작용과 그의 본질로 볼 때, 그리고 내적 작용에서 현상하는 사실 영역과 연관해서 볼 때, 각자가 동료 인간의 체험을 자신의 것과 똑같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p505)... 동일한 영혼 체험이 여러 개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 두 인간이 엄밀하게 동일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p510)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다시 제 경우로 돌아와서, 제가 후배에게 느꼈던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은 어린 시절을 친하게 지냈기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의 감정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때문에, 스미스의 말처럼 후배의 기쁨을 슬픔보다 더 공감한다는 말보다는 셸러의 설명이 더 공감됩니다.(심한 경우, 후배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배가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후배의 감정에 동감을 했다면, 그 이면에 사회적인 영향이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 ~ BC 415)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우스로부터 염치와 정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짐승들보다 약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기술적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을 위해서는 충분한 도움이 되었지만 짐승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부족했지요.(322b)... 인간은 시민적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서는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제우스는, 우리 종족 전체가 멸종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헤르메스를 보내어 인간에게 염치 aidos 와 정의 dike를 가져다 주게하였지요. 나라의 질서와 우정의 결속이 그들을 함께 모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322c)... 시민적 덕은 전부 정의와 분별을 거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요,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을 다 용인해 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요. 이 덕에는 모두가 참여해야 하며, 안 그러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323a) <프로타고라스> 中 


 프로타고라스가 창작 신화를 통해 설명한 염치 aidos와 정의 dike는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입니다. 여기에서 염치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만 hybris의 반대말로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염치는 절제, 겸손 등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프로타코라스의 염치, 절제와 맹자의 측은지심, 수오지심에서 통하는 바를 발견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나라(국가) 또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동서양 모두에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 속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문화유전자에 의해 매개된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 )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개념을 제시하고, <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e>의 표현을 빌려봅니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밈 meme'으로 줄이고자 한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등이 있다.(p322) <이기적 유전자> 中


 밈은 일정한 구조를 지니며 정보를 저장하고자 뇌가 사용하는 물리적 매개체 어떤 것에든 실현된다. 뇌가 시냅스를 연결하는 유형으로 정보를 저장한다면, 원리상 밈은 시냅스 구조의 일정 유형으로서 현미경으로 확인 가능하다... 표현형 효과는 뇌에 있는 밈이 밖으로, 눈에 보이게 발현된 것이다. 표현형 효과는 다른 개체가 가진 감각기관으로 지각 가능하고, 이를 수용하는 개체의 뇌에 스스로를 각인해 수용하는 뇌에 원리 밈의 사본을 새겨넣는다. 그리하여 밈의 새로운 사본은 표현형 효과를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해당 밈 자체의 더 많은 사본은 다른 뇌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p214) <확장된 표현형> 中


 도킨스의 표현이 맞다면, 우리는 왜 문화유전자(밈)을 통해서 이들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기, 동감하지 못하는 경우와 동감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중 지혜서인 <욥기.에서는 욥이 결백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한마디로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성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제까지 나를 말로 짓부수려나? 자네들은 임미 열 번이나 나를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구려. 내가 참으로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은 내 잘못일세. 자네들은 참으로 내게 허세를 부리며 내 수치를 밝히려는가?(욥 19 : 2 ~ 5)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좋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욥기> 전반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매몰차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반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 왕 King Lear>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처지에 동감하는 코딜이어의 대사 속에서 독자 역시 진한 슬픔과 함께 다소의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운면의 불행에 우리 모두가 나약한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해도, 휘날리는 백발이 

그들의 동정심을 일으켰을 텐데, 이 얼굴로 

사나운 비바람을 마주하셨다는 말입니까? 

두려움을 일으키는 암울한 천둥소리에 맞서면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빠르게 교차하는 번개가 

내리치는 속에서? 이렇게 몇 올 남지 않은 맨머리로 

불쌍한 척후병처럼 경계를 섰나요? 그런 험한 밤에는

나를 물었던 적의 개라 할지라도 따뜻한 난롯가에

두었을 겁니다. 불쌍한 아버지, 당신께서는 

돼지들과 부랑자들과 일행이 되어 썩은 지푸라기를 덮고

오두막에서 쓸쓸히 지내셨군요. 아, 슬프다 슬퍼! (p202) <리어왕 4막 7장> 中


Had you not been their father, these white flakes 

Did challenge pity of them. Was this a face

To be opposed against the warring winds?

To stand against the deep dread-bolted thunder

In the most terrible and nimble stroke

Of quick cross lightning? To watch - poor perdu! -

With this thin helm? Mine enemy's meanest dog,

Though hee had bit me, should have stood that night

Against my fire. And wast thou fain, poor father,

To hovel thee with swine and rogues forlorn

In short and musty straw? Alack, alack!(p260) <King Lear Act4, scene7 28 ~ 38>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살면서 '최소한 사람이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덕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작은 위로 속에서 힘을 내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동감'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랫만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느꼈던 동감(同感)이라는 문제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해봤습니다. 덕분에, 페이퍼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PS. 하얗게 불태웠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19-03-30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겨울 호랑이님,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3-30 23:37   좋아요 1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생각난 것을 붙이다보니 글이 길어졌고 주제가 다소 산만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2019-03-3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며칠 전 연의가 학교에서 교과서를 받아왔습니다. 예전 교과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국민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운 국어 교과서만은 기억이 또렷합니다.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바둑아, 안녕!˝ ˝멍멍!˝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어렸을 때는 학교 밖에서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지금 1학년 아이들은 벌써 학교에 들어가 바르게 앉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공자가 제자 자로를 평가한 말이 떠오릅니다.

공자는 또 「논어」「선진」에서 (자로를)이같이 평했다. ˝유는 ‘승당‘한 사람이다. 단지 ‘입실‘하지 못했을 뿐이다.˝「사기열전1」「중니제자열전」중

아직 ‘입교‘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업을 시작한 제 경우에 비해, 벌써 ‘입실‘한 상태에서 수업을 시작하는 연의와 친구들을 보니 대견하기도 하면서, 마음의 부담이 클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항상 학업이 쉽고 재밌지는 않겠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모든 어린이들이 자라길 바라 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좋은 환경과 배려심을 가져야함을 다시 느끼면서 아침을 열어 봅니다.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금요일 되세요!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29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3-30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교과서에는 철수, 영희 대신에 어떤 이름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지수, 지윤. 이런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한때 ‘지‘자를 쓰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03-30 20:40   좋아요 1 | URL
연의 교과서를 살펴보니 한글 읽기부터 시작되네요. 이름은 2학기 때 나올 것 같습니다.^^:)

2019-03-30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먼 옛날. 시골 마을의 작고 아름다운 집 이야기.

시골이 개발되어 도시가 되면서, 변화하는 주위에 적응하지 못한 작은 집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합니다.

작은 집은 너무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칠이 벗고지고 더러워졌습니다... 유리창은 깨지고 덧창은 비뚜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작은 집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작은 집 안은 변함 없이 훌륭했는데도요.(p35)

그런 작은 집은 집을 만든 사람의 손녀의 도움으로 다시 먼 시골로 옮겨가게 되고 행복을 찾습니다.

유리창이랑 덧창도 말끔하게 고치고 바깥 벽에는 옛날처럼 분홍색이 도는 색깔로 예쁘게 칠을 했습니다. 작은 집은 이 언덕 위로 옮아오고 나서부터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p42)

다행히 집이 행복을 찾는 이야기로 끝이 나서 아이도 다행으로 생각하며 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만, 저는 조금은 엉뚱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작은 집을 튼튼하게 지은 사람이 말했어요.
˝금과 은을 다 주어도 이 작은 집은 절대로 팔지 않겠어.이 작은 집은 우리 손자의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손자가 여기서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야.˝(p5)

다리가 없어 움직일 수 없는 작은 집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집을 만든 이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작은 집은 변화하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은 채 외롭게 죽어갔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는 주변이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작은 집이 불행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훌륭한 집 안을 가지고 있는 작은 집이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어른의 의인화된 표현이라면, 이러한 점은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바쁘게 일에 쫓기고, 도시에서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자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현대인들. 그 비극을 작품속에서 깊이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작은 집은 도시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건물 용적률, 건폐율을 높이고 재개발을 해야겠지만요. 도시에 맞는 작은 빌딩으로서 변화했다면 나름의 행복이 있지 않았을까요.

다른 의미에서 작은 집의 불행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도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할 수도 없었고, 남에 의해 시골로 강제 이주(?)당한 작은 집. 그곳마저 도시로 변화한다면 그때까지 작은 집은 아마도 불행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선택을 주저한다면 그것은 ‘욕심‘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도시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려는 마음, 시골에서 편리하게 지내려는 마음이 그런 종류의 것이겠지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진정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큰 행복이 아닐까를 딸에게 「작은 집 이야기」를 읽어주고 난 후 해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2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9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