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 73개 고구려산성 현장답사
원종선 지음 / 통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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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산성은 결코 독자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주변의 성들이 서로 연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산성의 힘이다. 당시 고구려가 거대국가였던 중원의 왕조에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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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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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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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 지음, 고선일 옮김 / 새물결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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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설은 에드가 모랭(Edgar Morin, 1921 ~ )이 이미 제안한 바 있는 것으로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자아의식, 즉 인간 자아의 존재 정도 혹은 그저 단순하게 그 자신의 개인성에 대한 의식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p1059) <죽음 앞의 인간> 中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의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은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유럽 사회 인식의 변화를 서술한 역사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중세 시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4가지 범주(주제)로 묶고, 죽음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천되어왔는가를 서술한다. 저자가 '길들여진 죽음'으로 이름 지은 중세 시대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제1.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행위가 아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의식이 행해지는 것처럼, 죽음도 다소간의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기념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기념적 의식의 목표는 개인과 그가 속한 혈족 혹은 공동체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확인하는 것이다.(p1061) <죽음 앞의 인간> 中


 주제2. 공동체가 죽음이 공동체를 지나쳐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또한 만일 죽음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은 죽음이 자연과 자연의 야생성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가 세워놓은 방어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p1062) <죽음 앞의 인간> 中


주제3. 여기서는 모든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의 종말은 신체적인 죽음과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은 내세, 내세적 삶의 강도, 기억의 존속 정도, 유명세의 마모 정도, 초자연적 존재들의 개입 정도 등 알 수 없는 여러 조건들에 달려 있다. 죽음의 순간과 내세적 삶의 종말 순간 사이에는 일정한 기간이 존재한다.(p1063) <죽음 앞의 인간> 中

 

 주제4. 죽음은 휴식 혹은 평온한 수면 상태로 정의되는 사후의 삶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렇게 죽음은 길들여지고, 자연의 힘들에 내재된 맹목적인 폭력성이 제거되고, 의례화될 수 있었으나, 결코 중립적인 현상으로 인식될 수는 없었다. 죽음은 늘 불행(mal-heur)인 것이다.(p1065) <죽음 앞의 인간> 中


 <죽음 앞의 인간>에서 말하는 중세 죽음에서 나타나는 4가지 주제는 죽음이 삶의 종말이며 두려운 존재였다는 사실, 죽음은 사회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신앙 信仰' 문제와 긴밀하게 묶여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죽음의 무도(출처 : 위키백과)


 모델 1 : 길들여진 죽음(중세 시대)


 중세 사람들의 죽음의 인식은 4가지 주제 자체라 할 수 있는데, 아리에스는 이러한 인식이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라는 중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앙은 생활양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죽음 이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죽음을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길들여진 죽음이라는 우리의 첫번째 모델에서는 네 가지 주제가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이 모델을 정의하는 데에도 각자가 동일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p1061) <죽음 앞의 인간> 中


 고대인들은 죽음과의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과 가까이하기를 꺼려했으며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이 돌아와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p84)... 이제부터 오랫동안, 정확하게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더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고, 그들은 한 장소에서, 때에 따라서는 한 건물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고대 사회의 거부감에서 새로운 친근감으로 그렇게 급속도로 상황이 전이되었을까?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초기 순교자들 그들의 무덤에 대한 숭배 관행과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p86) <죽음 앞의 인간> 中


모델 2 : 자신의 죽음(14 ~ 16세기)


 두번째 모델, 즉 자신의 죽음은 아주 단순하게 운명의 의미가 개인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생겨난다.(p1066)... '자신의 죽음' 모델은 자아의식(1)과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3)이라는 두 가지 주제의 변주에 의해 이전 시대의 모델, 즉 친숙한 죽음과 차이를 두게 된다.(p1068) <죽음 앞의 인간> 中


 공동체 차원에서 받아들여진 죽음의 의미는 14세기 이후 달라지게 된다. 십자군 원정 실패와 종교 개혁 이후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고,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물질주의가 보편화되면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나타나게 된것으로 이해한다.


 14세기 이후에도 최후의 심판 주체가 완전히 포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인간 최후의 종말을 상상하는 데 이러한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써 심판이라는 개념은 부활의 사고로부터 분리되었다. 육신의 소생이라는 사고는 여전히 남아서,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측을 막론하고 장례와 관련되는 도상 및 묘비명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범우주적인 대 드라마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개인적인 운명 차원으로 전이되어 있었다.(p206) <죽음 앞의 인간> 中


 초월적인 내세와 지상의 삶에서 획득한 명성이 분리되기 어려웠던 것은 그 당시 현세와 내세 간에 명확한 구분이 부재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 당시 죽음은 어떤 것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16세기부터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종교개혁 세력들은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입각해 이 두 가지 사후의 삶을 분리시키려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즉시 결실을 보지 못한다.(p388) <죽음 앞의 인간> 中


모델 3 :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16 ~ 19세기)


 세번째 모델,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은 16세기 이후부터 현실적 풍습과 명백한 사고들의 영역에서 제한적인 정도 내애서, 또한 은밀한 상상의 세계에서는 대대적으로 심층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준비되고 있었다.(p1070)... 감수성의 광범위한 변화가 시작되면서 예전에는 가깝고 친숙하고 길들여져 있던 죽음이 폭력적이고 음험한, 그래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야생성 쪽으로 조금씩 멀어져갔다.(p1071) <죽음 앞의 인간> 中


[사진] 파리 카타콤(출처 : http://catacombes.paris.fr/en)


 16세기 이전에는 죽음의 의미가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축소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죽음이라는 존재는 그리 먼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유럽인들의 중심에 있었던 시기에 죽음은 신(神)의 권능 아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부활과 내세(來世)에서의 희망으로 죽음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reason)의 시대가 밝아오고, 신의 권능이 쇠퇴하면서 죽음은 고대에서와 같이 다시 미지의 영역에 있는 낯선 존재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16세기 이후부터 침실 또는 침상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순간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간다. 지식인 계층에서 죽음의 순간이라는 주제를 포기했다면, 그것은 이들이 어떠한 집단적 감수성의 은밀한 움직임을 남들보다 앞서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중요했던 예고의 역할이 점차 감소되다가 결국 소멸된다. 이때부터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p527)... 죽음은 임종 순간이나 그것이 임박했을 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늘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했을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지배하는 삶이며, 이때 죽음은 단말마의 고통이라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하여금 삶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죽음, 즉 '삶이 아닌 것' 혹은 '삶의 부재' 상태이다.(p531) <죽음 앞의 인간> 中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간과 죽음 간의 친숙성에 변화가 나타나던 바로 그 시기에 이러한 두려움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매우 흥미롭다. 이때 그 친숙성과 공존하고 있었던 죽음의 존엄성도 타격을 입게 된다. 즉 이제부터 인간은 죽음과 도착적인 놀음을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죽음과 동침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죽음과 성(性)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따라서 죽음은 성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을 매혹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한다.(p711) <죽음 앞의 인간> 中


모델 4 : 타인의 죽음


 네번째 모델, 타인의 죽음은 19세기에 공동체적인 운명의 의미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전기(傳記)의 의미가 약화되면서 타인의 의미가 부상하게 된다. 여기서 타인은 뭇사람들이 아닌 특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예전에는 불분명하고 애매한 상태로 존재하던 감성 영역이 이제는 몇몇 특별한 존재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로써 그들과의 이별은 차마 견뎌낼 수 없는 것이 되고 급기야 극적인 위기를 발발케 했던 것이다.(p1073) <죽음 앞의 인간> 中

[사진]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中 ( 출처 : https://decider.com/2018/12/05/four-weddings-and-a-funeral-red-nose-day-short/)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공동체의 의미가 축소되면서 가족 중심의 생활(사생활 私生活)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여기에 당시 유럽에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가 유행하면서 죽음에 대한 감성적 측면이 보다 부각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의 의미'가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은 관습이나 교육, 또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려움은 도시에서 연약하게 자라나거나 교육으로 인해 다른 이들보다 감수성이 더욱 예민해진 자들에게서 주로 관찰된다. 서민들, 특히 농촌 서민들은 두려움 없이 죽음을 직시할 줄 알며, 가난한 자들에게 죽음은 불행과 근심의 종말을 의미한다."(p717) <죽음 앞의 인간> 中


 19세기에는 모두가 사후에도 현세에서의 애정이 지속되리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이와 같은 공통된 믿음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표상들의 사실성 정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세의 삶과 종교적 신앙 간의 관계였다. 특히 내세의 삶과 종교적 신앙이라는 이 두 개념은 19세기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는 아직 서로 일치되고 있었으나, 비(非) 그리스도교도, 실증주의자, 불가지론자들에게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p829) <죽음 앞의 인간> 中


모델 5 : 역전된 죽음


 다섯번째 모델, 역전된 죽음 오늘날 죽음의 모델은 여전히 사생활이라는 개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데, 이 개념은 예전에 비해 더욱 엄격하고 치밀하다... 오늘날 우리는 사생활이라는 개념의 절대적인 완벽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들 간의 믿음은 전적이거나 전무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상태도 있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성공이라는 불가능의 가정 속에서 결정된다.(p1076) <죽음 앞의 인간> 中


 저자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 난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개인이 사회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제는 가족 공동체마저 해체되고, 죽음의 의미는 완전히 개인화되었다. 죽은 자를 생각하기 보다 남은 유족과 살아남은 이들이 중심이 되는 죽음 예식.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역전된 죽음'의 모습이다. 


 현대 사회는 휴지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개인의 소멸 역시 사회의 연속성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한다. 마치 그 누구도 죽어나가지 않는 듯, 도시에서는 모든 게 각각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죽음은 약 천 년에 거쳐 오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풍습이 완전하게 역전되는 데 단 한 세대로 충분한 것 같다.(p985) <죽음 앞의 인간> 中


 이전 시대의 종교적 의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오늘날 영국의 모델에서 파생된 형태로, 화장 관행을 더욱 확대시키고 사회적 의례는 간소한 추도회 정도로 한정한다는 등의 역전된 죽음의 가장 급진적인 모델이다. 추도회에서는 고인의 가족과 친지, 친구들만이 모여 시신이 부재한 가운데 추도문을 낭독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간단한 철학적 성찰에 몰입한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몇몇 기도문을 욀 수도 있다고 말한다.(p1056) <죽음 앞의 인간> 中


 저자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을 통해 중세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변천 모습을 상세히 그려낸다. 단순히 죽음에 대한 개인의 태도 차원이 아닌 사회 인식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분량은 적지 않은 편이지만, 독자들은 '죽음'이라는 주제와 함께 유럽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종교 개혁, 계몽 주의, 산업화 등의 변화가 당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큰 매력이라 여겨진다.


 <죽음 앞의 인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죽은 이들을 보내는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때문에,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막연한 누군가를 잃는 것이 아닌 자신과 가까운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란 단지 평온한 자가 우호적인 사회로부터 빠져나가는 은밀하지만 품위있는 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심적 고통이나 신체적 통증도 없으며 불안감도 없는 한 개인의 생물학적 전이라는 사실에 의해 지나치게 타격을 받아서도 지나친 비통감에 잠겨서도 안 된다.(p1082) <죽음 앞의 인간> 中


 <죽음 앞의 인간>에서 저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죽는 필멸(必滅)의 존재이기 때문이며, '내 앞의 죽음'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종교가 다르고 신념도 다르기 때문에 죽음의 개인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와는 별도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게 돌리고 <죽음 앞의 인간>의 길었던 리뷰는 이만 줄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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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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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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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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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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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6-05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프 아리에스 <죽음의 역사>도 썼잖아요. 한 가지 주제로 파다보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고 죽음이라면 특히 그렇겠지만 두 책이 어떻게 다른 건지 문득 궁금하군요.
잘 봤습니다^^ 더위의 공포가 몰려 오고 있습니다. 더위 조심하십셩/

겨울호랑이 2019-06-05 13:20   좋아요 0 | URL
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죽음 앞의 인간>을 읽다 지쳤으니, 그럼 <죽음의 역사>는 AgalmA님께... 감사합니다. ㅋㅋ 시원하게 하루 보내세요!
 
먹고 마시고 웃기는 이야기 내 친구는 그림책
우치다 리사코 글, 사사키 마키 그림 / 한림출판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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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둥지 밑을 파헤치는 두더지 때문에 알을 위기에 처한 종달새 부부. 두더지를 쫓아 줄 것을 늑대에게 부탁하지만, 늑대는 번번히 약속을 어기고 자신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웃겨줄 것을 요구한다.

폴란드 민화인 「먹고 마시고 웃기는 이야기」는 재목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 무렵부터 독일기사단과의 치열한 다툼, 16세기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중부 유럽을 지켜내는 방파제 역할을 했음에도 19세기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국 분할로 이어지는 폴란드의 역사와 연관지어 본다면 더욱 그렇다.

이야기 안의 늑대는 다행히 약속을 지켜 두더지를 쫓아내지만, 현실 속의 강대국들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폴란드 민화 속에서 약소 민족의 슬픔과 희망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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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0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연한 일입니다.
저도 오늘 근대 폴란드 역사책 읽었는데요.
우연한 일이 반갑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6-02 15:41   좋아요 1 | URL
^^:) 폴스카로 대동단결 입니다 ㅋㅋ 북다이제스터님 즐거운 주말 독서 시간 되세요!

2019-06-03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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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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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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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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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 지음, 고선일 옮김 / 새물결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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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단지 평온한 자가 우호적인 사회로부터 빠져나가는 은밀하지만 품위있는 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심적 고통이나 신체적 통증도 없으며 불안감도 없는 한 개인의 생물학적 전이라는 사실에 의해 지나치게 타격을 받아서도 지나친 비통감에 잠겨서도 안 된다.(p1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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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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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2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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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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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경향이란 정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떤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변이의 증가와 감소 결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수성의 확산> 혹은 <진보의 경향>이란 변이의 확장과 축소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확함을 보일 것이다.(p31)... 이 책은 진보라는 관념은 네번째 프로이트적 혁명이 드러낸 단순 명료한 의미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과 심리적 희망이 만들어 낸 망상임을 증명한다.(p38) <풀하우스> 中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 ~ 2002)의 <풀하우스 Full House>는 진화(進化 evolution)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다. 생명의 진화가 단순 구조를 가진 종(種)에서 복잡한 구조를 가진 종으로 진보(進步)했다는 기존의 인식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보적 진화론자의 주장은 생물계(界) 전체가 아닌 일부에 적용되는 부분 모델에 불과하다. 


 진보의 추종자들은 최대값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장 복잡한 생물의 역사만을 살펴보았으며, 가장 복잡한 생물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를 모든 생물의 진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주장이며 비판적인 독자들을 항상 혼란시켜왔다.(p232) <풀하우스> 中


 진화는 정교하고 복잡하게 갈라지는 가지[分枝]처럼 <분지 진화 cladogenesis>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경향이란 하나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 분화 사건에서 다음 종의 분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복잡한 전환 또는 옆길로 들어서는 과정이다.(p93) <풀하우스> 中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초기 생태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 박테리아(bacteria)를 든다. 진화가 진보를 의미한다면 오래 전 지구에 등장한 박테리아는 현재 복잡한 종에 밀려 멸종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현실에서 박테리아는 어느 종의 동식물보다 많은 개체가 존재한다. 이처럼 진보적 진화론은 현상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를 <풀하우스>에서 저자는 분포 곡선(distriubution curve)을 도입하여 새로운 설명을 시도한다.


 소수의 생물들은 변이가 열려 있는 쪽으로만 계속 복잡성을 진화시켜 왔다. 그러나 최빈값은 유구한 생명의 역사 기간 내내 박테리아였다. 박테리아는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물일 것이다.(p62) <풀하우스> 中


 화석 기록이 서양 문명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진보의 증거가 되지 못함을, 즉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생명이 복잡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음을 확증해 주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에서 단순한 형태는 언제나 그러했으며, 아직도 여전히 생명계 전체에서 가장 우세하다. 따라서 진보라는 관념은 기초적인 증거에서부터 이미 지지받을 수가 없다.(p231) <풀하우스> 中


 저자에 따르면 생명의 진화는 복잡성(또는 다양성)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증가가 생태계 구조 전반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규분포와는 달리 비대칭분포를 이루는 분포 곡선에서 시간의 흐름은 곡선의 꼬리(long tail)를 증가시키지만,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생명의 복잡성 빈도 분포 곡선(출처 : <풀하우스> p237)


 실제의 분포는 보통 비대칭적이다. 비대칭 분포에서는 변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 곡선이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분포, 왼쪽으로 기울어진 분포라고 부른다. 곡선이 기울어지는 원인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자연의 시스템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 기울어짐은 무작위성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82) <풀하우스> 中


 한 시스템 내의 평균값은 언제나 일정하다. 방향성이란 그러한 시스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변이의 한 극단에서 찾아낸 희귀한 대상에 근시안적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된다.(p55) <풀하우스> 中


 <풀하우스>에서 말하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가 말하는 '다윈 혁명'에 잘 요약된다. 진화는 주류의 대체가 아닌 극한값의 확장(변이)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의 공존이 설명된다. 개별 개체의 적응이 세대전승 또는 종(種)간 대체가 아니라, 생태계 차원에서 가능성의 확장을 의미한다는  굴드의 주장은 진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다윈 혁명이라는 지적 대변혁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성스러운 창조 대신 진화가 인정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호모 사피엔스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아름드리 계통수 한 구석에 최근에 돋아난 미미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적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다윈 혁명은 자연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중심 범주를 본질 대신 변이로 대치한 것이다.(p67) <풀하우스> 中


 <풀하우스>는 이처럼 진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생물학을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생각된다. 우생학 (優生學)을 근거로 열등민족을 없애야 한다는 극우집단의 논리나 역사는 발전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진보주의자의 주장 모두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논의는 책 리뷰의 범위를 넘기에 다음 과제로 잠시 접어 두고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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