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2일에서 19일로 줄었다. 증기선은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외양도 커졌다. 그래서 같은 기간에 평균 총 용적 톤수는 대략 두 배가 되었다. 1870년대에 이르면 인도에서 오는 전보가 몇 시간 안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여왕은 전보를 주의 깊게 읽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 동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세계는 축소되었다... 1840년대 말에 이르자 전보가 육상 통신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1850년대에 이르면 인도의 건설 공사는 전신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했다. 전신 케이블과 증기선 노선은 세계를 일제히 단축시키고 통제를 더 쉽게 만든 세 개의 금속 네트워크들 가운데 두 가지였다. 세번째는 철도였다.(p242) <제국 Empire> 中


[그림]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제국(출처 : http://www.victorianschool.co.uk/empire.html)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1964 ~ )은 <제국 Empire>에서 영제국(British Empire)의 전성기인 19세기 말 제국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통제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는 증기선, 전보 그리고 철도의 도입을 통해 유럽 제국주의가 이전 제국과는 달리 오랜 기간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을 책을 통해 강조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과학과 제국주의의 결합에 대해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과학이 가져온 변화는 기술적인 면에 그치지 않는다.


 1850년대에 시작된 과학이 가져온 이러한 변화는 처음에는 인프라 확충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시스템이 구비된 19세기 말에는 시스템의 통합이 요청되었고, 이를 위한 새로운 이론(理論)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 시간의 제국들 Einstein’s Clocks, Poincare’s Maps: Empires of Time>은 물리학이 상대성 이론을 통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좌표화된 시간은 도시와 철도 시스템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동기화된 시계는 언론의 환대를 받고 길거리에 등장하고 천문대와 실험실에서 연구 대상이 되면서 이제 더 이상 이색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동기화된 시계는 기차역과 동네와 교회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과거에 전력과 하수시설과 가스가 그러했듯이 대중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근대의 도시적인 삶을 순환하는 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p140)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독일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적인 프랑스인들도 1870년에서 1871년에 있었던 보불전쟁이 끝나고 나서, 폰 몰트케가 시간이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는 철도를 제대로 활용한 것이 프랑스 제2제정(1852 ~ 1870)을 무너뜨렸고 유럽 권력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p206)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양(量)적인 팽창이 완료된 후 이의 효율적인 활용이 국력(國力)임을 절감한 유럽 정치인들은 시간의 통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제국 내 시간이 통합될 필요가 있었고, 1905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의 상대성 이론은 이들 정치인들에게 통합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거대 정치 조직은 행정 효율성과 관련된 공간의 문제, 연속성과 관련된 시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함축하고 있다. 구조의 유연성은 인재 발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지식 독점에 대한 공격과 관련이 있다. 또한 안전성은 통치의 발전 가능성뿐 아니라 통치 기관의 한계와도 관련이 있다.(p285)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中


 파바르제는 파리에 토대를 둔 국제 도량형국이 두 가지 근본적인 양인 공간과 질량을 정복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첨단 분야인 시간이 아직 개척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을 정복하는 방법은 점점 확장되는 전기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 전기 네트워크를 천문 관측소와 연결된 모시계에 덧붙여서 계전기들이 그 신호를 증폭시켜 보니면, 대륙 전체에 있는 호텔과 저잣거리와 교회의 뾰족탑의 시계를 자동으로 맞출 수 있을 것이다.(p294)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시간에 대해, 그리고 원거리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시계를 동기화 同期化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일 두 개의 시계를 동기화하려면, 하나의 시계에서 다른 시계를 향해 신호를 쏘아 보낸 후에 그 시계에 도착한 신호의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이보다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가? 시간에 대한 이 절차상의 정의 덕분에 상대성 이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고, 그 이후 물리학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한다.(p20)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에서는 물리학에 의한 시간 통합의 과정이 잘 서술되어 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에 의해 직교좌표계가 도입되었고, 칸트(mmanuel Kant, 1724 ~ 1804)에 의해 직교좌표계에 시간과 공간이 개별 변수로 할당된 근대 이후 시간과 공간의 기준점이 되기 위한 각국의 노력은 치열해졌다. 


 [사진] Space and Time(출처 : https://www.archive.scienceandnonduality.com/lost-in-space-and-time/)


 결국 공간은 프랑스의 미터(meter)법에 의해, 시간은 영국 그리니치(Greenwich) 천문대 기준으로 본초자오선이 설정되면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점은 영국과 프랑스로 분할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세계는 통합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유럽과 북아메리카는 좌표화된 십자선들로 구획이 나뉘었다. 열차 선로, 전신선, 기상 관측 네트워크, 경도 측량, 이 모든 것들이 관찰 가능하고 점차 보편화되어가던 시계 시스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푸앵카레와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시계 좌표화 시스템은 세계의 기계였다. 처음에는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동기화된 시계들의 방대한 네트워크가 구현되었고, 21세기로 넘어갈 무렵에는 범선이 끌어주는 해저케이블 네트워크가 되었고 위성을 수신하는 극초단파 방송망이 되었다.(p370)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시간이 시간 기록과 완전히 일치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구 전역에 절차나 거리상의 동시성을 기술정치적으로 확립해주는 통일 시간이 있었던 적도 전혀 없었다. 이전의 평범했던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동기화 시스템은 시간을 절차적인 동기화 문제로 한정시켜 전자기장 신호로 시계들을 연결했다. 사실상 시계 단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계획은 여기서 더 나아가 도시, 국가, 제국, 대륙, 세계를 넘어 마침내는 현재 전체적으로 유사 데카르트적인 우주라고 일컫는 무한대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p373)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시간과 공간의 통합이 가져온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제국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었던 열강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고 충돌한 결과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대신한 새로운 제국인 미국은 과거의 제국과는 문화(culture)를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의 출발에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통합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중심에서 방출된 전자기 신호가 바로 옆방이든 아니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든 떨어져 있는 지점들에 다다르는 것, 이것을 동시라고 정의한 사람이 비단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만은 아니다... 전기 신호의 교환을 바탕으로, 철도 계획자들은 열차 시간표를 짜고, 제독들은 군대를 소집하고, 전신 교환원들은 사업 거래를 타전하고, 측지학자들은 지도를 그린다.(p349)... 무선 기술은 파리와 파리 근료의 모든 지역에 시간을 분배해줄 것이고, 낡은 증기 시스템뿐 아니라 전신을 전달하는 전기 시간에 사용되는 불편한 지상의 전신선들을 몰아낼 것이었다.(p350)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中


 미국에서는, 신문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점 때문에 커뮤티케이션 독점을 크게 발달시켰으며 이는 시간 문제의 경시를 의미했다... 공간을 강조하는 종이 편향과 지식 독점은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의 발달로 견제를 받았다. 그 결과는 시간 문제에 대한 관심 증대, 계획 성장과 사회주의 국가 등장으로 나타났다. 커뮤니케이션 편향을 막을 수 있는 정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과 공간 및 시간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제국의 문제, 서구 세계의 문제 과제로 남겨 놓을 수 있다.(p286)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中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는 이처럼 상대성 이론이 가져온 인식의 변화가 20세기 초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작된 변화는 인터넷(Internet)을 통해 세계가 통합된 오늘날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생물학의 진화론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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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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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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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안셀름 그륀 지음, 김선태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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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전래 초기, 동양 문화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가져 왔는지...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 존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예수회 회원은 1600년 무렵 조상을 공경하는 제사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으나, 도미니코회 회원과 프란치스코회 회원은 엄격함 태도를 취했다... 제사 금지는 수도자들과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선교사들의 경쟁 때문이기도 했다.(p137)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인들의 전구와 통공에 대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흔히 보는 조상 공경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대답을 줄 수 있다.(p136)...우리 삶의 성공 여부는 우리가 죽은 이들과 화해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끼친 모욕을 용서하는 일에 달려 있다고 심리학은 말한다.(p139)

중국과 한국은 음력 새해 첫날을 가족 명절로 지내며, 친척들을 초대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들을 기억한다.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은 이들과의 일치를 체험하게 한다. 죽은 이들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는다.(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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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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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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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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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 시간의 제국들
피터 갤리슨 지음, 김재영.이희은 옮김 / 동아시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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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방적식을 써서 세계지도를 그리려 애썼던 푸앵카레는 3차 미소 흐름이 2차 흐름을 만들어낼 때까지 미분방정식을 선택했다... 이와는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예측에서만이 아니라 엄밀하게 현상과 맞아떨어지는 이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방향을 정하고 싶어했다.(p406)

푸앵카레는 공간과 시간이 심리적으로, 객관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편리하다는 솔직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워진 객관적 관계의 엄밀한 표면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와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현상과 그 밑에 놓여있는 이론 사이의 깊이를 목표로 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에게) 이론의 형식은 그 세부적인 형식에서 현상의 실재성을 드러내주어야 했다.(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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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6-15 1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극찬이 많네요~ 다른분들도 ㅎㅎ 읽고싶어요에 넣었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9-06-15 18:03   좋아요 2 | URL
20세기 초 과학사에서 상대성 이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잘 조망한 책이라 여겨집니다. 그러한 점에서 다른 분들도 좋아하신 듯 하구요. 초딩님께서도 좋은 독서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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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동일한 인간노동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특수한 목적이 정해진 형태로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고, 구체적인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p102)

상품형태는 인간들에게 인간 자신의 노동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그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 양 또는 물적 존재들의 천부적인 사회적 속성인 양 보이게 만들며,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생산자들 외부에 존재하는 갖가지 대상의 사회적 관계인 양 보이게 만든다.(p134)

화폐로 응고된 이 결정체(Geldkristall)는 서로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등치되고, 따라서 사실상 상품으로 전화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의 역사적인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본성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을 발전시킨다.(p152)

화폐상품의 사용가치는 이중화된다.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특수한 사용가치 외에도 자신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사용가치를 부여받는다. 다른 모든 상품은 화폐의 특수한 등가물에 불과한 반면 화폐는 그것들의 일반적 등가물이므로, 그 상품들은 일반적 상품으로서의 화폐에 대하여 특수한 상품으로 관계한다... 교환과정은 어떤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키면서 그 상품에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가치형태를 부여한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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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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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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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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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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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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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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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15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려운 책 도전하셨습니다.
부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6-15 08:11   좋아요 1 | URL
읽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다른 것임을 책을 읽으면서 절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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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나는 시모네 양이 아틀리에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크 원피스를 입고 모자를 쓰지 않은 한 소녀가 분명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릿결이나 코, 피부 빗깔을 알아보지 못했고, 또 거기서 폴로 모자를 쓰고 해안을 따라 산책하던 그 자전거 타는 소녀에게서 추측했던 실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알베르틴이었다.(p3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에서 화자(話者)는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을 만나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자건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녀 역시 소유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 삶 전체가 내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고통스러운 욕망이었으며, 그러나 이제껏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그치고 내가 채워 주기를 열망하는, 내 앞에 펼쳐진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에 활홀한 욕망이었다.(p26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하게 느꼈던 욕망만큼 알베르틴은 화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강렬한 이미지는 알베르틴과 함께 있던 소녀들에 대한 화자의 부정적인 첫인상을 지워버릴 정도였지만, 화자는 자신을 알베르틴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작품 후반부에서야 비로소 인정하는데, 이는 화자 자신의 철학(哲學)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나는 케이프를 걸친 그녀 친구를 보며 세웠던 가설을 파기하고, 이 소녀들이 모두 경륜장을 드나들며, 아마도 자건거 선수들의 나이 어린 정부가 틀림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어쨌든 그녀들의 품행이 단정하리라는 추측은 나의 어떤 가설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p25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화자는 시각으로 느낀 욕망을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관념'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화자는 매번 새로운 모습의 알베르틴을 발견하고, 이와 함께 변화하는 자신의 관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현상과 관념 그리고 믿음으로 표현되는 화자의 인식 틀로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랑과 관념을 통해 '사랑'이라는 상태(state)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르고 싶었던 것은 단지 소녀의 몸만이 아닌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으며, 그 인간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의를 끌어야 했고, 그 인간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속에 있는 어떤 관념을 일깨워야 했다.(p13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각각의 존재는 일단 우리가 보기를 멈추면 소멸된다. 그러다가 다음에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로서, 모든 창조와 다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바로 그 직전의 것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런 창조를 지배하는 최소한의 변화는 이원적이기 때문이다.(p45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나는 그날 알베르틴이 이전 날들과 같이 보이지 않으며 그녀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한 존재의 외모나 중요성, 체격에서의 몇몇 변화는 그 존재와 우리 사이에 놓인 몇몇 상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걸 느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믿음이다.(p357)... 믿음의 변화는 또한 사랑의 소멸이다.(p35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이제 난 알베르틴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샹젤리제에서의 놀이 이후로 내가 전념하는 대상은 언제나 거의 같았지만, 내 사랑의 관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p46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그렇지만,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우리는 화자의 감정이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과거 소녀들에 대해 가졌던 기억마저 왜곡시킬 정도로 강렬했다는 이야기와 작은 위로를 통해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이 사랑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다른 의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최근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런 솔직한 말들로 나는 알베르틴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아주 따뜻한 인상도 받았다. 어쩌면 이런 인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게 아주 중대하고도 난처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알베르틴에 대한 내 사랑의 한가운데 언제나 존속하게 될 거의 가족 같은 감정, 그 도덕적인 중심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인상을 통해서였다.(p49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나는 이 소녀들의 머릿속에 든 순결에 대한 경멸과 일상적인 바람기의 추억을 대신 정숙함의 원칙들로 바꾸었다. 소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부르주아 환경에서 물려받은 이 원칙은 잠시 흔들릴 수는 있었겠지만 이제껏 모든 탈선으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해 주었다.(p50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개인적으로 이러한 화자의 강렬한 사랑이 실제로 존재한 것일까하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끊임없이 덧칠되는 색처럼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망각 - 기억'은 이 작업이 이루어지는 '현재'의 작업이다. 소녀들에 대한 '경멸'이라는 감정 마저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꿀 수 있다면,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비롯한 다른 이야기들도 사실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이야기들 모두가 윤색된 사건일 수 있다는 의심을 던져 본다.


 무언가를 새로 만난다는 것은 실제로 매번 이전에 보았던 것 쪽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일종의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한 존재를 회상한단 건 실은 그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한, 망각했던 모습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는 그 모습을 알아보고 그 빗나간 선을 수정한다.(p4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p41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에서 우리는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통해 '현상'과 이를 해석하는 '관념'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믿음'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도식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화자의 믿음이 만약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알 수는 없지만, 다음 문장이 앞으로 진행될 사건의 복선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보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는 교제를 계속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번 한 짓은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처음 약속한 장소에 오지 않거나, 감기에 걸렸다는 친구를 해마다 다시 찾아 보면, 우리는 그때에도 여전히 감기에 걸렸거나 다른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친구를 본다. 친구는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이유를 댄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대는 핑계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p40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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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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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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