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에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49)... 돌파구는 미국의 강한 압력을 받고 나서 1964년에야 뚫렸다. 김종필은 재산청구권의 결정 액수를 매듭짓고자 다시 토오꾜오로 갔는데,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4월 한국과 일본의 합의안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한편, '위안부'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됨으로써 추가 청구의 문제가 거론되었다.(p45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의 기술이다. 저자는 1965년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투자한 3억 달러가 당시 수출 총액 2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합의안이 가진 불안 요소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합의안이 가진 '양 날의 검'의 모습은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로 현실화되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이슈와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국 때리기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21세기의 일본 모습은 1869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869년 1월 23일,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때 그 국서에서는 "우리 황제가 즉위하여 강기(綱紀)를 다시 다잡는다"는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의 문서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키토 타카요시(木戶孝允) 등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혹은 다만 50일 내에 30개 대대 병력으로 조선을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전리품을 이용하여 군비를 보충할 것을 강조했다. (p64)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통한 교류를 이어왔지만, 일본이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해 개항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빠르게 변신하려는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림] 征韓論(출처 : https://jpreki.com/seikanron/)


 일본정부는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 난항을 겪으면서 자주 분열되었다. (조슈-사쓰마의 독주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오쿠마는 통화팽창적인 관점을 견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부패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사할린(가라후토(樺太))과 쿠릴열도(지시마(千島))를 독차지하기 위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방과 인근 대륙을 노리는 러시아의 야심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는 동요하고 있는 구사무라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동시에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책을 가구할 수밖에 없었다. 1873년 논쟁의 초점은 조선에 맞추어졌다.(p539)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지배층에 대한 일본 국내의 불만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등 당시 일본 정부가 직면하고 있었던 위기 상황은 21세기 일본의 문제들인 일본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화 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 파문으로 인한 일본국민들의 불만 고조, 아베 신조 총리의 사학 스캔들 문제,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 한국(독도), 중국(센가쿠 열도), 러시아(쿠릴열도) - 등을 연상시킨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869년 일본정부는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을 빌미로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고, 현대 일본은 대한 수출 제한 발표를 하였다.


 일본인은 조선에 대해 유난히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약소국으로서 그동안 맛본 좌절감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조선은 외교관계를 맺자는 일본의 제안을 일관되게 거절해왔다. 도쿠가와 막부는 말기에 조선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보려 했으나, 일본을 의심했을 뿐 아니라 쓰시마를 통해 대일관계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던 조선은 막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시도했다.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하자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막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유수정부를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다.(p540)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한국 때리기를 통해 과연 일본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1869년 1월 25일 기도 다카요시 기록은 일본 지배 계급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체 없이 우리나라의 진로를 결정한 다음, 조선에 사절을 본내 조선의 관리들에게 우리한테 무례하게 구는 연유를 따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공포하고 우리 신국(神國)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면 우리 국민의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은 하룻밤 사이에 바뀔 것이다... 이 정책은 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로운 것이다.(p540)...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내세우고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참고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 <현대 일본을 찾아서>의 저자 마리우스 B.잰슨(Marius B. Jansen)은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일본 때리기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결국, 정한론은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은 무산되지만, 이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통해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한론은 실현되었고, 근현대사의 한-일 양국간 불행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의 감정적인 대응을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부터 적대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 ~ 1909)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중, 일 3국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국 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오랜 역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진] 저격 직전 하얼빈 역 플랫폼(출처 : http://study.zum.com/book/12502)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정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 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은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 3국은 다 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躙)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跋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 청국, 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설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의 치소(嗤笑)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p172)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일본서기 日本書記>에는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 이후 백제(百濟)가 멸망했을 때 왜(倭 일본)의 혼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해에 천황은 백제를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자 스루가노쿠니(駿河國)에 명하여 배를 만들게 했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하쿠스키노에(白村江)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p341)...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고 말하였다.(p342) <역주 일본서기 3 >中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피해 의식이 더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 1922 ~ 2004)는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을 통해 확인해 보자.

 

 '전후 처리와 연관되는 보상 문제도 벌써 국가로선 해결이 완료되었어야 하지만, 최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기회 있을 때만다 제기된 데서 '전후'가 종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사안이 겹친 데서 발생했다. 무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패전 후 이내 냉전이 심각해지고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편입되었다는 점, 소련의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 또 국내의 민중 생활이 의식주 그 어느 것도 바닥까지 내몰렸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p289)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정리해보면, 고대로부터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내왔지만, 백제 멸망이라는 사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과 식민 지배 경험 그리고, 패전에 대한 일본의 피해 의식 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일본인들의 한국인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 위에 일본 지배계급은 국내외 문제 발생 시 불만을 한국으로 터뜨리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넘겨왔으며(임진왜란, 정한론 등) 이번 일도 이런 일련의 흐름의 연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여러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일 간의 문제가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응보다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같은 단편적인 문제보다, 일본에 종속된 경제문제, 일본 조어(造語)에 오염된 우리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 갈등 문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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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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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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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9-07-1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이 부분이 잘 짚어낸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쉽게 정리될 것 같진 않군요.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런 행태를 보일 것 같고요.

한일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08:33   좋아요 0 | URL
일본인들 스스로 가해자라는 인식보다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독일과 같은 태도를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화해를 말하기는 어려운 처지니만큼 오랜 평행성을 달릴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oren 2019-07-1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일관계는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온갖 감정들이 ‘격류‘처럼 들끓었다가 잠시 가라앉았다가 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흘러온 듯싶네요.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꾸준히 관계 개선을 해나가야 된다는 점이 아닐까 보여집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미국에게 완패 당하고 나서 자존심을 모조리 거둬들이고 미국에 찰싹 달라붙어 한몸이다시피 우호적으로 지내왔고, 지금까지도 미국에는 무조건 ‘맹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생존 본능‘ 또는 ‘경제적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원한 감정이 너무 앞서서 ‘일본과의 공생‘ 또는 ‘미래 지향적인 모색‘에는 너무 등한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일본이 이번에 저토록 쎄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작정한 듯한 분위기가 다분한데(한미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내지는 재설정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는 판국이고, 이참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까지는 밀어부칠 듯한 분위기고요.), 정치권에서는 너무나 한가하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도 많이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근현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의 문제를 보면,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30년 전쟁 이후 끊임없이 독일을 작은 나라로 쪼개려 노력했던 프랑스의 모습과 한국을 남북한으로 나뉘어 통치하려는 일본의 저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사이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서이지, 그들이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물론, 19세기 프랑스-독일의 정세와 오늘날 한국-일본의 정세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미 국민총생산과 인구 등 여러 면에서 프랑스를 앞선 독일의 상황과 아직도 일본에 뒤쳐진 부분이 많은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모습은 상호평등,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이웃의 모습이 아니기에 지금 평화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과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단호한 의기를 보여준 그를 적이지만 존경하는 모습을 본다면, 일본의 적절하지 못하 태도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향후 양국간 외교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나도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일본이 배상판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향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 당연히 언급될 배상문제도 걸려 있다 여겨집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조건으로 국가간 배상에 합의한 한국과는 달리 아직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술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배상을 하더라도 한국의 전례에 맞춰 푼돈을 쥐어주려는 심산이었는데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온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측면도 있다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도 일본에 대해서는 차가운 대응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1:45   좋아요 1 | URL
다른 한 편으로, 우리 나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냉정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분기탱천해서 일본의 무모한 도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제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매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아닌 개인의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야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oren님 말씀처럼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분명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oren 2019-07-16 13:04   좋아요 1 | URL
국가간의 갈등은 대체로 위정자들이 바뀌면 그때마다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아베 정권은 너무나 치졸하고 악랄하게 한국을 괴롭히고 있고, 문재인 정권도 거기에 맞대응하는 방식이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듭니다. 좀 더 길게 보고, 위기를 도리어 역이용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도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뿌리가 깊은 양국간의 정치외교적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치고 나온 데 대해서는 집요하게 그 부당성을 물고 늘어지더라도, 감정적이고 격앙된 맞대응보다는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접근해서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3: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격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면, 다음에도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 정부 때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를 외교문제로까지 커지게 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oren님 말씀처럼 현재의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9-07-16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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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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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0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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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0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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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7-17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치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당시 민족우월주의와 전체주의가 만나 빵~
약육강식으로 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떨칠 수가 없는 그런 흐름이라니까요. 자유 민주주의 꺼풀 아래 ㅎㄷㄷ 한 게 오죽이나 많습니까ㅎㅎ
삶은 계속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고^^;

겨울호랑이 2019-07-18 07:47   좋아요 1 | URL
파시즘의 성격 자체가 극우 민족주의와 프로파간다(대중선동)이 만나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극우에 대한 경계를 하게됩니다. 그렇다고, 극좌에서 이루어진 만행(스탈린의 경우)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니,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위협받지 않고 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겨집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니, 역사 속에서 ‘기출문제‘와 답을 미리 예상해 볼 수 있어 어느 면에선 편리합니다.ㅋ
 
여왕과 야성녀 - 안셀름 그륀, 여자를 말하다
안셀름 그륀.린다 야로슈 지음, 한충식 옮김 / 분도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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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 야성녀. 이 두 원형에 여자를 살아 있게 하는 근본적 특성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둘은 함께 에너지를 발산한다. 여자가 여왕과 야성녀를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그 힘으로 다른 원형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p12)

타마르는 야성녀의 원형에 잘 맞다. 타인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자기에게 맞는 것을 한다. 사회 규범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수동적으로 견디지 않는다. 주도권을 잡고 모험을 감행한다.(p70)

여자는 자기 안에 여왕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왕은 여자 안에 감춰져 있다. 여자는 자기 내면에 여왕의 자리를 내어 줄 용기가 없다. 사회가 여자에게 부여한 역할에 매달린다.(p139)... 에스테르는 여왕의 원형을 구현한다. 여왕은 자신을 다스리며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며 홀로 선다. 그녀는 그녀 왕국의 여왕이다.(p142)

이 책에서 여성성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여성상 열넷을 묘사했다. 여자는 예술적이고, 지혜롭고, 사랑스럽고, 어머니 같고, 웃고, 싸우고, 여왕 같고, 야성적이다. 여성성은 무지개의 빛낄처럼 다양한 색을 띤다.(p221)

그러나 이들이 여자의 이상향은 아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비로소 자기 힘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시당하고, 부당한 일을 겪었다. 똑바로 설 때까지 고독과 무력감을 경험했다. 오랫동안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그 어려움들이 점차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해결책이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p222)

여자가 힘든 상황을 견뎌 내는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진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서 계속될 것이다.(p52)

남녀를 똑같이 만들어 버리면 너무 단조롭다. 남녀의 다름은 서로에게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영감을 주는 긴장을 만난다. 이 다름은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생동하는 관계의 기본 전제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다. 여자는 자기 가치를 남자의 이상에 맞출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서 발견 해야 한다. 여자는 자신만의 여성성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남녀가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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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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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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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강의 1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79
외젠 비올레르뒤크 지음, 정유경 옮김 / 아카넷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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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은 결코 죽지 않으므로, 그 원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진리로서 남아있다. 인류는 언제나 동일하다. 인류의 풍속과 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정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영원히 동일한 관념들을 표현하고 동일한 욕구들의 충족을 주장할 뿐이다.(p19)

모든 건축적 형태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므로 모든 형태의 이유를 물을 것, 그 형태들의 근저가 되는 다양한 원리들의 기원에 주목할 것, 이러한 원리들의 가장 전형적인 전개를 분석함으로써 그 장단점들을 제시하면서 그 논리적 결과들을 추적할 것. 끝으로 고대 예술의 원리들을 현재의 요구에 적용하는 것에 주목할 것. 이것이 내가 건축을 다룰 때 스스로에게 제시하는 기준이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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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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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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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大震)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마무리되고, 이제는 남아있는 유적(遺蹟)마저 훼손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에서는 이와 같이 사라져가는 고구려 산성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오늘 와서 보다시피 박작성(泊灼城)은 어느 날 갑자기 만리장서 동단의 기점이란 설명하에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다. 고구려 특유의 석성을 벗겨내고 그 위에 명나라의 전형인 벽돌로 쌓은 성으로 완전 탈바꿈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해왔다... 수많은 자료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2009년에 명나라 장성의 동쪽 끝단이 호산장성이라고 발표했다.(p223)... 호산장성이 들어서기 전에만 하여도 단동 관광지도를 보면 그 자리에 "고구려 성터", "고구려 옛 우물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에서만 없앤 것이 아니라 아예 성은 둔갑을 하였고, 우물을 메워 고구려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에 와서 보는 압록강변의 고구려성들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다.(p224)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中


 이제는 다른 나라의 땅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유적들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자료는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은 고구려가 요동(遼東)에 위치한 나라였으며,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의 노력이 궁색해 보이기만 한다. 그 중에서도 최부(崔溥, 1454 ~ 1504)의 <표해록 漂海錄>에서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謨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p246) <표해록> 中


 진기 일행이 말했다. "우리 요동성 지역은 귀국과 이웃하여 의(義)가 한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감히 약소한 물품로써 예를 표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땅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다. 고구려는 지금 조선의 땅이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 실상은 한나라와 같소."(p351) <표해록> 中


 계면(戒勉)이라는 승려가 나에게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소승의 조부가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이곳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제례(祭禮)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p496) <표해록> 中


 정작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적 훼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은 요동을 지나면서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고, 숙신 肅愼, 예맥 濊貊 등 동이 東彛(彛는 夷와 통해서 쓴다)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위만조선 衛滿朝鮮에 복속되었던 사실을 모르고, 오랄 烏剌, 영고탑 寧古塔, 후춘 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 영토인 줄도 모른다.(p84) <열하일기 1> 中


 비록 반도 안에서 삼국을 합병했으나 그 강토와 국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건만, 후세의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은 평양의 옛 이름만 마음으로 글워하여 한갓 중국의 역사 기록에만 기대고 수나라, 당나라의 옛 자취에만 흥미를 느껴 '이곳이 패수이다, 이곳이 평양이다'라고 한다. 이미 실제 사실과 다르고 차이 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이 안시성이 되는지 봉황성이 되는지 어찌 분변할 수 있겠는가?(p88) <열하일기 1> 中


 혼(魂)과 백(魄). 고구려의 백(魄)이 건축물, 미술품 등 유물이라면, 고구려의 혼(魂)은 문헌 속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백(魄)이 죽은 후 3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처럼, 유물은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더라도, 문헌 속에 담긴 뜻을 새긴다면 그 혼은 우리 안에서 불멸(不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는 잃어버린 땅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더 절실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PS.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가 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이 곳이 배출한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를 러시아 철학자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 민족의 본성(本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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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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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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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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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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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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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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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 프랑스인들은 독일인에 비해 온건하다. 당신들은 기껏해야 왕을 참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은 당신들이 머리를 자르기 전에 이미 머리를 상실했다... 막시밀리앵 드 로베르스피에르를 이마누엘 칸트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로베스피에르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p16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 ~ 1856)의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에서 프랑스 대혁명(Revolution francaise, 1789 ~ 1799)에 필적할 만한 독일혁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프랑스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서 하이네가 말하는 독일 혁명은 어떤 것일까. 그 이야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일찌기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가 <갈리아 원정기 Commentarii de bello Gallico>에서 밝혔듯이,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인 갈리아 인들과 게르마니아 인들만큼 다른 민족이었기에 독일의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네는 독일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보았을까?

 

 21 (1) 게르마니족의 관습은 갈리족과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종교적 업무를 주관할 드루이데스들도 없고, 제사에도 관심이 없다. (2) 그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은 태양신, 불의 신, 달의 여신처럼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실히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뿐이다. 다른 신들에 관해서 그들은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p196)... 24 (1) 전에는 갈리족이 게르마니족보다 더 용감하여 먼저 공세를 취하는가 하면, 인구 과잉과 경작지 부족으로 레누스 강 동쪽으로 이민단을 보낸 적도 있었다... (6) 패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진 갈리족은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한 뒤에는 자신들이 용기에서 게르마니족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5 (4) 이쪽 게르마니아에는 설사 60일을 걸었다 해도 이 숲의 동쪽 끝에 이르렀다거나 또는 이 숲이 어디서 끝나는지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p199) < 갈리아 원정기> 中


 하이네는 독일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와 철학에서 혁명 원리가 도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지적했듯 사상의 부재는 가져온 프랑스 혁명의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독일 혁명은 종교와 철학의 완성자가 있었기에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이네는 주장한다. 먼저 종교를 살펴보자.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p375)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독일에서는 혁명의 원리가 토속적이며 독일적인 철학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그리고 그러한 철학의 힘으로 보편화되지 않는 한, 어떠한 혁명도 불가능하다.(p100)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 철학은 전 인류의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와 같은 방법론적인 민족은 개혁으로 시작해서 이를 바탕으로 철학을 세우고, 오직 이를 완성한 이후에야 정치적 혁명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238)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정신주의는 물질을 파괴하고 정신을 찬미하는 사유이고, 감각주의는 정신의 지배에 맞서 물질의 자연권을 옹호하고자 하는 사유이다.(p54)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에서 가톨릭에 대한 투쟁은 다름 아닌 정신주의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정신주의는 지배라는 타이틀만을 가지면서 법적으로만 지배했고, 반면에 감각주의는 오랜 은신처를 기반으로 현실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실제로 지배했다... 17 ~ 18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에 대한 투쟁은 독일과는 반대로 감각주의가 일으킨 전쟁이었다.(p5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는 종교 혁명의 완성자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를 제시한다. 하이네가 바라본 루터는 단순한 종교 혁명가가 아니라, 독일어 성경을 보급을 통해 독일 정신을 세운 선구자다. 루터의 독일어 보급 이후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 ~ 1754)에 의해 비로소 독일어로 철학책이 씌어질 수 있었기에, 루터의 업적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인간 본성과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자연적 이성은 천성적으로 미신적이고 앞서 주어진 법과 행위에 의해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져 있고, 여기에 추가해서 모든 지상의 입법자들 관행에 의해 같은 생각으로 길들여져 있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 행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들을 이끌어주고 가르침 받은 자, 즉 신께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고 그 자신이 우리 마음에 그가 약속한 것처럼 법을 새겨주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 한, 행함은 우리에게 속한다.(p350)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中


 앞에서 나는 우리가 그를 통해 어떻게 가장 위대한 사유의 자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서술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단지 운동의 자유만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도 가져다 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정신에 육체를 부여했다. 그는 사유에 언어를 입혔다. 그는 독일어를 창조했다.(p74)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종교가 철학에 도움을 바라는 순간부터 종교의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종교는 자신을 옹호하려 애를 쓰며 지껄여대다가 점점 더 깊이 파멸로 빠져들었다.(p13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종교가 철학에 자리를 내주고 난 후, 독일 철학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이네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보다도 높게 평가한 헤겔 철학은 <역사 철학 강의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살펴보아야 한다. 형식적인 자유의 대립과는 별도로 이 혁명은 그 내실로 볼 때 세계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라틴국가(로마 가톨릭 세계) 즉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르는 곳마다 자유주의는 파산한다.(p430)... 라틴 제국에 대립하는 것으로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 제국이 있다... 독일은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을 뻔했으나 국민의 힘으로 그 압박을 물리쳤다. 명목뿐인 왕국은 완전히 소멸하고 몇 개의 주권국가가 탄생했다. 봉건제도는 폐지되고 재산과 개인의 자유가 근본원리가 되었다. 고매한 군주를 갖는 것은 국민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지만, 강력한 이성에 지탱이 된 대국에 있어서 그것은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는다.(p433) <역사 철학 강의> 中


 역사에 등장하는 민족이 잇따라 교체하는 가운데 세계사가 그와 같은 발전과정을 더듬고 거기에서 정신이 실제로 생성되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틀림없는 변신론(辯神論)이며 역사 가운데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사실이다.(p434) <역사 철학 강의> 中


 헤겔이 칸트와 피히테를 훨씬 능가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칸트처럼 명민했고, 피히테처럼 힘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헤겔은 라이프니츠 이후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다.(p230)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에서 이를 주도하는 민족은 교체되는 것이 신의 섭리이며, 과거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라틴 제국의 패권은 독일을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제국으로 교체되는 것이 필연임을 주장하는 <역사 철학 강의> 를 통해 하이네는 독일 민족의 위대한 혁명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독일 혁명을 예고하는 결연한 문장을 읽다보면 우리는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 ~ 1814)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의 결론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의 마지막을 읽다보면, 약소국의 슬픔과 밝은 미래에 대한 간절함 또한 느낄 수 있다.


 독일의 천둥소리는 물론 독일적이다. 그것은 매우 민첩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온다. 하지만 천둥은 울릴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프랑스인들이 언젠가 그 천둥소리를 듣게 될 때, 세계사에서 결코 울린 적이 없는 그런 천둥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p241)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나의 목소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의 여러분의 조상들, 물밀듯이 밀려오는 로마인의 세계 지배에 맨몸으로 대항하여, 지금은 외국인의 악랄함에 맡겨져 있는 여러분의 산하와 평야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조상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라.... 또한 우리들은 신의 세계 계획에 의해 신성해지고 고무받은 사람들로 생각된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 中


  이처럼 하이네의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서는 루터 이후 독일 종교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왔으며, 독일 민족의 혁명이 멀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독일 사상의 흐름 외에 강대국 프랑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약소국민의 슬픔이 잘 나타나, 아픈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919년 <기미 독립선언서> 중 하이네나 피히테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원문> 中


PS. 라인강의 간격이 현해탄만큼 넓다는 것을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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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2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득 요즘 호랑이님의 도서 목록이 빡세(?)다는 생각을 했는데, 좀만 더 생각해보니 이분은 사시사철 그래왔던 분이시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2 09:38   좋아요 1 | URL
에고, 제 독서 스타일이 다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향이 있어 syo님께서 빡세다는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나이가 들면 독서가 넓이가 아닌 깊이가 있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부족함이 많아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독서 목록 빡센 것으로는 syo님만한 분도 없을 것이라 쑥쓰럽네요 ㅋ 감사합니다.

syo 2019-07-12 09:45   좋아요 2 | URL
아, 호랑이님께서 ˝깊이가 없다˝고 말씀하셔서 깊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한참을 생각합니다..... 혹시 무슨 사전 보세요? 제 거랑 너무 다른 것 같아서ㅎㅎㅎ

대뜸 한 마디만 툭 던지고 예의도 갖추지 않았었네요. 좋은 페이퍼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9-07-12 10:36   좋아요 1 | URL
^^:)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syo님의 재치는 따라갈 수 없네요. 그런 재치와 자유로움이 참 부럽습니다. 이제 시헙도 잘 마무리하셨으니, 좋은 글 부탁드려요. 즐거운 금요일, 주말 시작하세요!

2019-07-12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4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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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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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7-12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 나라들이 붙어 있다보니 참 옥신각신할 일이 많았던 거 같은데 1차 세계대전도 사실상 유럽 내전이었잖아요. 민족주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만들기에 적절한 방법이었겠지요. 이게 효과가 좋은지 전세계적으로ㅎㅎ;;

겨울호랑이 2019-07-12 18:40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민족주의 뿐 아니라 다른 사상도 누군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