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 : 사상적 배경- 축약본 1
조셉 니덤 지음, 김영식 외 옮김 / 까치 / 1998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9년 08월 27일에 저장
품절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개정판
로버트 템플 지음, 조지프 니덤 서문, 과학세대 옮김 / 까치 / 2009년 4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19년 08월 27일에 저장
품절
중국의 과학과 문명 1
조셉 니덤 지음, 이석호 이철주 외 2인 옮김 / 을유문화사 / 1989년 1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19년 08월 27일에 저장
절판
중국의 과학과 문명 2
조셉 니덤 지음, 이석호 외 3명 옮김 / 을유문화사 / 1990년 2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19년 08월 27일에 저장
절판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산 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에서 국가 체제를 분석할 때 등장하는 중심 개념 중 하나다. 베버에 의하면, 가산 국가란 가부장제하의 가정(oikos)을 확대한 개념이다... 베버에 따르면 가산 국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경제 체제는 "특권 체제(liturgic governance)"다. 특권 체제란 특정 집단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와 용역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에 걸맞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p4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란 서구에 특수한 근대적인 합리적 기업의 자본주의지, 3천 년 전부터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피렌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 전쟁 물품 조달자, 관직 및 징세권 임차인, 대상인 기업가, 대금융업자 등의 자본주의가 아니다.(p11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는 중국의 경제체제를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정체, 유지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를 통해 막스의 주장에 반박한다.


 내가 정의하는 가산 국가란 군주가 귀족 가문과 주권을 공유하는 국가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450년 경 전제 군주 국가가 출현했는데, 그 이전까지가 가산 국가 체제였다. 막스 베버는 전형적인 가산 국가 체제가 왕조 시대 후기 중국의 정부 형태라고 했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내가 보기에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통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가산 국가 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p44)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통치자와 신하가 일정 지역에 대해 '의무 - 독점권' 을 교환하지만, 글란은 중국경제사는 긴장과 화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 이후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경제 체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중원(中原)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배를 받는 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戰國) 시대 말에 두 가지 분명한 경제 발전 패턴이 출현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일대의 위(魏), 한(韓), 조(趙)나라들에서 상공인 계층은 군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이와 반대로 변경 지역의 진(秦), 초(楚), 연(燕) 나라는 전제 군주가 관료제를 공고히 하여 경제적 자원을 총괄했다. 여기서 재정 국가 체제가 비롯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통제하는 전국 시대 후기의 경제 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p16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중앙 집권 체제국가인 진(秦)과 뒤를 이은 한(漢)에 의해 중국 경제 체제의 전체 틀이 만들어진다. 특히, 한 무제(武帝, BC 156 ~ BC 87)이후 소금, 철의 전매 정책과 통화주조권은 황제의 경제지배권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호족의 저항은 이들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준다. 


 소금과 철은 일반적인 수요 공급의 탄력성이 떨어지는(비탄력적인) 상품이므로, 통치자는 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직접세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p229)... 게다가 통치자는 오직 자신만 가진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다.... 통치자는 화폐와 재정(財政) 정책을 통해, 화폐의 교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품의 가격도 통제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환 가치를 지렛대 삼아 국가는 거래의 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 경제 행위를 관리할 수 있다.(p23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무제(武帝)의 정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 반-국가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와 중농주의 원칙이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무제가 실시했던 시장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호족(豪族)의 정치적 승리는 부와 투자의 중심이 상업에서 토지로 이동한 것이었다(p238)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반면, 이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제도의 예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를 들 수 있다. 균전제의 목적이 안정적인 세수 확보라면, 이러한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지방 호족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중앙집권체제 경제 하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확립된 이들 제도는 '안사의 난'을 통해 무너지게 되고, 중국 경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균전제는 백성 간의 사적인 예속 관계를 끊고 국가가 직접 백성을 통제 및 관리하기 위한 폭넓은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균전제의 목적은 토지 경작 면적을 최대한 늘리고 국가의 세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토지 할당 기준을 각 가구의 소비량이 아니라 노동량에 둔 것은 그 목적이 백성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보다 세금 수입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p322)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당(唐)나라 이전까지 '국가 - 지방' 권력자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 AD 755 ~ AD 763)을 통해 붕괴한다. 요(遼), 금(金), 원(元) 등 유목민족의 화북(華北)지역 지배는 이 지역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반면, 경제의 중심지는 시장 경제의 확대와 함께 강남(江南) 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중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재정 시스템의 기본을 고정된 인두세에서 진보적인 토지세로 바꾸는 등의 몇 가지 변화는 반란의 직접적 결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토지 소유는 더이상 균전제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이후로 토지를 축적해온 귀족도 부침하는 시장 경제에 노출되었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사적인 기획이 번성했다. 특히 소금 산업처럼 경제의 일정 분야가 국가직속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시장 경제를 규제하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인은 대체로 더 확대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바로 남부의 벼농사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었다.(p39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처음에 몽골은 북중국 평원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원으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와중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북중국의 농업 경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209년 금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와 명(明)나라 설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393년 의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어들었다.(p49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그렇지만, 원나라 시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던 강남 경제는 명(明)나라 초기에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쇠퇴하게 된다. 영락제(永樂帝, AD 1360 ~ AD 1424) 당시 정화(鄭和, AD 1371 ~ AD 1434)의 해외원정 역시 제국주의 성격이 강한 해외 진출이었기에, 송나라 이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중국경제의 발전은 주춤하게 된다.



[그림] Zheng He Returns from Treasure Voyage (출처 : https://www.nationalgeographic.org/thisday/jul6/zheng-he-returns-treasure-voyage/)


 처음 제국을 수립할 때 명 홍무제(주원장)는 강남 지도층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 1380년에 이르러 홍무제는 강남의 지도층이 정부 관료로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가 황제의 계획에 방해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결국 홍무제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관리를 숙청하고 강남 대지주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p50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황제에 의한 경제통제와 화북/강남 지역의 경제 침체로 인해 명나라 경제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침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럽(정확하게는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銀)유입이었다. 오늘날의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QE) 정책을 연상시키는 통화팽창은 다시 명나라 경제를 끌어올렸으며, 이러한 명말의 경제성장은 청나라의 자유방임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나라 후기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1570년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은(銀)이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은은 여전히 주조되지 않은 형태로 유통되었지만, 그럼에도 화폐 공급량이 급격히 확대되자 시장 경제의 숨통을 죄던 핵심적 문제가 제거되었다.(p545)...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민간 경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상인 조합은 대개 거래 관계보다 출신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번성했다.(p559)... 기본적으로 중개인 시스템이나 의집(자유시장)은 모두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상권으로부터 세금을 간접 징수하는 방식에 속했다. 청나라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서도 자유방임 정책을 채택했다.(p56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저자는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 경제가 결코 정적인 체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무제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한 중앙정부와 토지에 기반한 지방실력자들의 협조와 긴장 관계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수적으로 발달되어왔으며, 화북에서 강남 지역으로 개발이 확대된 역동적인 중국경제사를 우리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동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기술 혁신의 부족'이라는 중국 경제의 한계성도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식 경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발전했지만, 정부와 제도도 함께 발전했다. 국가의 재정 운용과 폭넓은 사회경제의 상호 작용은 시대 상황이나 이념의 방향에 따라 달라졌다. 슘페터식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 왕조는 시의 적절하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p3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18세기 경기 호황은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점진적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p569)... 17세기 말부터 중국은 인구가 급격히 성장했는데, 1680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3배나 성장했다. 전근대 역사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된 국내 평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생산의 지역별 전문화, 화폐 공급의 확대가 가져다 준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처럼 전례없는 인구 성장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산 기술의 혁신 부족이었다. 토지, 물, 식량, 에너지 등 자원의 압박은 갈수록 커졌고, 기술 혁신 없이는 이를 완화할 수 없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p60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이처럼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중국 경제체제가 결코 봉건제에서 정체된 체제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서 다양한 방향 모색의 결과임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경제사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뒤지게 된 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일까? 서양의 자본주의, 과학, 종교에는 중국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통해 차차 알아볼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 중국 자본주의 관련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대분기>

2. 중국 과학 관련 :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중국 철학 관련 : <중국철학사>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중국정치사상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 2019-08-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이렇게 잘 소화해주시다니.. 감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27 21:25   좋아요 1 | URL
사마천님 잘 지내셨는지요? 사마천님께 좋은 말씀을 들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역시 다른 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가 펼쳐진다. 할머니의 죽음, 알베르틴의 방문, 생루와 친구들과의 만남, 게르망트 댁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장면 안에서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 ~ 1885), 에밀 졸라(Emile Francois Zola, 1840 ~ 1902) 등의 작가 이야기,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의 오페라,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 ~ 1906) 등 당대 사회상과 문화 등을 넘치게 맛볼 수 있다. 문제는 너무 맛봐서 무엇을 맛봤는지 모를 정도라는 것이다.


  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했던 부분 모두를 여러가지 제약으로 다 쓰지 못하는 점은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진] Best types of fish in the sea(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CMb5u1ArtkQ)


 마치 푸른 바다에 커다란 수많은 물고기가 있지만, 그 물고기 하나하나가 너무 커서 그 중 한 마리밖에 잡을 수 없는 어린이와 같은 느낌이 이와 같을까. 그나마 리뷰를 쓰고나면 물고기는 없고, 내 손에는 물고기 비린내만 남아있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의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사회문제를 지적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요컨대 평등 사회에서의 예절은 철도의 발달과 비행기의 군사적 이용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예절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끝으로 사회란 사실상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은밀한 방식으로 서열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p23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 위의 문장으로만 쫓아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혀 다른 색깔의 리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스완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과 게르망트로 표현되는 귀족 계급간의 미묘한 대립과 공존의 문제와 프랑스 대혁명을 묶어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드레퓌스 사건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전에 유럽에 팽배했던 반(反)유대주의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시오니즘(Zionism)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이런 주제는 정말 넘쳐나기에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할 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른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소박하게 '할머니 죽음'과 '알베르틴의 방문' 에만 초점을 맞추려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의 시작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할머니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죽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은 비장(悲壯)함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산소의 쉬익거리는 소리가 그쳤고, 의사는 침대에서 멀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희끗희끗 세긴 했지만 그 머리칼은 지금까지 할머니 연세에 비해 젋어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머리칼에만 유일하게 늙음의 관이 씌워졌을 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으로 새겨진 주름살이나, 오그라지고 부풀어 오른 살, 팽팽하거나 늘어진 살로부터 해방된 얼굴은 이제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할머니의 이목구비는 순수함과 순종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뺨에는 세월이 점차 파괴해 버린 순결한 희망과 행복에의 꿈, 결백한 즐거움마저 빛나고 있었다.(p6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죽음 이후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靈)과 육(肉)이 결합되어 생명(生命)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시간 속에서 겪는 경험이 삶이라 했을 때, 그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 죽음이라면, 영과 육의 분리, 혼(魂)과 백(魄)의 분리가 우리에겐 진정한 해방인 것일까. 죽음 후에 다시 젊음을 찾은 할머니의 모습 안에서 할머니는 이미 '되찾은 시간'이나 행복함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영과 육의 불완전한 결합에서 오는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할머니를 잃은 '나'는 다시 알베르틴과 재회를 한다. 이미 알베르틴과 원치 않은 이별은 한 후 '나'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다타고 남은 재와 같기에 알베르틴이 자리할 곳은 더이상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알베르틴은 나의 마음안에서 꺼져버린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의 '언어'였다.


 이제 나는 그녀(알베르틴)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우정을 깨뜨릴까 봐 발베크에서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p79)... 하지만 내가 결심을 굳힌 것은, 그녀가 최근에 사용하는 언어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무스메(mousme)만큼 소름이 돋는 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알베르틴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발음하자 무스메란 단어도 그렇게 불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은 외적인 깨우침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의 어떤 내적인 발전을 보여 주는 듯했다.(p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통해 문학가를 지망하는 '나'에게 있어 언어는 중요한 문제다. 부르주아 또는 귀족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나에게 있어 문학적 재능은 다른 이들과 연결할 수 있는 '끈'이었으며, 자신 역시 문학적 재능(언어)를 활용하여 다른 이들과 교류한다. 나에게 '언어'는 세계를 살아가는 도구이자 이유다. 


 훗날 나는 게르망트네 사람들이 사실 나를 다른 인종으로 생각했으며, 나 자신은 몰랐지만 그들에게서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던 재능이란 걸 가졌다고 여겨 그들의 부러움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1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나는 충격으로 얼이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발밑에는 받은 명함과 봉투가 마치 총포가 발사된 후의 탄피처럼 떨어져 있었다. 나는 편지를 주워 문장을 분석했다. "그녀는 불로뉴 숲의 섬에서 나와 함께 식사할 수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라면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녀(스테르마리아 부인)를 찾으러 가는 것 같은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p13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제가 부인(게르망트 공작부인)께 이 구절을 말씀드리는 것도 스무 번이나 '언어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야 겨우 짜 맞출 수 있었던 덕분이죠.(p33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이런 화자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감정(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언어를 통해 부활시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흑백사진과 같은 과거에서 언제나 '소리'나 '맛'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으로 표현되었다. 언어를 시각적인 '글'과 청각적인 '말(소리글)'로 나눈다고 했을 때, 알베르틴의 소리로 다시 사랑이 살아난다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 육화된 Logos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 지적이라고 평하며 '인텔리전트(intelligent)'란 단어에서 두 l자의 발음을 강조하는 걸 보고 놀라 드디어 여인이 됐구나하며 주목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변했다는 표시로, 내게는 알베르틴이 사용하는 새로운 어휘와 내가 알았던 어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p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알베르틴의 발음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감미로워서 말소리만 들어도 키스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은총이었으며, 그녀와의 대화는 상대방을 온통 입맞춤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초대는 무척 상쾌했다.(p86)... 내 눈은 보기를 멈추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납작해진 코가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욕망하던 장미꽃의 맛을 더 많이 느끼지도 못했는데, 나는 이 가증스러운 기호들 앞에서 내가 알베르틴의 뺨에 키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p9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어서 6> 안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를 가져온다. 반면, 알베르틴의 목소리는 화자의 '영'이 변화시키고, 이는 알베르틴과의 키스를 통해 '육'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죽음을 통한 '영 - 육'의 분리와 언어를 통한 '영- 육'의 결합이라는 대칭 구조.할머니의 죽음이 되찾은 시간을 가져온 것처럼, 알베르틴과의 재회가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는 작가의 복선이 여기에 깔린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로고스(Logos)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된다는 요한 복음의 내용을 연상하게 된다. 프루스트가 유대인임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그럼에도 작품 속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허튼 생각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삼아본다. 


 그들은 개별적인 데서 보편적인 데로 이르지 못하고, 늘 과거에 전례가 없는 경험하고만 마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교훈도 꺼내지 못한다.(p1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비록, 작품에 담긴 보편적인 프루스트의 의도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작품이 내게 가져다 준 개별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8-26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을 여러 번 읽었어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프루스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용의 의미가 달라지고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예요. 하지만 텍스트의 다채로움을 느끼기에 분량이 너무 많아요. 프루스트의 소설 완독을 두 번 이상 성공한 독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프루스트 준전문가예요.. ^^

겨울호랑이 2019-08-26 07:25   좋아요 0 | URL
^^;) cyrus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깊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양과 질 면에서 풍부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읽는다면 감동의 크기가 몇 배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19-08-26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의도보다 자신이 느낀 의미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작가가 주려는 메시지보다 제가 느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두고 글을 쓸 때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26 12:48   좋아요 1 | URL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프루스트가 표현한 것이 너무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한 술에 배부르기보다 꾸준히 여러 차례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몽테스키외 지음, 박광순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7년 4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9년 08월 24일에 저장
품절
로마혁명사 2
로널드 사임 지음, 허승일.김덕수 옮김 / 한길사 / 2006년 6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9년 08월 24일에 저장
절판

로마혁명사 1
로널드 사임 지음, 허승일.김덕수 옮김 / 한길사 / 2006년 6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19년 08월 24일에 저장
절판
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180,000원 → 162,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800원(1%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9년 08월 24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한 통치 형태는 제각기 장점을 갖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서 가장 압제적인 형태로 바뀌다가 급기야 전복된다. 그러므로 군주정은 독재정이 되어 진보적 귀족들에게 전복당하고, 귀족정은 억압적인 과두제로 빠져들다가 민중 민주주의가 과두제 집권층을 타도하며, 민주정은 무정부 상태로의 문을 열어 또다시 상황을 안정시킬 군주정에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에서 군주정 요소는 행정을 맡은 집정관들이었다.(p38)... 귀족정 요소는 당연히 원로원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요소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열려 있던 민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p39)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 The storm before the storm>은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인 시간 배경은 BC 146에 일어난 카르타고의 멸망부터 BC 78의  술라 죽음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공화정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공화정의 토대가 흔들리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 시기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가 <정치학 Politika>에서 말한 혼합정체의 요소를 가진 로마가 체제가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구해본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오만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할 때, 시민들은 서로에 맞서, 또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그런 권위를 준 정치체제에 맞서 파당을 형성하기 때문에(정치체제의 변화가 일어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함, 즉 탐욕(pleonexia)은 어떤 때는 사적인 재산으로부터, 어떤 때는 공공의 재산으로부터 생겨난다. 명예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파당의 원인이 되는지도 또한 분명하다.(1302b 5 ~ 10) <정치학 제5권> 中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BC 264 ~ BC 146) 결과 카르타고(Carthago)는 멸망하게 되었고, 넓어진 식민지로부터 제국의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전에 없이 들어오면서 로마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회규범을 무너뜨리게 된다. 새로운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 ~ BC 132)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 154 ~ BC 121) - 의 개혁이 시작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공화정 초기를 규정짓는 요소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로마 정치는 계급 전쟁이 아니었다. 로마의 여러 가문은 엘리트층 귀족 보호자로부터 다수의 평민층 피호민들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진정 로마인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암묵적인 사회/정치 행동규범이었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가 로마인들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선조들의 관습'을 뜻하는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이라 했다.(p32)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의 시작은 그라쿠스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저자가 이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저자 마이크 덩컨은 사임의 로마 혁명론을 따르고 있다. 세상에 느닷없이 불쑥 일어나는 혁명은 없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전히 야망의 힘으로 파괴한 정치체계는 분명 출발부터 건전하지 않았다.(p8) <폭풍전의 폭풍> -추천사- 中


 해제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역사가 로널드 사임(Ronald Syme, 1903 ~ 1989)의 역사관을 따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임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이는 그의 주저 <로마혁명사 The Roman Revolution>을 통해 살펴본다.


 사임은 과두 정치를 로마사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영속적인 주제로 생각했다. "정부의 형태와 명칭이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상관없이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외관의 배후에는 과두 지배층이 숨어 있다. 그리고 공화정이었든 군주정이었든, 로마의 역사는 통치 계급의 역사이다. 혁명기의 대장군들, 외교가들, 금융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에서 사람은 같지만 다른 옷을 입은 권력의 집행자와 대리인으로 또다시 확인될 수 있다. 그들이 신(新)국가의 정부이다."(p30) <로마혁명사 1> - 해제 - 中


  사임의 역사관에서 로마사는 과두 집단의 의지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인 결과다. 이러한 이유로 사임은 인물 집단 전기(prosopography) 방식을 통해 <로마 혁명사>를 기술했고, 이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역사를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 ~ BC 86),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 138 ~ BC 78) 역시 이러한 인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된다.


 그라쿠스 형제 때문에 제국에나 속하는 모든 결과들이 로마 국가에서 터져나와 혁명의 한 세기를 열었다. 귀족 가문 간의 전통적인 경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주로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당파 간의, 심지어는 계급 간의, 그리고 군사 지도자간의 알력으로 복잡해졌다. 이탈리아 전쟁(Bellum Italicum)에 이어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킨나 그리고 카르보가 이끄는 당파가 패배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L. Cornelius Sulla)가 승리를 거두었고, 폭력과 유혈 덕분에 로마는 질서를 회복하였다. 술라는 기사들을 많이 죽이고, 호민관의 입을 막고, 콘술들에게는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술루조차 그 자신의 사례가 재현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한 후계자가 그의 지배권을 계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p85) <로마혁명사 1> 中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비슷한 유형의 책 하나를 <폭풍 전의 폭풍>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ロ-マ人の 物語>가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의 역사의 중심은 인물(人物)이며, 특히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 ~ BC 44)다. 로마 이전의 유럽사가 모두 로마라는 지중해로 흘러든다라면,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서 로마사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 중 카이사르에게 할당된 분량이 2권에 이르는 점이 저자의 카이사르 사랑을 뒷받침한다. 이런 시오노 나나미에게 이 시기 역사는 카이사르를 준비하는 시기에 불과하다. 일종의 대림시기(Advent)라 할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p86) <로마인 이야기 3> 中


 다분히 인물 중심의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歷史觀)에서 우리는 다른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le, 1795 ~ 1881)이 <영웅숭배론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은 큰 주제입니다. 그것은 실로 큰 주제이며, 무한대한 주제로서, 세계 역사 그 자체만큼이나 광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세계 역사, 즉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이룩해온 역사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한 위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룩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정당히 말해서 이 세계에 보내졌던 위인들에게 깃들여 있던 사상의 외적/물질적 결과요, 실질적인 구현이자 체현입니다. 전세계 역사의 본질은 이들의 역사였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그것은 이 자리에서 온당하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p28) <영웅숭배론> 中


 개인적으로 <폭풍 속의 폭풍> 속 인물들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 ~ 1831)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의 구현이라 여겨지는 반면, <로마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카이사르 라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저자들의 역사관 차이는 두 책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술라가 폰투스 군을 맞아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예로 살펴보자.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열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로 전투를 설명한다. 박진감있게 전투를 설명하는 능력은 시오노 나나미의 장점이기도 한데, 카이사르를 주인공으로 한 <로마인이야기 4> <로마인 이야기 5>에 이르면 거의 국방 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대본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림] Battle of Chaeronea(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01530137522876802/)


 폰투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투스 쪽의 전사자와 포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뒤 점호에 대답하지 않은 병사는 14명이었지만, 해가 진 뒤에 진영으로 돌아온 병사가 두 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p172) <로마인 이야기 3> 中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에 대해 우호적인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해, <폭풍 속의 폭풍> 속의 카이로네이아 전투 모습은 한결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을 비교해볼 때 두 책 모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지만, 차분하게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폭풍 속의 폭풍>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폭풍 속의 폭풍>이 다루는 시기는 공화정의 말기 일부를 다루기에 로마 전체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은 한계다.


 고대 사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과장법을 맛보기로 살펴보자면, 술라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10만 명 넘는 폰토스 병사가 죽은 반면 그 자신은 단 14명만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지만, 술라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다.(p373) <폭풍 전의 폭풍> 中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폭풍 전의 폭풍> 관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사임의 말처럼 로마 역사를 움직인 시대정신은 과두정으로 대표되는 지배계층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가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서 조명한 성산사건(聖山事件, BC 494)을 살펴보자. 평민들이 귀족의 독재에 대항하여 일으킨 성산사건에서 마키아벨리와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 ~ AD 17)는 무엇을 보았는가.

 

 로마의 평민들은 비르기니아 사건 때문에 무장을 하고 성산(聖山)으로 몰려갔다.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어 그들이 무슨 권위로 사령관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성산으로 이탈했느냐고 물어왔다. 원로원의 권위는 높이 존중되었고 또 평민들은 그들 중에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그들이 대답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논평한다. 이것은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위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215) <로마사론> 中


 성산사건을 통해 평민과 귀족들은 다시 화해하게 되지만,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들의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이들을 대표할 인물을 찾게 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라쿠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평민들의 시대정신은 공화정이 붕괴된 오랜 시간이 지나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AD 235 ~ 284)에도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하는 추론을 해본다. 이의 근거로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AD 331 ~ 363)가 갈리아 군단에 의해 황제에 옹립된 사건을 기번(Edward Gibbo, 1737 ~ 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 Gibbon's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통해 살펴보자. 


[사진] Flavius Claudius Iulianus (출처 : https://hellenicfaith.com/zeus-helios/)

 

 무장한 병사들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며,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불만스러운 웅얼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담하게 막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과격한 선동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치달았다. 또한 지휘관들의 묵인 속에서 율리아누스가 받은 치욕, 갈리아 군데애 데한 억압, 아시아 군주의 악덕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방의 글이 비밀스럽게 유포되었다.... 군대는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렇게 갈리아 군단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p271) <로마제국 쇠망사 2> 中


  페이퍼의 처음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체제의 변동이 탐욕과 명예라는 동기를 통해 파벌의 형성되고 이는 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로마의 경우 파벌의 형성된 원인이 민중들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를 단순하게 탐욕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개인의견으로 그렇지 않다 생각된다. 


 정리하면, 로마의 정체(政體)가 과두정이었으며, 공화정과 제정 전반에 걸쳐 과두정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서술한 사임의 역사관, 그리고 이를 반영한 <로마 혁명사> <폭풍 전의 폭풍>이 <영웅숭배론>과 <로마인 이야기>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과두정 이면에 위치한 로마 시민, 병사들의 관점있다는 전제 하에, <로마 혁명사>에서는 이 점이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 여겨지며, 대중 역사서인 <폭풍 전의 폭풍> 또한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폭풍 속의 폭풍>안에서 대중 교양서로서 가지는 즐거움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면서 이번 페어퍼를 갈무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