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듣건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세우는 데는 인의(仁義)를 주로 해야 합니다. ‘인‘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의‘란 이치를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잔학한 일을 없애는데 힘쓰는 것이고, 이치를 바르게 하는 것은 어지러운 것을 없애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입니다. 형벌을 주는 데는 적정함이 있어야하고 가볍게 처리하는 것을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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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연방은 "자기 본래의 목적이나 정치적 본질로 볼 때에 실질적인 국가연합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적, 외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특정한.... 관계 속에서 전체와 상황 속에 개입되었고, 이 상황 속에서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다." 즉 연방국가와 국가연합은 서로에게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36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8번째 주제는 동맹(Bund)다. 본문에서는 '동맹'이 역사 안에서 '연맹(Bundnis)', '연방주의(Foderalismus)', '연방국가(Bundesstaat)'라는 변주로 나타났는가를 다룬다.  


 이 시기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동맹'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자.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800~1806)이라는 이름뿐인 제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크고 작은 영주들의 '동맹'이었다는 사실과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의 결과 독일 영주들의 자치권이 강화되었고, 프로이센이 등장하였으며, '라인 동맹'을 통해서 독일 서부가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이후 '관세 동맹'으로 독일 제2제국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큰 흐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동맹'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변화되었다.


 같은 신분 계급 내에서 형성된 동맹 관계가 점차적으로 계급 간 동맹으로 확대되는 시기가 중세 이전의 '동맹'의 의미였다면,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은 '종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한 라인동맹의 결성(1806), 프로이센 중심의 관세동맹(1834) 체결, 소(小)독일주의를 기초로 한 독일제국의 성립의 긴박한 역사 흐름 속에서 '동맹'이라는 의미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바라봤을 때, 우리는 다른 개념어들과는 달리 '동맹 bund'이라는 단어는 독일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독일어 'bund'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과 연계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했던 동맹 제도들이 마련되지 않았고, 따라서 조약에서 약속한 것보다 라인동맹국들의 통치권이 더 강력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이용해서 제멋대로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체제의 법과 현실 사이에는 구舊 제국에서 관습법을 통해 통제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모순이 발생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8


 결정적인 사실은 이제(라인동맹 성립 이후)부터는 공동의 상위 권력이 소멸되고(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동맹 foedus clientelare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독일은 더 이상 국가들의 국가 Staatenstaat가 아니라 국가들의 동맹(국가연합) Staatenbund라는 사실이었다... "라인동맹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토를 갖고 있지 않고, 동맹 제후들만 통치 지역을 보유하고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9


  강한 이웃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 1585~1642) 이래의 프랑스 외교정책에 좌우되며 끝없이 분열을 거듭하던 독일 제후국들. 나폴레옹에 의해 '라인연방' 강제 가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지 불과 30년 뒤에 관세동맹으로부터 시작되어 성취한 독일 통일은 분단 체제에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독일 통일이 프로이센의 군사력에 의존한 바가 컸다는 사실은 우리가 걸러서 받아들여야겠지만, 관세동맹이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평화 통일 이전에 자유로운 경제 교류가 선행되어야한다는 좋은 교훈을 안겨준다. 이에 대해서는 독일 역사와 관련된 <30년 전쟁> <강철왕국 프로이센> <몽유병자들>의 리뷰로 넘기기로 하고, '동맹'의 개념어에 대한 페이퍼는 이만 줄이자...


 프로이센의 주도권에 거는 희망(그리고 우려)은 더 큰 경제 단위가 형성되고서야 비로소 실용적인 기반을 획득했다. 1833년에 북독일과 남독일이 관세동맹 Zollverein을 통합하면서 스스로를 "총연맹 Gesamtverein"이라고 칭했다... 새로운 관세동맹은 구성 국가들의 연방제적 평등을 엄격하게 지켰는데 - 결정은 만장일치로만 내려졌고, 그 기간은 8년으로 연장 기간이 12년으로만 제한되었다 - 그 뒤에는 프로이센의 사실상 패권이 독일연방에서 메테르니히 Metternich의 패권보다 더 효율적으로 숨겨져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0


 관세동맹은 이제 그야말로 실제로 통일 사상의 고향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 이 사상은 점점 큰 힘으로 발전할 것이다. 정치 산업 국가로서 최적의 통일을 이루라는 경제적 요청이 프로이센의 지휘 아래에서 충족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독일에서 통일에 대한 요구와 인식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는가? 공동체적 국가 이익이 독일의 상당 부분을 하나로 묶고 이렇게 결합된 국가에서 개별 정치를 행하는 가능성을 배제시켰을 때부터, 관세동맹이 시작되고 발전할 때부터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1


새로운 정당성으로서 국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토대가 1815년에 형성된 독일연방에 침투해 1848년에는 국가연합을 잠정적으로 폭파시켰고, 1867/71년에는 최종적으로 (협의의) 연방국가로 전환시켰다. 모든 기준에 공통된 사항은 연방이 점점 더 국가화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연방국가 Bundes-Staat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이 패권을 잡는 "군주제 연방국가 monarchischer Bundesstaat"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이원주의가 해체되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뿐이었던(그래서 독일어로도 한 가지 용어로만 불리는) 국가회 Nationalisierung와 산업화 Industrialisierung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동맹>,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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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11 1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트, 분데스리가...

겨울호랑이 2021-05-11 16:12   좋아요 3 | URL
^^:)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의 어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일식이 그믐날에 많이 있었습니다. 정해진 때보다 앞질러 합쳐진 것이니 모두 달의 운행이 빠른 때문입니다. 해란 임금의 상징이며, 달은 신하의 상징입니다. 임금이 급하게 생각하면 신하는 촉박하게 되니 그런 고로 달의 운행이 빨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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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크리스티안 마이어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나인호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 / 푸른역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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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초기에는 한 공동체의 질서를 명명하기 위한 결정적인 기준으로서 작용했던 것이 법(노모스 Nomos)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이러한 노모스적 질서를 긍적적으로 지칭하는 유일한 명칭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에우노미아(Eunomia)'이다.(p14)... 에우노미아의 반댓말은 이 단어의 부정형 명사인 '뒤스노미아 Dysnomia' 또는 '뒤노미아 Dynomia', 즉 "위법적이고, 무질서한 상태"였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기초>, p15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7번째 주제는 민주주의(Demokratie)와 독재(Diktatur)다. 개념사 사전은 민주주의 제도의 시작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정체 역시 출발은 귀족에 의한 지배 체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정체가 보편적인 정체가 되는 것은 이후 법률에 의한 지배가 '민회(demos)'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이후다. 다만, 이러한 정체(政體)가 최선의 정체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졌으며, 민주주의를 보는 사상가들의 시각 역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가 (그리고 과두정에서는 소수가)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간의 실제적 차이란 바로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에 있다"(p2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폴리테이아"의 원리는 자유와 재산이다. "폴리테이아"에서 지배 집단은 중간층(대개 중갑보병)이다. 이들이 최상의 시민이다._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31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자유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다. 평등이란 모든 것과 모든 이에 대한 관용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유에 대한 격렬한 요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치자와 피치자의 교체라고 규정한 바로 그 지점에서 이들 간의 상호 동화 또한 이들의 역할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플라톤에게 민주주의적 인간 유형이란 신분에 따라 결정되거나, 아니면 확신이나 신념 혹은 이해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나라, 그 자신의 타고난 기질에 의한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28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중갑보병으로 참전할 수 있는 능력있는 자들에 의한 통치라고 바라본 반면, 플라톤(Platon, BC428 ~ BC348)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민주주의적 인간 유형이 결정된다고 해석한다. 거칠게 요약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도를 뒷받침할만한 현실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플라톤은 선천적인 능력을 강조했다고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철학자의 관점 차이는 실천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관념적인 플라톤 철학의 연장선상에 놓인 듯하지만, 이들의 전제 모두가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갖는다. '두터운 중산층'을 배경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식 민주주의와 '덕성(德性)을 갖춘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플라톤식 민주주의는 모두 오랜 기간 언급되지 못했다. 사용되더라도 '민주주의' 라는 용어는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의 전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오랜 기간 유럽에서의 정체는 '군주정'과 '귀족정'이 차지해왔다.


 이론적 논의가 절대적 민주주의에서 대의제적 민주주의로, 또한 소규모의 - 원시적인 민주주의에서 거대한 영토의 문화적으로 발전된 민주주의로 옮아감에 따라 마침내 민주주의와 귀족정의, 그리고 무엇보다 군주정과 헌법정치적인 대립이 약화하였다. 민주주의가 국가 헌법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 또는 그 일부분 정도로 파악되면 될수록, 상기한 나머지 정부 형태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점점 더 적어졌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07


 민주주의 개념의 의미는 부정적인 관점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러한 언어 사용 관례를위해서는 버크 Burke와 그의 책을 번역하여 영향력을 발휘한 겐츠 Gentz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에 의하면, 인민은 그 자신의 주권자로서 그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자신에게 경솔함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솔함은 다시 권력의 남용을 허락한다는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93


 이러한 '민주주의'가 부활하게 된 시점은 프랑스 대혁명이후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혁명에 시대 정신을 불어넣고,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이전 민주주의와는 다른 형태로의 제도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헤겔의 세계정신이 민주주의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면, 토크빌이 말하는 섭리란 바로 민주주의로 향해 나아가고,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향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소용돌이라는 이러한 보편사적이고 미래 예견적인 이해는 명백히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의 후계자 위치에 서 있는 것이었다. 즉, 토크빌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은 강제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긍정해야 하는 것이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45


 1857년 블룬칠리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근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는 고대 헬레네의 그것과 다르다. ..... 바로 고대 민주주의의 특징, 즉 추첨에 의한 공직과 민회는 선거에 의해 공직이 맡겨지고, 미숙한 민회 대신 선거에 의해 엄선된 대표자 집단을 선호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의해 비난을 받고 있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 있어서 민주주의적 원리는 더 분별력 있고 더 유능한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귀족적정인 장점을 통해 개선되었다. 고대의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었고, 근대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적인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23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서 우리는 '법률'에 의한 지배를 보장받기 위해 출발한 민주주의 제도가 19세기 민족국가 출현과 함께 대의 명분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부활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개념어 사전 속의 역사 속에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지만, 민주주의의 출발과 부활 과정에 있어 정말 데모스(demos)의 의지가 작용했는가. 어쩌면 이것은 현 체제에 불만을 가진 다른 세력들이 들고나온 '천명(天命)'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는지. 민주주의의 안에 '민중'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 안에 민중이 없다면, 어쩌면 맹자(孟子)가 말한 '왕도정치 王道政治'가 오히려 더 민본(民本)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는 시스템이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운영 프로그램인 소프트웨어라는 생각도 든다.


 나우만은 독일제국의 위대한 군주정은 여러 후진적인(농업적, 산업적, 성직자적 성격을 지닌) "귀족세력들"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이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독일의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추구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낡은 민주주의와도 구별되는데, 이러한 민주주의가 경제와 국가의 현대적인 "거대 경영"에 적절하고도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성장하는 "산업적 인민 Industrivolk"에 걸맞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73


 오늘날 무엇이 귀족적 지위를 요구하는가? 지성과 돈이다. 이 둘의 힘이 함께 합쳐졌을 때 그러하지, 지성없이 돈만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하다면 제1차 헌법의 오류가 재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원에는 대지주, 상인, 공장주, 부유한 자영업자, 교수, 의사, 약사, 성직자, 교사 및 공무원의 대표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원은 보통선거권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력 분립이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09


 이 책의 다음 주제는 '독재(獨裁)'다. 책에서는 비상대권(非常大權)을 의미했던 '독재'가 1848년 혁명 이후에는 '스스로 생산된, 권력이 권력으로서 지배하는 자리' 개념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소개된다. 이들의 차이는 짧은 시기 집중된 권력과 영속적인 집중된 권력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이같은 의미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위기危機'가 강조되는 오늘날 현대 사회 분위기와도 결코 무관치 않아 보임을 확인하며 책을 덮는다...


 (루소에 의하면) 진정한 독재의 전제 조건은 명백히 비상사태 발생에 있다. 독재는 구체적인 비상사태 방지에만 한정되는 것이 그 본질이며 복구를 염두에 두고 입법 권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독재가 시간적 최소 한도를 넘겨 계속되고, 지속적인 비상사태에 맞서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입법 권력으로 등장한다면 이 독재는 '전제적이거나 무익한 tyrannique ou vaine' 것이다. 이처럼 독재와 폭정 Tyrannis은 루소가 보기에 서로 이웃해 있는 현상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191


 1930년대에는 세 가지의 완전히 다른 독재 개념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들 간의 최종적 논쟁은 책들이 아니라 마침내 전쟁터에서 완성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개념은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데, '독재'를 한 개인 혹은 몇몇 개인으로 이뤄진 한 집단의 비非헌법적인 권력, 즉 반反외회주의적이고 제한받지 않은 권력이라고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1935년까지 레닌이 1919년 제기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 독재냐"라는 양자택일이야말로 이 시대가 취해야 할 결정적인 선택이라는 명제를 확고히 견지하고 있었다... 파시즘적/민족사회주의적 해석은 다원주의적인 정당민주주의와 이것의 일시적 변형태인 독재와 대립한다고 주장된 특별한 종류의 민주주의에서 자신들 고유의 체제가 갖는 특수성을 찾았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 민주주의와 독재>, p214


요컨대 크세노폰이라는 가명을 썼던 자는 귀족과 인민 사이의 원칙적이고도 깊은 분열을 보았던 것이다. 양 집단의 여러 이해관계와 견해, 그리고 정치 전체는 상호 대립적이었고, 합의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본질적인 향상을 보지 못했고, 단지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몰락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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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최호근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 / 푸른역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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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한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3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6번째 주제는 역사(Geschichte, Historie)다. 개념사 사전에 의하면 근대 이후 '역사'의 특징은 크게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그리고 '세계사'로 요약된다. 마치 강(江)이 수많은 시냇물들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거대한 물줄기로 변해가는 것처럼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라는 근대적 개념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역사'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역사란 인간, 자연, 신, 이 세 종류에 대한 실화이다 Historiae, id est, verae narrationis tria sunt genera : humanum, naturale, divinum." 인간의 역사서술은 개연적인 것을 다루고, 자연사는 필연성을 다루며, 신적인 역사는 종교의 진리를 다룬다. 이러한 연속적 관계를 세 개의 법이론과 연관시켰던 보댕은, 바로 이 세 가지 역사의 관계 속에서 그 다음 단계로 갈수록 확실성이 증가한다고 보았다(p187)... 자연과 성사가 일반적인 역사 과정에 편입됨으로써, 역사 개념은 인간 경험과 기대의 근본 개념으로 부상하였다. '세계사'라는 표현은 이제 이 과정의 결과를 재현하는 데 특히 적합하게 되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94


 보댕(Jean Bodin, 1530 ~ 1596)이 내린 역사의 정의에는 인간, 자연, 신 이라는 3주체가 표현된다. 고대에는 각각 분리된 주체들이 중세를 거치면서 신(神)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자연 법칙의 발견을 통해 자연(自然)이 인간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 오늘날 서양의 역사 개념이 성립이라는 사실을 <개념사 사전>을 통해 알게 된다. 이같은 과정의 결과 계몽 시대 이후 '역사일반'이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역사일반 Geschichete uberhaupt'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특징짓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로 소급되지 않고자 분투하며 보여준 성취다. 이를 통해서 고유한 시간의 노출이 역사에서만 일어난다. 클라데니우스가 통상적인 언어 용업에 맞서 강조했던 것처럼, 그것은 세 개의 시간적 확장을 포함한다.(p131).. 결국 최후의 심급으로서 역사를 자기 자신에 소급시키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각인된 '역사일반'이라는 표현이, 그와 상응하는 유행어처럼 회자되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33


 이러한 개념의 변화에 따라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변화되었다. 중세의 절대적 시간 관념이 무너지면서 '과거-현재-미래'의 의미가 중요해졌고, 자연법칙에 따라 일반적인 '역사법칙'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역사 의지를 '지역'에서 '세계'로 확대되어 왔음을 개념사 역사 안에서 발견한다.


 시간의 세 차원이 서로 파열되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는 너무도 빠르고 너무도 임시적인 것이 되었다.(p226)... 역사 개념은 한편에서는 빠르게 사라져 가는 과거의 지속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 경도할 것을 요구하며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229


 역사에 공간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세계사 Weltgeschichte다. 시간적으로 이 역사에 상응하는 것은 진보 Forschritt의 특성이다. 진보는 '역사'와 더불어 비로소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그 후 19세기 오면서 이 두 개념은 다소 분리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역사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Gleichzeitigkeit der Ungleichzeitigen 내지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성 Ungleichzeitigkeit der Gleichzeitigen을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진보와도 유사한 일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 새로운 역사의 구조적 특성들 가운데 속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5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에서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순행 또는 역행하는 여러 흐름을 상세하게 보여주기에 이를 단번에 정리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아니,  어쩌면 '개념사'라는 시리즈의 핵심을 보여주는 이 단어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사를 '역사의 3주체 - 인간, 자연, 신-' 를 '시간 - 과거, 현재, 미래 -'과 '공간 - 지역사, 세계사 -'의 관점에서 정의한다는 틀을 갖고 개념사를 들여다본다는 정도로 정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는 동양(東洋)의 사관(史觀)과 서양(西洋)의 사관을 비교하는 곳까지 나아가려고 했으나,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아쉽지만 다음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자...

헤르더 Herder는 <인류사의 철학 이념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bbie>을 출판할 때, 자연과 마찬가지로 역사 가운데에서도 "사물의 본질 속에 놓여있는 자연의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그와 같은 "규칙"은 곧, "오용은 처벌받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자라가는 이성의 지칠 줄 모르는 바로 그 열정을 통해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역사의 도덕은 과정으로서의 역사로 시간화 verzeitlicht 되었다. "세계사는 세계법정 DIe Weltgeschichte ist das Weltgericht"이라는, 1784년 실러 Schiller가 표명한 시의 반구가 빠르게 유행하였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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