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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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너는 도널드와 비슷한 행동 패턴이란 맥락에서 최초로 사용한 "자폐적"이란 말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 어린이들이 아주 이른 유아기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 건강 상태와 "타고난 지적능력"에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44/537

결정적인 두 가지 특징을 파악한 사람이 바로 카너였다. 어린이들은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극단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두 가지 극단적 성향이 새로운 증후군의 핵심이며, 그때까지 차이점에 주목한 탓에 공통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48/537

존 돈반 (John Donvan), 캐런 저커 (Caren Zucker)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In a Different Key: The Story of Autism>는 '자폐'라는 용어가 1930년대 처음으로 '극단적으로 자신의 내부를 지향하며', '동일성을 추구하는' 특성을 사용된 이후 오늘날까지 '자폐'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보여준다.

독자들은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자폐(自閉)'를 둘러싼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만나게 된다.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주변인들.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접촉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자폐증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부여한 질서를 유지하며 영원(永遠)의 시간을 살아가는 반면, 그와 관계를 맺는 가족, 친구들은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며 살아간다. 영원을 살아가는 이들과 순간(瞬間)을 살아가는 이들. 영원과 순간. 자폐의 문제는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속에서는 분명 생각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지만, 그 톱니바퀴들은 사람들과 소통할 때마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의 언어는 육각형과 국화들로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이 의미를 알든 모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 그것은 '동일함'이었다. 완전하고도 순수한 일상의 반복이었다(p19)... 각각의 행동보다 더 이상한 것은 모든 행동이 다양한 결핍과 재능이 독특하게 결합된 형태로 한 사람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행동의 총합이야말로 도널드라는 사람의 극적 인격을 포괄적으로 규정했지만, 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20/537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제보다 나은 현재, 현재보다 나은 미래로 발달해야 한다고 믿지만, 영원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성(城)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자아를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다. 이제 논의는 그들이 내부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원인이 무엇인가에 집중된다. 유전적인 원인 때문일까, 아니면 주변으로부터 받은 학대 때문일까. 이런 가정문제로부터 백신접종이나 감염증세가 있는 전염병이라는 사회적 원인까지 수많은 가정과 추측의 역사가 펼쳐진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연구진은 어린이들을 부상 입은 존재로 보았다. 그토록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은 바로 엄마라고 믿었다. 연구자들끼리는 심리적 유발인자라는 용어를 썼다. 어떤 정서적 외상이 가해져 자폐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정서적 외상의 근원을 밝혀내고 손상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91/537

내면에 갇힌 아이. 자폐인의 가족들은 그 개념만 떠올리면 언제나 애가 탔다. 자폐증이란 가면 뒤에 "진정한" 아들이나 딸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용어를 직접 사용한 적은 없지만, 레오 카너는 처음 치료했던 열한 명의 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언급함으로써 그런 생각에 불을 붙였다. 마치 더 이상 자폐증이란 속박을 받지 않거나, 자폐 상태에 머물리 않는다면 드러날 참모습은 무엇일까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291/537

자폐증이 마침내 미국에서 진정 "유명해진" 것은 대중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자폐증은 드물고도 매혹적인 현상에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위협으로 돌변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물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사람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342/537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는 자폐에 관련된 역사를 다루지만, 엄밀하게 말해 절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는 자폐를 가지고 있는 영원한 시간 속을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한다면, 불멸(不滅)에 가까운 영원 속에서 역사(歷史)란 의미가 없겠지만. 대신, 우리는 자폐를 둘러싼 사회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자폐의 원인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과 다름없는 '정상적'으로 될 수 있을까.

"고기능"이란 말은 자폐성향이 뚜렷하지만 최소한 평균 수준의(종종 그 이상의) IQ와 말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결국 "고기능 자폐증"이란 아스퍼거 증후군과 매우 비슷하게 들렸다. 결국 "고기능 자폐증"이란 아스퍼거 증후군과 매우 비슷하게 들렸다. 고기능 자폐증과 아스퍼거 증후군 사이에 의미있는 차이가 있느냐는 주제를 두고 한때 자폐공동체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진단명은 삶이라는 퍼즐에서 평생 찾았던 조각 한 개를 끼워넣는 것 같았다. 가족들 역시 그렇게 느꼈다. _ 존 돈반, 캐런 저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p410/537

요약하면,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는 '자폐를 가지고 있는 이'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인식'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그 역사 안에는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보편 역사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자폐의 원인이나 치료법 등을 찾으려는 진(眞)을 추구하는 모습, 다른 이들과 차이 없는 상태를 '선(善)'으로 규정하고, '다름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선악 구조, 가족들에게 힘든 자폐 문제도, 뛰어난 재능을 의미하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일종의 '아름다움(美)'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은 보편역사로서 자폐의 역사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주체(主體)와 객체(客體) 그리고 인식(認識)의 구도 안에서 문제는 인식이고, 인식의 변화가 역사의 변화임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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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마음속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고 제어하는 ‘또 다른 나’가 있는 자다. 그런 나는 나의 행동과 감각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자아다. 나의 행동과 감각은 ‘또 다른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요가는 외부를 향한 눈을 감고 ‘또 다른 나’를 향해 눈을 떠서 발견하는 과정이며, ‘또 다른 나’의 탁월한 시선으로 외부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자리를 잡아가는 수련 과정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외부 자극, 특히 슬픔이란 마음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더 큰 불길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내면의 빛’이다. 내면의 빛은 외부의 자극으로 조절되는 인위적인 슬픔을 극복하게 한다. 유일한 선의 모습은 바로 이 내면의 빛이다. 우리는 이 빛을 통해 만물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면의 빛을 찾는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삶을 주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자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여겨야 한다. 모든 나무나 식물은 자신의 조그만 땅에서 자양분을 흡수한다. 자신의 환경이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
나의 최선이 내면의 빛으로 존재하는데,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요가 수련자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온전한 몰입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식사를 할 때나, 걸을 때나, 대화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최선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신독愼獨하는 자다. 온전한 몰입이란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한 뒤 약점은 버리고 강점은 살리는 자기 정복의 과정을 말한다.

‘삼매’는 요가 수련의 궁극적인 단계다. 삼매는 요가 수련자가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좌정하여 하나의 대상에 깊이 몰입하는 두 가지 명상 수련을 통해 진입한다. 하나는 의도된 수련인 ‘응념凝念’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몰입수련을 수행하는 사실도 모르게 물처럼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정려靜慮’다.

진정으로 파악할 때, 그 혜안을 넘어서는 생각의 도구가 등장한다. 바로 ‘상상’이다. 상상은, 그 대상을 통해 무한한 지점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 같은 것이다. 명상의 대상이 그 대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개체를 떠올린 뒤 구체적인 모습으로 상상하도록 ‘등지’ 안에서 훈련시킨다.

"만일 마음이 한 대상에 몰입해 삼매경 안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그 대상의 이름, 존재 의미, 지식, 상상과 섞이지 않고, 자신 본연의 자기 모습조차 비워진다면, 그것은 그 목적만 홀로 빛난다. 이를 초분별등지超分別等至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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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골자는 원자력발전가동을 대거 중단시킨 탓에 그 빈 곳을LNG 발전이 메우느라 발전용 LNG 수요가 늘어났고, 덩달아 난방용 도시가스가격도 올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발전량 가운데 원전 비중은 줄지 않았다.
2017년 26.8%에서 2021년 27.4%로 오히려 문재인 정부 시기 더 늘었다. 같은 기간 LNG 발전 비중이 22.8%에서 29.2%로오른 건 맞지만 그 증가분이 메운 곳은원전이 아니라 석탄발전 (43.1→34.3%)이다. 국내에선 미세먼지 관리, 국제적으로는 탄소 저감 요구가 높았다.  - P11

우리나라 가스와 전기요금이 그동안상당 부분 동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가 그것들을 ‘공공요금‘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가스는 한국가스공사가, 전기는한국전력과 같은 공기업이 생산(수입)과유통·판매를 독점하고 국내 공급가격은산업통상자원부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요금을올리고 싶어도 물가관리에 예민한 기획재정부가 반대하면 인상하기 쉽지 않다. - P12

윤석열 대통령은 ‘역주행‘하고 있다.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방문, 다보스포럼 등 참석하는 자리마다 원전을 강조하고 나섰다. ‘원전의 부활‘이 현 정부 최대의 국정과제가 된 듯하다. 그러면서도재생에너지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에서 "탄소중립을 반드시 달성하기 위해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기술력을 강화하고 원자력발전을 좀 더 확대해나가겠다"라고 말했다. - P15

그러니까 원전과 재생에너지는 서로
‘제로섬‘ 관계다. 한쪽 생태계가 흥하면다른 쪽은 망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국내원전은 1기당 발전량이 1GWh 이상인 대용량이다. 1GWh는 4인 가구 기준 약 10만 가구가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전력량이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은 날 원전이 함께 가동되면 전력망에 과부하가 걸린다. 재생에너지의 출력을 사람의 뜻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 P16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드러나지않은, 혹은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못한이야기들이 있다. 주로 사회적 약자들의이야기다. 감염병 위기 이전에도 발언권을 얻기 어려웠던 취약계층의 목소리는전 사회를 뒤흔든 재난 앞에서 더욱 쉽게묻혀버렸다.  - P27

시민사회에 남은 과제는 뭘까. 장유식 소장은 "국정원 개혁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대하는 데서부터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이당장 내년 1월 대공수사권 이관이 어렵다고 주장하면, 민주당은 또다시 유예기간을 늘리는 데 합의할 수 있다. 그걸 잘확인하고 감시해야 한다. 대공수사권 이관은 국정원을 국민과 국가로부터 신뢰받는 정보기관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왜 국정원을 개혁해야 하는지 계속 설명하면서, 60년 만에 만들어놓은 이 개혁을지키는 것이 급선무다." - P42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육성시뮬레이션 스포츠 만화 <슬램덩크>의정점은 전국대회 2차전 산왕전이다.
25권 후반부부터 시작해 31권까지 무려6권 넘게 한 경기에 할애한 이 시합은오랜 기간 함께 달려온 독자, 아니플레이어들의 잔치였다. 모두가 마지막성장에 도달했다. 강백호는 "리바운드와끈기, 송태섭은 "스피드와 감성", 정대만은 "지성과 3점슛", 서태웅은
"폭발력과 승리를 향한 의지". 채치수와권준호가 지탱한 토대 위에 재능들이더해진 ‘북산‘이 완성되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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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 기준, 전 세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415ppm을 넘어섰다. 불과 50년 만에 25%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런 증가는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이 흐름을 되돌리고 우리 모두가 의존하는 기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10년 안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크게 줄여야 한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요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네 가지는 석탄, 연소, 소, 그리고 콘크리트다. 이 네 요인이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 문제의 70%를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 집단 내에서 여러 구성원이 힘을 모으고, 세계 차원에서 여러 나라가 힘을 모으면 서로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장기적 관점을 따르는 행위자에게 보상을 하는 시장이 만들어질 때, 동참하는 개인과 조직이 늘어날 수 있다. 사회 규범의 확립, 실제 비용을 제도화하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개입이 조직과 국가의 행동 양식을 바꿀 수 있다.

1~2°C는 지구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변화지만 개인이 일상에서 이를 체감하기는 힘들다. 대신 기록적으로 더웠거나 많은 비가 내린 어떤 시기를 기억할 수 있다. 통통한 다람쥐가 기온 상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눈이 적게 내려서 다람쥐가 먹을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아직 건물에 난방을 하고, 차를 몰고, 노트북을 충전해야 한다. 구조적인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개별적인 노력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 관련 정책에 주력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일은 탄소 배출을 대규모로 감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꼽힌다.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차량에 연료를 공급하고, 전기를 생산하고, 기계를 돌리기 위해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태웠다. 이로 인해 점차 많은 탄소가 배출되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탄소가 산소와 결합해 이산화탄소(CO2)가 만들어지고, 이는 지구의 대기에 열을 가둬서 기온을 상승시킨다. 우리는 이미 지난 세기에 진행된 기온 상승의 물리적, 정치적 영향을 체감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국민 한 명당 평균 1년에 14톤(벽돌 6300개 정도의 질량)이 조금 넘는 탄소를 배출한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탄소 배출량을 1인당 약 1톤(벽돌 440개 정도의 질량)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지금까지 각국 대표자들이 모여 합의한 목표는 2050년까지 넷제로 배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피해를 복구하려면 넷제로 이상으로, 즉 지구가 흡수할 수 있는 한계보다 탄소를 ‘적게’ 배출해야 한다. 탄소를 ‘완전히’ 배출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배출된 탄소를 나무 같은 천연 흡수원과 혁신적인 기술로 제거해 넷제로에 도달할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포기하고 탄소를 제거하는 혁신적인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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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의 예수 - 예수의 민중운동, 개정2판
안병무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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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20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의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를 민중(民衆)의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갈릴래아의 예수>안의 예수는 다른 예수 평전에 그려진 나자렛 목수 예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결코 영광으로 가득한 승리의 왕(王)이 아니다. 예수는 민중 그 자체다.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 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3


 저자 안병무는 예수를 바오로(Paul, 5 ~ 64)가 강조한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라는 관념과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 ~ 1976)이 강조한 케리그마(Kerygma)와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로 바라보길 거부한다. 대신, 민중의 구체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망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상에서 일별한 예수 연구사에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예수를 해방시키려고 한 반면 저들에게는 사건보다 관념이 먼저라는 전제가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도 그리고 기적이야기도 관념의 산물이다. 불트만도 이 계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다. 그에게는 관념의 자리에 케리그마가 대치된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52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90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저자는 예수운동을 투쟁적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둘러싼 '부재지주-소작농', '도시-농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로마와 유대협력자-민중'의 격렬한 대립형태 안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선 메시아로서 자리매김된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 ~ 1900)의 <행복한 왕자 The Happy Prince>에서 왕자 동상이 높은 곳에 서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것을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스스로 초라해져 갔듯이, 말씀(word)은 온전하게 인간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하강하고 거기에 머무른다.


 갈릴래아 민중의 처지는 다음과 같은 네 겹의 억압 밑에 있었다. 첫째는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인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 착취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47


 갈릴래아에 세워진 도시들은 애초부터 침략한 외세에 아첨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특히 로마시대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노예노동에 의해서 팽배해진 그레꼬 로마적 사회인 데 반하여, 농촌은 고대 이스라엘 당시의 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이며 저들은 비옥한 토지,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민으로서 착취를 당하고, 그의 앞잡이인 헤로데 왕가에 의해 그리고 더 나아가 침략세력과 야합하여 생산품의 징수권을 가진 종교귀족들에 의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저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또한 예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4


  아래에 내려온 말씀은 마치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같이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파괴는 '우리 편을 남기고 적을 쳐 없애는' 구약의 실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뒤집어 없애는 파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그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그의 적들은 단결했고, 그의 편들은 자신들을 챙기지 않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돌아섰으며 이로 인해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죽음의 순간 예수는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심지어는 신(神)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어린 양(Agnus Dei). 그렇다면, 그의 비참한 죽음은 부활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02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인식전환으로 해석한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참함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그와 일체를 이루는 순간, 버림받은 그와 민중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발견한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패배요 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실망하고 체념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는 순간 바로 예수와의 새로운 연대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죽음은 인식을 바꿀 수 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리스도론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83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 예수의 모습 대신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의 열망을 담은 정신으로서의 예수. 개인적으로는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통해 기복 신앙(祈福信仰)을 넘어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대 교회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정신이 예수 운동의 대척점에 있던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갈릴래아의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과 회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짚어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출처 : 법보신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에는 누워있는 불상, 와불(臥佛)이 있다. 누워있던 불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담긴 운주사 불상. 아마 이 불상을 만들었던 어느 누군가의 마음이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갈릴래아 민중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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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먹는 일, 나누어 먹는 일을 빼고 생각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으면 무엇하며, 온다고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벌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터이니까.

겨울호랑이 2023-02-08 08:02   좋아요 1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기독교가 보편종교, 세계종교가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을 넘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동감에 바탕을 둔 행위를 강조한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안녕만을 바라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일부의 모습은 분명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