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첫 번째로 현대 일본에서의 우경화는 어디까지나 정치 주도(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 엘리트 주도)이지 결코 사회 주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근래에 이르러 우경화를 나타내는 지표가 일본 사회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정계에서의 우경화 쪽이 그 시기도 빠르고 진폭도 크다.

두 번째 특징은 우경화 과정이 단선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처럼,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반대 방향으로 일시적으로 회귀했다가 다시금 진전되는 식으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이러한 우경화의 본질이 가히 ‘신우파 전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우파가 그대로 좀 더 강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우파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은 이러한 특질이 더더욱 우경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모든 것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끌어들여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와 최근의 상대적 발전이 일반화하고 전파한 가치들은 지난 수천 년간 서구가 경험한 오래된 서구적 유산의 일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공자는 아시아적 가치라는 상상의 건축물에서 두 개의 기둥, 즉 가족에 대한 헌신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아시아적 가치’의 힘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역할을 가정의 역할이 확장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공자가 말했듯이 이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파악해야 할 요점은 현대의 ‘아시아적 가치’의 지지자들이 그것의 권위주의적 관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들의 생각이 작가들과 전통을 극단적으로 좁게 선택한 것에 기반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 문화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서구의 전통만이 유일하게 자유를 기반으로 사회적 이해의 접근법을 제공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가 여러 중요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기반인 단순한 자기 이익의 추구에서 벗어난 동기 구조를 갖고도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특이한 사실을 이해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현재의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직면한 큰 도전에는 불평등의 문제(유례없는 번영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빈곤의 문제), ‘공공자산’의 문제(환경과 같이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자산)가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법은 확실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의 범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 민감한 윤리를 적절히 발전시킴으로써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주된 교훈은 사회적 선택에 대한 합리적 평가의 무용성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측 가능한 결과들을 예상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것은 의도의 힘에 압도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부수적 효과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둘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도 발전에 대한 이 두 가지 접근법이 왜 실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가? 자유에 초점을 둔 것이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가? 그 차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생겨나는데, 각각 자유의 ‘과정의 측면’과 ‘기회의 측면’에서 온다. 먼저 자유가 의사결정 과정과 동시에 가치 있는 산출을 성취할 기회와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관심영역은 산출이나 소득의 진작 혹은 더 높은 소비의 달성(혹은 경제성장과 관련된 다른 지표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성과에만 한정될 수 없다.

현재의 경제분석은 기본적으로 자본축적을 물리적 관점에서 보는 것에서 인간의 생산적 자질이 통합적으로 관여된 과정으로 보는 것으로 강조점이 상당히 옮겨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년 체제가 사회통합의 시대가 되기 위해서도 수구세력과의 격돌이 일단 불가피하다는 나 자신의 생각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을 바탕으로 소통하고 합의하자고 해도 절대 안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떠나 오로지 자기 이득만 지키려는 '수구'의 특성 아니겠는가. _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p207

백낙청(白樂晴, 1938 ~ )의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는 저자가 주장한 '2013년 체제'에 대한 반성과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변혁기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의문이 담긴 책이다. 2012년 대선을 새로운 변혁의 원점으로 삼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와 달리 박근혜의 당선은 '2013년 체제'론에 대한 반성을 가져온 반면,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의 당선은 '촛불혁명 이후의 과제'를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

'시민참여'의 가장 큰 몫은 대화와 교류를 거부하는 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갈아치우는 일이다. 이 기본적인 책무를 우리는 촛불대항쟁을 토해 훌륭하게 이행하였다. 남은 과제는 정권을 잃었을 뿐 여전히 사회의 각종 고지에 포진하고 있는 세력을 촛불시민과 촛불정부가 힘을 모아 제압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정부와 대통령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시민들 스스로도 평화로운 한반도와 핵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혜를 선보일 때가 되었다. _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p451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서 저자는 촛불혁명을 움직인 시민참여라는 거대한 힘에서 일찍이 2008년 제기한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 평화'라는 삼중과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다. '근대적응'과 ' 근대극복'이라는 근대의 이중 과제가 냉전 이후 변화된 세계체제와 직결된 것이라면, 한반도 평화는 분단체제와 세계체제 문제에 함께 걸쳐있는 과제다.

'근대의 이중과제'론, 곧 근대적응(adapt to modernity)과 근대극복(overcoming modernity)을 이중적인 단일과제로 추지한다는 논의는 추상수준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p108)...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그 실천방법을 고정하기는 어렵다.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최소한의 적응조차 못해서 그 현실의 극복에 실패하고 마는 결과를 어떻게 피할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_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p136

우리에게 주어진 고차방정식(高次方程式)은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임기 초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높은 기대를 불러왔지만, 이후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수구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오히려 파탄으로 이어진 지금의 상황은 마치 2016년 촛불혁명 당시 뒤늦게 읽었던 <2013년 체제>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시민참여 통일운동의 그 방면 상황은 어떤가? 6.13지방선거로 반촛불 수구정당에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이후로 운동이 오히려 소강상태로 접어든 느낌이 짙다. 그 원인은 크게 두가지라 생각된다. 하나는 문재인정부가 적폐청산과 남북관계 개선에서 이룬 성과에 비해 스스로 제1목표로 설정한 일자리 창출 등 민생경제 분야의 성적표가 실망스럽다는 점이다(p323)... 남북경협은 비록 미국의 대북제재로 지체되고 있지만 그 전망은 여전히 밝아 보인다. 반면에 국가의 조세권과 입법권을 행사하는 문제에서는 집권세력의 지혜와 의지가 모두 불확실하다. 바로 이것이 시민참여 통일운동의 국내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진 둘째 원인이다. _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p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는 <2013년 체제 만들기>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던 '시민' 그리고 '우리'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과거 <2013년 체제 만들기>에서는 총선신리, 입법부 장악 등 주로 정치권의 변화가 언급되었다면, 이제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서는 나라 주인들의 참여와 함께 한 걸음씩 나가자는 내용이 말해진다. 어쩌면 당연하고 작은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과제가 정치인의 것이 아닌 시민들의 것이라는 깨달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거대 담론과 언제 실현될 지 모르는 추상적인 비전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이 말해질 수 있다는 것. 무위(無爲)가 위(爲)가 될 수 있음을 어두운 시대에 실감한다...

6.15 공동선언의 묘미 중 하나, 지혜로운 점 중에 하나는, 제1단계로 연합제든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그 어름에서 뭔가 하나만 한다는 것만 명시하고 그 후에 뭘할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첫째는 그 후에 뭘 할지를 미리 얘기하려면 합의가 안 됐을 거고요. 또 하나는, 그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참여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거 그때 가서 우리가 정하면 됐지 왜 정상들이 다음에 뭐 하고 뭐 하고를 다 정해놓느냐, 이게 그야말로 민주시민, 주권시민의 태도 아니겠어요? _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p3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근을 이해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획득권한의 상실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은 음식을 살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한 단위로서의 가족이 소비할 수 있는 식량의 양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가족 내에서 분배의 문제는 기근 상황에서 매우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빈곤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족 내의 구성원의 영양실조와 굶주림을 결정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공동체에서 ‘정상적’ 상황이다.

여성은 가정에서 매일 오랜 시간을 일하지만 이 작업에는 보수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함께 증진시킨 부에 대해서 여성과 남성의 상대적 기여를 평가할 때 가사노동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취업하여 밖에서 임금을 벌어온다면 그녀가 가정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의 향상된 지위는 심지어 여성 아동의 ‘몫’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준다. 따라서 외부에서 일을 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 자유는 여성의 상대적인 그리고 절대적인 박탈을 감소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사실 여성의 권리 강화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발전 과정에서 마주치는 중요한 논점 중 하나다. 여기에 포함된 요인들은 여성의 교육, 그들의 소유 형태, 취업 기회, 그리고 노동시장의 작동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변수 외에도 고용제도의 특성, 여성의 경제활동에 대한 가족과 사회 일반의 태도,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독려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사회적 환경 등도 요인에 포함된다.

출산율 감소는 경제적 번영으로 인한 효과 때문만이 아니라 높은 출산율이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형의 삶을 영위할 자유 특히 젊은 여성의 자유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실 잦은 임신과 양육 때문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번식하는 도구로 전락당한 젊은 여성들이다.

콩도르세는 출산율의 자발적 감소를 예측하고 ‘이성의 진보’에 기초한 작은 가족이란 새로운 규범이 출현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의무를 갖고 있다면, 그 의무가 그들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교육의 확대, 특히 여성 교육의 확대(이에 대해 콩도르세는 가장 앞선, 그리고 가장 목소리를 드높인 지지자였다)로 인해 이러한 유형의 추론이 사람들을 낮은 출산율과 작은 가족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사람들이 사회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구 성장의 결과에 관한 한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공급을 초과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고, 이 맥락에서 식량 생산이 상대적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 장의 주제와 관련해서, 맬서스는 특히 자발적인 가족계획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가 인구의 압박을 감소시키기 위해 ‘도덕적 자제’를 대안으로 언급했지만(다시 말해 고통과 증가된 사망률의 대안으로), 그는 그러한 자제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아, 영양실조, 기근 문제의 본질과 혹독함을 오직 식량 생산량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식량 생산량은 기아가 발생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 중 하나다. 소비자가 식량을 살 수 있는 가격은 식량 생산량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식량 문제를 전 지구적 수준에서 고려한다면(국가나 지역 차원이 아니라), 경제 ‘바깥’에서 식량을 구할 방법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맑스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자본과 국가는 그것들이 어떤 필연성에 뿌리박고 있는 까닭에 자율적인 힘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초월론적인 가상인 까닭에 단순한 부정에 의해서는 사라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좀 더 강력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관한 깊은 통찰(비판)이 필요하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43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트랜스크리틱 トランスクリティ-ク―カントとマルクス >은 '탈(脫)자본주의'를 위한 고찰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이념과 국가라는 통치권력의 긴밀한 연합을 과연 깨뜨릴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이 과제를 위해 고진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와 맑스(Karl Marx, 1818 ~ 1883)을 소환한다. 


  국가나 네이션이 비록 공통 환상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게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나 네이션은 상품 교환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역시 '교환'에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더라도 그와 같은 계몽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초월론적 가상인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5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본질을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으로부터 밝혀내고, 이들의 연결고리를 맑스의 이윤원천인 '교환'에서 찾아낸다. 교환관계로 결합된 초월론적 가상. 마치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cerberus)와 같은 이들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트랜스크리틱>에서 고진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에 해당하는 칸트적 전회(轉回)를 꺼내든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사물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지동설로의 '전회'를 초래한다. 즉 코페르니쿠스의 전회 그 자체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경험주의처럼 감각으로부터 출발할 것인지, 합리주의처럼 사유로부터 출발할 것인지 하는 대립을 빠져나간다. 그가 가져온 것은 감성의 형식이나 지성의 카테고리와 같이 의식되지 않는, 칸트의 말로 하자면 초월론적인 구조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56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적 전회를 통해 초월론적 구조를 도입한다. 초월론적 구조 안에서 '타자(他者)'가 도입되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보편성과 특수성은 자리바꿈을 한다. 여기에서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는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와 같이 정(正)-반(反)-합(合)의 구도를 갖지 않는다.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는 타자와의 끊임없는 관계, 사이가 목적과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은 자본=네이션=국가를 긴밀하게 엮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그것은 교환관계에서 온다. 이제부터 주제는 칸트에서 맑스로 전환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보편성'을 추구했을 때 불가피하게 '타자'를 도입해야만 했다는 것, 그 타자는 공동 주관성이나 공통 감각에서 나와 동일화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신)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타자이다. 그와 같은 타자는 '상대주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만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85


 이 명령(정언명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동체에서 오지 않으며, 신에게서도 아니다. 이 명령은 (칸트의) 초월론적 태도 자체에서 온다. 초월론적 태도는 암묵적으로 '괄호에 넣어라'는 명령을 포함한다(p176)... 초월론적인 시점이 그와 같은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망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인 시점 자체가 하나의 명령에 의해 촉구되고 있다는 것도 망각되고 있다. 그 점은 초월론적 시점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을 때 분명해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와 연관되어 있다. 초월론적인 시점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177


 고진은 맑스의 <자본>에서 특히 3권에 주목한다. 잉여의 원천과 신용관계를 통한

자본의 끊임없는 지불유예와 만기연장을 통한 자본증식의 본질을 고진은 밝혀낸다.  다른 가치 체계에서 교환을 통해 형성된 이윤이 끊임없이 돌려막기되면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 고진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긴밀한 유대를 끊어낼 수 있는 약한 고리를 생산-교환-소비의 단계 중 교환에서 찾아낸다. 초월론적 구조 안에서의 영구 교환 시스템. <트랜스크리틱>에서 논의된 구조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 행동 논의는 <세계공화국으로>와 <윤리 21>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된다...


 맑스는 G-W-G'에서 W-G'가 실현될지(상품이 팔릴지) 아닐지 하는 것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보고 있다. 그 경우 덧붙여야 할 것은, 실제로 자본은 상품이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운동을 계속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신용'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235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을 촉진하고 '판매'의 위태로움을 감쇄하는 '신용'이 자본의 운동을 무한(endless)히 강제한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본의 자기 운동은 마치 자전거 타기처럼 바로 '결제'를 무한히 뒤로 미루기 위해서 존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거기에 '끝'이 있다면 신용은 붕괴하기 때문이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42


 맑스는 자본의 원천에서 바로 화폐의 페티시즘을 고집하는 수전노(화폐 축장자)를 발견하고 있다. 화폐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것과도 직접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사회적 질권'을 갖는 것이다. 화폐 축장자란 이 '권리' 때문에 실제의 사용 가치를 단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설적이게도 수전노는 물질적으로 욕심이 없다. 수전노에게는 종교적 도착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실 세계 종교도 유통이 일정한 일정한 '세계성' - 공동체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이윽고 공동체들에게도 내면화되는-을 지닐 수 있었을 때에 나타났다. _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 p325


통상적으로 공적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에 반해 공동체나 국가 차원에 대해 말해짐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역으로 후자를 사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칸트적 전회‘가 놓여 있다. 이 전회는 단지 공공적인 것의 우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의 의미를 바꿔버린 것에 있다. 공적이라는 것=세계 공민적이라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는 오히려 그저 개인적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개인적인 것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공적 합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개인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 - P150

언어는 개별성-일반성의 회로로 회수되지 않는 잔여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 명사가 초래하는 패러독스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거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단독성이 이를테면 ‘사회적‘인 것과 관계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반성-개별성과 보편성-단독성의 구별이다. 또는 공동체-사회의 구별이다(p165)... 고유 명사(proper name)은 종종 사유 재산(property)과 결부된다. 따라서 고유 명사에 대한 공격은 반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인다. - P166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채택된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에 있다. 제비뽑기는 권력이 집중되는 장소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참으로 삼권분립을 보증한다. 이리하여 만약 익명 투표에 의한 보통 선거, 요컨대 의회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적인 독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싱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어소시에이션은 중심을 지나지만, 그 중심은 제비뽑기에 의해 우연화된다. 이리하여 중심은 있음과 동시에 없다고 해도 좋다. 즉 중심은 이를테면 ‘초월론적 통각 X‘(칸트)인 것이다. - P28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집 2023-04-18 2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는데… 상당히 어려운데요!!!

겨울호랑이 2023-04-18 22:39   좋아요 2 | URL
아, 제가 <트랜스크리틱> 리뷰에서 큰 골격만 떼어 요약하다보니, 그렇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생각하기에도 100%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스스로도 부족함이 많은지라... 직접 읽으시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DYDADDY 2023-04-19 0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05년에 번역된 책과 같은 내용인줄 알았는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크게‘ 바뀌었다고 하네요. 새로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3-04-19 04:58   좋아요 0 | URL
서두에 이전 내용 중 일부를 보완했다는데 저는 이전 본을 읽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만, DYDADDY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그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4-25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칸트=나쁜 놈 이란 도식을 알기 위해 저도 읽어봤는데 앞 부분은 참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23-04-25 23:00   좋아요 1 | URL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의 사상이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의 골격을 설명하다보니 처음에 저도 선뜻 내용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강한 칸트의 초월론은 그 내용은 차치하고, 이해의 어려움으로 독자들의 건강에 유해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