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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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과 해변 사이 중산간지대의 백삼십여개의 마을들이 불에 타 사라졌다. 불바다와 함께 대살육극이 시작되었으니, 주민들 절반은 산으로 달아나 폭도라는 누명 아래 사살의 대상이 되고 절반은 명령에 따라 해변으로 소개했으나, 그중의 많은 부로(父老), 아녀자들이 폭도 가족이라고 처형당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소도 닥치는 대로 학살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물정을 잘 모르는 읍내 아이였다(p31)... (어른들은) 한라산을 적대시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죽창을 들고 토벌대 뒤를 따라다녀야 했던 그들은 동족을 적으로 삼아야 하는 자신의 기막힌 운명에 치를 떨었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37/229

일부 해안가를 제외한 섬 내륙 전체를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초토화작전을 전개한 이승만 정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고립된 섬 제주는 지옥도가 되었고, 지옥을 만든 것은 외세가 아닌 자국정부에 의해서였다. 앞선 시기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과 1920년대 간도참변, 같은 시기 여순사건과 이후 5.18민주화항쟁에 이르는 국가에 의한 민간의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의무라 생각한다.

이름난 명승지 모두가 과거에 학살터였던 아픔의 섬 제주. 제주4.3평화공원의 리플렛을 꺼내어 평화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그러한 아침에 의해 격려받고, 그러한 아침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아침 빛으로부터 병든 자는 삶의 의욕을 얻고, 절망한 자는 용기를 얻고, 그리고 용기있는 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더 밝고 더 아름다운 아침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결심을 하는 순간도 그러한 아침의 햇빛 속에서일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10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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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6 07: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년전 4.3평화공원 다녀왔었습니다. 평화가 너무나 요원하다는것을 더욱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리플렛 잘 보관하고 계셨군요^^ 저도 갖고 오기는 잘하는데 관리는 잘 못하네요^^

겨울호랑이 2023-04-06 07:57   좋아요 5 | URL
네. 제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주로 해안 관광지를 방문하지만, 제주의 아픔이 묻어있는 내륙지역에는 잘 가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서, 4.3평화공원도, 아픈 역사도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합니다. 그나마 4.3사건에 대한 추모행사마저도 폄훼하는 이들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나와같다면 2023-04-06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4월1일 프로야구 개막 시구하고 서문시장 갈 시간은 있어도
4.3 희생자 추념식에 불참할 수 있는가!

이제는 화도 안나고 슬프고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3-04-06 17:33   좋아요 2 | URL
열을 내서 화를 내는 것도 그 사람이 알아듣고 나아질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알아들을 능력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금치산자(지금은 폐지되었지만)에게 휘둘리는 것릉 여러모로 손해인 듯합니다. 차가운 분노로 작태를 하나하나 눈을 떼지않고 지켜본 후 끌어내려야겠다는 생각만 해봅니다...
 

울프가 보기에 소설은 여성들의 장르였다. 소설은 희곡이나 시에 비해 전문교육이 필요하지 않으며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기 수월했다. 다른 전통적인 장르들이 이미 굳어지고 결정된 형태였던 데 비해 소설은 유연하고 새로운 장르였기 때문에 여성은 소설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여성 예술가들을 옹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울프는 예술에서 남성도 여성적인 것을, 여성도 남성적인 것을 다루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을 고려하면 두개의 성(性)도 부족한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해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해가 편을 가르거나 제한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돌봄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고 있다. 돌봄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요청된 중요한 과제다.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은 가족 안에서 여성과 돌봄노동의 조건들을 첨예하게 다룬다.

「돌보는 마음」은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페미니즘의 ‘돌봄의 윤리’가 처한 곤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돌봄은 인간이 서로를 의존하는 토대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었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매진하느라 돌봄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주장하지 못했으며 돌봄은 일 주위에 알아서 욱여넣어야 하는 것이 되는 한편 돌봄을 분담하려는 남성도 늘어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자기만의 방』 이후 약 십년의 시간이 지나 울프는 『3기니』(Three Guineas, 1938)에서도 기득권을 쥔 남성들이 보지 못한 세계와 전쟁의 참상들을 말한다. 울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매우 중요한 연결이 존재함을 알리며 무너진 집과 부서진 담장에서 처참하게 깨진 연결의 파편들을 응시한다. 그는 분노의 정념을 넘어, 다른 성에 대한 적대감을 넘어 공동의 삶을 위한 협력을 먼저 제안한다. 지금 가족 이야기를 다시 쓰는 여성서사는 공동의 삶을 위한 돌봄을 모색하고 소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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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기호들에 관한 감상의 영화다. 박찬욱의 감상법은 기호들을 할 수 있는 한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힘을 이용해 자신 앞에 놓인 논리적인 명제들, 논리적인 그림들, 논리적인 세계의 체계들을 파고들 수 있는, 놀랄 정도로 폭력적인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해. 밀려오는 파도. 지연된 시간. 모래 구덩이 속의 서래. 물에 젖어 무거워진 해준의 신발. 정훈희의 '안개'.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인가. _ 프리즘오브 프레스, <프리즘오브 PRISMOF 특별호 : 헤어질 결심>, p19


 오랜 알라딘의 이웃분으로부터 책선물을 받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인상깊게 보시고 책선물을 해주셔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헤어질 결심>을 다시 떠올린다. 평론가 정성일의 글처럼 영화는 수많은 상징과 의미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한 수식처럼 얽힌 이들 관계를 소거(消去)한다면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 이야기'다. 정성일은 본문에서 사랑의 기호들을 설명하면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 1951)의 논리를 따라간다. <헤어질 결심> 뿐 아니라 박찬욱 감독의 전작으로부터 이어오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바라본다.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헤어질 결심>의 사랑 이야기는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인다. 철처하게 계산된 서래의 움직임 속에 놀아나는 해준. 지쳐가는 해준에게 서래는 스스로 영구미제(永久未濟)의 인물이 되며, 해준에게 잊혀지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새긴다.


 서래는 해준을 해파리로 만든다. 서래는 해준을 재우면서 최면을 걸듯이 말한다.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당신은 해파리에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서래가 해준을 잠재울 때, 그때는 아직 사랑의 시간이 아니다. 더 기다려야 한다. 서래는 차를 운전해서 바닷가로 달려가며 해준에게 전화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그들은 비 오는 날 사찰을 방문할 때에도 아직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해준만이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 팜 파탈 서래의 계산 안으로 들어온 형사 해준을 해파리로 다루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냉정한 최면인가. _ 프리즘오브 프레스, <프리즘오브 PRISMOF 특별호 : 헤어질 결심>, p17


 서래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극적으로 실현해낸 이포 바닷가를 보면서 영화를 볼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영원회귀'와 '힘(권력)에의 의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진] 영화 <헤어질 결심> 이포 바닷가 (출처 : 아이뉴스24)


 "힘의 마력. 필요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고 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인류의 수호신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즉 건강, 음식, 주택, 오락을 줘보라. 그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불만스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력적인 존재가 기다리면서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이 마력적인 존재를 만족시켜보라. 그러면 그들은 거의 행복하게 된다. 인간과 마력적인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최대한 정도까지." _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제4부, 262절


  해준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남기기 위해 마침내 해준을 붕괴(崩壞)시킬 정도까지 몰아붙이는 서래. 그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하나의 의지가 아닐까. 서래는 자신의 의지를 세우기 위해 밑으로 들어간다. 태양이 모래밭 위에 걸리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서래를 덮지만, 그 순간 서래가 느끼는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뤄지는 극한의 쾌감이 아니었을까.


 

 인류의 오류 역사의 결과로서 니체가 도달한 이 영원회귀의 앎은 지금까지 오류를 산출해 온 힘에의 의지가 거기서 스스로의 맹목적 성격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 더욱이 그 맹목적인 힘에의 의지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었다. 인식과 오류가 그 극한에서 수렴한다.  그러나 힘의 놀이는 거기서 영구적인 정지 상태에, 완전한 균형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아니다. 위대한 정오, 태양이 천정에 걸리는 것은 순간이며, 더욱이 그 순간을 그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자에게 있어서만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한순간이, 요컨대 세계가 인식에 의해 빛나고 니체의 메모를 끌어들이자면 "쾌락의 절대적 과잉"이 증명되는 이 한순간이 되돌아오게 되면 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_ <니체사전> '영원회귀' 中 , p414


  서래가 바닷가에서 '힘에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면, 그 의지를 둘러싸고 덮는 것은 파도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 그렇지만, 그 파도는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다. 서로 다른 높이와 소리, 세기를 가진 저마다 다른 파도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끊임없이 해준 곁에 머무르려는 서래의 의지를 덮는다.  


 다른 한편 니체는 세계의 본래적인 존재 양태를 부단한 '생성'으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 구상은 '영원회귀'와 결부된다. 즉 세계가 일정한 '힘의 중심들'의 상호 작용으로 성립해 있다고 한다면,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조합이 실현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실현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의 존재의 세계로의 극한적인 접근이며 고찰의 정점이다"라고 말하고,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힘에의 의지다"라고 하고 있다. _ <니체사전> '힘에의 의지' 中 , p643


 그렇지만,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만남은 항상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마치 자기 유사성을 가진 프랙탈(fractal)처럼, 서래를 덮은 파도는 그 다음 파도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그 다음 파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또 다른 생성(生成)을 이룬다. 그렇게 만들어낸 변화의 양상들이 부분과 전체의 자기 유사성으로 표현되며, 서래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으로 해준에게 사랑이 되어 남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 망델브로 집합(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A-Mandelbrot-set-M-2-for-the-family-f-x-c-x-2-c-5-The-boundary-of-the-black_fig1_263911584)


 앞서 평론가가 말했듯,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기호에 관한 영화다. 때문에, 어느 기호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 이 페이퍼에 올린 해석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이고, 이 관점도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글을 올리는 것은 먼저 좋은 선물을 주신 이웃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미련한 생각에서 조금은 나아지는 과정의 발자취를 남겨야겠다는 생각때문이다...


 어떤 복소수 C에 대해 식 f(z)=z2+C로 정의된 복소 다항식 f가 있다고 하자. 임의의 복소수 z0을 고르면 반복, 즉 함수 f를 계속 적용하여 수열 z0, z1, z2...를 얻을 수 있다. 어떤 경우 (C>=2) 얻은 수열은 무한대로 다가가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유계 상태, 즉 0으로부터의 고정된 거리 내에 머물러 있다... 만일 z0을 고정하고 C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망델브로(Mandelbrot set)이다. z0=0으로 잡았을 때 수열이 유계로 남아 있는 C 전체의 집합이 정확한 정의다. 망델브로 집합도 대중적인 상상을 사로잡는 복잡한 프랙탈 모양을 갖는다. _ 티모시 가워스 외,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 p414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되돌아오며, 우리 자신도 더불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이미 존재했으며, 모든 사물 또한 우리와 함께 그렇게 존재해왔다는 것이 아닌가. _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3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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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4-04 0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영화 ‘헤어질 결심‘에 이토록 깊은 뜻을 알게 하시다뇨!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참 다양한데 이 영화를 꼭 다시 봐야겠어요.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가 책선물 주신 분에게 보내는 최고의 감사인사인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4-04 08:10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격려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영화에 담긴 감독과 작가의 의도를 제가 제대로 파악했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 집니다. 저 스스로도 작품 내의 더 많은 장치들과 알레고리들 중 많은 부분을 놓친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네요...ㅜㅜ 부족함이 많은 생각입니다만, 하나의 가능성 정도로 이해해 주시고, 페넬로페님께서 참고 정도만 하시고 작품을 즐기신다면 그것으로 이 페이퍼는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하루 되세요!

잘잘라 2023-04-04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극한의 쾌감‘이 궁금해지는 글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을 상상하게 된달까요. 너무 오래 덮어두었던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4-04 08:26   좋아요 2 | URL
서래의 선택이 제3자의 눈에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선택의 길이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래의 눈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모래 밑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통해 해준의 마음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선택.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예수의 선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면, 서래 또한 자신의 선택 순간에 일종의 황홀경, ‘엑스터시‘를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냥 가벼운 제 생각이고 추측입니다. ^^:) 잘잘랄라님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나와같다면 2023-04-0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영원회귀‘와 ‘힘(권력)에의 의지 까지 대단한 사고의 확장이고 <헤어질 결심> 리뷰입니다!

2023-04-04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관점주의가 어떤 것인지 대략의 윤곽을 보여주는 것으로 니체가 존경했던 문화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서문을 들어볼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서문에서 이 책의 서술 내용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본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니체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니체는 유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란 그것 없이는 특정한 종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할, 그런 오류의 한 양식이다." 이 문장에서 니체는 진리란 일종의 오류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어떤 진리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기 때문에, 실상 어떤 관점에서, 어떤 해석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오류의 일종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오류가 우리 삶에 필수 불가결한 것, 절대적으로 유용한 것이어서 진리로 간주되고 신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데카당스란 무엇인가? 니체에게 데카당스란 강한 인간에게서 힘을 빼앗고, 약한 인간을 승리하게 만드는 모든 경향이다. 강자의 권력의지를 부식시키고 부패시키는 약자의 도덕, 약자의 사상이 바로 데카당스의 핵심이다. 퇴폐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선한 삶이 데카당스의 핵심에 들어 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연민’, 곧 약한 자들을 껴안는 마음이다.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상’을 가리켜 "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서문’, 2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니체는 사람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모세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겼듯이 지금 사람들이 이상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상이 우상일 뿐임을 폭로하는 작업은 어찌 보면 전 생애를 관통하여 니체가 했던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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