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철 건축은 일본 국내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건축가가 동아시아의 일본 식민지에 파견돼 공부한 결과를 일본 바깥에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 도달한 건축물 몇몇은 중국 내 세계적 수준의 건축물들을 접하면서 쌓은 견문과 지식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정금은행 다롄지점이나 초대 대만은행 본점 등 식민지 은행의 점포는 대부분 지배 지역에 거점을 둔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것이 식민지 건축의 본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대만은행 본점과 만주중앙은행 본점만 도쿄에 거점을 둔 니시무라 요시토키가 설계했는데, 이는 만주사변 발발과 만주국 성립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변하고 일본과 지배 지역 간 결합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설할 수 있다.

식민지 은행 건물은 은행 조직이 변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례가 많다. 조선은행 본점은 1950년 한국은행 본점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쓰였다. 한국은행이 기존 건물 서쪽에 고층 빌딩을 새로 지어 본점을 이전한 후에 구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노무라가 대만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은 그의 대만총독부 영선과장 경력에 조선총독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 설계에서 보여준 노무라의 업적을 고려해 당시 설계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그의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오노기가 대만총독부에서 만철로 옮겨 간 일이다. 이는 만철 건축 조직이 지배 지역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의미를 띠었다. 즉, 이민족 지배나 일본과는 다른 기후나 풍토를 겪어보지 못한 만철의 일본 건축가·건축기술자들이 만철 본사가 다롄으로 이전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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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2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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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어떤 시대의 철학보다 중세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중세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려 한다면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장애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언어상의 장애물, 전문성과 관련된 장애물, 종교적 장애물 그리고 소속 교단과 관련된 장애물이 존재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머리말, p15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 )는 <중세철학 Ancient Philosoph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2>에서 중세철학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한다. 학자들에게는 어려움이겠지만, 일반독자들에게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심리적 장벽으로 작동한다. 중세철학이 라틴어와 로마 가톨릭이라는 공통 분모 위에서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에, 이 시기 철학을 일반적으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로 요약되며, 이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관심을 가지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렇지만, 중세철학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흐름 아래 무수히 많은 여러 갈래의 흐름이 있으며,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바람이고 이 바람은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어느 시기보다 중세철학이 서양철학에서 보다 세계적이었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종교적 세계관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전통 안에 놓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가능한 한 성서를 플라톤, 키케로와 조화시키려 애쓰며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만 반기독교적인 철학적 주장들을 상세히 언급하고 이를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화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후 라틴어권에서, 심지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넘어서까지도 철학적 논의의 기본 체계를 제공한 성서적이고 고전적인 요소들을 처음 생각해 내었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머리말, p44


 

 중세철학의 큰 흐름을 결정 지은 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였다. 그가 <신국론 De Civitate Dei>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대조하면서 로마의 역사를 히브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플라톤(Platon, BCE 427~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의 철학 또한 성경 해석의 틀로 들어오게 된다. 다만, 이 시기 그리스 문화 유산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로 나뉘어 전승되었고, 서구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다 자세히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군 원정 시기 이후였다. 


 이븐 루슈드는 플라톤의 저술들도 알고 있었지만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만큼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오직 아리스토텔레스만을 최고 수준의 인간 지성을 드러낸 천재로 여겼다. 사실 그는 플라톤의 <국가>를 의역하기도 했는데 - 이는 어쩌면 당시 스페인에서 구할 수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대용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는 <국가> 중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등장하는 중요한 대목들을 생략하기도 했으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더욱 가깝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곳을 변형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주석가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그는 자신이 깨달았던 것 이상으로 플라톤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95


 그렇지만, 서구 세계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비롯한 자연과학은 온전히 그리스 문화의 유산만은 아니었다.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  이븐 루슈드 Ibn rushd, 1126~1198), 알 가잘리(Al ghazali, 1058~1111) 등에 의해 해석된 사상이 서구 세계에 전해지면서 로마 가톨릭 교리 또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점은 이 시기의 철학이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라는 중세철학의 논제를 성격으로 갖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플레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비교하는 강의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라틴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을 더욱 선호하여야 한다. 플라톤은 단지 최초의 운동을 일으킨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었으며 또한 영혼의 불멸을 진정으로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잘못 파악하였으며, 덕을 중용으로 잘못 생각하였으며, 행복을 관조와 잘못 동일시하였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74


 <중세철학>을 통해 우리는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유명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교도의 철학으로 배척되었지만,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철학과 갖는 공통분모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뒤이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되며, 이와는 별도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와 윌리엄 오컴(Gulielmus Occamus: 1287~1347) 등의 일단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에 의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는 등 기독교 신학이라는 흐름 아래 무수히 많은 소용돌이가 일었음을 확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한 스콜라철학자들 대부분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지복을 누리면서 신을 바라보는 일정의 지적인 과정으로 생각한 반면 스코투스는 천상에서 축복받은 자들이 신과 하나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자유로운 행위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스코투스는 인간과 신의 의지 모두를 이전의 그 어떤 철학자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폭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48


 또한,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1384)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사회주의 사상은 중세철학이 고립된 '신학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근대혁명의 씨앗을 내부적으로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중세철학이 갖는 보편성과 후대 철학과의 연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철학에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끝에 신(神)이 있다는 것과 이를 위해 삼단논법과 같은 쓸데없이 어려운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세철학의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매달릴 수 있는가'와 같은 내용을 오늘날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를 위해 사용한 방법론까지 무시한다면 뒤이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과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를 이해하기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 점에서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인 동시에 '근대철학의 씨앗'이 아닐까 하는 요약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위클리프의 혁신적 생각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의 소유권(dominium) 이론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제안한 점이다... 신의 모든 재화는 모두가 공유하여야만 한다.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모든 사람이 은총 받은 상태라고 생각해 보자. 만일 누군가가 은총 받은 상태라면 그는 세계와 세계에 포함된 모든 것의 주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우주 전체의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른 모든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많다면 이는 일종의 모순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반드시 공유되어야만 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167


 유명론과 실재론 모두 어떤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결과로 등장한다. 단어들이 지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단어들은 사물을 의미하기도 하며, 사고를 표현하기도 한다. 단어들은 적절한 사고를 일깨움으로써 사물을 정확하게 의미하는데 이때 적절한 사고는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세계 안에 있는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로 이런 개념들을 통하여 사물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며, 우리 목에서 나는 소리 또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된다. _ 앤서니 케니, <중세철학>,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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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12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니의 중세철학은 정말 좋죠!

겨울호랑이 2023-09-12 21:05   좋아요 0 | URL
네 특히 전반부에서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한 후 뒤에서 주제별로 보다 깊이 있게 들어간 구성이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

2023-09-12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2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2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폐성장애 등 발달장애 학생들은이른바 ‘도전행동(challenging behavior)‘을 하는 경우가 있다. 도전행동이란 발달장애 아동처럼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찢거나, 자해하는 등의 문제 행동을 말한다. 대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하는 어려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는 행위도 대표적인 도전행동에 속한다. - P11

특수교사들은 도전행동 중재가 잘 이뤄지지 않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말한다. 하나는 교사가 직무상 어디까지학생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정서적·신체적아동학대로 신고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특수교사노조는 교육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도전행동 중재 매뉴얼을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행동중재 전문가나 의료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P13

특수반으로분리한 것을 교육적 조치로 보긴 어렵다.사람들은 ‘장애가 있으니 배려했다‘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차별‘을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안이 그렇다. 특수학급이 분리 수용소인가? 특수학급은 누가 뭔가를 잘못해서 분리되는공간이 아니라 배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필요한 지원을 받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능력이 떨어지거나 수업에 방해가되면 쫓겨나는 차별과 배제의 공간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이는 다시 특수교육대상자에 대한 낙인을 강화한다. 통합교육이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기에 이모든 일들이 일어났다고 본다. - P17

핵심은 오염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도쿄전력은 2017년 10월부터 2023년 2월까지 4년 3개월 동안 1000개가 넘는 오염수저장탱크 중 3분의 1에서 표본을 채취해 방사성 물질의 농도를 측정한 자료를이 전문가들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총 62개에 이른다는 오염수 내 방사성 핵종 중에서 실제로 도쿄전력이 측정한 핵종은대부분의 경우 7개에 불과했다.  - P37

<나비부인>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환상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 취향의 전형이다. 푸치니는 <토스카> 초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00년 6월 무렵, <나비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미국 해군장교가 일본에서 게이샤와 결혼하고 자식도 낳지만, 진짜 아내와결혼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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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를 인도해 온 질문은 ‘어떻게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후세대들이 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철학자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오간 수많은 이야기들, 때로는 그를 비판하기도 하는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형이상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르네상스 시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새롭게 조명을 받으며 많은 이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의 시학과 수사학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해서 바로크 수사학으로까지 이어졌고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영국 철학자들의 본격적 연구 대상으로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은 논리학 분야에서 끊임없이 거론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많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현상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반적인 생각은 목적론적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은 외부적인 지성의 활동에 의해 주어지지 않으며 단 하나의 외부적인 목표를 전제로 하지도 않는 독특한 형태의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은 자연적인 물체 안에 내재하는 무의식적인 원리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 원리가 다름 아닌 물리physis, 즉 자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설명 방식은 역시 목적론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포조직은 기관을 구성하기 위해 존재하고 기관은 기능을 목적으로 존재하며 기능은 삶의 영위를 위해 필요하다. 주로 비교를 통해 동물의 해부학과 생리학의 이해를 도모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상이한 기관들이 상이한 종의 동물들에게서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는 경우에 주목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포유동물의 폐와 물고기들의 아가미가 지니는 유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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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이들 도시에는 지배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들, 예를 들면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구 조선은행 본점), 중화민국총통부(구 대만총독부), 다롄빈관(구 야마토 호텔) 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물을 마주하지 않고, 먹거리와 선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의 자세는 우습고, 도시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증거를 내보이는 꼴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과 지배가 그 국가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피해를 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와 함께 수반된 무력 충돌과 전쟁은 승패에 상관없이 양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남긴다. 허나 가해국의 사람들은 그 피해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쉬운 법이다. 그뿐 아니라 피해를 준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타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다시 일으킬 위험을 낳는다. 지금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묻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그 재발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 즉, 언제든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물어야한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든 아니든 그렇게 해야 하며, 이것이 새로운 것을 잃어버리는 행동은 아니다.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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