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거주불능 지구 -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후변화는 개별 허리케인, 개별 폭염, 개별 기근, 개별 전쟁 등 구지적인 재해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립된 단서 같은 게 아니다. 지구온난화는 가해자라기보다 공모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기후 속에서 살아가면서 온갖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변화된 기후가 다시 또 모든 인간과 인간의 활동을 둘러싸고 있다.(p41)... 뜨거운 지구에서는 가장 빈곤한 국가들이 더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호주를 제외하고는 GDP가 낮은 국가들이 가장 극심한 기온 상승을 겪게 된다. 정작 남반구 국가들 대다수는 지금까지 지구의 대기를 그리 많이 오염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런 결과를 맞이한다.(p4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2050 거주불능 지구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의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David Wallace-Wells)는 탄소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단순한 기후변화에 그치지 않고 기후재난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는 기온상승으로 인한 폭염과 해수면 상승, 가뭄과 산불 등의 증가는 사회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고 먼저 가난한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매우 비관적인 내용의 시나리오다. <2050 거주불능 지구>는 다른 기후변화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12가지 기후재난으로 설명하는데, <탈출기 Exodus>에서 모세(Moses, BC 1393 ~ BC 1273)가 파라오에게 예언한 10가지 재앙을 연상시키는 시나리오는 신앙심 깊은 미국인들에게 종말처럼 다가간다. 이는 다른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많은 책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2050 거주불능 지구>는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본다. 기후변화문제에 대해 결론중심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다소 독특한데, 이러한 독특함은 다른 책들과 차이를 가져온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인류가 계속 이전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연‘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상당 부분 잃는다 하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인류가 결코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p64)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저자는 환경주의자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보지 않는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보기에 기후재난으로 가는 이러한 시나리오에 대해 인류 정체의 공동책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음 세대 후손에게, 마법 같은 혁신을 일으킬 기술자에게, 당장의 폭리에 집중하는 정치인에게 미루고 있다. 설령 강압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책에 ‘우리‘라는 단어가 강박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p331)<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저자는 기후재난에 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돌리는 한편,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미국 책임론에 대해 변론한다. 지구온난화가 산업화 이후 일어난 추세라는 일반의 설명에 대해 최근의 탄소배출량 현황을 근거로 서구와 미국 대신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책임을 부각시키며, 이들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온난화가 산업혁명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쌓였다가 이제야 갚을 때가 된 도덕적/경제적 부채와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 중 절반 이상은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됐다.(p1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유명한 파리기후협약에서 기온 2도 상승을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설정해 전 세계 국가의 동참을 요구한 것도 불과 2016년에 일어난 일이었다.(p76)... 트럼프의 협약 탈퇴 결정 역시 실리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트럼프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생산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후변화 문제에서 주도권 잡기를 포기하자 중국의 시진핑에게 훨씬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기회와 유인이 주어졌다.(p7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기후변화 문제에서는 확실히 중국이 거의 모든 패를 쥐고 있다. 온 세상이 존속과 번영을 위해 안정적인 기후를 필요로 하는 이상, 이미 탄소배출량 증가세가 멈췄으며 머지않아 줄어들기 시작할 미국과 유럽의 탄소배출량 궤적보다는 개발도상국의 탄소배출량궤적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p293)<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이와 함께 저자는 개인단위에서의 변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소비에서의 작은 변화는 자기 만족에 불과하며, 정치적인 행동만이 현재의 재난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기후변화의 고통을 감지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의 무책임을 탓하는 것은 일종의 연막 술책에 가깝다. 우리는 개인의 소비 행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소비 행위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또 한편으로는 미덕을 과시할 수 있는 아주 현대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의 소비 선택은 거의 늘 사소한 요인에 불과하며 오히려 더 중요한 요인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p140)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선택적 소비와 웰니스 추구는 둘 다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의 근원에는 신자유주의 정신에 의해 다시금 보장된 기본적인 약속이 깔려 있다. 바로 소비자가 정치적 참여 행위 대신 소비 행위를 통해 정치적인 성향은 물론 미덕까지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는 약속이다.(p284)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세상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두드러지게 배출하는 상위 10퍼센트가 탄소배출량을 유럽연합 평균 수준으로만 낮춰도 전 세계 탄소배출량은 35퍼센트나 떨어진다. 개인이 식단을 바꾸는 정도로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책을 바꾼다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유기농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진정으로 염원하는 목표가 기후를 구제하는 일이라면 투표가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는 도덕적 증폭기와 같기 때문이다.(p282)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예언된 12가지 재난 중 가장 큰 재난은 ‘시스템의 붕괴‘일 것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기후재난을 불러왔고, 이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신자유주의가 이로 인해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기후 리바이어던>의 내용을 토대로 설명한다.

기후변화는 두 가지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첫째로는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발생하며 그로 인해 일부 지역에 숨 쉴 틈조차 없는 영구적인 불경기가 닥칠 것이다. 둘째로는 전 세계적으로나 특정 정치조직 내에서나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가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음으로써 이미 터무니없는 수준인 소득 불평등이 점점 노골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p250)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신자유주의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면 다음 후계자는 무엇이 등장할까?(p288)... 바로 신자유주의다. 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신자유주의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오로지 자본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는 세계 상태가 도달할 것이다. 강박에 사로잡힌 신자유주의는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피해와 퇴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겠지만 권위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이런 존재가 바로 ‘기후 리바이어던 Climate Leviathan‘이다.(p289)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요약하면,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저자는 현재까지 지구온난화 현상을 바탕으로 12가지 재난과 함께 암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제시한다. 저자의 글에 따르면 이러한 미래에서 우리가 벗어날 길은 거의 없어 보인다. 조금 정도를 약화시키거나 시기를 늦추는 정도일뿐. 더욱 처참한 것은 이러한 미래의 끝에 현재의 불평등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질서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먼저, 현재 상황이 위기이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구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로 20세기 신생 독립국들은 다시는 짓밟히지 않기 위해 산업화의 길을 선택했다.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아직도 개발도상국인 상태에서 전 인류에게 이러한 방향으로 가도록 이정표를 제시한 서구문명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탄소배출량이 절대 다수인 중국(94억 6,700만 t)과 인도(22억 7,700만 t)을 근거로 미국(51억 1,800만 t)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내세워 문제 해결에 중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하지만, 저자는 이들 국가들의 산업발전 정도와 인구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최근 한 시기에 절대치만 비교한다.(사진) 제조업을 개발도상국으로 아웃소싱(outsourcing)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글로벌 공급 체인을 구축한 현 체제에서 3.3억의 미국이 13.9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13.5억이 인구를 가진 인도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1인당 탄소배출량이 압도적인 미국은 뒤로 물러서도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미국 예외주의‘에 불과하다.

세상에 초강대국이 미국 하나였던 시절에는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저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7년에 미국은 세계 탄소배출량의 15퍼세트만을 차지하며 미국 국경을 넘어서면 기후부인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오로지 미국 공화당이나 공화당의 뒤를 봐주는 석유 회사에게만 돌리는 것은 미국 중심주의적인 생각에 가깝다(p226)... 화석연료 사용에 기업이 미치는 영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단기적인 이익을 좇고 기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전 세계 노동자 및 소비자의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p22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또한, 개인의 소비생활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저자의 말 속에서 개인의 작은 변화로는 탄소배출의 결과인 12재난 시나리오를 피할 수 없다라는 운명론적인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소비 대신 생산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책임을 돌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큰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저자의 입장처럼 공동책임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는 기후재난의 끝을 ‘신자유주의 질서의 공고화‘로 바라보는데, 신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자유시장주의의 무한경쟁의 결과로 빚어진 기후재난에 대해 왜 사회주의/공산주의 방식의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가. 우리는 책임을 배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시장의 규칙인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기후 재난이라는 현실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맞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더 많은 수익을 거둔 국가에서 보다 책임있는 비전과 부담을 선언했을 때 그때가 탈(脫)기후재난(Exodus)의 원년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변화가 투표와 같은 정치 행동과 함께 이루어졌을 때가 바로 < 대학 大學>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며 <2050 거주불능 지구>의 리뷰를 갈무리한다.

ps.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코로나 19 재난 이후 선진국으로 제조업이 회귀한 후에 판단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향후 선진국의 제조업이 활성화되는 시기에 환경 문제가 수면 아래로 내려앉는다면, 기후변화 문제는 정치적 이슈라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ookholic 2020-04-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 온난화, 돌이키기엔 이젠 늦었겠죠? ㅠㅠ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이걸 고민해야겠죠?

겨울호랑이 2020-04-12 23:32   좋아요 0 | URL
지구온난화라는 문제가 수 십년동안 쌓였던 문제이니민큼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우리의 작은 실천부터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제3 신분이란 무엇인가
E.J. 시에예스 지음, 박인수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6,900원 → 6,210원(10%할인) / 마일리지 340원(5% 적립)
2020년 04월 11일에 저장
구판절판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40,000원 → 36,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0원(5% 적립)
2020년 04월 11일에 저장
품절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8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1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0년 04월 11일에 저장

선거는 민주적인가-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폴리테이아 총서 2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1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0년 04월 11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민주정 및 과두정과 병행해(para) 이른바 '혼합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그것이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말해보자.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들 간의 구분을 파악해야만 하고, 그런 다음에 이것들 각각으로부터 징표(sumbolon)를 취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조합해야만 하기 (suntheteon) 때문이다....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를테면 관직자를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은 민주정적이지만, 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것은 과두정적으로 생각된다(dokein)는 것이다. 또 재산 평가 기준에 따라 선출하지 않는 것은 민주정적이지만, 재산 평가 기준에 따라 선출하는 것은 과두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각각으로부터 하나의 것을 취하는 것은, 즉 과두정으로부터는 관직자를 선출하는 것을 치하고, 민주정으로부터는 재산 평가 기준에 따르지 않고 관직자를 선출하는 것을 취하는 것은 귀족정과 '혼합정'의 특징인 것이다.(제4권 1294a30 ~ 1294b 14) <정치학 Politika>,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 ~ BC 323) 中


 수많은 자료들은 추첨을 민주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추첨이 바로 민주주의적 선출 방법으로 묘사된 반면, 선거는 다소 과두정치나 귀족주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민주적 제도와 과두적 제도를 종합한다면 한쪽만의 특징을 가진 정체보다 더 나은 헌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p45)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선거는 민주적인가 The Principles of Representative Government>에서 버나드 마넹(Bernard Manin, 1951 ~ )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인 선거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선거는 민주적인 제도인가? 저자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선거가 아닌 추첨에 의해 행정관이 지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상당수의 주요 권력을 민회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특정한 기능은 선출된 행정관이 수행했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민회가 수행하지 않은 대부분의 업무가 추첨을 통해 선발된 시민들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이다.(p23)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추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고대 아테네에서의 추첨은 운(運)에만 의존한 제도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후보자의 자가검열과 함께 심사단의 심사를 통과한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한 추첨이기에 무자격자가 추첨에 뽑힐 가능성은 낮았다. 반면, 선발은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은 추첨 후 사회갈등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좋은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추첨 제도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은, 행정관으로 선출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름만이 추첨 기계 kleroteria에 넣어졌다는 사실이다. 30세 이상의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추첨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후보로 지원한 사람에 한해서만 추첨이 이루어졌다.(p28)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추첨의 두 가지 성격은 민주정에서 필수적이다. 추첨은 행정관으로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지도 또 불명예를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운에 따라 자신도 공평하게 선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추첨은 뽑힌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방지한다.(p98)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이에 반해 선거는 추첨제에서는 없는 두 가지 단점을 갖는다. 하나는 후보의 교체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선거로 인한 분열(사회 갈등)이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행해지지만, 이것이 반드시 대표자의 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같은 후보가 계속 대표로 선임될 수 있으며, 선거과정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사회 균열을 낳게 된다는 점에서 최선의 제도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제도로 인식된 것은 대의제(代議制)의 도입 결과다. 복잡해진 사회구조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은 이러한 결정의 배경이 된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교체의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근본적인 원칙이 추첨에 의한 선발을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만들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관직에 올라가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하는 순서는 운에 맡겨졌을 것이다. (p49)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선거는 언제나 유권자들 사이의 분할과 변별(differentiation)이라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 선거의 목적은 한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드시 분리하는 것이다. 게다가, 개인들은 적수가 있고, 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인식할 때, 보다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화합하게 된다. 따라서 후보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적을 정의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차별성도 제시해야 한다.(p269)... 하나의 균열이 지속적인 동시에 특별히 두드러진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선거 이전에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균열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지식에 기초해서 차별적인 원칙들을 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치인이 제시하는 선택의 항목은 이미 존재하는 균열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정당 민주주의의 핵심적 역학이다.(p270)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근대사회의 변화에 따라 도입된 선거제도는 같은 시기 발달하게 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경제력'이 당락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가 되었고, 이는 조직화된 정당(政黨)을 탄생시키게 된다. 또한, 의회 내에서의 목소리가 아닌 의회 바깥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중매체의 등장은 선거에서의 균열을 메우기도 때로는 더 크게 벌리기도 하면서 현대 선거제도의 복잡성을 증대시켰다.


  대중정당이 대의 정부를 지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 정부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표의 두드러진 특성은 더 이상 지역적 지위와 사회적 유명세가 아니라 행동주의와 조직 기술이었다. 투표자는 이를 근거로 대표를 선출하지 않지만, 정당이 내세운 후보에게 투표함으로써, 유권자는 이러한 범주가 사용되는 것에 동의하고 인준하는 것이다. 정당 민주주의는 활동가와 정당 관료의 통치인 것이다. 정당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한다. 이것은 선거 결과의 안정성이라는 두드러진 현상에 의해 증명된다.(p255)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대중매체는 특정한 개인적 특성에 유리하다. 즉 성공적인 후보들은 지역 명사가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한 의사소통 기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미디어적 인물 media figure"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대의 정부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 유형의 변화이다. 의사소통에 능숙한 새로운 엘리트들이 정치활동가와 정당 관료를 대체했다.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는 이른바 미디어 전문가의 통치인 것이다.(p267)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저자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통해 선거가 민주주의 제도라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에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가 과연 민의를 대표하는 제도인가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비판한다.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는 선거가 시민(demos)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엘리트를 선출하는 제도임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점에서 선거는 민주적인 제도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선거의 비(非)민주적인 면을 보완할 요소(선거비용 규제, 재임 방지 등)등을 통해 민주적으로 실행될 수 있음도 함께 밝힌다.


 선거의 두 가지 측면(귀족주의적인 측면과 민주주의적인 측면) 모두 객관적 진실이고, 둘 다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똑같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여러 요소들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물인 혼합 정체와는 달리, 인민에 의한 선거는 그 구성 부문들로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과정이다. 그 두 가지 속성은 너무나 단단하게 짜여져 있어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p195) <선거는 민주적인가> 中


[그림] 카이사르 암살(출처 : https://www.pinterest.pt/pin/552746554238535254/)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는 '시민의 무리(Demos, 민중)'가 '국가 지배권(Kratos)'을 갖는 체제를 가리킨다. '민(民)'이 나라의 주권과 정치권력의 '주인(主)'이 된다는 '민주(民主)'의 이념을 담는다는 뜻에서 '민주주의(democracy)'로 옮겨진다(p9).... '공화(共和)'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 뿌리를 둔다. 국가와 권력은 모두 인민(populus)에게 속하는 '공공의(publica)의 것'이며 특정 집단이나 계층, 지도자들이 사유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최고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특정 계급에게만 주어져 있었지만, 평민 계층을 대표하는 호민관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은 왕정과는 다른 민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p11) <두 정치 연설가의 생애> 中  


  우리는 민주정(民主政)과 공화정(共和政)을 자연스럽게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원로원 중심의 로마 공화정이 결코 민주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BC 384 ~ BC 322)가 지키려 했던 정체가 로마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공화정과 다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의 가치는 이들의 가치와도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위해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Quintus Servilius Caepio Brutus, BC 85 ~ BC 42)가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 ~ BC 44)를 죽이면서 지키려고 했던, 시라쿠사의 디온(Dion)이 독재자 디오니시오스 2세(Dionysius 2nd of Syracuse)를 추방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선거를 통해 체제를 유지한다. 이는 우리가 현재의 제도 안에서 가장 적극적인 의사표현이 선거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는 세부적으로 우리의 혼합정체 - 서로 다른 가치가 만난 '민주 공화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선거제도'. 민주 공화제라는 혼합 정체 - 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잡고 잘 나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제도와 법을 고쳐 나가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우리의 의사표현이 이루어지는 제도인 '선거'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선거제도의 이해 Electoral Systems: A Comparative Introduction>의 리뷰 편으로 미루도록 하고, 페이퍼를 이만 마무리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 신분이란 무엇인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3
E.J. 시에예스 지음, 박인수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es, 1748 ~ 1836)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tiers etat?>에서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대표자로 구성된 삼부회(Etats generaux)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된 제3신분의 문제에 주목한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는 시에예스가 주목하는 문제와 이에 대한 시에예스의 대답이며 문제해결 방안이다.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 모든 것.
제3신분은 전체 국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제3신분이 아닌 것은 모두 전체 국민으로 간주될 수 없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p24)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2. 정치적으로 제3신분은 현재까지 무엇이었는가 - 무(無)
제3신분은 현재까지 삼부회에서 진정한 대표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제3신분의 정치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p34)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3. 제3신분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 그 무엇이 되는 것.
제3신분의 대표자는 진정 제3신분에 속하는 시민 중에서만 선출될 것.(p40)... 제3신분 대표자의 수가 두 특권 신분 대표자의 수와 동일할 것.(p48)... 삼부회에서는 신분별이 아니라 개인별로 투표할 것.(p54)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주권으로부터 소외된 제3신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에예스는 이들을 대표하는 국민의회 설립을 제안한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제기되는 시민대표제는 공화정(共和政)이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 representative democracy)는 과연 시민주권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시에예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대표에 의한 지배체제만이 전제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길이라 대답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계몽주의시대의 낙관적인 기대 위에 놓여있다.

시민의 공통적 자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모든 것은 정치적 권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다. 인민의 입법 기관은 오직 일반 이익에 대해서만 필요한 것을 마련해줄 의무를 띌 수 있다. 그러나 법률과는 거의 무관한 단순한 구별에 의존하지 않고, 통상적인 규범에 따른 평가에 의해 특권적인 적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들은 적극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오만방자한 특권을 지속하는 한 그들은 유권자일 수도, 피선거권자일 수도 없다.(p133)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시에예스의 안에 따라 1789년 소지된 삼부회에서 국민의회가 구성된 이후 이제는 대의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버렸다.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체제는 국민주권주의를 보장하지만, 대의제도가 통치자를 피통치차의 판결에 종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실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과거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다중(多衆)의 목소리를 모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면, 보다 효과적인 대의제를 운영하기 위한 방안 마련은 오늘날 우리의 숙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애(厚愛) 2020-04-10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시고,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0-04-10 20:23   좋아요 0 | URL
후애님께서도 건강한 주말되세요!^^:) 감사합니다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김명수 지음, 도올 김용옥 서문 / 통나무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수는 과연 무슨 공동체를 꿈꾸었는가? 그것은 율법과 폭력에 근거한 기존 사회의 가치와 질서에 대립되는 공동체 질서를 지향한다. 예수의 대안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당시 폭력, 지배, 권위, 강압, 착취, 성차별에 근거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가치체계와 정면으로 마주서있다. 예수는 사랑, 화해, 평등, 섬김, 봉사, 모성에 근거한 타자(식민지 민중) 중심적 대안 공동체를 추구했다.(p90)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中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에서 저자 김명수는 역사 속의 예수와 예수 공동체를 민중신학(民衆神學)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민중신학을 통해 예수와 소외받은 계층인 민중과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주변부에서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예수.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예수의 모습 - 부활한 메시아 - 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인식 위에 '동양인 예수'의 사상을 제시한다. 


 예수의 수난과 처형은 갈릴리 민중의 고난에 대한 집단적 표상이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수난과 처형에서 바로 민중의 운명을 보고 있다. 민중의 운명에서 예수의 수난이 현재화되고 있음을 본다. 민중신학은 지금까지 신학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민중을 신학의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역사의 예수를 로마 식민지 민중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종말론적인 민중해방의 전통에서 재해석하고 있다.(p70)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中


  민중신학에서의 예수과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면, 저자는 서양인 예수와의 헤어짐을 선택한다. 동야인 예수의 가르침과 공자사상, 노자사상, 동학사상, 불교사상 등 동양철학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안에서 재해석된 예수의 모습은 평등주의자, 평화주의자, 환경주의자, 페미니즘 사상가로, 급진적 혁명가의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는 새 형제자매를 발견하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새 어머니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보상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제도의 상징이다. 여기에는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대한 예수의 부정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예수가 생각했던 대안공동체의 탈 脫가부장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p86)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中


 저자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가 추구했던 가치가 당대의 가치관의 부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당시 유대지역이 헬레니즘 질서 안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플라톤(Platon, BC 428 ? ~ BC 348)의 이성(理性 logos)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사회질서 부정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변질과도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이었는가? 로고스 logos에 의해서 뮈토스 mytos가 통제되는 사회였다. 이러한 플라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저자는 플라톤과 필로로 이어지는 희랍사의 보편적 개념인 로고스를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p110)... 요한복음 저자는 그들이 믿고 따르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 로고스의 화신 化身이라고 선포하였다.(p111)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中


 저자는 <요한복음>을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반(反)예수의 가르침' 문헌으로 바라본다. 예수와 그의 공동체가 추구했던 가치가 이러한 로고스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지혜' 대신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역사 속의 나자렛 예수와 그리스도교의 예수가 다른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초대 교회에서의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으로 바라본다. 이런 해석은 새롭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의문을 갖게 된다. 저자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비판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기원이 헤브라이즘(Hebraism) 전통에 있는 것으로 본다. 


 예수 사후 20년 내에 다양하게 발달했던 여러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론은 모두 유대교의 지혜사상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요한복음 이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소피아(sophia)와 연결시키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이 지혜(소피아)를 말씀(로고스 logos)으로 대체한 것은 당시의 기독교 공동체가 가부장적 구조로 변모하고 있던 맥락과 일치한다. 즉 소피아가 억압되는 과정은 곧 교회 안에 성차별주의 sexism가 성장하는 과정과 정비례한다.(p217)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 中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교회 내의 여성성 억압이 헬레니즘의 수용이라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면, 헤브라이즘 전통은 성평등적인가? 지혜문학 작품 중 하나인 <구약성경> <잠언>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창녀는 깊은 구렁이고 낯선 여자는 좁은 우물이다. 그런 여자도 강도처럼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들 사이에 배신자를 늘린다.(잠언 23 : 27)


 지혜문학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신명기계 역사관, 역대기계 역사관에서도 성평등 관점의 전통은 발견하기 어렵다. 성평등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공통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헬레니즘의 수용이 교회 내 여성성을 억압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요한 복음> 의 <로고스 찬가>를 위와 같은 관점에서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우선, <로고스 찬가>가 당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에 반박하고 교리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 의해 씌여졌다는 일반적 이론을 생각해보더라도 이는 '말씀 logos'에 의한 '지혜 sophia' 살해라는 일종의 '여신(女神)살해'관점에서 바라본 한정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지혜문학(智慧文學)이 고대 중동 지역에 공통된 문학형태임을 생각해본다면, <요한복음>은 지혜 문학로 대표되는 오리엔트 문화에 대한 헬레니즘 문화 침공으로 바라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 ~ BC 323)이 다리우스 3세(Darius III, BC380 ~ BC 330)의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한 첫 번째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Battle of the Granicus)를 여기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림] 그라니코스 전투 (출처 : 위키백과)


 또한,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 자신이 많은 곳에서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미 공동체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있기에, 인간 '아버지'가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가부장제의 질서를 부정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아버지 = 하느님'을 가정했다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권한에 신(神)권을 부여한 것으로 강력한 체제 옹호자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  물론, 지금 지적한 부분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의 짧은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많으리라 생각이 들면서도, 저자의 주장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공부해나가기로 하고...


  이제 마무리하자. <역사의 예수와 동양사상>은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서양인 예수'가 아닌 '동양인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그리고, 동양사상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 오늘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라 생각된다. 비록 저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 서양 종교로 인식된 기독교 사상 속에서 동양철학과의 접점을 발견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알기쉽게 제시했다는 점을 배운 독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