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자치통감> 294권을 마치며 간략하게나마 이를 정리한다. 전국시대부터 5대 10국까지의 1300여년 시기동안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끊임없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에는 일관되는 사람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평론가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사가가 처한 현실이 과거와 같지 않기에 다른 인과의 끈으로 구슬을 엮고, 목걸이를 만든다는 교훈. 


 역사를 과거에 대한 현재의 재해석으로 바라보고,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E.H. 카의 저서 속에서 이미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번 <자치통감>을 읽으며 우리가 만나는 과거가 하나의 과거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독자가 살아가는 현대사가 아닌 다음에야 저자의 사관(史觀)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통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양자는 한비자를 군자로 보고 있어서 그가 뜻을 가지고 있으면 되었지 받아들여지고 아니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광은 한(韓)나라 사람으로 진(秦)을 위해 정책을 제시한 점을 몹시 나쁘게 보고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한비자와 몽념에 대한 평가에서 사마광은 한비자는 충성심이 없다고 비판하고, 몽념은 의롭다고 칭찬한데 대해 양자는 한비자는 능력있는 사람이고, 몽념은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평론하여 각기 보는 시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마광이 역사를 보는 시각은 도덕적 시각, 특히 유가적(儒家的)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375/957


 <자치통감>의 저술은 사마광이 역사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고도 정치적 목표와 황제를 교육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p407)...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려는 이유는 철저하게 '제왕을 위한 책'을 만들려는 것이다. 제왕은 시간이 없어 긴 책을 읽을 수가 없으니 제왕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는데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싣겠다는 것이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410/957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p50)



 여기에 더해 독자가 처한 현실 역시 유동적이기에 '역사적 현실 - 해석된 과거 - 읽는 현재'라는 3개의 역사축(軸)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또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자치통감> 마지막 글을 읽으며, 어제 대통령 인수위의 소상공인 손실보상 공약 파기 뉴스가 떠오른다. 이와함께, 파기된 손실보상을 조금 일찍 시작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혼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함께 느낀다...


 회남에 기근이 들어서 황상이 쌀을 그들에게 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백성들은 가난하여 아마도 갚을 수 없을까 걱적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백성은 나의 자식인데 어찌 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풀어주지 않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책임 지우려는데 있겠는가? _ 사마광, <자치통감 294>, 中

 관련기사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40849.html


PS. 역사서를 거치지 않고 현실의 역사를 체감하는 상황이 우리가 진실을 접한다는 사실을 보장할 수 있을까. 사실의 왜곡과 편향된 사실의 조명 그리고 이를 천명(天命)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기제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깝다'가 '진실과 맞닿아 있다'와는 다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2-04-29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작업을 끝내신건가요^^ PS에 덧붙인 글까지 정말 공감하는 글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이전 글까지 짬짬이 읽어볼 참이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29 09: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일단 읽긴 했는데, 읽고 나니 큰 줄기와 부족함만 남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기전체 역사서를 다시 들여다 보며 조금은 그 줄기에 살을 붙여볼까 싶습니다. 거리의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도덕, 정치를 말하다- 보수와 진보의 뿌리는 무엇인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손대오 옮김 / 김영사 / 2010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2년 04월 29일에 저장

이기는 프레임- 진보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방법
조지 레이코프.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6년 2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2년 04월 29일에 저장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인지 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2년 04월 29일에 저장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조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지음, 나익주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원(1%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2년 04월 29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수는 집단]과 [기관은 사람]이라는 이 두 개념적 은유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많은 경우 법으로도 인정받았다. 로마법은 특정한 상업 기관과 종교 기관들을 목표, 자원, 기능, 책임, 특권 등 인간적 속성을 갖는 기관으로 인정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기관에 은유적으로 이런 인간적 속성을 부여한다. _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p219/446


 기업(企業)은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인격(人格)을 부여받고 회사법에 따라 법인(法人)으로 등록되고, 세금 납부 등 경제활동을 한다. 세금을 내지만 투표권을 가지지 못하는 정치적인 인격은 부여받지 못한 법인은 투표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공평하게 보이지만, 이들은 '후원'이라는 행사를 통해 선거에 자신의 이익을 '공약(公約)'으로 보장받고, 정치인을 키울 수 있으며, 여론을 형성할 막대한 힘을 갖는다. 우리의 '소신투표'가 잘 짜여진 프레임의 '추천권'에 의해 결정되는 의도적인 결과로 흐르는 것이 일상화된 오늘날 일론 머스크(Elon Reeve Musk, 1971 ~ ) 의 트위터 인수가 단순한 기업 인수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때, 일반인들에게 유용한 경제/경영 정보를 제공하던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어느 순간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삼성 경영 승계 도구로 전락했던 것처럼, 머스크 인수 후 비상장 전환 예정인 트위터가 극우들의 놀이터나 암호화폐 교환소로 전락하지 않길 바라게 된다...


 관련기사 :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61116348



 비록 기업이 여론조사나 투표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 주주들이 자유로이 발언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업은 '사람'으로서 자유로이 발언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은유, 즉 [발언은 돈(Speech as Money)]이 선거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후보자(진짜 사람)가 아니라 기업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을 지지하면서 말이다. 이는 '시민연합'을 향한 하나의 움직임이었다(p226).... 기업은 광범위한 측면에서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_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p233/44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6-09 0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09 05:38   좋아요 0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
 

《서경(書經)》에 말하였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지음이 없으면 왕도(王道)는 호호탕탕하다.’ 또 말하였습니다.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 그 덕을 품는다.’ 세종은 이에 가깝습니다.’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물었습니다. ‘오대(五代)의 제왕 가운데 당의 장종(莊宗)과 주(周)의 세종(世宗)은 모두가 영웅적인 무력을 가졌다고 칭찬하는데, 두 주군 가운데 누가 현명합니까?’ 신이 이에 응답하였습니다.
‘무릇 천자가 만국을 통치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복종하지 않는 것을 토벌하고, 그 중에 미약한 자를 어루만져주며 그 호령을 시행하며 그 법도를 하나로 하고, 신의(信義)를 두텁게 밝히며 억조나 되는 백성을 아울러 아끼는 것이다.’

왕박이 상소하였다. "예(禮)는 형체를 검사하는 것이고,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데, 형체는 밖에서 순리에 맡도록 하는 것이고, 마음은 안에서 평화롭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도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와 악이 위에서 닦아지면 만국은 아래에서 교화되니, 성인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그 정치는 엄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진 것은 이 도를 사용한 것입니다. 무릇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고 소리는 물건에서 이루어지는데, 물건의 소리가 이미 이루어지면 다시 능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황제(黃帝)는 9촌(寸)이 되는 관(管, 관악기)을 불다가 황종(黃鐘)의 정성(正聲)을 찾아냈는데, 이를 반으로 하면 청성(淸聲)이 나고, 이를 배로 하면 원성(援聲)이 되며, 셋으로 나누어서 이것을 더하거나 덜어내어 12율(律)을 낳습니다. 12율이 돌아서 궁(宮)이 되어 7조(調)를 낳아서 1균(均)을 만듭니다. 무릇 12균·84조(調)가 되면 다 갖추어진 것입니다. 진(秦)이 만나서 학문을 없애는 일을 만나니 역대로 음악을 다루는 사람을 채용하는 일이 아주 적었습니다.

회남에 기근이 들어서 황상이 쌀을 그들에게 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백성들은 가난하여 아마도 갚을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백성은 나의 자식인데 어찌 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풀어주지 않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책임 지우려는데 있겠는가?"

종모는 기공(紀公) 이종선(李從善)과 함께 사절의 책임을 받들고 주에 갔었음으로 서로 두텁게 잘 알아서 당주에게 말하였다. "이종가는 덕이 가볍고 뜻이 나약하며 또 석씨(釋氏, 석가모니)를 지독하게 믿으니 인주(人主)의 재질이 아닙니다. 이종선은 과감하고 신중하니 의당 후사(後嗣)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당주는 이로 말미암아서 화가 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 보도를 쭉 이어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저널리스트로서 우리가 사건을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것, 명칭의 문제부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죠.

국가에 대한 실망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표적인 레토릭이 ‘이게 나라냐’였지요. 이것은 국정개입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헌법수호라는 프레임으로 넘어갔습니다. 동시에 ‘이게 나라냐’와 ‘헌법수호’라는 프레임 속에서 ‘세월호 7시간’이라는 프레임이 등장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 언론, 헌재(헌법재판소), 특검 등 네 집단을 한번에 모두 연결하는 아주 강력한 프레임이었죠. 아시다시피 ‘세월호 7시간’이 탄핵 사유로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인용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네 주체에게 가장 큰 압력으로 작용했던 프레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은 여러 세력 간에 일어난 프레임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언론, 특히 방송뉴스의 경우 각 방송마다 보도의 논조나 방향성에서 스펙트럼이 다양했죠.

대통령 차량이 이동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좋아요. 그러면 그때는 다른 얘기를 해도 되거든요. 예를 들어 이동하는 장면은 자료화면처럼 보여주면서 오늘 일정이라든가 국정운영에 대해 대선 전에 밝혔던 대통령의 계획을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식의 중요한 팩트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앵커가 기자한테 ‘저 경로를 택한 이유가 뭐냐’라고 물어보면 ‘직선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경호실에서 여러차례 검증된 도로를 택하는 거다, 신호 조작을 해서 몇분 만에 도착한다’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요.

대형 사고나 큰 이벤트가 생기면, 항상 취재윤리를 염두에 두고 취재를 해야 한다고요. 당시 용어가 없었을 뿐이지 ‘기레기’라고 비난받을 상황이었던 건 마찬가지죠. 또 이런 것도 있어요. 기레기라고 하면 자사의 이익, 혹은 권력이나 광고주를 위해 기사를 쓰는 거죠. 독자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요.

독자들이 봤을 때 뭔가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상관없이 바로 ‘기레기’라는 소리가 나와요. 기레기라는 단어가 한국 언론 전체를 상징하는, 굉장히 보편적인 용어가 된 거예요.

저는 출입처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사안이 불거지면 사실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는데, 우리 출입처 시스템에서는 정당·정부부처에서 보도자료나 성명이 나오면 일단 무조건 써요. 거기에 대한 비판이나 반박이 있으면 그걸 또 쓰고요. 쓰고, 또 쓰고, 나중에 ‘공방’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내버려요.

말씀하신 것처럼 대선과 얽힌 이해관계가 각 언론사와 기자에게 있는 거예요. 자기가 출입하는 정당, 부처가 잘되어야 자기가 잘되거든요.

그리고 정치부는 정보 보고가 무척 중요해요. ‘유능한 기자’는 ‘정보 보고를 잘하는 기자’라고 할 정도로, 기삿감이 되든 안 되든 데스크에 보고를 많이 할수록 좋은 점수를 받아요. 청와대·여당의 정보를 윗선에 보고하는 게 기자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는 거죠. 공영방송사에서는 고위 간부들이 보고를 받지만 일반 신문사나 민영언론사에서는 사주가 보거든요. 그래서 KBS·MBC보다 SBS 기자들이 훨씬 정보 보고도 많이 하고 잘해요. 조·중·동의 정보 보고 능력은 대단하죠. 기자들이 고급 정보에 가장 깊숙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청탁금지법을 강화할 필요는 있어요. 선거법을 위반하면 안 되니까 선거 때와 정권 초기에 몸을 사리고 있지만 기업 간부들의 접대는 아직 있고, 시간이 좀더 지나면 슬슬 구태가 다시 드러날 거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신문 전체를 봤단 말이에요. 지금은 핸드폰으로 기사 하나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전체 논조를 보려면 종이신문을 다 넘겨봐야 해요. 그러면 A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고 B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고, 문재인은 이쪽에서 다루고 안희정이나 안철수는 저쪽 면에서 다루는 게 다 보이거든요. 그런데 인터넷에 특정 기사만 딱 올라오면 ‘어, 문재인 비판 기사인데 한겨레네. 이놈들 옛날 버릇 못 고치고 있어’라는 식으로 흘러가기 쉬워요.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기자들도 어느 순간 언론 기득권 체제에 순화되고 동화된 측면이 있어요. 출입처 체제에 굉장히 안주했잖아요.

‘우리 사회에 리영희 같은 기자가 없다, 젊은 기자들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기자가 없다’고 하죠. 손석희 씨는 조율을 굉장히 잘하고 공정함과 중립의 표상이기는 하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언론과 사회가 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는 분은 아니잖아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난 건가요?

요즘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등 진보언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커졌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한겨레에 집중되는 감이 있고요. 문제는 이 비판이 보수진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같은 진영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독자·수용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