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는 "시간 개념을 관장하는 인간의 뇌를 비롯하여 모든 시계가 똑같이 느려진다면, 시간 자체가 느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계로 재지 않고서는 시간의 지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을 측정하는 다양한 방법이며 그 방법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과 관련된다. 시간을 시공간으로 한정시키면 진짜 시간은 없어진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3개의 공간 차원과 시간으로 구성된 4차원 우주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가 미리 배열된 것처럼 ‘미래’도 한 치 틀림없이 배열되어 있는 우주에 자유의지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웜홀은 블랙홀과 비슷한 가상의 왜곡 공간으로, 웜홀의 한쪽 입구로 들어가면 무한하게 휘어지는 짧은 시공간의 터널을 통과해 반대쪽 출구로 나와 우주의 다른 공간에 도착할 수 있다(농구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튜브를 상상하면 된다. 공의 표면을 따라 먼 길을 돌아가서 반대쪽 지점에 도착하지 않고 한가운데로 뚫린 직선 터널을 지나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밀접하게 얽혀 있으므로, 킵 손은 공간을 뛰어넘으면 동시에 시간도 뛰어넘을 수 있으며 따라서 웜홀을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버나딘의 틀을 받아들인다면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관계적’ 속성이라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물(혹은 한 집의 방들) 사이의 거리가 3미터라고 하자. 시간 간격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려면 두 사건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도 두 사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버나딘은 공간은 시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시간을 방문한다는 것은 다른 방(다른 영역의 공간)을 방문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스티븐 호킹과 레너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w는 우주 인플레이션을 물이 끓고 있는 큰 단지에 비유했다. 단지 안에서는 기포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팽창한다. 대부분의 공기 방울은 빠르게 팽창하다가 터지고 말지만, 개중에는 초기의 팽창 이후에 안정된 상태로 수면까지 올라오는 공기 방울도 있다. 우리의 우주는 이렇게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공기 방울과 비슷하다. 물론 수면까지 가기 전에 팽창하다가 터지는 방울이 대다수이지만, 우리 우주와 같이 성공하는 방울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 인플레이션은 우리의 우주만이 아니라 무한히 먼 과거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우주를 만들어왔으며,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낼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은 자체적으로, 에버렛의 양자 현상에 대한 ‘다중 세계’ 해석과는 전혀 별개로, 우리가 무한한 다중우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끈 이론은 물질과 에너지를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가 진동하는 아주 작은 끈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끈은 서로 다른 진동수로 진동함으로써 우리가 양성자나 중성자라고 부르는 종류의 입자들을 만들어낸다. 끈 이론이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끈 이론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통합, 즉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의 통일이라는, 이제까지 물리학에서 성취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끈 이론 연구에 몰두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그들 중 다수가 끈 이론을 기술하는 방정식이 우리의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암시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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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표면이야말로 진정한 기준틀이라는 사고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나중에 시간 여행의 본성에 대해 살펴볼 때도 문제가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똑같다. 절대적인 값이다. 그것 참 신기하다.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밝힘으로써 위대한 도약을 이루어냈다. 그는 빛의 속도(거리의 측정치를 시간의 측정치로 나눈 값)가 불변량이 되려면 무언가가 탄력 있게 변해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통찰이었다. 즉, 시간은 상대적이다(공간도 마찬가지지만, 경우가 다르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운동, 혹은 속도가 시간의 측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과 가속 또한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진정한 시간true time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래리의 시계와 배리의 시계는 똑같이 정당하다. 래리의 시계를 기준으로 보면 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리의 시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시계를 우선시한다. 당연한 얘기다. 배리의 시계는 지구에 남아 있던 수많은 다른 시계와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래리의 시계도, 배리의 시계도 절대적인 시간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이 일어나려면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야기 말미에 가서는 그중 하나를 내던져 버린다. 하지만 두 개의 시계가 없이는 시간 여행이 존재할 수 없다. 즉 쌍둥이 사례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시간들 여행travelling in times’이라고 불러야 한다. 시간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지칭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시간을 말해줄 한 시계를 지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모든 상대론적 시간 여행은 이렇게 한 시계의 측정값을 다른 시계의 측정값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상대성이론은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속도만 달라질 수 있을 뿐 시간은 언제나 앞쪽만 향한다. 여기서는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론적 시간 여행은 시간 이주time-emigration에 차라리 더 가깝다.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관점은 대략 두 가지 큰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실체적substantival 관점과 관계적relational 관점이다. 실체적 관점, 혹은 ‘절대적absolute’ 관점에서는 시간을 우주가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집이라 여긴다. 따라서 시간은 실체적이며, 고유하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우주의 작동과는 독립적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세상에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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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07-04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수 없다면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걸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겨울호랑이 2022-07-05 04:52   좋아요 1 | URL
네, 저자가 밝히는 시간여행의 비밀을 들으면서 막연하게 우리가 시간여행에 대해 가져온 생각들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말 그대로 회의주의자의 쓴소리같은 기사였습니다 ^^:)
 
중세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역사도서관 교양 18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김위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이른바 '상업혁명'은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를 바꿔 놓은 일종의 사회혁명이기도 했다. 사회 변화와 더불어 한 계층이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Hansa 同盟)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 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48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중세 유럽의 상인들 Tre Storie Extra Vaganti >는 상인(商人, merchant)을 주제로 한 짧은 대중역사서다. 14세기 초 대상인의 등장 시기와 이후 17세기와 18세기 화폐(貨幣)경제에서 상인의 움직임이 가져온 변화를 통해 독자들은 당시 생생한 경제활동을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시를 주름잡은 상인은 대상인(grandi mercanti), 다시 말해 보통 상인과는 달리 대체로 국제 교역에 종사하며 상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및 금융업(환전과 은행 업무)을 겸하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경제 조직체가 육지 무역쪽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른바 '콤파니아'라고 불렸다. 콤파니아의 탄탄한 기반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족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vecchio)이 판단 ·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여기에 복종해야 했고 이들에게는 '불평'(mugugno)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은 콤파니아에서 일할 사람을 선별하고 콤파니아의 모든 자본을 관리하였다. 이것도 새로 생겨난 요소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50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바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피렌체의 중심 가문의 바르디(Bardi) 가문 이야기다. 중세 말기 봉건제와 교회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이들의 공백을 대신하는 대상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현대 영어 company에 해당하는 콤파니아(Compagnia)가 장원을 대신하여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왕과 귀족들에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여해 주고, 대신 사치품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보던 르네상스 거상(巨商)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30년대 초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피렌체의 경제는 말 그대로 완전히 전복되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p60)... 여러 콤파니아가 파산하자 그 여파를 받아 2차, 3차 산업도 일거에 붕괴되었다. 보통, 콤파니아는 상업 활동 이외에도 은행업과 수공업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콤파니아가 도산하자 신용이 삽시간에 치명적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와 관려된 모든 영역이 피해를 입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1

이들의 투자가 항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한 왕에게 자금을 빌려 준 경우 그들이 가진 채권은 휴지조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푸거(Fugger)가문처럼 바르디 가문은 잉글랜드 군주에게 투자를 하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 군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에 더해 피렌체 전체 경기가 수축 국면에 진입하면서 많은 콤파니아들이 무너지는 등 바르디 가문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디 가문의 처세와 그들의 생존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세 콤파니아는 좋은 운수를 타고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앞에서 설명한 1330년대와 1340년대 같은 최악의 시기에, 그리고 바르디 가문의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는 그런 때에 창립되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가문 특유의 방식이었던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르디 가문 사람 몇몇이 이미 피렌체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하면 입김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피에로데이 바르디의 주도로 콤파니아의 일부 회원은 피렌체의 정부 체제를 전복하려고 쿠데타를 꾀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6

교환 중심의 시장 경제라면 바르디 가문은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바르디 가문의 모습은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대처를 잘 보여준다. 막강한 경제력을 활용해서 '화폐위조'라는 중대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치력을 발휘해 독점권을 강화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근대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18세기 유럽 경제를 분석하며 자본주의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치폴라는 넌지시 자본주의의 기원은 이보다 이전 시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바르디 가문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법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였다. 베르니오 법령을 새로 제정한 후 피에로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정성 들여 작성한 법령에 의거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자들을 모두 응징함으로써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제거하였고, 그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약탈권을 독점하였다. 그 이상 극악무도해지기도 힘들 것이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72

특히 바르디 가문 출신의 세 사람이 확신했던두 가지 사실은, 첫째, 경찰의 손에 잡힐 확률은 거의 없다는 점, 둘째, 혹 잡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형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는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특권층에 속했고, 이 때문에 특별히 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실제로 이들은 법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96

다른 두 편의 이야기의 중심도 역시 상인들이다. 화폐의 품질을 조악하게 만들어 유통시켜 막대한 부을 축적하고 한 나라(오스만 투르크)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해상무역을 통해 더 큰 세력으로 커나간 상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14세기 이미 자본주의 형태를 갖춘 대상인들의 현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안의 담긴 이야기는 간략하지만 이야기들이 던지는 메세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현대 무기산업자본, 환율을 이용하여 경제소국에게 외환위기를 강요하는 투기자본의 모습과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대기업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발견할 수 있다. 불과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경제사 관련 서적을 우리가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도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 문제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세로 가야할 듯하다. 과연 중세 경제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세 유럽의 상인들>을 읽으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이후 다른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 정부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조악해질 대로 조악해질 악화 루이지노의 유통을 막아 낼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은화 부족 현상을 감내하던 터키 경제는 위조된 대량의 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더 이상 현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없었다. 생필품의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올랐고 빵조차 사 먹기가 힘들었다. 터키 제국에는 루이지노 화폐가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도 이 화폐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모두들 이 화폐가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13

상인은 점차 신분이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은 프랑스어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며 소매업을 하던 자나 신분 상승을 꿈도 꿀 수 없던 사람에게는 마르샹(marchand)이라는 이름표가 그대로 남았다. 그 외의 사람, 즉 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던 특권층을 위해 네고시앙(negocian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인간사에 흔히 일어나듯이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싸움, 적대감, 경쟁의식이 생기곤 한다. 어떤 네고시앙을 마르샹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자크 사바리는 다행히도 자신이 네고시앙이라 믿었고 수많은 네고시앙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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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대해 팽배한 증오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하자 전면적 반란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티롤, 이탈리아의 봉기 소식은 나폴레옹을 불안감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파괴하는 훨씬 더 중요한 과제에 집중했다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앞서 주목한 대로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프랑스와의 전쟁 전야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쓴 오스트리아는 재정적 도움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 250만 파운드 선불 지급을 비롯해 750만 파운드의 보조금에 대한 대가로 병력 40만을 동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런던은 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며, 영국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전쟁이 진행되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런던이 결정할 것이다.

사실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공격을 가능케 하도록 나폴레옹의 주의를 분산한다는 맥락에서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 담화에서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다 잃었다면 나는 전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멸에 우리가 기여하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패배는 덴마크가 한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음을 뜻하는데, 덴마크 농업의 성장은 해상 활동의 증대를 자극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에 덴마크가 결국 휘말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싶은 욕망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스웨덴 군주들은 1536년 이래로 덴마크와 공동의 왕위로 연결된 노르웨이를 획득할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1807년의 전반적 상황은 1800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승리를 거둬 발트해 연안까지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대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궁정의 신입자였지만 곧 왕위 배후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새로운 제2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조국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스웨덴의 동부 국경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에 알맞은 보상이라고 여기는 서쪽의 노르웨이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베르나도트의 확고한 결심이 1813~1814년의 6차 대불동맹전쟁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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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고래는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동물이다. 돌고래의 뇌는 인간보다 큰 데다, (인간은 뇌 용적이 평균 1200~1400㎤인데 비해 돌고래는 평균 1500~1700㎤이다.) 동물계에서 몸무게 대비 뇌의 크기가 가장 큰 동물 중 하나이다. 또한, 뇌 영역 중에서 의식적 사고와 추론 등 (사람의 경우 언어까지 포함하는) 고등사고 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인 신피질이 발달했다. 돌고래는 십여 마리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사회적 유대 관계를 강하게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한 가지 체액의 단편적인 측면이 어떻게 한 사람과 그의 행동에 그토록 다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성격이 여러 환경적(문화) 요인과 신체적(유전) 요인에 의해 다면적으로 형성된다고 가르치는 심리학적 연구와는 크게 상반된다.

혈액형이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확신에 차서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정보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증거라는 미명하에 이처럼 근거 없는 믿음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로서 우리는 이 같은 정보들을 검증하여 잘못된 점을 밝혀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 증거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그들이 근거 없는 주장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피가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 때문이지 혈액형 때문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토리노의 수의를 떠받들면서 진품 여부를 판정하지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 뒤로 가톨릭 교회는 토리노의 수의를 다른 성물과 똑같이 대접했다. 수의가 진품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리하게도 토리노의 수의의 가치와 중요성을 신자 개개인의 신앙심과 헌신에 떠넘겨 버렸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가톨릭 교회 지도부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토리노의 수의가 역사적 가공물이라고 인정하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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