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카(Edward Hallett Carr, 1892 ~ 1982)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 The Russian Revolution 1917 ~ 1929>을 통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농업 국가인 러시아의 공업화 과정과 여기에서 빚어진 갈등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선행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확립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전한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이런 토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은 경제적/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혁명이 곧바로 국제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가정하에서만 이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수적으로 미약한 한 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도입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의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으킨 혁명의 결과로 예상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은 혼성되고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다.(p273)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 1883)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2단계 혁명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렇지만, 1917년 당시 러시아는 농업국가였으며, 마르크스의 혁명 도식에서 벗어난 국가였다. 이는 온건파인 멘셰비키(Mensheviks)와 볼셰비키(Bolcheviks)가 대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멘셰비키가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 1870 ~ 1924)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제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쳐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해야 했다.


 소련의 산업, 특히 중공업은 비효율적인 고비용 생산 부문인 반면, 농민 노동을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는 농업은 상대적으로 저비용 생산 부문이었다. 자본이 최대 수익을 얻는 방법은 농업에 자본을 투자해서 수출용 잉여 농산물을 증대시켜 산업의 궁극적 발전을 위한 자본재를 비롯한 산업재 수입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자본이 부족하고 미숙련 노동 잉여가 넘처나는 소련 같은 나라에서 합리적인 경로는 자본집약적인 자본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닌 노동집약적인 단순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우선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p16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의 현실은 산업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인구의 다수가 농민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은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소련이 직면한 현실은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련 내부에서 빠른 산업화와 국제적인 혁명의 확산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 이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의 첫째 조건은 농민이 도시와 공장에 필요한 식량을 임금 수준에 견디기 힘든 부담을 주지 않는 가격으로 공급하고, 농민 시장을 위한 소비재 생산에 전용되는 산업 자원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p196)... 공공연하게 공언된 둘째 조건은 노동의 생산성을 임금보다 빠르게 증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산업 팽창에 필요한 재원을 일부나마 산업 이윤 자체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p198)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산업화된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촌은 저렴한 노동력과 식량을 꾸준히 제공할 수 있어야 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결과로 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선순환(善巡還)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농촌 생산력의 증대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경공업 보다 중공업의 발달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소련은 경제 권한의 집중과 반(反)시장주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중, 둘째 요소인 반 시장주의가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불,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p54)... 그런데 전시공산주의의 둘째 요소, 즉 '시장' 경제를 '자연' 경제로 대체한 것은 그런 기초가 전혀 없었다.(p5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통화는 또다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확실성과 경계의 분위기 속에서 곡물은 가장 안전한 가치 저장물이었다. 비축물이 있는 농민들로서는 이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p186)... 신경제정책이 토대를 두었던 믿음, 즉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농산물 인도와 시장의 자유 판매를 결합한 체계로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산산이 무너졌다.(p192)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소련의 반 시장주의 정책의 실패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1985)는 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Afterthoughts on Material Civilization and Capitalism>를 통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구분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소련 지도부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소련 경제는 시작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레닌이 "제국주의(imperialisme)"라고 부르는 것(또는 달리 말하면 20세기 초에 새로 탄생한 독점자본주의)과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병존이 그것이다. 나는 갤브레이스와 레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경제(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근 것 사이의 영역 차이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 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marche)의 영역이 있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p32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1, 교환의 세계 上> 中 


 국가는 언제나 계급 지배와 억압의 도구였다.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와 국가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었다. 레닌은 직접 만든 경구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란 없다.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면 국가란 없을 것이다."(p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시장경제는 인류 역사를 통해 꾸준히 존재해온 양식이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 1920년대의 소련 경제 정책을 결국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등을 추진하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이끌게 된 스탈린(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 1878 ~ 1953)은 국제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국가를 부정한 마르크스 - 레닌의 이론 대신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E.H. 카가 서술한 소련의 1920년대는 마무리 된다.


 그때까지 일국사회주의는 신경제정책의 연속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신경제정책 또한 국제 혁명의 암울한 전망에 등을 돌렸고, 러시아 농민과의 동맹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제 스탈린은 자급자족하는 러시아, 즉 근대화된 산업과 농업을 통해 변형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된 러시아라는 아주 다른 개념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현홍적인 장기적 전망이었고, 바야흐로 경제 상황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던 여러 변화와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그 주창자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자급자족의 조건으로서 중공업 장려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의 자원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도 함축했다.(p1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코민테른의 결정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었다. 이 결정을 외국 공산당에 강요할 수 있고 실제로도 강요했지만, 해당 국가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대가를 치렀다. 노동자들은 동떨어진 외국의 권력이 자의적이고 때로는 전혀 부적절한 지시를 내리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1920년대 말에 서구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수와 영향력이 쇠퇴하고 동조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p267)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몰두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p251)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저자는 E.H.카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를 통해 소련의 신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집단화는 토지 혁명을 완성했는데, 이 혁명은 1917년에 농민들이 지주 토지 강탈로 시작됐지만 오랜 경작 방식과 농민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남겨 높았다(p238)... 지난 12년 동안 농업은 여전히 경제 내에서 준 準 독립적인 고립지대로 남았고, 자체의 궤도를 따라 기능하면서 그 궤도를 변경하려는 외부의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이것이 신경제정책의 본질이었다.(p23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농민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변신과 국제 혁명의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농촌 - 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1920년대 소련의 경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소련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것이 1937년 이루어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러시아 혁명과 우리 역사의 거리는 지리상의 거리보다 짧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출처 : http://webzine.nuac.go.kr/tongil/sub.php?number=1779)


 이처럼 <러시아 혁명>은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 후 10여년에 걸친 소련의 경제사를 '도시 - 농촌'의 대립 관점에서 짧은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특히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독립운동 당시 고려인 이주 사건 외에도 1960년대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사의 모델을 제시하는 등 우리 역사에 미친 직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농촌의 억압을 통한 도시 발전과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소련 경제사 속에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최근 한계에 부딪힌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한계점 역시 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역사책을 읽는 이유라고 한다면, 비록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조금 넘겼지만,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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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4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에 반대하는 스탈린
이 레닌의 후계자가 된 것이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산주의 역사발전 이론에서 아직 공업화가
덜 된 러시아에서 PT혁명이 발생했다는 점도
넌센스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독일 정도 되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반대로
파시즘 국가가 되어 버렸으니.

푸틴 짜르 시절에 마치 다시 예전 제정 러시
아 시대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8-08-24 14: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물론 마르크스 혁명론이 절대 진리는 아니겠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 같습니다. 보다 사회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문제 인식 공유가 먼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18-08-24 1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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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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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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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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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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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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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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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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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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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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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8-27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의 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전 사회주의가 실패하지 않았다 봅니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보고, 현실 사회주의는 쿠바도 있죠.

저 또한 스탈린을 비판하는 쪽에 가깝고, 레닌과 트로츠키보다 당연히 저평가하는 쪽이기는 하나 스탈린식 경제개발은 설사 트로츠키였다 하더라도 했을거라 봅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사정이 워낙 안좋았으니까요. 다만 일국사회주의와 국제사회주의라는 국제적인 측면에선 달랐을 거라 보고, 트로츠키의 경은 스타하노프 운동과 같은 짓은 안했겠죠.

참고로 전 사회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제 심장을 뜨겁게 만드네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8-27 20:24   좋아요 1 | URL
^^:) 인류 사회가 지속되는 한 ‘평등‘과 관련한 논의는 계속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 역시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주의의 많은 요소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으로 들어올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마르크스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사회변혁의 공식 틀에 맞춰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은 유물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베들레헴에서 예언자가 나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저는 성향이 보수적인 편이라 사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주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느 사상이나 이념도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요. ^^:)
 

 <유럽 도자기 여행>은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의 도자기 문화사를 다룬 기행문이다. 독일 마이센(Messein)으로부터 시작되는 유럽 도자기 역사는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수입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양 도자기를 만나기 이전 유럽에는 고온을 견뎌낼 수 있는 흙이 없었기 때문에, 남유럽이베리아에서는 러스터웨어(lusteware)라는 도기가, 네덜란드 등에서는 마욜리카(majorlica)등의 자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아름다움은 청화백자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이탈리아든 네덜란드든 유럽은 그릇 제작에 사용한 점토의 특성 때문에 흰색 도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유럽은 1710년까지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령토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그릇을 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온도에서 휘발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안료인 파란 코발트블루의 존재도 잘 몰랐다.(p34)... 이같은 상황에서 매일같이 칙칙한 그릇만 보다가 하얀 눈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는 순백색 그릇을 보았을 때 얼마나 설레었을 것인가!(p37)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청화백자는 백자, 즉 하얀 자기에 푸른색 안료인 코발트블루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한다. 청화백자는 지구의 도자기 역사를 바꾸어놓은 주역이다... 유럽 왕실은 모두 청화백자에 눈이 멀어 너도나도 파란 코발트블루의 바다에 빠져들었다.(p34) 그래서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 ~ 1900)는 청화백자, 즉 쯔비벨무스터(Zwiebelmuster)에 대해 "일상에서 파란색 도자기를 사용할수록 그 깊은 세계에 점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고 표현했다.(p35)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당시 유럽 상류층은 중국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로 생산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아리타 자기의 수입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만들어낸 이는 조선의 도공 이삼평이었다.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 Ceramic war'으로 부른다는 '임진왜란'의 영향은 이처럼 멀리 떨어진 유럽에도 미치고 있었다.


[사진] 청화백자(출처 : 한국경제매거진)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 아리타가 속해 있는 사가현(佐賀縣)의 영주였던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 ~ 1619)는 1만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쳐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일본으로 퇴각할 때 수만 명(많게는 10여만 명으로 추산)의 도공을 붙잡아와서 일본에 정착키고 자기를 만들게 만들었다. 이때 일본에 잡혀온 이삼평(李參平, ? ~ 1655)은 아리타에 있는 이즈미야마(泉山)에서 태토를 발견해 이곳에 가마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백색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p138)... 1650년대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공식 기록에 의한 것만 해도 100여년 동안 120만여 점이 넘는다고 한다.(p139)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일본 도자기가 유럽 왕실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바닷길을 막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자기 제품의 수입이 끊기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베트남을 새로운 수입처로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p5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중국 자기들이 들어오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동양으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본 자기가 수입되면서 유럽 도자기 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였던 그 방식 그대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모방을 통해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사진] 유럽 도자기(출처 : 경향신문) 


 품질이 월등히 좋은 중국 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델프트 마욜리카 산업도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면 그들 역시 제품의 질을 높이든지, 기존의 색상을 바꾸든지 무엇인가 변해야 했다. 그러면 델프트 도공들은 과연 처음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모방이다... 1640년부터 1800년께까지 델프트 도기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 자기를 성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p52)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동유럽 편에서 누누이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이슨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 1세처럼 샹티이의 루이 앙리 왕자 역시 열렬한 동양 도자기 애호가였고, 특히 일본의 아리타 가키에몬 양식을 좋아했다. 이 점 역시 아우구스트 1세와 똑같다. 그래서 샹티이 공장의 초기 제품은 가키에몬 도자기와 거의 흡사한 '파송 드 자퐁 facon de Japon'이 생산되었다. 이들 제품은 언뜻 보면 어느 것이 아리타 자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다.(p453)  <유럽 도자기 여행 : 서유럽편> 中


 이처럼 유럽 도자기는 중국과 조선, 일본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음에도 이제는 이들 지역으로 제품을 수출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양에서 출발한 도자기 산업이 유럽에서 꽃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민 클라인(Armin Klein, 1855 ~ 1883)의 인물화 도자기에는 흡사 라파엘전파의 그림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르민 클라인의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캔버스 대신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불에 구워야 한다는 점에서, 화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이지만 도자기의 그림은 깨지지 않는 한 변색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남아 있을테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p39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동양에서 도자기는 그릇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유럽에서는 이를 넘어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타일을 비롯하여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까지 활용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신(神)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취향과 도자기의 속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인간의 유한함을 강조하며 건물에 나무(木)을 많이 사용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서양만큼 도자기의 절대성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용도에 제한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림] 극세밀화로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출처 : 중앙일보)


 그리고, 이러한 수요(需要, demand)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주체들의 결합을 유도하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 도자기 산업과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해 본다. 큰 시장(市場)이 있는 곳에는 생산을 위한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기 마련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에, 20세기 소비 사회를 통찰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 2007)의 주장은 유럽 도자기 발전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점적 생산은 결코 단순히 재화의 생산만은 아닌, 항상 제(諸) 관계의 (독점적) 생산이며, 여러 차이의 생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대한 트러스트와 미소(微小)한 소비자, 생산의 독점적 구조와 소비의 '개인주의적' 구조 사이에는 논리적 공범관계(共犯關係)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욕심부리며 '소비하는' 차이는 또한 일반화된 생산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독점의 영향하에서 대단히 폭넓은 균질성이 생산 및 소비의 여러 내용(재화, 생산물, 서비스, 관계, 차이)을 결합시키고 있다.(p119) <소비의 사회> 中


 <유럽 도자기 여행>에서는 이처럼 유럽의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도자기 사진과 함께 도자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럽 도자기의 발전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 또한 자리잡고 있음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책을 통해 도자기라는 씨앗의 원산지는 동양이었으나, 이를 꽃피운 곳은 유럽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유럽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것에 대해서 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우리 곁에 있지만,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2018년 광복(光復) 73주년을 맞아 근대화(近代化)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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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 & 황제내경 : 하늘, 땅, 인간 그리고 과학 지식인마을 20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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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강신주(姜信珠, 1967 ~ ) 박사는 <회남자 & 황제내경 淮南子 & 黃帝內經>을 통해 동양 과학사상과 서양 과학사상의 차이와 동양 과학사상에 기반한 동양의학(한의학)의 신체관을 설명하고 있다. 리뷰에서 동양의학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뿌리가 되는 동양 과학사상에 대해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서양 근대 자연과학은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양(量)으로 치환한다. 우리가 분석하려는 요소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는 주어진 조건으로 가정하게 된다. 'ceteris paribus, all things being equal'라 불리는 이러한 전제를 통해 일반법칙을 도출할 수 있게 되며, 세워진 수식을 통해 수리적 조작을 가능케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상과 주체의 엄격한 분리가 필요하다.


 서양의 근대 자연과학은 인간의 양적인 경험에 주목한다. 따라서 이 전통은 이를 통해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즉 양화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와 달리 동양 전통 과학사상은 음양오행론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질적 경험을 직접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제1성질(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 크기, 모양, 양, 운동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양적인 조작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었다.(p36) <회남자 & 황제내경> 中


 반면, 동양 전통 과학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기 氣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동양 과학의 태도는 관찰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서양 과학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결과 동양 전통 과학에서는 일반 법칙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이러한 차이로부터 동양 과학은 서양 과학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가 비가시적 invisible 이지만 감지할 수는 sensible 있는 것이다'라는 정의이다.(p51)... 우리는 동양 전통 과학사상의 중대한 특징 하나를 읽어낼 수 있다. 즉 기에 대한 경험이나 감지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객과화되기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서 객관화되기 어렵다는 표현은 양화되기 어렵다는 것, 즉 측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p52) <회남자 & 황제내경> 中


 우리는 동양의 전통 과학사상이 기본적으로 '실험'을 통한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 즉 실험을 통해서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동양 과학사상은 '실험'하고나 '조작'하기보다는 오히려 '설명'하는데 치우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p39) <회남자 & 황제내경> 中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 다른 방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편작'으로 대표되는 동양의학은 인체를 '유기체'로 바라보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점이 서양의학의 환원주의 reductionism, 還元主義 의 극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동양의학이 주먹구구식 의학이 아니라, 혁명적 사고의 전환의 결과임을 알게 된다.


[사진]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 차이(출처 :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13/2013041300268.html)


 동양의학은 우리의 신체를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유기체'로 다룬다. 유기체란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전체의 변화는 모든 부분의 변화를 낳을 수 있는 통일체를 말하는 것이다.(p15)... 배를 절개해서 내장들을 직접 살펴보고 이것들을 치유하려는 유부 兪跗라는 의사는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사유와 매우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해부학적 치료법에 대해 편작 扁鵲은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런 해부학적 치료법에 대해 편작은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피력한다.(p16) <회남자 & 황제내경> 中  


 편작 앞에는 이미 '유부'로 대표되는 '해부학적 의학'이 있었던 것이다. 편작의 새로운 의학이 해부학적 사유를 부정하면서 출현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동양의학이 해부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서양의학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을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p16)... 동양의학은 어떻게 인간의 몸 안에 오장육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동양의학도 기본적으로는 해부학적 전통에서 왔다... 그들 역시 몸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기를 직접 관찰했고 그것들의 위치를 경험적으로 확인했던 것이다.(p132) <회남자 & 황제내경> 中


 그렇다면, 동양 과학사상에 기반한 동양의학의 탁월한 점과 한계점은 무엇일까? <회남자 & 황제내경>에서는 동양의학의 탁월한 점으로 몸의 기능을 관계를 통해 해석한 점으로 꼽는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원리와 질서가 우리 몸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보편적인 도 道를 끌어낼 수 있다. 반면, 지금 사회에 적용되고 있는 질서를 통해 자연 nature 自然 법칙을 바라보기에,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어렵게 만든다. 초기 동양의학이 혁명적 사고의 전환의 결과였음에도, 이후 획기적인 전환점이 없음은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회남자 & 황제내경> 에서는 그 예로 뇌(腦)의 기능을 발견하지 못한 동양의학을 들고 있다.


 <황제내경>에서 다른 장기도 물론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도 서한시대 동양의학자들이 생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심, '일차적 중심(위장)'과 '이차적 중심(심장)'을 따로 설정해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일차적 중심'이 신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면, '이차적 중심'은 신체 내부의 균형과 조화를 상징한다. 결국 '이차적 중심'은 최종적으로 '일차적 중심'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황제내경>의 탁월할 통찰이었다.(p136) <회남자 & 황제내경> 中


 왜 <황제내경>은 뇌가 정신활동의 근원이라는 것을 통찰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동양의학자들이 정신활동이 직접 장기를 손상한다는 임상적 경험을 직접 추상화해냈기 때문이다.(p137)... 고대 중국인은 경험적으로 사실을 관찰하고 그에 주목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기쁨, 노여움, 두려움, 걱정 같은 정서적 반응이나 사유 같은 지적인 활동이 신체 내부의 장기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정신활동이 장기에 직접 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오행론이 함축하는 유추논리이 부적절함이 확실하게 드러난다.(p138) <회남자 & 황제내경> 中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동양의학(한의학)과 서양의학 중 어떤 의학이 더 우수하고, 어떤 치료법을 선택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잠시 마케팅 Marketing 조사 기법을 머리도 식힐 겸 살펴보자. 


  <회남자 & 황제내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마케팅 조사 기법 중 정성 Qualitative 定性 조사와 정량 Quantitative 定量조사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정량 조사 기법은 객관식 문항을 중심으로 소비자의 의향을 파악하는 분석 방법인 반면, 정성 조사 기법은 개념 도출을 위해 사용하는 분석 방법이다. 전자가 객관화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파악하는데 활용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전혀 새로운 사실, 제품 등의 소비자 수용성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진] 정성조사 정량조사(출처 : https://www.weetechsolution.com/blog/strengths-and-weaknesses-of-quantitative-and-qualitative-research)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반적인 법칙/치료법을 추구하는 서양의학은 우리가 아픈 상황에 직면했을 때 눈 앞의 치료를 위해서 바람직한 반면, 동양의학은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우리가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고 있기에 별로 놀라운 결론은 못된다.)


 <회남자 & 황제내경>은 이처럼 동양과학과 서양과학 사상 기반의 차이에서 출발하여 의학의 차이까지를 넓게 바라보고 있다. 어느 의학이 더 우수한가에 대한 질문과 답에는 주관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동양 의학 역시 해부학적 사실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인식의 전환이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회남자 & 황제내경>은 우리에게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좋은 교양서적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대상 - 주체'와의 관계를 정리한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번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서양의 분리법에서는 내포 intension와 외연 extension이라는 유명한 논리적 개념들이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내포가 어떤 개념이 함의하고 있는 속성들을 의미한다면, 외연은 그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음양 陰陽에 의한 의한 분류법에는 내포와 외연이라는 논리적 관계가 성립될 여지가 전혀 없다. 단지 인상적이고 감각적인 유사성에 의한 유비 analogy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점에서 유비적 사유는 마치 시 詩에서의 '은유'나 '직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p55) <회남자 & 황제내경> 中


PS. '대상-주체'의 관계를 분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서양과학이라면, 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동양과학이라고 정리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동양과학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공분산 共分散, covariance : 2개의 확률변수의 상관정도를 나타내는 값'을 고려한 과학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양과학 사상으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 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을 '유비'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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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1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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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8-10 2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분야에 깊이있는 독서를 하시고,
늘 글도 꾸준히 쓰시는 호랑이님.. 부럽고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좋은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8-10 22:48   좋아요 2 | URL
에고. 아니에요. 저는 북프리쿠키님께서 독서 모임을 통해 여러 분야의 책을 깊이 있게 읽고 계시는 모습이 많이 부럽습니다. 한동안 더운 날이 이어진다니 북프리쿠키님께서도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요즘 아이가 포켓몬스터에 많이 빠져있습니다. 유튜브에서도 포켓몬과 관련한 내용을 즐겨찾아 보고, 인형도 수집하고 있네요. 거의 수십마리의 포켓몬들이 연의 침대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중 큰 녀석들만 모아 기념사진을 찍어 봅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빠에게 녀석들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딸아이 덕분에 요즘 뒤늦은 미술 공부를 하게 되네요. 포넷몬 캐릭터를 함께 보며 같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저 역시 부족함이 많지만, 함께 하면서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그리 어렵던 부분이 쉽게 풀리는 경험을 할 때는 작은 기쁨도 느끼게 됩니다. 아마 이런 것을 보며 아이가 부모를 성장시킨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추가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는 가을 분위기가 조금씩 드러나네요. 이웃분들 모두 건강하게 막바지 더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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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09 0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나옹 그림 너무 귀엽네요 ㅎ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8-09 07:43   좋아요 0 | URL
syo님 감사합니다. 보고 그린 것 치고는 많이 부족하지만, 아이를 만족시킬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나무 2018-08-0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주말 포켓몬에 푹 빠진 조카녀석때문에 정말 다양한 몬스터들을 만났었네요. ㅎㅎ
다음 만날 때까지 포켓몬스터 공부좀 해야겠어요. ^^
그림 멋지십니다!

겨울호랑이 2018-08-09 09:07   좋아요 1 | URL
정말 포켓몬은 오래 가는 장수 캐릭터임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뒤늦게 저도 포켓몬을 공부하게 되네요. 아이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부모님들께 이런 수준의 그림으로도 아이들은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 그림을 올려봤습니다. 설해목님, 감사합니다.^^:)

아트 2018-08-0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초등학생 때 포켓몬을 좋아했었는데 반갑네요😸 저도 보고 그리는게 어려워서 항상 종이 밑에 원본 그림을 깔고 따라 그렸던 생각이 나요~ 귀여운 그림과 인형 잘 보고 가요 😆

겨울호랑이 2018-08-09 09:09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군요. 김유나리님께는 포켓몬이 더 남다르게 다가올 것 같네요. 세대 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캐릭터가 포켓몬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2018-08-09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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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9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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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8-08-0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리 아들 어렸을때 포켓몬을 좋아하여 수많은 굿즈들을 사모으고,
무슨 빵 속에 스티커가 들어있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빵을 사먹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연의 어린이는 날마다 행복하겠어요~^^

겨울호랑이 2018-08-09 10:5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예전에 국찐이빵, 핑클빵 등등 해서 빵 안에 스티커등이 있었지요. 크지 않지만 함께 하는 것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연의와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雨香 2018-08-09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째가 한때 열심히 포켓몬을 그리다 시들해질 때 쯤
둘째가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

가끔 제가 쟨 누구 진화야 물어보면... ˝아빤, 그것도 몰라!˝ 하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줍니다. ^^

겨울호랑이 2018-08-09 12:26   좋아요 1 | URL
우향님 말씀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보이는 부모의 작은 관심이 정말 아이에게 자부심을 주는 것 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에서와 같이 아이들 기를 살리는 것은 우향님처럼 눈높이를 같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니 2018-08-09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들이 유치원때부터 포켓몬에 빠져서 수백장이 넘는 포켓몬 카드와 포켓몬 관련 보드 게임에 이제는 포켓몬고 어플까지~
이제는 온 가족이 포켓몬과 친구가 된 느낌입니다^^
저희집 포켓몬 대도감 책은 하도 봐서 이젠 너덜너덜 해졌네요~
직접 그림도 그려주시고 좋은 아빠시네요~^^

겨울호랑이 2018-08-09 14:11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나이니님 가정에서는 포켓몬이 가정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세대를 관통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잘 그린다고 칭찬해주는 딸아이 덕분에 용기내어 그리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8-08-09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이면 우리나라에 포켓몬스터가 들어온 지 10년일거예요. 1999년에 만화가 첫 방영한 걸로 알고 있어요. 연의도 포켓몬스터를 알고 있다니 신기하네요. ^^

겨울호랑이 2018-08-09 14:13   좋아요 0 | URL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요즘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포켓몬은 인기에요. 그렇게 본다면 닌텐도에서 캐릭터 관리를 참 잘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퍼마리오도 그렇고 장수 캐릭터가 제법 있네요.

2018-08-09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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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0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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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0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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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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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 1961 ~ )의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 ~ 1976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 ~ 1976>으로 마무리된다. 일반에게 홍위병(紅衛兵)으로 대표되는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의 시작은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 ~ 1953) 사후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 ~ 1971)에 의한 스탈린 비판과 이를 지켜본 마오쩌둥의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의 집중적인 집산화 프로그램은 1956년 거대한 역화에 직면했다.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의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하에서 재판도 없이 행해진 무자비한 숙청과 대규모 추방, 처형을 비판했다... 몇 개월 뒤 총리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단의 인물들이 국영 농장을 비판한 흐루쇼프를 인용하며 집산화 속도를 견제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듯 보였다.(p39)  <문화대혁명> 中


 권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마오쩌둥은 자신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겼다. 특히, 그에게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라는 아픈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과 문화, 예술부문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p53)... 대약진 운동 이후로 힘을 얻어 온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려면 탄압만으로 부족했다. 마오 주석은 혁명의 계승자인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p79)  <문화대혁명> 中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이 지속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p114)...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p115) <문화대혁명> 中


 그렇지만, 마오쩌둥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대신 측근들과 인민을 이용한다. 먼저, 자신의 측근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면서 공작대를 만들어 냈다. 공작대에 의해 일련의 사람들이 반동, 반프롤레타리아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마오쩌둥은 반대편에 서면서 공작대 해산을 지시하게 된다. 마오쩌둥에 의해 혐의를 벗게 된 이들은 마오쩌둥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들이 후에 홍위병의 중추가 된다. 마치 <삼국지 三國志>에서 조조(曹操, AD 155 ~ 220)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게 된 30만 청주병(靑州兵)이 하북(河北) 제패의 기반이 된 것처럼, 이들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에게 큰 힘이 되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당이 늘 하던 대로 나아가기로 했다. 요컨대 공작대를 파견해서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석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항저우로 날아갔다. 주석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주석은 편안히 앉아서 중국이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참이었다. (p120) <문화대혁명> 中


 당에 반대하는 중등학교나 대학교의 시위를 그대로 묵인할 경우 반혁명 세력이 미쳐 날뛰도록 방치한다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책망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가장 노골적인 비평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에도 이번에는 주석이 태도를 바꾸어서 '대중을 억압한다'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p133) <문화대혁명> 中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 1966년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제 그곳에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참가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p131)...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공작대의 손에 명예가 훼손되고 감금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때의 가해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섰다.(p135) <문화대혁명> 中


  복수심에 불타는 홍위병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모든 것을 인습(因習)으로 규정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대혁명의 수많은 파괴가 이때 발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이루어진 파괴였지만, 문화 혁명이 끼친 영향은 컸다. 오랜 역사 전통과 단절된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진] 문화 대혁명(출처 : 한계레)


  홍위병이 진정한 조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구(舊) 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p150) <문화대혁명> 中


 낡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폭력 사태는 이삼 주 남짓하게 지속되었지만 그 파장은 오래갔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검소한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파란색이나 회색 면으로 된 군복과 검은색 헝겊신을 주로 선택했다.(p169)... 예술과 공예, 산업 부문이 완전히 전멸했다... 문화 대혁명은 산업 분야 곳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장난감이나 원단, 화장품, 가정용품부터 도자기까지 모든 제품은 상표와 포장, 내용에서 봉건적인 과거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p170) <문화대혁명> 中


 <문화대혁명>에서는 홍위병에 의한 파괴 이후에도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홍위병의 세력이 위축된 이후 군대의 등장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대오 정화 운동, 상산하향 운동을 통해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간 과정과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외국과의 분쟁이 <문화 대혁명>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문화 대혁명>에서 저자는 문화 대혁명 전후 상황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 준다. 저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등장으로 스탈린주의자였던 마오저뚱이 느꼈을 불안감과 국면 전환의 필요성, 마오저뚱의 모호한 태도, 인민들의 복수가 한데 얽혀져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문화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3부작의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임을 책 전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문화 대혁명 말기에 농촌에서 널리 퍼졌던 은밀한 관행들이 이제는 완전히 활성화되었고 농민들은 가족농으로 회귀하거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거나, 개인 소유의 상점을 운영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농촌의 탈집산화는 보다 많은 농촌 인력을 해방시켰고 향진 기업 붐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p492) <문화대혁명> 中


 현재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 노동자인 농민공(農民工) 문제가 큰 사회 불안 요인 중 하나이지만, 이들 농민공의 저렴한 노동력 제공이 현대 중국 성장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최근 중국 경제 성장 역시 문화 대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문화 대혁명을 절대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볼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던지게 된다. (긍정적인 면도 약간 있다는 뜻이지, 문화 대혁명 전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농민공 실직자 문제(출처 : 아시아 투데이)


 이제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마무리 하자. 

 

1부인 <해방의 비극 1945 ~ 1957>에서는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후 국민당 정부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숙청이 주로 다뤄진다. 2부인 <마오의 대기근 1958 ~ 1962>에서는  빠른 시간 내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위한 대약진 운동과 이의 실패가 그려지며, 마지막 3부에서는 <문화 대혁명 1962 ~ 1976>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어난 내전(內戰)인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사망을 서술한다. 


 인민 3부작의 특징은 개별 사건의 상세한 제시가 될 것이다. 비교적 최근 공개된 사례를 시기별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책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보다 생생한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인민 3부작에서 다루는 사례를 대부분이 비참하다. 이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무엇이며, 이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절로 던지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책이 끝난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되짚을 필요가 있다. 인민 3부작에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마지막으로 끝나지만, 이후 오늘날 미국과 G2를 이루는 강대국으로 서는 시간까지 연결고리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의 행간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무모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작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인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현실에 담담히 대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묵묵하게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의 모습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그다지 회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윈난 성의 성도 쿤밍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가게마다 술이 매진되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절친한 친구를 초대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던 유일한 포도주를 개봉했다고 회상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들은 공공 추도식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너무나 슬프게 통곡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른들의 표정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전날 밤 그렇게 행복해했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p483) <문화 대혁명> 中 


 우리는 인민 3부작을 통해 1945년 ~ 1976년의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중국 민중들의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어려웠던 이념과 배고픔의 시기를 살아낸 이들의 축적된 힘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었음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삶 또한 잘 묘사하기 때문에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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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읽어 봤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습니다. 이 책 빠는 수꿜이 있는거 보고 좀 읽기 싫어졌던 기억이.ㅋ 마오와 현대 중국을 알기 위해선 이 책보단 마오쩌둥 평전이 나았던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18-08-11 20:02   좋아요 2 | URL
말씀하신대로 저자가 중국공산당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거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이와 관련한 다른 관점의 책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화혁명 역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겠지요. 다만, 누구에게 장점이었는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독자의 기준은 스스로 세워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NamGiKim 2018-08-11 20:06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쪽입니다. 네 여러 책을 보며 해석해야 한다는 호랑이님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전 개인적으론 이 책 1권의 제목부터 좀 맘에 안들었습니다. ㅎㅎ 많은 사람들에게 읽더라도 좀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에요.ㅎ

겨울호랑이 2018-08-11 20:11   좋아요 1 | URL
인민 3부작의 전체 구성이 저자의 역사 해석과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보다 실감나게 읽히긴 합니다만, 극단적인 사례를 제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징가 2018-08-27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사가의 세계관을 반영할수밖에 없다는 E.H.Carr 의 견해를 전제로 읽는다면 별 문제없다고 봅니다 다만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도 같이 읽어본다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8-08-27 12:04   좋아요 0 | URL
네 민정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의 양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절대적인 ‘역사적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겠지요. 민정식님께서 추천해 주신 <중국의 붉은 별>은 제목만 들어봤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다만, 에드가 스노가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겨우 알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요. 말씀을 들은 김에 챙겨놓아야겠습니다. 민정식님 좋은 책 추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