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과제는 희랍의 인간교육(paideia)을 희랍 고유의 특질과 역사 전개 가운데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교육은 추상적 이념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체험된 운명의 구체적 현실 가운데 발견되는 희랍역사 자체다... 희랍인은 최고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을 그들 발전의 초기 단계엔 갖지 못했다. 하지만 앞을 내다보고 길을 걸어가면서 희랍인은 자신과 자신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를 점차 뚜렷이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더욱 훌륭한 인간의 조형이었다. 희랍인에게 교육사상은 모든 인간적 분투를 대표하며, 교육은 인간 공동체와 개인의 궁극적 존립 정당성이었다.(p20) <파이데이아 1> 中 


 베르너 예거(Werner Jaeger, 1888 ~ 1961)는 <파이데이아 1 Paideia: The Ideals of Greek Culture Volume 1>에서 고대 희랍의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작품에 담긴 교육의 대상과 내용을 분석하면서, 희랍 교육 사상안에 희랍 정신의 정수(精髓)가 담겨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림] Paideia(출처 : https://hellenicfaith.com/paideia/)


 희랍 교육사상은, 민족과 국가가 정신적으로 조형된 삶 속에서 외부로 뻗어 나가며 그 힘으로 타 민족과 타 국가를 빨아들이는 가장 숭고한 힘의 총체가 되었다. 인간교육의 이념 말고 희랍세계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권력의지를 정당화해줄 근거는 달리 없을 것인데, 특히 아테네의 외적 좌절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인간교육의 이념에서 아티카 정신은 영원한 존속이라는 위안을 얻었다.(p588)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敎育)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예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귀족계층은 흥망(興亡)을 거듭하며, 때로는 권력을 내주기도 하지만 빠른 시간내에 권력을 획득하면서 중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귀족정신을 대표하는 덕목이 '탁월함(arete)'이라 해석한다. 


 귀족층은 민족교육의 정신적 원천이다.... 교육은 다만 점차 정신영역으로 옮겨간 민족적 귀족이념이다.(p39)... 지배와 탁월함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탁월함(arete)'의 어원은 뛰어남과 월등함의 최상급인 '제일 뛰어남'이며, 복수형으로 늘 귀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p41)... 귀족교육은 각자가 평생 바라볼 이상(理想)에 대한 의무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의무감을 '염치(aidos)'라고 하는데 이는 언제든지 귀족에게 촉구될 수 있는 것이며, 그 훼손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분노(nemesis)'를 다른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다.(p43) <파이데이아 1> 中


 예거는 호메로스(Homeros, ? ~ ? )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가 이러한 귀족정신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는 <일리아스>와 트로이아를 파괴한 후 많이도 떠돌았던 오뒤세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뒷세이아> 안에서 우리는 탁월한 귀족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탁월함의 고대적 영웅정신이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던 세대를 배경으로 하며, 탁월함의 이상을 모든 영웅에게서 실현한다. <일리아스>는 노래로 전승된 신화 속 옛 영웅들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이미 분명한 도시국가 생활을 익힌 헥토르와 트로이아의 모습에 담긴바 당대의 생생한 귀족전통을 통합하여 영원한 이상형을 제시했다.(p59) <파이데이아 1> 中


 <오뒷세이아>는 우리에게 옛 귀족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자료다. 물론 그것은 <오뒷세이아>가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이오니아 지방의 귀족문화겠지만, 이를 우리의 연구대상인 전형적 귀족문화로 간주할 수 있다.(p60) <파이데이아 1> 中


  호메로스가 귀족문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면, 헤시오도스(Hesiodos, BC 7세기 ?)는 민중의 삶을 노래하면서 영웅이 아닌 일반인의 삶을 노래한다. 헤시오도스가 <일들과 날들> <신들의 계보>를 통해 신화를 민중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제 시민계급이 새로운 교육의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이제까지 의식적 교육에서 배재되었던 민중계급은 헤시오도스 서사시에서 정신적 자기 형성을 완수한다. 이때 민중은 상류 사회의 문화가 그들에게 제공한 이점들, 특히 궁정문학의 정신적 형식들을 활용하고, 민중 삶의 근원에서 그들 고유의 내용과 정신을 길어 올린다.(p136) <파이데이아 1> 中

 

 <일들과 날들>의 근본사상, 정의와 노동의 관계가 바로 연결 고리였다. 평화로운 노동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선한 에리스만이, 대지에 질투와 갈등이 만연하는 것을 저지할 유일한 신성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힘겨운 강제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시인 헤시오도스는 세계 질서의 영원한 법칙 가운데 근거 짓고, 사상가 헤시오도스는 이를 신화의 종교적 표상 가운데 깨닫는다. 호메로스 사유는 신화전승을 이런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반면 헤시오도스는 그의 다른 위대한 저작 <신들의 계보>에서 이를 최초로 시도한다.(p123) ... <신들의 계보>의 '인과적' 사유형식을 헤시오도스는 <일들과 날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통해 노동의 실천적/윤리적/사회적 문제에 적용한다.(p125) <파이데이아 1> 中


 이후 아테네의 솔론(Solon, BC 640 ? ~ BC 560 ?)은 입법자에게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며, 이른바 '솔론의 개혁'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주의는 한층 발전하지만, 통치 계급에 더 높은 수준의 '탁월함'을 요구하는 다른 기준은 후대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국가>를 통해 '철인(哲人)' 지배를 주장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계와 끝이라는 개념은 솔론과 동시대인들이 중요시했던 문제, 내면적 성찰을 통한 새로운 생활규범의 획득과 분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한계는 딱 잘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대중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법률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법을 만든 입법자에게는 어디에도 없는 좀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그에게 이런 기준을 찾게 만든 아주 특별한 것을 솔론은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늘 올바른 통찰과 확교한 실천 의지를 나타내는 "앎"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솔론이 가진 내면 세계의 통일성을 파악해야 하는 지점이다.(p246) <파이데이아 1> 中


 후대의 모든 교육이 고민했던 큰 사회 문제는 개인주의의 극복이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봉사라는 기준에 따른 인간교육이었다. 이런 문제의 실질적 해결방안으로 엄격한 규율의 스파르타 국가가 유력해 보였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의 사유는 스파르타 국가에 평생 매달렸다.(p149) <파이데이아 1> 中


 

도시국가는 각 형태마다 거기에 맞는 특별한 인간유형을 길러냈다는 플라톤의 말은 옳다.(p185)... 우리는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어 옛 희랍 귀족문화가 '보편적 인간교육'의 이념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새로운 도시국가의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p187)... 플라톤은 <법률>에서 모든 참된 교육 혹은 인간교육을, 상인과 장사꾼과 뱃사람 등 직업인의 특수 지식과 구별하여 "참된 교육은 법률의 토대 위에 통치하고 통치받을 줄 아는 완벽한 시민이 되려고 열망하는 인간을 그가 갖추어야 할 탁월함으로 이끄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초기 도시국가의 정신에 충실하게 '보편교육'의 근원적 의미를 천명했다.(p191)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의 대상이 이처럼 귀족계층에서 시민 계급으로 확대되었다면, 교육의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거는 이를 아이스퀼로스(Aischylos, BC 525 ~ BC 456),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7 ~ BC 406),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 ~ BC 406)의 비극을 통해 페리클레스 50년의 황금기 동안 고대 희랍인들의 인식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들의 주사위 게임의 말에 불과한 존재에 불과하다. 아이스퀼로스 작품 안에서 인간은 신에게 탄원하는 존재라면,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비로소 주체로서 생명을 부여받았다. 

 

 삼부작 형식은 아이스퀼로스 문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삼부작 형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인바 이때 운명의 담지자가 개인일 필연선은 없고 개인이 속한 가문 전체일 수도 있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에서 인간은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고 운명의 담지자일 뿐이었고 문제는 운명이었다.... 극 전개의 주인공은 인간들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신들이다. 신성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인간들의 싸움을 굽어보고 있고, 만물은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p383)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의 인물에는 억지스러운 궤변이나 인위적 과대과장이 없다. 소포클레스의 기념비적 성과는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 비율에서 나타난다. 소포클레스의 인물을 아이스퀼로스의 인물처럼 불쑥 땅에서 쏟아난 땅딱막한 진흙형상의 인물과 달랐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모든 인물을 필연성에서 태어난다. 전형이라는 공허한 보현성에서도 아니며, 개별 인물의 일회적 특수성에서도 아니며, 오로지 비본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실체 자체에서 태어난다.(p407)... 소포클레스의 인물들은 미적 감각에서 탄생했는데, 그 출발점은 이제까지 전례가 없던 '영혼 부여'였다. 이로써 탁월함의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고 이때 처음으로 '영혼'을 의식적으로 모든 인간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415) <파이데이아 1> 中


 예거에 따르면 소포클레스 작품에 보이는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지식교사(소피스트 sophist)라 불리는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은 새롭게 조명되고, '만물의 척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짙게 영향을 끼친다.


 철학이 인간에 관심을 두고 점점 더 가까이 관심 대상에 다가갔다는 사실은 지식교사의 출현이 역사의 필연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다. 물론 지식교사들이 충족시킨 요구란 학문적/이론적 요구가 아닌 철저히 실제적 요구였다.(p436)... 지식교사들은 교육요소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잠언투 운문문학을 새롭게 산문화했고 이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식적으로 형식에서나 사상에서 운문문학과 경쟁했다.(p437)... 지식교사들의 공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놀라운 형식교육 기술의 독창성에 있다. 그들의 약점은 그들 교육의 내적 실질을 채워줄 정신적/윤리적 실체의 결함에서 유래한다.(p484)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는 시대의 가파른 정점을 걷고 있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시대가 파괴할 교육비극의 계시자로 활동했다. 시대는 그의 정신사적 위치를 규정했고, 그의 문학을 오로지 시대적 표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구속성을 그에게 부여했다.(p486)...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이 숨 쉬는 정신적 환경의 대기는 섬세하고 건조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강력한 생명력에 비추어 다만 약점이었던 예민한 정신성은 이제, 새로운 주관적 공감 능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끝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비극의 정신적 매체가 되었다.(p506)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에서 예거는 지식교사들의 교육이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은 정치교육'이라는 사상은 결국 사유(思惟)를 극한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다. 여기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들을 비판하는데, 우리는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를 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진실로 '보편적인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보기에 오로지 정치교육 뿐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보편'인간교육이라는 개념 이해를 통해 희랍교육 역사의 발전 전체를 요약했을 뿐이다.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진정한 인간교육의 토대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순수 미학적 유형의 인문주의가 추가되고 혹은 이것이 기존 인문주의를 대체한다.(p443) <파이데이아 1> 中


 매우 강력한 요구와 함께 등장한 교육이념은 그만큼 더 철학과 종교의 단단한 토대를 요구한다. 기본적으로 플라톤 철학이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호메로스에서 비극에 이르는 옛 희랍교육의 종교적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지식교사들의 교육이념을 극복하면서 지식교사들 이전으로 회귀한다. 지식교사들에서 결정적인 것은 의식적 교육사상 자체다. 교육사상은 희랍의 모든 문학창작과 모든 사유 노동이 인간형상의 규범적 특징을 찾으려 애쓴 지속적 노력의 표현이다.(p446) <파이데이아 1> 中


 탐구의 활동은 "오로지 교육을 위해"이며 교육이 필연적인 한에서일 뿐이다. 이 표어는 페리클레스 교육을 상징하는데, 페리클레스 교육은 철저하게 실용적이고 정치적이었다. 토대는 희랍의 패권을 지향하던 아테네 제국이었다.(p469).... 번성하는 학문의 엄격한 제한적 향유를 지시하는 이 문구는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귀족 칼리클레스가 벌인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p468) <파이데이아 1> 中


 이번에는 역사학을 살펴보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 ~ BC 425)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두 세계의 격돌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했다면, 투퀴티데스(Tuchididdes, BC 465 ~ BC 400)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전쟁의 원인과 영향에 대해 분석한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이 전쟁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투퀴티데스는 인간 내부에서 이를 찾아냈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아이스퀼로스가 신의 뜻을 강조한 반면, 소포클레스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강조한 것을 연상시킨다.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처럼 민족학과 지역학의 통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중점은 인간들에게 두었다... 그의 내적 통일성은 상고기적 화려한 다양성을 수용하는데, 이에 희랍인들과 크로이소스왕이 이끄는 이웃 뤼디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확인가능한 최초 격돌로부터 페르시아 전쟁까지의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커다란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p552) <파이데이아 1> 中


  투퀴디데스는 정치사의 창시자다. 창조과정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사유와 의지의 놀라운 집중은 투퀴디데스의 작품에서 합당한 정신적 표현을 발견했다.(p553)... 아테네 국가의 비극을 기록한 역사가 투퀴디데스는 아테네 권력의 몰락을 오로지 내적 와해의 결과로 보았다. 이 순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을 펠로폰네소스 정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서 관심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고 더욱더 급격하게 진행된 사회 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위대한 역사가의 진단이다.... 투퀴디데스는 현행 가치 전체의 파탄을 말한다. 이는 심지어 언어에서 완전한 어의변화로 감지된다. 고래로 최고 가치를 표현하던 단어들은 추락하여 일상언어에서 사고와 행동의 경멸적 지시에 사용되었고 이제까지 비난을 표현하던 언어들은 출세하여 칭송의 수식어로 상승했다.(p489)... 대체로 경제발전 흐름과 패권정치 흐름에 집중되어 그려진 과거사 영상은 동시대의 희랍인들에 대한 투퀴티데스의 입장을 반영한다.(p558)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 >에서는 이처럼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polis)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정체(政體)를 고민했으며,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정체의 모습을 공유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귀족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었고, 교육의 내용이 신(또는 자연)에서 인간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국가정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가정체는 희랍에서 오늘날 우리가 국헌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국가정체가 규정하는 한에서 도시국가의 삶 전체를 포함한다. 비록 시민의 모든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스파르타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국가정체에서 국가의 영향은 보편정신으로서 모든 인간적 생활영역에 깊이 침투했다... 페리클레스가 그린 아테네 국가정체의 모습은 경제, 윤리, 문화, 교육 등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총체적 내용을 포함한다.(p587)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은 고대 희랍의 교육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주요 문학, 철학, 역사서를 다루기에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 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그리스 비극을 다루었으니, 그리스 희극은 부록으로 옮긴다. 투퀴티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모든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는 <헬레니카>를 추천한다. 

 

 희극도 비극의 영향으로 비로소 '주인공'이란 것을 도입했고, 서정시적 형식요소들도 마찬가지로 비극의 영향이다. 발전의 절정에서 희극은 비극으로부터 마침내 최종적 도야를 위한 영감을 획득했는바 비극의 교육적 소명을 받아들였다. 이는 희극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동시대 비극과 대등한 창조물이라는 지위를 굳혔다.(p524)..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심호한 문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으로 침잠했다. 반면 희극은 대중을 숨쉬는 공기로 삼아 대중을 통해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국가 미래와 정신 운명의 긴밀한 결합을 강조하고 대중 전체에 대한 창조적 정신의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희극은 그 교육적 소명의 정점에 도달한다.(p549) <파이데이아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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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25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교육 문제의 원류가 희랍에 있었군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0   좋아요 1 | URL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이 악용된 사례가 반드시 희랍에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자라난 제도이니만큼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32   좋아요 1 | URL
개인 행복이 아닌 항상 체제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씀에 오뉴월 더위가 무척 섬뜩해 집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찰리 채플린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담아냈듯 부속품화된 개인을 양산하는 체제가 그들이 지향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중장보병전술인 팔랑크스도 밀집대형으로 전체로서 싸우는 형태라는 사실도 떠오릅니다. 결국, 고대 희랍 사회는 거대한 파시즘 사회의 전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40   좋아요 1 | URL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바람직한지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25 22:53   좋아요 1 | URL
네, 사회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잘 심어주는 것이 바른 교육인지, 아니면 아이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도록 주관을 심어주는 것이 가야할 길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는 북다이제스터님과 저만이 아닌 모든 부모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그리스 사회는 중세의 산업 계급처럼 상업과 각종 예술과 더불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술은 상업이 그렇듯 자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 인들은 상인도, 예술가도 아니었습니다. 예속 국가들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의 정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죠. 세계의 정복자였던 그들에게 로마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했습니다.(p138)... 그리스의 건축은 옷을 벗은 사람에 비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의 신체의 부분들은 오직 유기적 구조, 그의 욕구, 그의 뼈대의 결과물이며 그의 근육의 기능들일 뿐이지요. 반면 로마의 건축은 옷을 입은 사람에 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의복이 있습니다. 그 의복은 좋거나 나쁠 수도, 원단의 가격이 높거나 낮을 수도, 재단이 잘 되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p144) <건축 강의 1> 中


 외젠 비올레르뒤크 (Eugene Emmanuel Viollet-le-Duc, 1814 ~ 1897)는 <건축 강의 1 Lectures on Architecture 1>에서 그리스와 로마 건축, 나아가 문명(문화)에 대해 위와 같이 비교한다. 책 전반에서 자유로운 그리스 사회에 비해 로마는 철저하게 제도화된 사회였기에 이들간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건축 강의 1>의 내용을  우리나라 임석재 교수의 서양건축사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비올레르뒤크는 그리스 건축에서 특히 '이성 理性'을 강조한다. 그리스 철학의 이성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성은 이분법(二分法)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부분적으로 서도 다른 두 개념이 전체적으로 이성 안에서 이루는 균형. 이는 두 저자가 바라보는 그리스 건축의 특징이다.



[사진] 그리스 건축물(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ncient_Greek_architecture)


 그리스 신전의 모든 부분을 분리해서 보고, 그것들이 전체와 맺는 관계는 물론 그 각각을 개별적으로 연구한다면 우리는 예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그러한 현명하고 섬세한 관찰들의 영향을 항상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의 존재라는 것은 모든 형태를 이성에 종속시키는 세련된 감정으로서, 이때의 이성은 기하학자의 건조하고 현학적인 이성이 아니라 감각과 자연법칙에 대한 관찰에 의해 인도되는 이성입니다.(p102) <건축 강의 1> 中

 

 그리스 건축은 서양문명사의 흐름을 구성하는 대표적 쌍개념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탄생했다. 이러한 쌍개념들로는 자연과 인공, 정신과 육체,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규범과 자유정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단순성과 다양성, 원형성과 가변성, 남방문화와 북방문화, 전쟁문화와 상업문화 등을 들 수 있다.(p114)... 그리스 건축에서 관찰되는 장점은 균형감각이다. 많은 내용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도 혼란스럽거나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그리스 문화의 힘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건축에서의 종합화가 단순 합이 아닌 정제 精製의 의미에서의 추상작업이었기 때문이다.(p115)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그리스 인은 이성의 규칙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추론하고, 논쟁하며, 구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입법 정신에 들어맞지 않지요. 대칭을 예술의 첫 번째 법칙 중 하나로 선언함으로써 로마 인은 끝없는 문제와 불확실성을 피해 갔습니다.(p182) <건축 강의 1> 中


 로마의 정치 체제에 대해 이해하지 않고서는 로마 미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맣한 것처럼 로마 인들은 정치적인 민족이고, 그런 그들에게 예술은 그리스 인들에게서와 같은 향락이 아니라 도구이고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인은 자신의 방대한 조직 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특정한 예술 형식이 그 예술의 원리들과 조화를 이루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그의 안중에 없습니다.(p133) <건축 강의 1> 中


  그렇지만, 로마 건축에 대해서는 두 저자의 입장이 다르다. <건축 강의 1> 에서 비올레르뒤크는 자유로운 그리스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규격화된 로마 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로마의 건축에는 서로 다른 사상과 건축 기법이 기술적으로만 결합했을 뿐 여기에는 로마인만의 철학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비올레르뒤크의 주된 비판 내용이다.


[사진] 로마 상수도관( 출처 : https://www.ancient.eu/Roman_Architecture/)


 에트루리아 인들로부터 로마인 들은 석재들을 건식 쌓기(joined stone / pierre appareillee)한 원형 아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캄파니아 인들에게서는 종교 건축의 일반 계획, 그리스식 주범, 주거의 배치와 장식을 배웠지요. 따라서 그들은 별개의 두 원천에서 각각 이런 것들을 빌려다 쓴 셈입니다. 그들은 정반대의 두 원리, 즉 그리스식 인방과 에트루리아식 아치를 결합하려고 했습니다.(p129) <건축 강의 1> 中 

 

  반면, <임석재 서양 건축사 1>에서 로마 건축에 대해 긍정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로마 건축술의 결합은 당연한 것이었다. 테베레 강(fiume Tevere)의 작은 도시 국가가 서쪽으로는 에스파냐, 북쪽으로는 라인강, 동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로마 시민의 의식은 크게 높아졌다. 반면,이를 건축으로 표현하기에는 기존 건축술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건축술의 결합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콘크리트와 철근이 결합하여 철근콘크리트가 탄생한 것처럼.


 로마만의 독립적 문명이 시작되면서 로마 고유의 건축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집단주의와 팽창주의라는 공화적을 대표하는 두 가지 건축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로마 건축의 집단성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 의해 최초로 형성되었다. 공화정기 때 집단의식을 형성한 가치관은 로마 민족의 우수성이었다. 집단의식은 건축에도 반영되어 화려한 과시욕의 표출로 나타났다.(p250)... 로마만의 건축을 창출해내기에 이전의 건축술은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건축술의 발명을 포함한 산업기술 체제의 실속 있는 정비가 필요했다. 건축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 또한 상식적 수준을 뛰어넘는 비상한 요구가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킨 것이 팽창주의였다.... 이 두 가지 상황이 함께 작용하면서 로마 건축은 발전했다.(p252)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이처럼, 로마 시대 건축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해답은 <건축 강의 1>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헬레니즘(Hellenism)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사진]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출처 : https://fineartamerica.com/art/hellenistic+architecture)


  기원전 2세기에 나타난 헬레니즘화와 구조기술의 발전은 공화정건축뿐 아니라 로마 건축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이었다. 전자는 신전으로 상징되는 고급건축을, 후자는 토목 인프라로 상징되는 실용건축을 각각 대표했다.(p255)...  헬레니즘화는 로마 건축에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양면적 영향을 끼쳤다. 구조기술의 발전은 이 가운데 부정적 측면에 대한 치유적 성격을 가지면서 로마 건축만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헬레니즘화가 끼쳤던 긍정적 영향은, 로마 공화정 건축의 본격적인 출발을 촉발시키면서 양식의 수준을 처음부터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 것이었다... 헬레니즘화에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 로마 건축은 헬레니즘 건축을 모방하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헬레니즘 건축의 아류에 머무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p256) <임석재 서양 건축사 1 : 땅과 인간> 中


 신라 석굴암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지는 헬레니즘 문화는 고대 그리스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이 만들어낸 제국 안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여러 문명(文明 Civilization)이 통합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이라는 제국 문명이 이미 존재하였기 때문에, 로마는 새로이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여기에 숟가락만 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로마인들 특유의 실용성을 생각한다면,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스의 건축은 언제나 수직, 수평선들과 표면들의 조합으로 진행됩니다. 로마의 건축은 이 두 가지 원리들에 아치와 궁륭, 즉 곡선과 오목면을 추가합니다. 공화국 시대부터 우리는 로마 건축이 이 새로운 요소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지배적인 원리가 되고, 결국은 앞의 두 원리들을 지배하게 됩니다.(p179) <건축 강의 1> 中


  시간이 흘러 로마 제국 전성기가 지나고 비잔틴 시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의 중심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그리스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에 위치했지만, 비잔틴 시대의 건축은 이전 그리스 건축과는 달랐다. 제국 말기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基督敎)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비잔틴 문화라는 독특한 양식이 출현하게 된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인들은 포착할 수 없는 추상들, 철학적/종교적 교의들에 대해 토론하면서 한편으로는 조형 미술에 이교적 형태를 부여할 것은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 민족의 본능과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모순입니다.(p335)... 아시아와 서양의 중간에 위치한 이 나라는 이중적인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스는 예술의 아름다움, 불변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때로는 완고하다시피 보존합니다. 반면 그들은 과학과 변증법의 방대한 범위에서, 그리고 도덕적 영역의 엄격한 탐구에서 앞장서며 현대인들조차 이끌어 갑니다.(p336) <건축 강의 1> 中 


[사진] 성소피아 성당(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24467253@N04/5890779855)

 

 비잔틴 교회, 넓게는 비잔틴 건축의 특징은 중앙집중형으로 대표된다. 비잔틴 건축은 중앙집중형 공간의 보고이다. 비잔틴 건축은 90퍼센트 이상이 중앙집중형 공간으로 구성된다. 통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비잔틴 건축은 중앙집중형 공간이 가장 발전한 시기였다. 중앙집중형 공간의 역사에서 비잔틴 건축은 가장 발전한 구성기법과 가장 풍부한 예를 남긴 시기였다. 비잔틴 건축은 르네상스나 바로크 등과 같이 이후 시기에 중앙집중형 공가을 추구하는 경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p338) <임석재 서양 건축사 2 : 기독교와 인간> 中


 <건축 강의 1>에서 비올레르뒤크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를 건축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로마 문명은 이질적인 문화의 단순한 결합으로 규정하고 비판을, 그리스 문명은 자유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문화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저자의 이런 관점은 '작은 사회 = 자유로운 사회'라는 생각 위에 놓인 듯하다. 


 민족성(nation / nationalites)의 역사를 근대적 관념들에 따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아테네 인들의 애국심은 로마 시민들이나 19세기 파리 인들의 애국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민족성보다는 이런 사회(association / societe)의 상태가 예술의 발전에 현저하게 유리합니다. 그들에게 애국심이란 로마나 근대 유럽 국가들에게서 발전된 감정보다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에 가까웠습니다.(p116) <건축 강의 1> 中


 그렇지만, 이러한 비올레르뒤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건축사 측면에서 당대 우수한 고대 문명의 결정체인 헬레니즘을 서방 세계 곳곳에 전파시켰다는 것만으로도 로마 문명은 충분히 제 할 일을 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창업을 할 수 없고, 창업(創業) 이후에 수성(守城)이 어렵다는 말도 생각해본다면, 로마 문명 나름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로마 문명은 처음으로 세계 종교인 기독교를 탄생시켜 비잔틴 예술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로마 예술이 헬레니즘의 아류라는 비판도 지나친 면이 있다 생각된다. <건축 강의 1>과 <임석재 서양건축사>를 통해 로마 건축과 로마 문명의 의의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 한다.


PS.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 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개인 생활(private life)의 등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전체주의 도시 공동체의 부분으로 느끼는 개인의 자유와 거대한 제국의 보호 아래 느끼는 개인의 평온함. 서로 다른 이들 가치 중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에서는 개인 주택 규모와 장식이 극히 소박했다. 모든 웅장함과 사치는 공공 분야, 즉 도시만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도시 자체가 개인과 공동체의 융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합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이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 고전 시대의 도시가 위기에 처하면서 변화가 초래되는데, 한마디로 공적인 영역이 줄어드는 대신 사적인 영역이 괄목할 만큼 확대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택이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개인 소장품이 증대되는 동시에 예술 작품이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는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p462) <사생활의 역사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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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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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0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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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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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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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부산 출장을 마치고 밤늦게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내리는 많은 비로 잠시 쉬어가게 된 경부고속도로 언양휴게소. 매장 한 편에서 반구대 암각화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늦은 밤. 갈 길을 멀었지만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반구대 암각화 자료를 감상했습니다. 비록, 실제 자료의 모사품이었지만, VOD 자료까지 갖추고 있어 암각화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 페이퍼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진] 언양 휴게소 반구대 암각화 1


[사진] 언양 휴게소 반구대 암각화 2

 

 선사시대의 미술 중에서 회화적인 표현체로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바위의 표면에 새겨서 나타낸 암각화(岩刻畵), 즉 바위그림이라 하겠다... 1970년에서 1972년에 걸쳐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川田里)와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般龜臺)의 태화천 냇가 두 군데 암벽에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바위그림이 발견되었다.(p31)... 대곡리 반구대에 있는 바위 그림에는 각종 동물, 사람, 배 등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어로사냥과 관련된 제사 장소였음이 분명하며, 성격은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같다. 반구대 그림은 크게 좌/우 두 부분으로 갈라지는데, 왼쪽 부분은 고래, 돌고래 등 바다짐승의 전체 모습을 쪼아서 나타낸 실루엣 그림인데 비해 오른쪽 부분은 호랑이, 사슴, 멧돼지, 개, 곰, 산양, 여우 등 짐승을 선각화(線刻畵)로 나타낸 것이어서 이곳 주민들이 바다 짐승 사냥에서 들짐승 사냥으로 옮겨갔고, 그림 양식이 영화(影畵)에서 선각화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전통과 함께 새로이 사실적 경향의 미술이 등장하여 두 가지 계보를 이루며 병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그림에서 사냥감이 바다 동물에서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고 보는 근거는 심리학 측면과 미술사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왼쪽'에 대한 부정적 원형(原形)이 심리학 측면의 근거라 여겨집니다.

 

 Left 왼쪽 : 보통 왼쪽은 사물의 불길함, 어둠, 서출 庶出, 달이 의미하는 내향적인 면을 뜻하며 과거를 나타낸다... 크리스트교에서 최후의 심판 때 어린양들은 신의 오른쪽에 있고, 염소는 왼쪽에 서 있다... 중국에서는 반대로 왼쪽은 약함과 음(陰)이며, 명예로운 쪽이다. 그래서 오른쪽은 양과 강함을 나타내며, 폭력적인 경향이 있어 자멸하는 경향을 나타낸다.(p194)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中


 고대 중국의 노자(老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왼편을 부정적, 과거의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왼편을 과거로, 오른편을 그 이후라고 보는 추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냥감의 종류가 바다 동물에서 육상 동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우연히도, 왼편의 고래의 진화가 육지에서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반대로 이루어져 작은 발견의 즐거움(?)을 가져 봅니다.

 

 내가 가장 흔히 받는 질문은 고래가 왜 물로 들어갔느냐는 것이다... 고래는 매우 정교하게 완성된, 육상생활에 적응된 몸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약 800만 년 만에, 대양에 완벽하게 조율된 몸으로 바꾸었다... 작은 너구리만 한 우제류들이 꽃과 이파리를 뜯어먹다가, 위험을 피해 물속에 숨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포식자로서 물속에 숨어 먹잇감을 정찰하며, 물속에 머물렀다. 뒤이은 후손들이 빠르게 헤엄치는 법을 알아냈고, 새로운 먹잇감을 쫓았고, 땅 위에서 돌아다니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버렸다. 다양한 방식의 헤엄을 실험한 뒤, 이들은 마침내 자신의 몸을 미끈한 유선형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육지에 대한 모든 유대가 끊어졌다.(p266) <걷는 고래> 中


  보다 정밀한 시대 구분은 미술 기법의 차이를 통해서 잘 뒷받침됩니다. 왼편의 그림들보다 오른편 그림들이 보다 정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추론 이상의 명백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 선각화 기법이 나왔기에, 조금 더 나아가 선각화의 특징이 잘 담겨진 '농경문청동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반구대의 암각화에 보이는 선각화의 전통은 뒤에 청동기 편에서 소개할 농경문 청동기를 비롯한 일부 청동기 문양에서도 볼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사진] 농경문 청동기(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농경문청동기 農耕紋 靑銅器는 외곽선을 따라 거치문 鋸齒紋을 새겨서 전체적인 틀을 만들고 가운데에 격자무늬 기둥을 세워 좌우로 공간을 마련했는데, 왼쪽 공간에는 머리에 깃을 꽂은 인물이 새를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배부분이 볼록하고 몸 전체에 그물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그릇이 놓여있다.... 제사 의식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청동기의 일부로, 윗면이 기와집의 지붕 모양을 닮았다. 윗 부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여섯 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아마도 끈을 꿰어 다른 기물과 연결하여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p26) <회화 1> 中


 "반구대 암각화"와 "농경문 청동기"는 기법상으로 선각화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외에 등장 인물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가지는데, 바로 벌거벗은 남자 무당의 모습을 통해서 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왼쪽 맨 윗부분에는 발기한 성기를 노출하고 합장하고 있는 남자 무당 그림도 있다. 일본에서는 산으로 사냥하러 들어갈 때 산신 앞에 벌거벗고 제사지내는 풍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고대수렵의식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p3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인물은 간략한 선으로 골격만을 묘사하였는데, 순간적인 동작을 포착하여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인물의 성기를 노출시킨 점이나 몸 속까지 투과하여 표현하는 X-레이 기법을 사용한 점에서는 대곡리 암각화와 기법상 유사함을 엿볼 수 있다.(p26) <회화 1> 中


 수렵 시대(狩獵時代)에 많은 사냥감을 얻기를 기원하며 하늘에 그 뜻을 올리는 남자  무당의 모습을 통해 고대 무녀(巫女) 역시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고대 문명에서 땅에서의 소원을 하늘에 알리는(誥)역할을 남자 무당이 했다면, 하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을 여자 무당이 수행한 것은 아닐까. 양(陽)의 기운을 가진 하늘에 대한 기도는 남성(陽)을 통해서, 음(陰)의 기운을 가진 땅에 대한 답은 여성(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에도 제례(際禮)를 주관하는 이가 대부분 남성인데 반해, 미래를 점(占)치는 이들은 여성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하고 연관도 지어봅니다. 동시에 가톨릭에서 사제직 계승이 남성 중심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고대의 전통에 기반한 것일까하는 몇 가지 질문을 암각화 안의 인물을 통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기원은 예술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데, 간절한 자신과 공동체의 표현이 어떻게 후대의 '예술(藝術 art)' 로 발전했는가는 <건축 강의 Lectures on Architecture 1>에서 잘 설명됩니다.

 

 예술들은 기운에 있어 자연적 욕구들로, 만족을 얻기 위해 인간 영혼의 특정한 본능들에 종속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이 본능들은 오랜 관찰에 의해 규칙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진작부터 말과 기호들이 그의 영혼이 가진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충분치 않음을 인식했습니다... 인간은 예견하고 희망하고 기억하며, 인간의 음성은 그의 의지에 따라 그가 자신의 동류와 소통하고자 하는 감정들을 표현합니다.(p32)... 예술은 전적이고 완전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의 원시 영웅이 죽자 그의 가족은 바위에 그의 유해를 보관할 감실을 파내고 그 위에 사자와 싸우는 남자의 모습을 새깁니다. 남자의 형상은 거대하고 사자는 왜소할 것입니다. 망자의 친지들은 행인들이 재현된 그들의 아버지 혹은 남편을 보고 그가 막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p34) <건축 강의 1> 中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감동(感動)을 기대합니다. 큰 울림을 주는 예술작품을 걸작(傑作)이라 부르고, 위대한 예술가를 존경하는 것은 예술의 기원 자체가 간절한 기도(祈禱 pray)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 합니다...

 

 종교의 실천적 요구와 종교적 경험은 개인들을 초월하여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연속적 형태로 그와 그의 관념들에게 친근한 광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충분하게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그 힘이 우리가 의식하는 자아들보다 더 광대하고 다른 존재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향한 충분한 신뢰를 주기에 충분할 만큼 더 광대한 존재라면, 어떤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무한할 필요도 없고 유일할 필요도 없다. 상상컨대, 단지 더 광대하고 더 신 같은 자아이다. 그 자아의 현실적 자아는 다각적 표현일 따름이다.(p614)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中


 PS. 윌리엄 제임스의 글 속에서 스피노자의 향기를 느낀다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유리 렌즈 냄새같지는 않지만, '영원의 상(相)'의 모습이 이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2. 암각화 속의 고래 사냥을 보니, 최근 일본에서 고래 조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기사가 생각납니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 호랑이가 멸종된 것도 일제(日帝)시대였다는 것도 떠올린다면, <축소 지향의 일본인>에서 말하는 넓은 공간 또는 큰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가 호랑이와 고래 등의 남획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관련기사]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4882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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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에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49)... 돌파구는 미국의 강한 압력을 받고 나서 1964년에야 뚫렸다. 김종필은 재산청구권의 결정 액수를 매듭짓고자 다시 토오꾜오로 갔는데,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4월 한국과 일본의 합의안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한편, '위안부'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됨으로써 추가 청구의 문제가 거론되었다.(p45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의 기술이다. 저자는 1965년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투자한 3억 달러가 당시 수출 총액 2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합의안이 가진 불안 요소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합의안이 가진 '양 날의 검'의 모습은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로 현실화되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이슈와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국 때리기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21세기의 일본 모습은 1869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869년 1월 23일,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때 그 국서에서는 "우리 황제가 즉위하여 강기(綱紀)를 다시 다잡는다"는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의 문서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키토 타카요시(木戶孝允) 등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혹은 다만 50일 내에 30개 대대 병력으로 조선을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전리품을 이용하여 군비를 보충할 것을 강조했다. (p64)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통한 교류를 이어왔지만, 일본이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해 개항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빠르게 변신하려는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림] 征韓論(출처 : https://jpreki.com/seikanron/)


 일본정부는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 난항을 겪으면서 자주 분열되었다. (조슈-사쓰마의 독주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오쿠마는 통화팽창적인 관점을 견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부패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사할린(가라후토(樺太))과 쿠릴열도(지시마(千島))를 독차지하기 위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방과 인근 대륙을 노리는 러시아의 야심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는 동요하고 있는 구사무라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동시에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책을 가구할 수밖에 없었다. 1873년 논쟁의 초점은 조선에 맞추어졌다.(p539)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지배층에 대한 일본 국내의 불만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등 당시 일본 정부가 직면하고 있었던 위기 상황은 21세기 일본의 문제들인 일본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화 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 파문으로 인한 일본국민들의 불만 고조, 아베 신조 총리의 사학 스캔들 문제,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 한국(독도), 중국(센가쿠 열도), 러시아(쿠릴열도) - 등을 연상시킨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869년 일본정부는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을 빌미로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고, 현대 일본은 대한 수출 제한 발표를 하였다.


 일본인은 조선에 대해 유난히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약소국으로서 그동안 맛본 좌절감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조선은 외교관계를 맺자는 일본의 제안을 일관되게 거절해왔다. 도쿠가와 막부는 말기에 조선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보려 했으나, 일본을 의심했을 뿐 아니라 쓰시마를 통해 대일관계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던 조선은 막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시도했다.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하자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막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유수정부를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다.(p540)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한국 때리기를 통해 과연 일본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1869년 1월 25일 기도 다카요시 기록은 일본 지배 계급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체 없이 우리나라의 진로를 결정한 다음, 조선에 사절을 본내 조선의 관리들에게 우리한테 무례하게 구는 연유를 따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공포하고 우리 신국(神國)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면 우리 국민의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은 하룻밤 사이에 바뀔 것이다... 이 정책은 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로운 것이다.(p540)...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내세우고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참고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 <현대 일본을 찾아서>의 저자 마리우스 B.잰슨(Marius B. Jansen)은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일본 때리기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결국, 정한론은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은 무산되지만, 이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통해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한론은 실현되었고, 근현대사의 한-일 양국간 불행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의 감정적인 대응을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부터 적대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 ~ 1909)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중, 일 3국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국 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오랜 역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진] 저격 직전 하얼빈 역 플랫폼(출처 : http://study.zum.com/book/12502)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정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 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은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 3국은 다 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躙)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跋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 청국, 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설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의 치소(嗤笑)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p172)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일본서기 日本書記>에는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 이후 백제(百濟)가 멸망했을 때 왜(倭 일본)의 혼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해에 천황은 백제를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자 스루가노쿠니(駿河國)에 명하여 배를 만들게 했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하쿠스키노에(白村江)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p341)...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고 말하였다.(p342) <역주 일본서기 3 >中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피해 의식이 더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 1922 ~ 2004)는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을 통해 확인해 보자.

 

 '전후 처리와 연관되는 보상 문제도 벌써 국가로선 해결이 완료되었어야 하지만, 최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기회 있을 때만다 제기된 데서 '전후'가 종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사안이 겹친 데서 발생했다. 무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패전 후 이내 냉전이 심각해지고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편입되었다는 점, 소련의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 또 국내의 민중 생활이 의식주 그 어느 것도 바닥까지 내몰렸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p289)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정리해보면, 고대로부터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내왔지만, 백제 멸망이라는 사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과 식민 지배 경험 그리고, 패전에 대한 일본의 피해 의식 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일본인들의 한국인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 위에 일본 지배계급은 국내외 문제 발생 시 불만을 한국으로 터뜨리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넘겨왔으며(임진왜란, 정한론 등) 이번 일도 이런 일련의 흐름의 연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여러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일 간의 문제가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응보다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같은 단편적인 문제보다, 일본에 종속된 경제문제, 일본 조어(造語)에 오염된 우리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 갈등 문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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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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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7-1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이 부분이 잘 짚어낸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쉽게 정리될 것 같진 않군요.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런 행태를 보일 것 같고요.

한일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08:33   좋아요 0 | URL
일본인들 스스로 가해자라는 인식보다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독일과 같은 태도를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화해를 말하기는 어려운 처지니만큼 오랜 평행성을 달릴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oren 2019-07-1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일관계는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온갖 감정들이 ‘격류‘처럼 들끓었다가 잠시 가라앉았다가 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흘러온 듯싶네요.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꾸준히 관계 개선을 해나가야 된다는 점이 아닐까 보여집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미국에게 완패 당하고 나서 자존심을 모조리 거둬들이고 미국에 찰싹 달라붙어 한몸이다시피 우호적으로 지내왔고, 지금까지도 미국에는 무조건 ‘맹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생존 본능‘ 또는 ‘경제적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원한 감정이 너무 앞서서 ‘일본과의 공생‘ 또는 ‘미래 지향적인 모색‘에는 너무 등한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일본이 이번에 저토록 쎄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작정한 듯한 분위기가 다분한데(한미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내지는 재설정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는 판국이고, 이참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까지는 밀어부칠 듯한 분위기고요.), 정치권에서는 너무나 한가하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도 많이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근현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의 문제를 보면,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30년 전쟁 이후 끊임없이 독일을 작은 나라로 쪼개려 노력했던 프랑스의 모습과 한국을 남북한으로 나뉘어 통치하려는 일본의 저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사이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서이지, 그들이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물론, 19세기 프랑스-독일의 정세와 오늘날 한국-일본의 정세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미 국민총생산과 인구 등 여러 면에서 프랑스를 앞선 독일의 상황과 아직도 일본에 뒤쳐진 부분이 많은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모습은 상호평등,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이웃의 모습이 아니기에 지금 평화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과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단호한 의기를 보여준 그를 적이지만 존경하는 모습을 본다면, 일본의 적절하지 못하 태도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향후 양국간 외교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나도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일본이 배상판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향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 당연히 언급될 배상문제도 걸려 있다 여겨집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조건으로 국가간 배상에 합의한 한국과는 달리 아직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술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배상을 하더라도 한국의 전례에 맞춰 푼돈을 쥐어주려는 심산이었는데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온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측면도 있다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도 일본에 대해서는 차가운 대응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1:45   좋아요 1 | URL
다른 한 편으로, 우리 나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냉정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분기탱천해서 일본의 무모한 도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제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매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아닌 개인의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야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oren님 말씀처럼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분명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oren 2019-07-16 13:04   좋아요 1 | URL
국가간의 갈등은 대체로 위정자들이 바뀌면 그때마다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아베 정권은 너무나 치졸하고 악랄하게 한국을 괴롭히고 있고, 문재인 정권도 거기에 맞대응하는 방식이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듭니다. 좀 더 길게 보고, 위기를 도리어 역이용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도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뿌리가 깊은 양국간의 정치외교적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치고 나온 데 대해서는 집요하게 그 부당성을 물고 늘어지더라도, 감정적이고 격앙된 맞대응보다는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접근해서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3: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격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면, 다음에도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 정부 때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를 외교문제로까지 커지게 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oren님 말씀처럼 현재의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9-07-16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0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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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7-17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치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당시 민족우월주의와 전체주의가 만나 빵~
약육강식으로 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떨칠 수가 없는 그런 흐름이라니까요. 자유 민주주의 꺼풀 아래 ㅎㄷㄷ 한 게 오죽이나 많습니까ㅎㅎ
삶은 계속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고^^;

겨울호랑이 2019-07-18 07:47   좋아요 1 | URL
파시즘의 성격 자체가 극우 민족주의와 프로파간다(대중선동)이 만나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극우에 대한 경계를 하게됩니다. 그렇다고, 극좌에서 이루어진 만행(스탈린의 경우)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니,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위협받지 않고 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겨집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니, 역사 속에서 ‘기출문제‘와 답을 미리 예상해 볼 수 있어 어느 면에선 편리합니다.ㅋ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大震)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마무리되고, 이제는 남아있는 유적(遺蹟)마저 훼손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에서는 이와 같이 사라져가는 고구려 산성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오늘 와서 보다시피 박작성(泊灼城)은 어느 날 갑자기 만리장서 동단의 기점이란 설명하에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다. 고구려 특유의 석성을 벗겨내고 그 위에 명나라의 전형인 벽돌로 쌓은 성으로 완전 탈바꿈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해왔다... 수많은 자료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2009년에 명나라 장성의 동쪽 끝단이 호산장성이라고 발표했다.(p223)... 호산장성이 들어서기 전에만 하여도 단동 관광지도를 보면 그 자리에 "고구려 성터", "고구려 옛 우물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에서만 없앤 것이 아니라 아예 성은 둔갑을 하였고, 우물을 메워 고구려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에 와서 보는 압록강변의 고구려성들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다.(p224)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中


 이제는 다른 나라의 땅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유적들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자료는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은 고구려가 요동(遼東)에 위치한 나라였으며,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의 노력이 궁색해 보이기만 한다. 그 중에서도 최부(崔溥, 1454 ~ 1504)의 <표해록 漂海錄>에서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謨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p246) <표해록> 中


 진기 일행이 말했다. "우리 요동성 지역은 귀국과 이웃하여 의(義)가 한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감히 약소한 물품로써 예를 표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땅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다. 고구려는 지금 조선의 땅이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 실상은 한나라와 같소."(p351) <표해록> 中


 계면(戒勉)이라는 승려가 나에게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소승의 조부가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이곳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제례(祭禮)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p496) <표해록> 中


 정작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적 훼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은 요동을 지나면서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고, 숙신 肅愼, 예맥 濊貊 등 동이 東彛(彛는 夷와 통해서 쓴다)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위만조선 衛滿朝鮮에 복속되었던 사실을 모르고, 오랄 烏剌, 영고탑 寧古塔, 후춘 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 영토인 줄도 모른다.(p84) <열하일기 1> 中


 비록 반도 안에서 삼국을 합병했으나 그 강토와 국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건만, 후세의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은 평양의 옛 이름만 마음으로 글워하여 한갓 중국의 역사 기록에만 기대고 수나라, 당나라의 옛 자취에만 흥미를 느껴 '이곳이 패수이다, 이곳이 평양이다'라고 한다. 이미 실제 사실과 다르고 차이 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이 안시성이 되는지 봉황성이 되는지 어찌 분변할 수 있겠는가?(p88) <열하일기 1> 中


 혼(魂)과 백(魄). 고구려의 백(魄)이 건축물, 미술품 등 유물이라면, 고구려의 혼(魂)은 문헌 속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백(魄)이 죽은 후 3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처럼, 유물은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더라도, 문헌 속에 담긴 뜻을 새긴다면 그 혼은 우리 안에서 불멸(不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는 잃어버린 땅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더 절실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PS.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가 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이 곳이 배출한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를 러시아 철학자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 민족의 본성(本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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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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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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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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