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 은 - 순간의 꽃-


시(詩)는 압축적인 표현으로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문학이라 개인적으로 어렵게 다가오는 문학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시인이 의도한 바와 같은지, 내가 시인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머리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시가 가슴까지 내려가기전 머리에 맴돌다 빠져가는 느낌이 드네요. 지금껏 많은 시를 읽지 못했지만,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世界)에 제가 다가가지 못하는 벽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여러가지 장벽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벽을 시와 함께 정리해 봅니다.


1. 언어(言語) 장벽

 

시인(詩人)이 사용하는 시어(詩語)는 의미가 함축적이고, 여러 의미를 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리듬을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시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도 하지만, 특히 외국 시인인 경우 보다 높은 언어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의 sonnet 14의 영어원문입니다.


Not from the stars do I my judgement pluck,

And yet methinks I have astronomy,

But not to tell of good or evil luck,

Of plagues, of dearths, or season's quality;

Nor can I fortune to brief minutes tell,

Pointing to each his thunder, rain, and wind,

Or say with princes if it shall go well

By oft predict that I in heaven find.

But from thine eyes my knowledge I derive,

And, constant stars, in them I read such art

As truth and beauty shall together thrive

If from thyself to store thou wouldst convert :

or else of thee this I prognosticate,

Thy end is thruth's and beauty's doom and date. (p409)


 영문 시는 제게 외국어(外國語)라는 언어의 한계 때문인지 어렴풋하게 내용이 다가옵니다. 마음 깊이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래 번역시가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나는 별들에게서 판단을 얻으려 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겐 점성술이 있다고 생각한다.

운의 길흉을 말하려 함도 아니요.

질병 기근 계절에 대하여 말하려 함도 아니라.

또 개개인의 생에 오는 풍우 뇌성을 

그 시각까지 예시할 수도 없고,

또는 하늘에서 자주 나타나는 전조를 보고

경사스러울 것을 왕후에게 고하려 하지도 않노라.

그러나 나는 그대의 눈으로부터 지식을 얻고,

불멸의 별 그 눈 속에서 이런 것을 읽었노라.

'그대 회심하여 자신의 공급자가 된다면,

진(眞)과 미(美)는 같이 번영하리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예언하리라.

'그대의 죽음은 진과 미의 종말이라'고.(p23)


 외국 작가의 작품인 경우 원전(原典)을 통해 보다 깊이있게 다가가고 싶지만, 지금 현재 언어적 장벽을 포함한 문화적 장벽은 제가시를 즐기게끔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2. 지식(知識) 장벽

 

 대부분의 시가 가슴을 적신다면, 어떤 시는 머리로 읽어야 하는 시도 있습니다. 이 상(李 箱, 1910 ~ 1937)의 <운동>과 같은 시가 그렇습니다.


運動(운동)


一層(일층)우에있는二層(이층)우에있는三層(삼층)우에있는屋上庭園(옥상정원)에올라서南(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옥상정원)밑에있는三層(삼층)밑에있는二層(이층)밑에있는一層(일층)으로내려간즉東(동)쪽으로솟아오른太陽(태양)이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시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시간)은맞는것이지만時計(시계)는나보담도젊지 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시 전체가 한 문장으로 연결된 이 시는 해설없이는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전집에서 설명한 시의 해설 부분을 살펴봅니다.


 '해설 : 이 작품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관련된다. 시적화자는 1층에서 3층 옥상을 오르내리면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헤아리고 태양의 고도와 움직임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그리고 태양이 하늘의 한복판에 와  있는 순간에 자신의 위치를 헤아려보게 된다. 공간 속에서 고도(상하), 위도(남북), 경도(동서)라는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p245)


  해설을 통해서 <운동>이라는 시가 물리학 법칙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시의 배경지식인 상대성(Relativity) 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의 <상대성 이론> 중 시와 연관된 '시계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추측이지만, 천재(天才) 이 상이 아래의 실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관측자는 시계와 측정자를 가지고 원판 위에서 실험할 수 있다. 이 정의들은 관측에 근거한다. 이 실험에서 관측자는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실험을 시작하기 위해 원판 중앙과 모서리에 동일한 시계를 하나씩 놓았다. 이 시계들은 원판에 대해서 모두 정지해 있다.... 기준 좌표계에서 보면 모서리에 있는 시계는 원판 중앙에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 원판에서 또는 일반적인 모든 중력장에서 시계가 놓인 위치에 따라 시계는 빠르게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한다. 이렇기 때문에 기준 좌표계에 관해서 정지해 있는 시계를 가지고 시간의 정의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p85)


  이러한 상대적 시간 속에서 시인은 공간적 운동을 노래합니다. 작품에 대한 수리철학적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詩)는 화자의 수직운동과 태양과 시계의 회전운동을 노래한다. 태양이 양(positive)의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는 동안에 시계는 그 대립인 음(negative)의 방향으로 운동한다(p215) ... 이 시의 회전운동은 태양이 동(東)에서 서(西)로 양(+)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에 시계는 반대로 음(-)의 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리고 태양이 한 바퀴 회전하는 동안에 시계는 바쁘게 2바퀴를 회전해야만 한다. 정오의 시각만이 태양과 시계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치하는 유일한 곳이다. 또한 그곳은 화자의 시선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3방향의 운동이 동시에 일치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p218)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교점, 태양과 시계와 화자의 교점이 시간적으로는 '정오'에서 공간적으로는 '옥상'에서 형성됩니다. '시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의 시계는 정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정지된 시계'를 통해 시간의 정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화자는 쓸모없는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운동 運動>의 내용인듯 합니다.(이 내용과 '자아분열'이 연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를 마음으로 느끼기 전에 겪는 이러한 언어적(또는 문화적) 장벽, 지식 장벽외에도 다른 여러 장벽이 있기에 아직 시는 제게 어려운 분야입니다. 이런 장벽에 걸려 시가 머리에서 차마 가슴까지 내려가기 전 증발해 버리고 말지만, 작가와 좀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한다면 언젠가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이 상의 시를 읽고 나니 문장도 괜히 길어집니다..) 앞뒤없이 시를 멀리하는 자신을 합리화시켰네요... 보다 쉬운 시(詩)도 많으니 다른 작품으로 접근하는 편이 더 나을 듯 합니다.ㅋ 


이웃 여러분, 시(poem)와 함께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28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8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28 17: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상의 시 한 편 읽기 위해서 이 시를 연구한 학술 논문 한 편을 먼저 읽어야합니다.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5-28 17:41   좋아요 1 | URL
그래야할 것 같네요. 많이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AgalmA 2017-05-28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상 시와 상대성이론을 비교한 논점이 멋집니다^^b 수학과 과학을 늘 대입해보는 겨울호랑이님 특징이죠ㅎㅎ

겨울호랑이 2017-05-28 21:46   좋아요 2 | URL
^^: 에고. 이 상 전집에 ‘상대성 이론‘이 나와있어서요... 생각해보면 꼭 고등학교 때 국/영/수를 못한 애들이 사회 나와서 국/영/수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꼭 군대 안 다녀온 애들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경우와 마치 비슷한 것 같군요..ㅋ

AgalmA 2017-05-28 22:11   좋아요 2 | URL
영/수는 아직도 제 恨이죠ㅎ;;
음...제가 군대를 안 다녀와서 양성 병역 의무제 찬성하는 지도요ㅡ,.ㅡ 지금 가라고 한대도 가긴 갈 거라는.
다만 국가 착취 구조로 운영되는 지금 시스템이 병역 문제를 남녀 성대결로 만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8 22:15   좋아요 2 | URL
^^: 여성의 군 복무가 필요하다면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헌법의 정신에 부합하겠지요. 다만 현재 지상군 중심의 한국군 체제에서 여성징병제는 수용할만한 여건도, 필요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평화 정착이후 단계적으로 지원제로 가야겠지요.^^:

AgalmA 2017-05-28 22:21   좋아요 2 | URL
인구 축소와 기술 발전화로 어차피 군대는 인적 자원을 줄일 수밖에 없는 수순이죠. 이미 지금 전쟁 양상도 지상군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니까요. 거의 날마다 군대내 위계적 성폭력 문제가 자주 터지니 여성 병역을 기피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죠.

겨울호랑이 2017-05-28 22:26   좋아요 2 | URL
네 AgalmA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육군 위주로 운용되는 현 상황과 일본제국군의 구태를 벗은 군 제도 개혁. 그런 후 인적쇄신이 한국군의 선결과제라 생각되네요.. 군 기득권 세력 교체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7-05-28 22:43   좋아요 1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를 부과해야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경우, 여성은 군복무 대신 사회적 약자돌봄과 같은 대체 의무 부과가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마립간 2017-05-29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병역 의무에 대한 대체 복무는 실현 장벽이 별로 없기에 논의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여성이 병역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 선천적 이유가 더 큰지, 아니면 후천적 이유(사회적 환경)가 더 큰지 고민되지만 저는 잠정적으로 전자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9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여성의 병역 문제가 이슈가 될 가능성은 현재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향후 인공지능의 발전 등으로 ‘전투‘보다 ‘전략‘이 더 중요해지는 시점에는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체 능력이 전쟁 수행 능력과 직결되는 과거와 전쟁 양상이 달라진다면, 이에 따른 제도 변화도 이야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2017-05-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오케스트라(Orchestra)


 '오케스트라에는 20여종의 악기가 동원되죠. 그러니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작곡가가 그리거나 지휘자가 읽는 악보는 필연적으로 20여개의 보표들을 포개놓을 수 밖에요.'(p88)



 [그림] 오케스트라용 악보 (출처 : http://blog.daum.net/peturuslee/6008528)


 '악기 그룹들이 병치된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에서 3악장 스케르초를 들어볼까요? 여기서는 오케스트라의 세 개 악기 그룹들이 교대로 부각됩니다. 우선 현악기 5종의 피치카토가 나오고요, 이어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목관악기 그룹이 부상하죠. 그 뒤를 호른, 트럼펫, 트롬본의 금관악기 그릅이 이어받고 여기에 목관악기 그룹이 가세합니다. 그리고 다시 현악기 5종의 피치카토죠. 마지막으로 이 그룹들이 모두 합쳐졌다가 분리되면서 끝납니다.' (p90)



 '로장탈씨, 오케스트라를 마주할 때면 어떤 기분인가요?... 아주 인간적인 감정이랄까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상대와의 만남이 그렇듯 조금은 두려운 감정이 듭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는 정말로 한 사람과도 같고 오케스트라마다 그 사람됨이 각기 다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오케스트라마다 다른 방법을 써서 다가가고, 감동시키고, 청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p94)... 상황이 악화되면 예술가들의 예민함이 다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지 않죠. 어떤 악기를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다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첼로 연주자가 틀렸다고 해서 그 대목을 트럼펫까지 같이 한번 더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p97)


2. 하프시코드(Harpsichord)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의 조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두 악기의 기원은 하프의 기원만큼이나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자, 스피넷과 하프시코드는 키타라처럼 현을 퉁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 撥絃樂器에요. 반면에 클라비코드와 오늘날의 피아노는 헝가리의 심발론처럼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 打絃樂器입니다.'(p100)


 '현을 뜯어서 나는 소리는 짧고 날카로워요. 이론적으로는 소리의 세기에 변화도 없죠. 하지만 현을 때려서 나는 소리는 울림이 꽉 차 있는 느낌이죠.'(p100)



'아주 물리적으로만 말하자면 "표현 Expression" 이라는 단어는 소리를 부풀리거나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죠. 이렇게 보자면 하프시코드는 표현력이 있는 악기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음악에는 더 넓은 의미의 "표현"이 있죠. 음악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미묘한 차이들을 아우르는 표현 말입니다. 템포의 미묘한 변화, 강약의 변화, 악상 달기, 건반의 터치에서 비롯되는 음색과 음량의 변화도 있죠.'(p108) 


하프시코드가 다른 건반악기인 피아노와 오르간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Bach의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 565>를 통해 확인해 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에 좋아하는 연주곡은 달라질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버전이 가장 마음이 드네요. 악기의 우위보다는 연주되는 장소와 곡(曲)에 따라 개인의 선호는 달라질 것 같습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있다고 하니, 이웃분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거운 5월 마지막 일요일 보내세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28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8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의 나침반 The compass of Zen>은 숭산(崇山, 1927 ~ 2004)스님의 가르침을 현각(玄覺, 1964 ~ ) 스님께서 엮은 책이다. <선의 나침반>은 불교 입문자들에게 '불교(佛敎)가 무엇인가?'를 전반적으로 잘 소개한 책이라는 평(評)을 받고 있다. 좋은 평가에 맞게 간결하면서도 핵심(核心)을 설명하고 있어 불교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데 도움이 되며, 특히 불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종교가 다른 이들에게 <선의 나침반>은 어떤 방식으로 불교(佛敎)를 알려주고 있을까. 먼저 책의 제목인 <선의 나침반>의 의미를 서문(序文)에서 살펴보자. 


 '이 책의 제목을 왜 "선의 나침반"이라고 지었는가? 부처님은 우리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들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나고, 우리의 욕망과 집착 때문에 우리는 고해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산스크리트로 이것을 "삼사라(samsara, 輪回)"라고 부른다. 돌고돌고 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지혜(prajna)의 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배에는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나침반이 필요하다.'(1권 p17)


 '불교 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써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오직 모를 뿐"이다.'(1권 p28)


 우리가 삶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진리'를 가르키는 진리의 나침반을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나침반을 발견하는 과정이 참선 수행일 것이다. <선의 나침반>에서는 진리 그 자체보다 참선 수행의 목적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불교 지식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선의 나침반>에 소개된 여러 내용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리뷰를 작성해 본다. 


 1. 불교(佛敎)와 물리학(Physics)


 <선의 나침반>에서는 불교의 우주관(宇宙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세계를 시간과 공간으로 구분하고 우리의 상황이 세계 안에서 어떤 관계(인과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p112)...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 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1권 p119)

 

 이와 같은 불교의 우주관을 우리는 현대 물리학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의 장(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운동(運動), 그리고 그 안의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자연의 법칙을 찾는 물리학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불교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 이 행위들이 전개되는 연출무대는 공간space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space and time임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삼차원이지만, 그래프에는 직선(일차원)으로 표시하도록 하자. 즉, 수평축은 공간을, 수직축은 시간을 나타내는 그래프에 사건의 위치를 표시하기로 한다.'(p138)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강의>







[그림] 시간과 공간 (출처 : http://hkpark.netholdings.co.kr/web/manual/default/manual_print.asp?menu_id=107589&id=2773)


2. 불교와 기독교(基督敎)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내 인식틀은 '기독교'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 신자들의 인식과는 차이가 생겨나지만, 그런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의 나침반> 안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선의 나침반>에서 숭산 스님께서 불교의 용어로 불교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불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열반적정'을 설명한 부분을 살펴보자. 


 '열반적정(涅槃寂靜), 생사를 윤회하는 고통을 벗어난 피안이다. 신을 찾고 싶으면, 또 부처를 찾고 싶으면, "참 나" 혹은 "절대"를 찾고 싶으면, 당신은 이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를 얻어야 한다. 이 정적이란 진정한 공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의 본질이다. 14세기에 지어진 한 기독교 시(詩)는 이것을 아주 맑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깨끗하고 텅 빈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모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본성품이 되어

 밝음과 어둠, 고요함과 폭풍이 된다.


 The God who is pure emptiness(空)

 Is created as form(色)

 Becoming substance, light and darkness,

 The stillness and the storm.'(p140)


 또한, 프랑스 신부님들과의 대화를 소개한 다른 대목에서는 비록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시간관(時間觀)과 불교의 시간관이 서로 통함을 발견하게 된다. <선의 나침반>에서는 바로 '지금' 이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선사님께서는 "원점(primary point)"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프랑스 신부의 질문)...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단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테이블을 치는 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부처님 이전입니다. 우주 이전입니다.... 법화경은 바로 이 지점이 어떻게 우리의 본성이고 모든 현상의 본질인지 깨닫게 해준다. 실제 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이 장소가 아닌 때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1권p192)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는 <고백록> 11권에서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당되는 내용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리뷰에서 옮겨본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관련 내용 : http://blog.aladin.co.kr/702641187/8621064] 

<고백록> 11권에서는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1)"는 구절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 주된 내용으로 다루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신(神)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이다. 하느님(神)의 시간은 영원이며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현재'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만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재게 되고, '미래->현재-> 과거'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통해,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되고, 끊임없는 시간의  확장을 통해 하느님께  영혼이 흘러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시간론'이다.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 <고백록> (11권 20,26) 


 이처럼 <선의 나침반>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가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어 하나만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眞理)가 결코 언어(言語)의 형식에 좌우되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점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은 아닌듯하다.


 '나는 미국 가톨릭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참선 지도를 할 때마다 한번도 "부처"라거나 "불성"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대신 "신성(神聖)"으로 바꿔 불렀다. 수도사들은 아주 행복해했고 우리 모두는 완전히 서로를 공유할 수 있었다.'(2권 p185)


 3. 진리를 깨닫다


 이러한 다른 종교의 세계관(世界觀), 교리(敎理)가 통할 수 있다는 점은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진리를 찾는 과정은 <요한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8장을 통해 잘 드러난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If you remain in my word, you will truly be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요한 8 : 31 ~ 32)


 한편, <선의 나침반>에서는 '선원(禪圓 The Zen Circle)'을 통해서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깨달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0도는 "작은 나(small I)"이다. 90도는 "업을 가진 나(Karma I)"이다. 180도는 "나가 없는 나(Nothing I)"이고, 270도는 "자유로운 나(Freedom I)"이다. 그리고 360도는 "큰 나(Big I)"이다. "큰 나"란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나와 너는 하나이다. 선 수행은 바로 이 360도에 도달하는 것이다.'(2권 p128)


 '"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만물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360도에 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꽃은 붉고 벽은 하얗다. 나와 이 세계가 언제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된다. 큰 사랑과 큰 자비로 오로지 중생을 돕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이다.'(2권 p130)


  이처럼 <선의 나침반>은 불교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여러 관점에서 불교를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 신자 뿐 아니라 나와 같은 타종교인들도 편견없이 불교에 대한 개관(槪觀)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해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ps <파인만의 일반인을 위한 QED강의>의 출판사가 '숭산' 스님과 발음이 비슷한 '승산' 출판사라는 것은 '불교'와 '물리학'과의 관계와는 무관(無關)하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22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2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3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24 0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 인식으로는 시간과 공간은 나뉘지 않습니다. 굳이 나눠야 한다면 차라리 그것은 [시간-공간] 한 경계 그리고 다른 [시간-공간] 이 이어지는 연속체이자 무한 다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같이 움직이고요. 과거를 떠올리면 공간과 시간은 따로 오지 않습니다. 함께 옵니다. 여튼 이것도 제 사고실험일 뿐이겠지만요.
시간과 공간을 나누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선적인 세계에 갇히고 인과론적 사고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런 사고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만. 10차원 상상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죠.

선의 나침반은 저도 읽어보려 한 책인데, 제겐 좀 실망스러운 소식이네요;

겨울호랑이 2017-05-24 07:52   좋아요 2 | URL
^^: 제가 쓴 리뷰가 <선의 나침반>에 대한 전체 내용을 정리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리뷰에서 언급한 구절이지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잡고 끊임없이 정진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가 깨닫지 못해서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공(空)의 세계에서는 시간-공간의 구분도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설명 자체가 필요없겠지요.) 그럼에도 1권에서 ‘시간-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일반인들과 함께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책의 내용과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후애(厚愛) 2017-05-26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겁고 행복한 금요일 되세요.^^
맛있는 점심 드시구요~

겨울호랑이 2017-05-26 12:17   좋아요 1 | URL
^^: 후애님도 여유있는 금요일 되세요. 보노보노가 아기해달인 것을 보니 제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캐릭터인것 같습니다 ㅋ

서니데이 2017-05-26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종교와 철학의 문법도 수학과 과학의 문법처럼 낯선 먼 나라의 언어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금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05-26 21:51   좋아요 2 | URL
^^: 저 역시 낯선 이방인중 한 명입니다.ㅋㅋ ㅜㅜ 어렵기만 하네요. 서니데이님 하루 마무리 잘 하시고 편한 밤 되세요^^:
 

 '호른(Horn) 또는 프렌치 호른(French horn)은 나팔꽃 모양의 금관악기다. 발생적 기원에 관하여서는 트럼펫과 같으나 호른이라는 것은 '뿔(角)'을 의미하므로 특히 뿔피리(角笛)를 그 기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호른의 직접 조상은 유럽의 수렵용 호른으로서 특히 프랑스에서 발달하였다.'[출처 : 위키백과]


[그림] 호른


뿔피리에 기원을 둔 호른의 유래를 우리는 <롤랑의 노래>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에스파냐의 마르실왕은 조약을 깨고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가 철수한 틈을 타 롤랑의 후위부대를 공격한다. 롤랑의 후위부대는 피레네 산맥의 롱스포에까지 추격당했다. 롤랑의 전우이자 지략가인 올리비에는 롤랑에게 구원을 청하라고 세번 청한다. 롤랑의 큰 뿔나팔 올리판트는 멀리 있는 샤를마뉴대제의 군대에까지 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롤랑은 오만했다. 자신은 명검 듀렌달을 가지고 있었고 최고의 기사라고 생각한 롤랑은 구원을 청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고 롤랑은 자기 주위에 약 60명 가량만이 남았을때야 비로소 뿔피리를 불어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뿔피리 소리를 들은 샤를마뉴 대제가 군대를 돌려 싸움터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모두가 전멸한 뒤였다...' [출처 : 위키백과] 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 의 요약

 

1. 하프(Harp)


'18세기 하프 유행은 그야말로 여성의 멋내기 유행 같은 거 아닐까요? 하프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악기죠. 연주 자세에서 예쁜 손과 우아한 팔, 아리따운 옆모습이 돋보이기도 하고... 맞아요. 그 시대는 하프가 살롱의 장식물이었죠. 하프는 로망스들과 함께 했죠. 마리 앙투아네트도 하프를 연주했답니다...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을 빼놓을 순 없어요.'(p78)


 '더블 액션 하프가 개발됨으로써 하프는 오케스트라와 음색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는 하프가 곧잘 음들을 미끄러지듯 연주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효과를 자아내죠.'(p79)


2. 호른(Horn) / 프렌치 호른(French Horn)


'모난 데 없는 부드러운 소리 덕분에 프렌치 호른은 금관악기와 목관악기를 이어주는 중재 역할을 톡톡히 해냈죠. 약간 불분명하면서도 유유한 느낌의 호른 소리는 우리의 친구 쿠르티나 씨 같은 명연주자의 손안에서 더욱더 매력을 발합니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호른 협주곡>들도 빼놓을 수 없죠.'(p82)


3. 팡파르(Fanfare) : 트럼펫, 호른, 트롬본, 튜바


'제가 맞게 이해한 거라면 팡파르는 금관악기들의 4중주네요...현악 4중주나 4중창만큼 완벽하게 일체를 이루는 4중주는 아니죠. 앞에서 얘기했듯이 호른은 금관악기와 목관악기를 중재하는 역할입니다. 요컨대, 이걸 4중주로 치자면 각 요소의 음색이 꽤 상이한 4중주에요. 그래도 현대음악에서 확실한 성공작을 하나 꼽자면 폴 뒤카의 <라 페리>를 여는 팡파르가 있지요.'(p8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21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1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21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뷔시의 <달빛> 하프 연주 버전도 좋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5-21 16:53   좋아요 0 | URL
^^: 그렇군요. cyrus님 추천으로 들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제4차 산업혁명(第四次 産業革命, 영어: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4IR)은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낸 혁명 시대를 말한다. 18세기 초기 산업 혁명 이후 네 번째로 중요한 산업 시대이다. 이 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 인터넷, 무인 운송 수단(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 3차원 인쇄, 나노 기술과 같은 6대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 혁신이다.


 세계 경제 포럼 창립자 겸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의 저서 《제4차 산업 혁명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에서 이 네 번째 혁명이 기술 발전에 의해 특징 지어 졌던 이전의 세 가지 혁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웹에 연결하고 비즈니스 및 조직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며 더 나은 자산 관리를 통해 자연 환경을 재생산 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출처 : 위키백과]

  

<4차 산업 혁명의 충격>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4차 산업혁명의 파급 효과,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 변화 등에 대한 내용을 여러 전문가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새로운 기술(디제털 제도, 사물인터넷, 모바일 금융 혁명, 합성생물학, 로봇) 등이 가져온 변화와 향후 발전 전망과 필요한 정책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의 충격>의 서문에서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의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클라우스 슈밥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이 이전 산업혁명과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속도, 범위, 시스템에 미치는 충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이 혁명은 3차 산업혁명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그것과 구별되는 4차 산업혁명의 도래라고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그 속도와 범위 그리고 시스템에 미치는 충격이다. 현재와 같은 비약적인 발전 속도는 전례가 없다. 이전의 산업혁명들과 비교하면, 4차 산업혁명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모든 나라에서, 거의 모든 산업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혁명에 따른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생산, 관리, 통제 전반에 걸쳐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한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연결된 수십억 인구는 전례 없이 빠른 처리 속도와 엄청난 저장 용량 그리고 편리한 정보 접근성을 갖춤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무한해질 것이다.'(p18)

 

[사진]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아이폰(iPhone) (출처 : ttps://estimastory.com/2013/10/05/therebeaniphone/)


 2007년 스티브 잡스의 애플에서 아이폰을 출시한 후 1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스마트폰으로부터 파생된 많은 변화를 겪은 것이 사실이지만, 한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스마트폰이 인류 역사에 가져온 변화는 전례없이 혁명(革命)적인 것인가? 4차 산업에 대한 수많은 낙관적인 전망과 예찬으로 가득한 <4차 산업혁명의 충격>속에서  '기술낙관론에 대한 반박(마틴 울프)' 장(章)에서 이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과거의 혁신은 오늘날 상대적으로 사소한 혁신보다 훨씬 더 큰, 정량화되지 않은 가치를 창출했다. 전화가 없던 세상에서 있는 세상으로의 변화나 석유 램프를 사용하던 세상에서 전등을 사용하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된다. 깨끗한 물과 수세식 화장실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누가 정말 인터넷에 관심을 두겠는가?... 우리가 상대적으로 사소한 우리 시대의 혁신에 감동하는 이유는 과거의 혁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p166)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요즘이다. 2016년초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래 이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16년 말로 기억된다. 2016년 12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클라우드 슈밥의 <4차 산업혁명>을 읽는다는 기사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제19대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이와 관련한 공약을 제시하면서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져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전반 모든 분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마치 4차 산업혁명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면  곧 도태(淘汰)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 1867~1947년)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1929년 10월 14일 월요일 저녁, 어빙 피셔는 뉴욕의 파크 애비뉴 2번지 건축가 교류 클럽에 도착했다. 그는 예일 대학 경제학 교수이며 동시대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로 구매관리자협회의 월례 미팅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셔는 인사말이 끝난 후 안타깝게도 주식 시장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을 언급했다. “주가가 영원히 하락하지 않는 고원의 경지에 이르렀다(Stock prices have reached what looks like a permanently high plateau.)"

 

피셔의 연설이 끝난 2주 후인 10월 29일 주식은 폭락했다. 그가 말한 ‘고원의 경지’는 ‘끝없는 심연’으로 바뀌었다. 그 후 3년간은 주식 시장 역사상 가장 심각한 약세장이었다.. '


   많은 이들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을 제시하는 이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업규모에서 2005년 '블루오션 Blue ocean', '6시그마 Sigma' 등의 신경영기법이 제시되었고, 국가 차원에서는 2008년 '녹색성장', 2013년 '창조 경제'라는 구호가 등장했었다. 세계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 세계적인  IT 혁명이 그러한 패러다임의 예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4차 산업혁명에서 말하는 여러 현상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같은 시대의 우리가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18세기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 ~ 1819)가 증기 기관을 개량하면서, "자, 이제 산업혁명시대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200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림] 제임스 와트와 증기기관( 출처 : http://unibranding.tistory.com/272)


 그런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의 충격>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차원으로 가볍게 읽을 책이라 생각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18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8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9 0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7-05-19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레미 시겔 교수의 저 책을 구판(『제레미 시겔의 주식투자 바이블』)으로 읽었는데, 어빙 피셔의 호언장담은 지금 다시 들어도 여전히 배우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존 템플턴 경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네 단어‘라고 말했던 ˝This time it‘s different˝ 라는 문장도 다시금 생각나고요. 그런 착각들이 ‘튤립 파동‘과도 같은 엄청난 버블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지구는 돌고, 4차 산업혁명은 거센 물결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인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4:20   좋아요 0 | URL
^^; 네 oren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oren님 말씀처럼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잘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발이 딛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겠지요. 다만, 이러한 흐름을 잘 타지 못하고 휩쓸려가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할 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oren 2017-05-19 14:2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댓글을 보니 갑자기 셰익스피어의 대사 한토막이 떠오릅니다.^^
* * *
인간사에는 조류라는 게 있어
시류를 잘 붙잡으면 큰 행운으로 이어질 수 있소;
놓치게 되면 앞으로 헤쳐가야 할 운명은
얕은 여울에 처박혀 비극으로 점철될 것이오.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면,
지금 밀려들어오는 만조를 붙잡아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험은 실패할 것이오.
- 『줄리어스 시저』, <4막 3장>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7-05-19 15:01   좋아요 2 | URL
^^: orens님 좋은 구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께서 알려주신 글 뒤에 이 구절을 추가해 봅니다.

그러니 이제 정신을 차리고 불행과 공포를 잊어버리시오.
아마 이 고생도 그대들에게 언젠가는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 것이오.
온갖 파란을 겪고, 그토록 많은 위험을 뚫고 우리는 라티움으로 향하니, 그곳에서 운명은 우리에게 안식처를 줄 것이오. - <아이네이스 제1권 202 ~ 205 -

oren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은 아마도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한 말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줄리어스 시저>를 읽지 않아 조심스럽습니다만, 불확실성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oren 2017-05-19 17:5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 인용해 주신 『아이네이스』의 싯구도 정말 좋군요. 그런데 제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안타깝게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이 아니랍니다. 그는 <3막 1장>에서 죽으니까요. ˝브루투스, 너 마저?˝ 라는 명대사와 함께요. 4막 3장은 <줄리어스 시저>의 ‘진짜 주인공‘인 브루투스가 카시우스(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와 함께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필리피 평원‘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브루투스의 대사‘랍니다.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끝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의 군대에 패배한 끝에 장렬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지요.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최후‘를 ‘그림‘으로 구경하시고 싶으시면 ☞ http://blog.aladin.co.kr/oren/6884723

겨울호랑이 2017-05-19 18:09   좋아요 0 | URL
^^: 그렇군요.. 나중에 <줄리어스 시저>를 읽을 때 해당 구절을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필리피 평원에서 부르투스의 죽음을 다뤘다면, 또다른 작품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악티움 해전으로 인한 이들의 죽음이 다루어졌는지도 궁금해집니다.^^: oren님 덕분에 세익스피어의 작품세계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19 18:48   좋아요 1 | URL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무대 장면‘이 무려 42번이나 바뀌는(全 42장) 연극으로도 유명하더군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그만큼 ‘전세계를 누비며‘ 연애를 했기 때문인데, 그 가운데 ‘악티움 해전‘을 빼놓을 수는 없죠. ‘막강한 육군 병력‘을 갖춘 안토니우스가 어리석게도 좁은 항구를 가진 ‘악티움‘에서 해전으로 맞붙은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그 전쟁에 클레오파트라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더욱 문제였죠. 그리고 그녀가 겁을 먹고 이집트로 달아나니까 ‘자기가 총사령관인 줄도 잊어버리고‘ 그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간 것도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고요. 플루타르코스는 그 대목을 가지고 안토니우스를 엄청나게 질타했는데, 셰익스피어는 도리어 ‘세계의 절반 혹은 전부가 걸린 싸움‘도 포기하고 자신의 연인을 먼저 챙기는, ‘세계 최고의 훈남‘으로 잔뜩 미화해 놓았더군요. 하여튼 ‘안토니우스‘는 두 희극에서 한 번은 주연으로, 한 번은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 남자를 보면 매번 ‘두 가지 생각‘이 겹쳐 떠오릅니다. 진짜 찌질남 같기도 하고 엄청난 훈남 같기도 해서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7-05-19 18:48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한 작가의 작품에서 같은 인물이 그렇게 다르게도 그려지는군요. 안토니우스와 같이 여인으로 인해 평가가 달라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를 작품화한다면 참 멋진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