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산숭해심(山崇海深)으로 정리한 추사의 예술과 학문세계가 시기별로 소개되고 있으며, 본문에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볼거리 또한 풍부하다. 책에서 서술된 추사의 삶에서 큰 분기점을 고른다면 1809년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의 지위로 연경(燕京)을 방문하여 여러 학자들과 교류한 일과 1840년 제주도 유배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연경을 방문한 추사는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1733 ~ 1818)과 운대 완원(芸臺 阮元, 1764 ~ 1849)과 특히 깊은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阮堂)이라 했고, 연행 후 중년으로 들어서면서 추사보다 완당이라는 호를 더 많이 사용했다.(p71) <추사 김정희> 中


 연경 방문 이후 추사는 청나라 학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깊게 한 반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추사가 거만하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제주도 유배 이전 추사의 글씨는 중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그의 서체는 한 세대 이전의 서예가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 ~ 1777)와 많이 비교되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서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추사의 <무량수각> 두 글씨는 두 사람의 세예 세계가 얼마나 달랐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량수각>은 기름진 획의 예서풍 글씨이고 <대웅보전>은 굳센 획에 리듬이 있는 해서체이다.(p243) <추사 김정희> 中


 추사는 자신과 다른 서체를 가진 원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제주도 유배 이전 대흥사에 들려 원교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을 내리게 할 정도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1914 ~ 1999)의 글에서도 원교에 대한 추사의 박한 평가를 확인하게 된다.

 

 김정희는 <서원교필결후 書員嶠筆訣後>에서 "세상 사람은 원교의 글씨 이름에 떨려서 그의 학설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했다" 하였으며(p226)... <서결 書訣>에 대하여 거의 완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혹평하였다.(p227) <청명 임창순> <원교 이광사전(員嶠 李匡師展)에 부침>中


 자부심이 강한 김정희에게 제주도 유배는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은 비행기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제주도는 과거에는 높은 파도와 잦은 풍랑등으로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지난 2016년에 제주도에 배를 타고 갈 일이 있었다. 큰 배였음에도 비가 날리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추사가 살았던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사진] 추사는 저 검은 제주도 바다 저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by 겨울 호랑이)


 제주는 옛 탐라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정도가 소요되곤 했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사는 것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p245) <추사 김정희> 中


 들어가는 것만큼 험난했을 약 10여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추사는 자신만의 필체인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게 되었다. 걸작 <세한도 歲寒圖> 또한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을 생각해본다면, 제주도 유배 시기를 통해 김정희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던 '완당'에서 '추사'라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 세한도 (출처 : 위키백과)


 서체의 기본은 해서(楷書)와 행서(行書)인데 (제주도) 유배 이후 추사의 간찰 서체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금석기와 예서의 맛이 들어가면서 필회개에 강약의 리듬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편지의 글씨들은 한마디로 해서, 행서, 예서(隸書)의 필법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무 잘못이 없고 오히려 필획의 굳센 느낌만 강하게 다가온다.(p344) <추사 김정희> 中


 제주도 유배 이후 추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예술 세계를 인정하는 넓은 마음도 갖추게 되었다. 제주 유배 이전 비판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도 다시 달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추사의 모습 속에서 한결 원숙해진 대인(大人)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원교는 원교대로 한 생(生)이 있고,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 한 글씨를 썼을 것인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은데 어떻게 원교만이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p356)<추사 김정희> 中


 추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제주도 유배를 통해 플라톤(Platon, BC 427 ? ~ BC 348 ?)이 말한 '동굴(spelaion)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묶여 있다가 지내던 이가 동굴 밖의 햇빛을 바라보게 되는 상황을 <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515c)...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올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 온 데에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515e)...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synetheia)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제7권 515e) <국가, 정체> 中  


 추사가 기득권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보다 넓고 큰 경지를 제주도 유배를 통해 끌려 가서 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 시기가 10여년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바라본 아름다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 유배 시기는 추사에게 '고통스럽지만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단련(鍛鍊)의 시기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에서 저자는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 ~ 1799) 일화를 서두에 언급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그의 뛰어난 글씨를 연계하는 분위기를 피워낸다. 만약, 추사가 글씨를 쓰지 않고 사상가로 남았다면 그의 인생은 편안했을까?


 김노경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했다고 한다.(p30)... 추사가 글씨를 잘 쓰게 되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나 문장으로 나아가면 크게 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속뜻은 과연 무엇일까?(p31) <추사 김정희> 中


 글씨를 쓰면 기구한 운명이 될 것이나, 문장에 전념하면 이름을 떨칠 수 있다는 채제공의 예언은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만, 추사의 글씨와 학문을 분리해서 봐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추사의 글씨가 그의 학문 세계를 담아내기 때문이 아닐까.


 금강산의 만이천봉은 모두가 절경이며 볼 적마다 새로운 것처럼 추사(秋史)의 글씨도 얼핏 보면 비슷한듯하나 모두가 특수한 형태를 지니고 웅장한 만폭, 구룡이나 섬세한 만물상처럼 볼 적마다 보는 사람의 넋을 뺏고 만다. 그러므로 몇 번을 거듭하더라도 또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추사(秋史)는 명필이기에 앞서 대경학자(大經學者)이다. 학자로서의 성과는 오히려 글씨에 묻혀서 바로 아는 사람이 적다. 저술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는 중국에서 들어온 고증학을 집대성한 학자다. 그러므로 글씨가 학문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p220) <청명 임창순> <추사 김정희 명작전(秋史 金正喜 名作展)>中


 <추사 김정희> 뒷부분에는 과거 <완당평전>을 저술했던 저자가 이를 절판시킬 수 밖에 없었던 사연과 <추사 김정희>를 쓰게 된 이유 등이 담겨 있다. 그러한 사연 때문일까. 책을 읽으면서 과거 청나라의 영향을 받던 '완당'이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추사'로 거듭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속에서 뛰어난 학자이자 예술가의 모습과 함께 시간에 따라 원숙해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기에 추사에 대한 좋은 평전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이웃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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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2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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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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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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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5-22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사가 제주 갔다 오면서 인물 됨됨이로서도 학자로서도 완성되는 부분이 너무 감동스럽더라고요! 사과를 받아줄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게 슬프던;_;)! 추사 글씨는 볼 때마다 어줍잖게 따라하고 싶어서 근질근질ㅜㅋㅜ)...뭐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ㅎㅎ;;...일단 벼루 열 개를 아작내고 붓 천 개를 몽당붓으로 만들어야 가능하다는데ㅎㄷㄷ

겨울호랑이 2018-05-22 22:46   좋아요 1 | URL
정말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도하란 말도 있는 것 같아요. 이젠 AgalmA님의 ‘1일 1글씨‘ 개봉인가요? 기대해 봅니다!^^:) 생각해보니 「세한도」처럼 ‘1일 1그림‘에 추사체로 작품 설명을 ‘시‘로 하시면 3박자를 갖춘 예술 작품이 되겠어요!

AgalmA 2018-05-22 22:57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글을 담은 문인화처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까마득한 저의 실력에ㅜㅜ....

겨울호랑이 2018-05-22 23:02   좋아요 1 | URL
태어나면서부터 문인이 있나요?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지요. AgalmA님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참, 음악까지 넣으면 거의 4D수준의 예술이.... 겨울호랑이님께서 AgalmA님께 부담을 백배로 선믈하셨습니다 ㅋㅋ

AgalmA 2018-05-22 23:1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이 옹방강과 완원의 역할을ㅎㄱㅎ!
얘얘~ 연의 가르치기도 힘든 분이야...ㅎㅎ;

겨울호랑이 2018-05-22 23:17   좋아요 1 | URL
ㅋㅋ 저는 믹스커피를 즐겨마시는초의선사 역을 맡겠습니다.

2018-05-22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마천(司馬遷, BC 145 ? ~ BC 86 ?)의 <사기 史記>는 중국 24史 정사 중 으뜸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 중 <본기 本紀>는 중국 고대부터 한 무제(漢 武帝)까지 시기 동안 제왕(帝王)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으로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사기 본기>의 의의를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한 사마천의 역사관에서 찾는다. 

 

 본기의 서술 체계를 보면, 반드시 제왕의 역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사람을 실권자로 보아 선정의 기준을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항우 본기>를 설정하고는 오히려 서초 西楚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한나라 원년' 혹은 '한나라 2년'의 형태로 기록하였는데, 이로써 '항우 열전'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며 <항우 본기>라 한 것은 정명 定名의 원칙에 위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 (劉知幾, AD 661 ~ 721)가 <사통 史通>의 곳곳에서 반고를 기리고 사마천을 깎아내리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된다.(p30) <사기본기 史記本紀> 역자 해제 中


 반면, <사통>의 저자 유지기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사기> <항우 본기>에 대해 비판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기 본기>의 역자 는 제왕의 위치보다 권력의 실질에 초점을 맞춰 사마천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반면, <사통>의 저자는 <본기>와 <세가>의 모호한 분류 기준을 비판하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 천자를 본기로, 제후를 세가로 한 것은 참 합당한 일이다. 다만 본기/세가/표/지/열전과 같이 분류의 범주는 정해졌음에도 그 구분의 실제 내용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이 그 의미를 상세히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p107)... 항우 項羽는 군웅의 한 사람으로 과분한 자리를 차지했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더욱이 군주였던 적도 없으므로, 옛날의 사례로 비춰본다면 제나라 무지 無知나 위나라 주우 州吁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 이름자를 피하고 왕이라 부른단 말인가?(p108) <사통 史通> 내편 中 


 <사통>의 <사기>비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지기는 <사기>의 사마천 기록에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생략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다면, 내용 평가가 어렵다고 비판한다. 


 <사기>에는 이들 역사서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일 가운데 생략되고 누락된 것이 매우 많았다. 만일 옛 기록을 가지고 현재의 기록과 비교하고...... 그러므로 태사공(사마천)도 당연히 같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마천의 기록은 매우 부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반고가 사마천에 대해 부지런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p806) <사통 史通> 외편 中 


 또한, 유지기는 <사기>의 기록에서 역사의 흐름을 '천명(天命)'에 의존한 서술 또한 비판하고 있다. 역사(歷史)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기록한 자료라면 그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게 한정되어야 함에도, '하늘의 뜻'을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가로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유지기의 입장이다.


 (사마천은) 하늘이 바야흐로 진 秦나라에게 천하를 평정하도록 했으니, 아직 그 사업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도 위나라가 이윤 伊尹같은 인물을 얻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성패를 논할 경우에 사람들이 한 일을 중심으로 생각해야지, 굳이 천명에 미루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이치가 어긋나게 되어 있다.(p813) <사통 史通> 외편 中 

 

 역사가인 사마천이 '천명'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사기 본기> 의 시작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기 본기>는 <오제 본기 五帝 本紀>부터 시작된다. 신화(神話)의 시대로부터 역사가 기록된 이유를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일찍이 서쪽으로는 공동 空桐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탁록을 지나왔으며, 동쪽으로는 바닷가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바닷가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강수와 회수 淮水를 건넌 적이 있는데, 때때로 장로 長老들이 황제, 요, 순을 칭송하는 곳에 가 보면 풍속과 교화가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달라, 이것들을 총괄해 보면 옛 글의 내용에 어긋남이 없고 사실에 가깝다.(p70) <사기본기 史記本紀> 中


 사마천은 위와 같이 사료(史料)를 확보하기 위해 곳곳을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신화 역시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과 역사의 흐름에는 개별적인 인과 관계 뿐 아니라 보편적인 흐름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천명'이라 부른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이와 같은 점을 살펴봤을 때 <사기 본기> 역사 서술의 특징은 '실질' 권력 위주의 역사 서술과 신화의 시대를 역사의 시대로 기술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독창적인 사마천의 <사기>의 내용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 기록물 자체는 한 인간이 궁형(宮刑)의 치욕을 딛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한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고 생각된다.


PS. <사기 본기> 중 <오제 본기>는 중국 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화는 과연 얼마만큼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중국신화전설> 속 고대 동방의 어느 나라와 관련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사진] 무궁화(출처 : 위키백과)

 

 동방의 군자국(君子國)은 장수국 중의 하나인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수명이  매우 길었다. 그들은 가축과 들짐승을 잡아 먹었으며 그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무궁화(木槿花)를 쪄서 일상 식품으로 먹기도 했다 무궁화는 관목(灌木)에 속하는 나무에 피는 꽃인데 붉은색과 보라색, 그리고 흰색의 여러 가지가 있었다.(p391)... 수명이 짧은 꽃(무궁화)을 먹는 그들이 장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수는 어쩌면 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군자로서의 품덕이나 자애로운 마음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인자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 살았다고 하니까... 군자국 사람들은 옷과 모자를 모두 격식에 맞추어 차려입었고 허리에는 보검을 찼으며 모든 사람들이 각자 호랑이 두 마리를 하인으로 부렸다.(p392) <중국신화전설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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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1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두 마리가 하인이고, 무궁화를 일상적으로 먹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요즘 차로 마시는 히비스커스가 무궁화속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맛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5-17 22:25   좋아요 1 | URL
^^:) 무궁화 차가 있군요. 아마 호랑이를 하인으로 둔 조상님들 입맛이 요즘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모두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봅니다. 서니데이 군자님 편한 밤 되세요!^^:)

2018-05-18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22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은 어떤 하인 역할을....(노...농담요;)
지금은 환생해서 연의 하인 아빠 역.

겨울호랑이 2018-05-22 22:51   좋아요 1 | URL
ㅋㅋ 세상의 모든 아빠가 딸아이의 하인이겠지요. 아내의 머슴이기도 하구요..ㅋㅋ 물론, 누군가는 마님의 마당쇠일 것 같다는 19금 상상도 해봅니다 ㅋㅋ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는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로 유명한 김영진 작가의 작품입니다. 주말 하루를 함께 보낸 아빠와 아들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 속에서 오늘 하루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봅니다.

유아기는 몸을 많이 움직이고 싶어하는 시기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밖에서 실컷 놀 기회가 적기 때문에 욕구불만이 되고 성격이 반항적으로 변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휴일만이라도 아빠가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몸을 실컷 쓰고 놀게 해주어야 합니다.(p218) 「4세에서 7세 사이, 내 아이의 미래가 바뀐다」중에서

다시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로 돌아오면, 아빠와 주인공 그린이는 공원 산책을 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희 집 경우를 비춰볼 때 그린이가 아빠와 보낸 시간 중 가장 즐거운 때는 아마도 엄마 몰래 군것질 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이들 건강에 더 엄격한 엄마 대신 불량식품 앞에 한없이 관대한 아빠에게 기대하는 바는 공통의 모습인 듯 합니다.

˝우리 햄버거 먹고 갈까?˝ ˝정말?˝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아빠가 혼나거든. 꼭. 약속!˝

이렇게 약속해놓고, 막상 집에 들어가는 순간 ˝엄마! 나 햄버거 먹었다! 아빠가 사줬어!˝라고 배신을 때리는 모습도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ㅜㅜ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는 평소 아이들과 함께 하기 어려워 서먹한 관계를 유지한 아빠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는 문장을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책은 글 제목을 잘 담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가 ‘아빠 좋아!‘, ‘아빠는 진짜 대단해!‘라고 생각해주는 때는 유아기밖에 없습니다. ‘아빠, 아빠‘ 하면서 열심히 그리워해 주는 것 역시 아쉽게도 유아기가 마지막이지요... 아이가 온몸으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기는 5세부터 8세 정도까지 입니다. 정말이지 짧은 시간임을 명심하세요.(p220)「4세에서 7세 사이, 내아이의 미래가 바뀐다」중에서

어제 내린 비로 청명한 5월 주말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집에서 자전거도 타기도 하고, 밖으로 나들이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빠가 엄마보다 경쟁력있는 부분은 몸놀이 시간이라 밖에서 놀 때만큼은 아빠를 좋아합니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빠와 나」를 만들었네요. 만들자마자 코골며 자는 아이를 보면서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일년 중 가장 푸른 5월. 아빠와 딸 사이도 짧은 5월만큼 금방 가겠지만, 지금은 이 푸르름을 즐겨봅니다^^:) 이웃분들 모두 편한 밤 되시고, 즐거운 한 주 시작하세요!

ps. 만약 아이와 함께 군것질을 공모하여 포식 후 엄마에게 걸려 ‘죄수의 딜레마‘상황에 빠졌을 때는 무조건 이실직고 하세요. 당신의 아이는 절대 비밀을 지키지 않습니다. 비밀이라는 사실까지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아빠들은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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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us_fugit 2018-05-14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카들에게 매번˝엄마나 아빠한테는 비밀이다!?˝하면서 용돈을 주는데 정말 얘기 안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또 다른가 봅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18-05-14 00:47   좋아요 3 | URL
kokoro님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올라가면 또 달라지는군요. 아이들은 참 변화무쌍합니다 ㅋ kokoro님께서도 편한 밤 되세요^^:)

雨香 2018-05-14 11:26   좋아요 3 | URL
저희 애들도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 부터는 서로의 비밀을 간직합니다. ^^
음.. 요즘 엄마가 공통의 적이기도 해서요. ㅋㅋ

겨울호랑이 2018-05-14 11:30   좋아요 1 | URL
시간이 흐르면 아빠와 같은 편이 될 것으로 믿어보겠습니다.^^:)

2018-05-14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8-05-14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세요.^^
그리고 늘 건강하세요.^^

겨울호랑이 2018-05-14 16: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후애님도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2018-05-1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5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데미안 2018-05-1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이들도 그래요! 엄마,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줬어. 그치만 아이스크림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이 아빠에게 매달리는 때는 이때뿐이니 그걸 누리는 시간인거죠. 지금은!!

겨울호랑이 2018-05-16 22:35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아빠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응, 여기 있어!˝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 그 순간 아이와 아빠 모두가 행복해지는 시간이라 여겨집니다^^:)

젤리밥 2018-05-26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어렸을 때에 아빠는 바쁘셨지만 항상 시간을 내서 저와 동생들을 놀아주셨던 기억이 나요ㅎㅎ 지금도 아빠가 너무 좋고 아빠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요.. 확실히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이 가장 소중했었던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18-05-26 20: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희 아이도 젤리밥님처럼 생각해 주면 참 행복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젤리밥님 행복한 주말 저녁 보내세요!
 


 대봉건 국가들과 봉건 영주국, 자치 도시, 새로운 왕조에서 모습을 갖추어 가던 무장 세력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한 필요성은 기마 전투를 유일한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삼는 전문적인 전사 계층을 출현하게 만들었다... 문헌 자료에서 확인된 이들을 정의하기 위한 이름은 원래 의미(군인)에 비해 많은 제약을 지닌 전통적인 '밀레스 miles' 였지만, 독일과 잉글랜드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리터 Ritter와 나이트 knight는 과거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무장 노예와 동일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196)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2, 1000 ~ 1200) 中


 서양 중세(中世) 시대를 특징짓는 계급은  단연 '기사(knight)'다. 그리고, 이들 기사를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 무훈시(武勳詩, Chanson de geste)이며, 그 중에서도 <롤랑전(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피레네 남부 지방에서 사를마뉴 대제(Charlemagne, AD 742 ~ AD 814)의 원정군 일부가 이슬람 군에 의해 습격된 작은 사건을 미화(美化)한 이 작품은 후대 무훈시의 기본적인 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훈시는 주로 봉건계급 남성들이 가장 관심을 두었던 전투와 봉건정치를 주된 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무훈시의 최고 걸작인 <롤랑의 노래>는 우선 사를마뉴의 궁정에서 롤랑과 가늘롱(Ganelon)이 벌이는 정치투쟁으로 시작된다. 다음에는 대전투가 있고, 이 전투에서 롤랑과 그의 동료들은 무수한 사라센인을 죽인다. 기독교인사이의 봉건적 전쟁을 사라센인에 맞선 전쟁으로 바꾸어 놓은 무훈시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모든 무훈시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p457) <서양 중세사> 中


 전쟁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작품 전체에 넘치는데 이러한 전투 장면의 서술은 호메로스(Homeros, BC 8세기 ?)의 <일리아스 Ilias>를 연상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전쟁의 원인이 아닐까. <롤랑전>의 전쟁은 종교(宗敎)전쟁이고, <일리아스> 전쟁은 한 여인의 납치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차이를 제외하고 두 작품은 여러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롤랑의 노래 (출처 : https://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europe/chanson-de-roland.htm)

 

 (93) 롤랑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전속력으로 내닫는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하여 아엘롯에게 일격을 가한다. 아엘롯의 방패가 먼저 깨지고, 다음에 갑옷이 찢어진다. 그의 가슴팍이 열리고 뼈다귀들이 부러지더니 척추가 쪼개진다. 롤랑이 그의 몸통 깊숙이 창날을 처박아 거칠게 뒤흔드니, 영혼이 육신을 떠나고, 몸뚱이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동시에 목이 부러진다.(p79)  <롤랑전> 中


  (제22권 322 ~ 327) 그런데 그의 살갗의 다른 부분은 그가 강력한 파트로클로스를 죽였을 때 빼앗은 아름다운 청동 무구들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쇄골이 어깨에서 나와 목을 감싸고 있는 부분, 즉 목구멍만은 드러나 있었으니 그곳은 치명적인 급소다. 바로 그곳으로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덤벼들어 창을 밀어 넣자 그의 부드러운 목을 창끝이 곧장 뚫고 나갔다.(p604) <일리아스> 中


 <롤랑전>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은 롤랑의 독단(獨斷) 때문이다. 먼저 출발한 샤를마뉴에게 뿔피리를 불어 구원을 청하라는 동료 올리비에의 요청을 롤랑은 다음의 말로 거절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과 동료들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85) "이교도들 때문에 내가 뿔피리를 불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오! 나의 혈족들이 그러한 이유로 지탄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싸움이 격렬해져 내가 수천 번 거듭하여 적을 치리니, 뒤랑달의 날이 선혈로 젖어 있음을 보시게 될 것이오.'(p73) <롤랑전> 中


 <일리아스> 역시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에 이르는 결정적 계기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이었고, 이러한 결과는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아킬레우스의 전선 이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16권 56 ~ 63)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아가멤논)이 내게 명예의 선물로 골라준 소녀(브리세이스)를, 그것도 내가 훌륭한 성벽의 도시를 함락했을 때 내 창으로 얻은 것을, 아트레우스의 아들 통치자 아가멤논이 내 손에서 도로 빼앗았다네... 함성과 전쟁이 내 함선들에 이르기 전에는 나는 결코 분노를 거두지 않기로 결심했다네. (p604) <일리아스> 中


 결국, <롤랑전>,<일리아스>에서는 명예욕으로 인한 무리한 행동이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AD 1889 ~ 1975)는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속에서  난폭한 행위(휘브리스 hybris)를 문명(文明)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휘브리스'의 결과는 많은 경우 개인과 문명의 파멸로 이어짐을 확인하게 된다.

 

 (제16장) 군사적 기량과 무용은 예리한 칼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잘못 쓰는 자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수가 많다. 군사적 분야는 '코로스(koros, 포만) - 휘브리스(hubris, 난폭한 행위) - 아테(ate, 재난)'라는 치명적 연쇄를 연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예를 제공한다.(p83)... '코로스-휘브리스-아테'의 비극이 취하게 디는 더 일반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는 '승리의 도취'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포획물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 또는 정신적인 힘의 충돌로 전개될 수 있다.(p84) <역사의 연구 4> 中 


 그리스의 비극에서 개인의 휘브리스 결과는 개인의 파멸로 끝나게 됨을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 또는 <안티고네>등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지위가 왕이더라도 고대 사회에서 개인의 휘브리스는 국가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개인에서 봉건사회으로 옮겨간 사회구조 속에서 휘브리스는 그 사회에 큰 타격을 주게 됨을 <롤랑의 노래>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휘브리스의 결과가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식의 틀이 확장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롤랑전>은 역사적으로도 민족국가 형성에 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롤랑의 노래> 덕분에 프랑크 민족은 서구의 미래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슬림 적 그리스도를 찾아내 파괴하고, 칼과 십자가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책임을 맡은 선민이 되었다. 이 서사시의 많은 부분이 꾸며낸 역사이지만 민속 신화의 드높은 이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p386)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 ~ 1215> 中


 <롤랑전>은 중세 유럽의 작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서사시다. <일리아스>가 고대 터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전쟁을 장대하게 묘사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사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작품이 주는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중세인(中世人)을 이해하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롤랑전>에는 이교도와 다른 민족에 대한 잔인한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중세 유럽인들의 인식이 담겨 있다. 현대 유럽인들의 인식의 기저에는 그들의 선조들의 인식이 깔려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이끌고 있는 지금 <롤랑전>이 우리의 삶과 완전히 떨어진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세 사회 발전과 중세 유럽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프랑크 문헌들은 왕의 회군이 침착하고 질서정연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샤를마뉴는 스페인에서 서둘러 회군하여 그 군대를 위기 지역으로 급파했다. 색슨족의 반란은 카롤링거 체제를 절단 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론세스바예스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는 색슨족의 대량학살과 짝을 이루면서 색슨 킬링필드를 정당화 했다.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에 살고 있는 숲의 부족에게 부과한 역사적이고도 야만적인 혹독한 평화조약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롤랑의 전설적 순교가 상징하는 이타적인 기독교 기사도 정신에 의해 고상한 작업으로 미화되었다.(p385) <신의 용광로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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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5-12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러 책을 착착 엮어서 페이퍼를 쓰시는 겨울호랑이님의 서재에는 과연 책이 몇 권이나 있을지 가끔 궁금해집니다...... 한, 육백만 권??

겨울호랑이 2018-05-13 00:15   좋아요 1 | URL
^^:) 안 세어 봤지만 대략 2천권 정도 되는 것 같네요... e-book을 잘 활용하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책들이 공간을 제법 많이 차지합니다...

2018-05-12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3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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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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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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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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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여러 차례의 대기근(大飢饉, Great Famine)이 있어 왔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왔다. 그렇다면, 대기근과 이로 인한 피해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인가? 이번 페이퍼에서는 역사상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 1845 ~ 1852)을 배경으로 한  <검은 감자 Black Potatoes>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 ~ 1962) 시기를 다룬  <인민3부작 2.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 1958 ~ 1962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 ~ 1962>를 통해 대기근의 전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자본주의 대기근 : 아일랜드 대기근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온 마을 모든 집을 빠짐없이 휩쓸었다. 아일랜드어와 몇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과 민간 신앙은 거의 사라졌다.... 역사가 대부분이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사망자는 100만 명이 넘고 이주민은 200만 명을 웃돈다고 추정한다. 정확한 수치는 영영 알 길이 없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p238) <검은 감자> 中


 전체 인구의 1/8이 아사(餓死)한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 감자 흉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듬해인 1846년 흉년으로 인해 아일랜드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1845년에는 부족한 식량은 미국으로부터 옥수수 수입을 통해 해결하고,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도 받을 수 있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위기가 극복된 것으로 보였던 1846년에는 이러한 조치가 늦었으며, 무엇보다도 1845년 재난을 통해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대재앙(大災殃)으로 치닫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해 감자 흉년의 원인이 '피토프라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hora infestans)'라는 감자 역병균이며, 이 병균은 몇 시간 만에 감자밭 전체로 퍼질만큼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안다... 1845년에 필 총리가 파견한 과학 위원단은 감자 역병균에 관해 몰랐다. 당연히 진단도 처방도 잘못 내렸다.(p57)... 감자 역병이 또다시 덮친 것은 1846년 8월 첫 주였다. 게다가 지난 해보다 훨씬 심했다. 하룻밤 사이에 전체 수확량의 4분의 3이나 되는 감자가 썩어버렸다.(p78)... 감자 역병이 2년 내리 발생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지난 겨울을 나면서, 노동자 대부분이 돈 될 만한 것은 다 팔거나 저당 잡혔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식량과 씨감자를 샀다. 그런데 감자 농사는 쫄딱 망쳤고, 팔 것도 하나 남지 않았다.(p79) <검은 감자> 中


 주식인 감자 흉년으로 인해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쓰러지는 것도 비극(悲劇)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한 처참한 결과는 사회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양가 높은 감자를 먹지 못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따라서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졌다.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굶주려서 죽은 사람보다 어림잡아 열 배나 더 많다.... 비위생적인 음식과 오염된 물을 먹고 생활환경마저 불결한 탓에 질병은 널리 퍼졌다.(p131) <검은 감자> 中

 

 여기에서 대기근의 아주 커다란 모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백성이 주식으로 삼는 감자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시달리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 노동자들은 입에 댈 수도 없는 곡식들이 영글고 있었다. 그것은 지주와 농민의 것이었다. 굶주린 노동자들은 그저 곡식을 베고 털고 빻아 수레에 싣고 시장으로 내가는 것만 지켜보았다. 그 곡식은 영국과 다른 나라에 팔 것들이었다.(p79) <검은 감자> 中


 아일랜드 대기근 동안 '감자'만 흉년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가진 것이 없는 소작농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지주, 상인 등 여유있는 이들에게 이 사건은 '기회'였다. 감자 역병균에서 시작된 기근은 사회적 문제와 결합되면서 역사에 '아일랜드 대기근'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나라에서 식량을 수출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가혹한 현실 한 가지는 기근은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근 문제는 식량 이용권을 누가 갖느냐에 달려있다.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아일랜드인을 굶주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주, 농민, 도매상, 소매상의 생업에 간섭할 법률을 제정할 뜻이 없었을 따름이다. 그런 법률을 만든다는 것은 자유방임주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지주와 농민도 곡물을 영국과 외국 시장에 수출했다. 자신들이 영리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81) <검은 감자> 中


 2. 공산주의 대기근 : 대약진 운동


 "올해 우리나라는 강철 520만 톤을 생산했고, 5년 뒤에는 1000만 ~ 15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이 더 지나면 2000만 ~ 2500만 톤을, 다시 5년 뒤에는 3000만 ~ 4000만 톤을 달성할 것이다... 흐루쇼프 동지는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마오저뚱)는 15년 안으로 우리 또한 영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p49) <마오의 대기근> 中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 ~ 1962)은 마오쩌둥이 단기간 내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대약진 운동 역시 또하나의 대기근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총 당원 수는 1559년에 1396만 명에서 1961년 1738만 명으로 급증했지만 1959 ~ 1960년에 360만 명의 당원이 우파로 낙인찍히거나 숙청되었다... 수천만 명이 혹사와 질병, 고문, 굶주림으로 죽어 가게 되면서 중국은 파국으로 빠져든다.(p167) <마오의 대기근> 中


 대약진운동은 아일랜드 경우와는 달리 자연재해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대기근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집권(中央集權) 계획경제(計劃經濟) 체제 하에서, 자신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과도한 목표 설정과 허위 보고, 그리고 허위 보고에 기초한 생산물 조달은 농촌 지역에서의 대규모 기근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중국 경제는 1962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곡물 생산량 달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압력은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다. 경쟁적으로 더 높은 목표량을 약속하는 광풍 속에서 마을 단위부터 성에 일으기까지 당 관리들은 서로를 능가하고자 갖은 애를 썼고 선전 기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록을 발표하면서 더 조심스러운 간부들까지 숫자를 부풀렸다.(p201)... 수확량이 부풀려지면서 과도한 조달 할당량이 내려왔고, 이는 부족 사태와 대대적인 기근으로 이어졌다.(p202)... 당(黨)은 농촌의 필요를 무시하는 일단의 정치적 우선순위를 발전시켰다.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 사항을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p207) <마오의 대기근> 中


3. 대기근의 결과들 


 이러한 대기근은 이후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대기근을 통해 아일랜드는 뜻하지 않은 디아스포라(Diaspora)와 이로 인한 막대한 인구 유출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결국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당시의 충격으로 아일랜드가 입은 손실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오래도록 씻기지 않을 적대감과 원한을 남겼다... 대기근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영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감자 대기근 이후 60년 동안 대규모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청년층이 이주민의 절반을 차지했다... 1910년까지 조국을 영원히 떠난 아일랜드인은 500만 명에 달했다. 오늘날 아일랜드 인구는 약 400만 명으로 1845년 인구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현재 미국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4,000만 명을 웃돈다.(p241) <검은 감자> 中


 한편, 중국 역시 대약진운동을 통해 사회 각층의 불만이 쌓여가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었다.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오쩌둥은 이러한 목소리에 답(答)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답은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 1966 ~ 1976)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저우런라이는 과도한 곡물 징발, 생산량 부풀리기, 각 성에서의 곡물 유출과 해외로의 식량 수출 증대에 관해 개인적 책임을 지는 식으로 지금까지 잘못되어 왔던 상황의 원인을 상당 부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마오쩌둥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했다... 마오쩌둥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당과 나라를 산산조각 낼 문화 대혁명을 개시하기 위한 참을성 있는 기초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p492) <마오의 대기근> 中


  'Laissez faire(자유 방임주의)'를 표방한 자본주의와 노동자 중심의 'Communism' 을 주장한 공산주의 사회 모두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두 체제 모두가 전체 구성원의 행복보다는 소수(少數)를 위해 작동했으며 이로 인해 대규모 재앙을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다운 삶의 전제조건인 의(衣), 식(食), 주(住)보다 사유 재산권, 혁명 사상 등 부차적인 내용을 강조했을 때 큰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검은 감자> <마오의 대기근>은...


 <검은 감자>의 작가인 수전 캠벨 바톨레티(Susan Campbell Bartoletti)가 딸에게 이야기 해주듯이 쓰여진 책이기에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잘 서술하고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인민3부작 2.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 1958 ~ 1962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 ~ 1962>는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가 '대약진운동' 시기를 다룬 역사책으로, 당대의 참상을 사례와 통계자료를 통해 잘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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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9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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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09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천재인줄 알았습니다. ㅠ

겨울호랑이 2018-05-09 22:11   좋아요 0 | URL
네... 저 역시 자연의 힘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정말 대단한 것은 사람의 끝없는 재물욕, 명예욕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8-05-11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1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1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0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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