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세계사 - 네안데르탈인에서 신자유주의까지
닐 포크너 지음, 이윤정 옮김 / 엑스오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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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나의 역사적 국면은 역사의 '순환'과 역사의 '화살'이라는 양면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국면과 다른 국면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역사의 '순환'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양 量적이고 제한적이다. 반면 역사의 '화살'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질 質적이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는 세 가지 엔진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 첫째는 지식, 기술, 생산성의 축적이다. 둘째는 잉여의 통제를 놓고 벌이는 지배계급 간의 경쟁과 투쟁이다. 셋째는 잉여의 크기와 배분을 놓고 벌이는 계급 간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192

닐 포크너(Neil Faulkner, 1958 ~ 2022)의 <좌파 세계사 A Marxist History of the World: From Neanderthals to Neoliberals>는 인류 탄생부터 최근까지 인류 역사를 생산성 향상과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사다. 신석기 시대 농경 사회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불평등 구조는 불안정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불안정이 가져온 변화는 잉여가치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는 이를 차지 하기 위한 쟁탈전이었다는 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다.

'즉자적 卽自的 계급 class in itself'이란 사회관계와 경제적인 관점에서 계급이 처하게 되는 현실을 가리킨다. 반면 '대자적 對自的 계급 class for itself'은 계급의식을 갖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적극적인 저항을 해내가는 것을 가리킨다. 노동자는 현실에 무심하고, 파편화되고, 수동적인 채로 역사의 피해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반면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동료들과 단합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투쟁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역사의 주체가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7

저자 닐 포크너는 특히 중세에 뿌리를 두고 상업자본주의(1450 ~1800), 산업자본주의(1800 ~ 1875) , 제국자본주의(1875 ~ 1935), 국가자본주의(1935 ~ 1975), 신자유주의자본주의(1975 ~ ) 등 다른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온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용(變容)에 대한 대응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혁명(革命)이라는 저자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도전(挑戰)과 혁명이라는 응전(應戰)'이라는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인류는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끝없는 학살의 수렁으로 빠질 뻔했다. 이를 막은 것이 바로 혁명이었다. 처음엔 러시아, 그 다음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로 혁명이 이어졌다. 패전한 동맹국에서만 혁명이 전염된 게 아니었다. 곧 영국, 프랑스, 이탈리에까지 퍼졌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496

저자는 본문에서 역사의 고비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68운동 이후 신자유주의가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요즘 저자는 '즉자적 계급'이 아닌 '대자적 계급'에 의한 궁극적 변화를 소망한다.

1차 대전 후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업, 파시즘 그리고 전쟁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조직과 리더십은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의 대가는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고 나서까지 치러야 헸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럽지역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붕괴되어 1917년 같은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전쟁이 치러졌고 이후 나치가 최악의 폭력을 이끌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598

<좌파 세계사>에서 저자 닐 포크너는 역사의 분기점마다 좌절된 혁명을 인간의 희망의 꺾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갖는 내재적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혁명을 번번히 좌절시켜왔다는 저자의 인식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의 역사관을 잘 보여준다. 분명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세계의 주된 흐름은 신고전학파주의 경제학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임이 분명하기에 자본주의가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거나 해결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항상 고도로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역동성은 우리의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공급해준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때문에 세계의 부가 소수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인류 대중을 지속적인 박탈에 시달리게 한다. 18세기에 제국과 식민지의 모습이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이런 모순을 확실히 입증해준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282

저자의 설명대로 자본주의의 모순성이 동일 대상을 '노동자-소비자'라는 다른 측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면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계급투쟁이 결국 투입된 노동의 산출 가치에 대한 배분 문제라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얻으려는 자본가의 탐욕이 '최소 노동으로 최대 임금'을 받으려는 노동자의 탐욕으로 대치된다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임금과 이윤을 합친 가치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임금은 생산과정에서 투입된 노동의 가치를 전부 반영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임금을 지급하고 사들이는 것은 일정 시간 동안, 특정한 수준의 기술로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이다. 자본가는 임금에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얻기를 바란다. 이 가치의 차이가 바로 '잉여 가치' 즉 이윤이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0

문제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좌파의 세계사>를 읽으며 현대사회 문제에 대한 진정한 처방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제적 헤게모니 이관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부정한 시대정신(Zeitgeist)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주장하지만 그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주창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는 구호에서 보여지는 단결된 노동자의 행동은 결국 또 하나의 '시대정신'의 발현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런지.

'관념적인 시대정신'대신 '유물론적인 시대정신'을 도입하기 전에, 궁극적으로 변화된 개인, 계급의 물리적 결합 이전 개인 윤리의 화학적 변화를 먼저 강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정신사적인 혁명을 부정한다면, 결국 다수의 눈에 사회주의 혁명은 'Post Capitalism'을 표방한 '제2의 자본주의'에 불과해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적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사고 변화에 맞춰져 있었다. 특히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절대정신은, 절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는 현실과 절대정신 사이의 모순에 의해 세계를 변화시키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유물론적인 변증법으로 바꿨다. 주요한 모순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회적 세력 간의 충돌(모순)이다. 사고의 역할은 이런 세력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개입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하고, 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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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6-06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ㅋ
전 누구보다도 마르크스 이론 대부분에 공감하지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는 말엔 아주 조금만 동의합니다. 오히려 상부구조(시대정신, 관념론)가 하부구조(유물론)을 구축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3-06-06 21: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대의명분이 실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고, 그 이면에 있는 실리가 실제적인 동인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은 분명 뛰어난 것이지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상부구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여겨집니다. 마르크스 사상 자체가 이미 상부구조의 구성물임을 생각해본다면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하는 다른 형태의 종교‘로 다른 의미에서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평안한 밤 되세요! ^^:)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오쇼 라즈니쉬 지음 / 기원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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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상이란 평온과 '공(空)'을 의미합니다. 그 공(空)은 그곳에 항상 있는데, 생각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감춰지고 생각이 멈추면 그것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마음은 때로 매우 불안정한 듯이 보이는 반면 또한 쉽게 침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초월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관조(觀照)'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의 입회인, 즉 자신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을 지켜봐야만 합니다. 그 관조 상태가 찾아든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22

오쇼(Bhagwan Shree Rajneesh, 1931 ~ 1990)의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명상(冥想), 관조(觀照), 공(空)이 본문 전체에서 반복된다.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는 끊임없이 주관적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아(自我)의 소멸이자, 신(神)과의 합일(合一)이기도 하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그것은 영원한 것과 하나가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십시오. 오로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절로 생각을 소멸시켜 갑니다. 관조(觀照)의 깨우침이 마음속의 잡음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1

오쇼가 말하는 자유(自由)는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이라는 상대적 자유가 아니다. 과거로부터 얻어지는 현실태(現實態)와 미래에 대한 가능태(可能態)가 인간 프시케(Psyche)를 구성한다면, 저자 오쇼는 오직 현재로부터 얻어진 깨달음, 진리(眞理)는 프시케, 자아와 함께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명상을 통해 과거/미래와 현재, 주관과 객관, 우연과 필연, 불멸과 필멸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인식의 대상과 인식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 안의 신성(神性)을 밝힐 수 있다.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다가오지만, 잠시 멈칫하는 대목도 있다. 바로 의지(意志)와 관련된 부분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앞선 구절과, 의지는 오히려 길을 막는 장벽이라는 충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앞선 의지를 명상에 의해 자신의 아집을 멸(滅)하고 새롭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의지로, 마치 무위(無爲)를 행하는 위(爲)와 같은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인간은 점점 모든 변화의 뒤를 변모시키지 않는 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속에 생겨난 그 목적의식을 환영하고 싶습니다. 그런 강건한 의지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좀 더 깊은 우리의 힘이 그것에 의해 불러일으켜지고, 활기찬 에너지가 생성될 때 거기에서 음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9

 무의식중에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 의식적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성스러운 것 중에 당신의 의지로 인해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의지는 길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벽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74

 무위를 행하는 위, 공에 머물리 위한 집중 이나 노력 마저도 피안(彼岸)에 이르면 또 다시 버려야할 뗏목이 된다면, 결국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아를 시공간안에서 끊어가고 줄여가지만,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탄탈로스의 형벌처럼 영원한 굴레 속에 갇혀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에서의 찰나를 보십시오. 공간에서의 원자를 보십시오. 그 '시간 속의 찰나'에서 시간은 존재를 정지하고, '공간 속의 원자'에서 공간은 존재를 끊습니다. 그곳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지금 이곳이 있을 뿐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91 

오쇼 라즈니쉬는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에서 궁극적으로 명상을 통해 신의 뜻에 따라 가는 순응의 삶을 말한다. 종교가 있는 이들에게는 신의 길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되는 이 길에 순응하는 삶을 통해 절대적 자유를 얻는 길을 가자는 오쇼의 주장은 간단하지만,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마치 양궁 경기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활을 쏴 날리고 나중에 그곳에 가서 과녁을 그려넣자는 오쇼의 말. 자칫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는 어느 수도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향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도 최소한 어떤 국면에서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기'에 대한 오쇼의 말은 우리 가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좋은 조언이 되리라 생각한다...

명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완벽하게 고요한 수동성의 경지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세계와의 조화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고의 모든 형태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돌과 함께 자아도 점차 사라져 갈 것입니다(p121)... 자아는 과거 속에서만, 또는 과거의 투영뿐인 미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알아차림이 무아(無我)라는 것에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아는 현재 속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현재의 울타리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33

기도로 가득 찬 마음에서의 비움이야말로 신과 연결되는 문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풀어 놓으십시오. 마치 강물에 띄워진 작은 배처럼......(p49)... 자신을 신 속에 빠뜨리는 자야말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다시는 목표를 갖지 마십시오. 목표를 지닌 인간은 헤쳐 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닿은 곳, 그곳이 당신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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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의 준법투쟁은 그동안 은폐돼온 병원 내 불법을 폭로한다는 취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확대하려는 간호법 제정 문제와도 맞닿아있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행위와 관련한간호사의 임무를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라고 정의하고 있다. 보조를 넘어서는 의료행위는 간호사 단독으로 할 수 없다. - P12

간호법 제정이 급물살을 탄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다. 간호사들의 헌신이 널리 알려지면서 간호·돌봄 시스템 구축과 간호사 처우 개선에 대한 공감대가 커졌다. 2021년 여야 모두에서 간호 법안이 발의됐다.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 각각간호사와 약사 출신인 국민의힘 최연숙·서정숙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 세 개 중 두 개가 국민의힘에서 나왔다. 세법안의 공통점은 간호사의 임무에서 기존 의료법에 있는 ‘진료의 보조‘라는 문구를 들어냈다는 점이다. 대신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 같은 문구로 바꿨다. ‘보조‘의 기준이 불명확한 데다가 의사와 간호사 사이 관계를 협력보다는 종속적으로 규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 P15

간호사들 처지에서 마지막으로 건진 것이 바로 최근 간호법 논란의 핵심 쟁점인 ‘지역사회‘ 네 글자였다. 간호사의 임무를 ‘의사의 지도하에‘ ‘진료의 보조‘로묶어둔 채 활동공간을 의료기관과 함께 ‘지역사회‘로 넓힌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마저도 반대 측에서는 간호사들이지역사회에서 단독으로 의원을 열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다. - P15

다시 말하지만, 이번 간호법은 차·포를 뗀 법이었다. 간호인력 전체의 처우 개선과 돌봄 시스템 구축에 턱없이 모자란 법이다. 진보 성향인 ‘행동하는 간호사회‘
의 경우 거부권 행사 직후 성명을 통해 윤 대통령의 ‘행정 독재‘를 비판하면서도이번 법안에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 같은 실질 내용이 빠졌다고 지적했다.‘지역사회‘ 네 글자만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할 만큼 의료계에 불신과 갈등의 골이깊음을 확인했다는 점이 어쩌면 이번 사태의 교훈인지도 모른다. - P17

섣부른 탈중국 선언의 결과는 참혹하다. 올해 1분기에만 한국의 대중국 수출감소 폭이 28.2%이다. 주요 23개국 가운데 가장 많이 감소했다. 올해 4월까지 대중 무역수지 적자는 101.1억 달러이다. 4월 대중 무역수지 적자만 22.7억 달러인데, 전체 4월 무역수지 적자인 26.2억 달러와 비슷하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중국과 무역에서 흑자를 내 미국·일본과 무역에서 생긴 적자를 극복해왔다.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이다. 이제는 거꾸로다.
다른 나라에서 번 돈을 모두 중국에 갖다 바치고 있다는 곡소리가 들린다. G7 정상회의가 확산시킨 디리스킹이라는 신조어를 단순하게 공급망 다변화로만 받아들일일이 아니다. - P20

한·미·일 핵확장억제협의체 논의는 미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서 먼저 진행되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워싱턴 선언 이후 한·미·일 핵협의그룹 설치에 대해 부인했다. 어쩌면 미·일 사이에 이미 논의가 진행 중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동북아 핵확장억제 논의에서 한국을 ‘디커플링‘한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확장억제 제공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 것도 배경이 되었을수 있다. - P21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을 표방했으나 지지율의 상당 부분을, 검찰을 통해서만 추진 가능한 ‘적폐 청산‘에서 얻었다. 검찰의 위세가 역대 정권 최고수준으로 막강해졌다. 검찰이 역사상 최초로 대법원을 수사하고, 대통령(박근혜)을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은 검찰의편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뒤늦게 검찰개혁에 나서지만, 이에 검찰이 반발하면서 시민들도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 공정하게
‘수사하는 집단‘이라는 착시 현상이 발생했다. 윤석열 당선의 배경이다. - P25

SG증권의 대량 매도 배경에는 차액결제거래 (CFD·Contract For Difference)가 있었다. 8개 회사 주식 모두 SG증권을 통해 CFD 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CFD는말 그대로 차액으로 수익을 내는 장외파생상품이다. 투자자가 증권사에 정해진증거금을 내면, 증권사는 투자자 대신 주식을 사주고 추후 차액만 정산한다.  - P36

그럼 이번 사건의 핵심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일차적 원인은 라덕연 호안스탁 대표의 주가조작 행위다. 그리고 라덕연 대표의 불법행위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금융감독원의 책임이 핵심이다. 사실상 ‘주식 리딩방‘ 형식으로 운영되는 유사투자자문업체의 주가조작 행위에 대응해야 할 주체는 금융감독원이다. - P39

노키즈존 논란은 여러 각도에서 볼수 있다. 경제활동의 자유에 주목할 수도있고, 아동 배제 정책이 필연적으로 이들의 보호자, 특히 엄마인 여성을 함께 차별하는 효과에 집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인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주린이‘ 같은 말이 농담으로 쓰이는 사회에서 어린이 정체성을 가진 시민의 삶은 어떨까. 성인 누구나 한때 아동이었음을 생각하면 더 씁쓸한 일이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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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 세계가 주목하는 대한민국 수소전기차 기술 개발 풀 스토리
권순우 지음 / 가나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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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전기자동차와 배터리전기자동차는 단순히 기술 논쟁이 아니라 자동차의 심장을 둔 패권 경쟁이다. _ 권순우,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p57/314

권순우 기자의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는 한국 수소 자동차 역사를 다룬 책으로 특히 한국 수소차 개발이 주로 이뤄진 현대 수소차의 간이 백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책의 결론은 당연히 짐작하다시피,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청정 에너지인 수소 에너지를 향한 노력은 지속되어왔고 계속될 것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책에 담긴 내용이 불굴의 신념으로 척박한 시장을 개척해나간 기업사(史)만이라면 별도의 리뷰로 정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 수소차와 배터리를 사용한 전기차와 비교한 한 장(章)은 여러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수력이나 풍력, 태양광 발전소처럼 재생에너지를 사용해 만든 전기를 이용한다면 배터리전기자동차는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것인지 전기에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기에 어떤 방식으로 발전한 전기인지 일일이 알 수는 없다. 결국 한 국가에서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 방식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배터리전기자동차의 친환경성이 달라진다. _ 권순우,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p88/314

수소차와 전기차. 어느 차가 과연 미래의 차가 될 것인가?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기후변화가 이슈가 된 현실에서 친환경성은 필수다. 생산된 전기를 배터리에 충전하는 방식의 전기차와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 전력을 사용하는 수소차 모두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여야 친환경성이 획득된다는 점에서는 중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소차는 백금을, 전기차는 리튬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희토류 자원을 확보해야하는 과제을 안겨준다는 점에서도 공통된 과제를 제시한다.

책 본문은 전기차와 수소차의 장단점을 보여준다. 승용차 등 중형차 이하에서 강점을 갖는 배터리 전기차와 버스, 트럭 등 대형차에서 경쟁력을 갖춘 수소차. 이렇게 경쟁력을 갖춘 부분이 다르다면 향후 전기차와 수소차는 한동안 서로 다른 시장에서 각각 주력 제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주행 거리가 짧고 출력이 낮은 도심 주행에는 배터리전기자동차, 주행 거리가 길고 높은 출력이 필요한 버스나 트럭 등 대형차에는 수소전기자동차가 유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p79)... 소형, 중형 승용차는 트럭에 비해 가볍기 때문에 배터리전기자동차가 경쟁력을 갖는 구간이 더 길다. 승용차를 기준으로 배터리 시스템과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의 재료 원가는 주행 거리 350~700km 구간에서는 비슷하다. 주행거리가 그보다 짧으면 배터리전기자동차가, 그보다 길면 수소전기자동차의 원가가 더 저렴하다. _ 권순우,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p81/314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를 통해 현대의 수소차 개발은 현대차 뿐 아니라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납품업체들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사용되는 내연기관에서 친환경차로의 전환이 강제된다면, 기존 완성차 입장에서는 협력업체들과의 상생을 위해 수소차 전환이 우선 시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수소차가 경쟁력이 있는 부문, 상용차 시장은 자가용 시장에 비해 (판매대수 기준) 약 3:7 정도 비율로 적기에 전기차가 강세인 자가용 시장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전기차 원가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40%이고, 자동차 구조도 훨씬 간단하다는 점에서 기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업체들이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넥쏘는 99% 국내 기술로 만들어졌다. 특히 수소전기자동차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연료전지 발전기에서도 가장 큰 비용이 들어가는 금속분리판과 MEA의 원가를 독자 개발한 국내 기술로 현저하게 낮춰 수소전기자동차의 대중화 가능성을 보여줬다. 기체확산층이라는 1개 부품만 외국 부품이 들어갔는데, 이마저도 한국의 JNTG라는 회사가 개발에 성공해 상용화했다. 현대자동차와 20년 가까이 함께 수소전기자동차를 만들어온 협력업체들이 있기에 한국은 수소전기자동차 부품을 A~Z까지 모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추게 된 것이다. _ 권순우,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p272/314

결국, 자동차 시장에서 내연기관을 대신할 친환경 차량이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기차의 배터리를 제조하는 화학업체들과 수소차의 제조업체와 협력업체, 석유화학공업, 비철금속 업체들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주식시장이 시장 상황을 선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요즘 이차전지 관련주와 관련된 치열한 논쟁 중 일부의 요인도 이와 관련있지 않을까를 잠시 생각하게 된다. 아래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결코 정치와 경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정권이 바뀌면서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수소와 태양광의 희비가 엇갈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는 수소 연료전지사업단이 태양광, 풍력 사업단을 압도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태양광 분야에 수소 연료전지의 두세 배 예산이 투입됐고, 배터리팩 연구에도 엄청난 예산이 배정됐다. 당시 수소 연료전지 분야에 참여했던 한 전문가는 "배터리 진영은 자신들의 강점으로 비전을 제시해 정부를 설득한 게 아니라 수소전기자동차를 비판해 주도권을 쥐었다"고 회고했다. _ 권순우,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 p24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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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 2 - 1장 태동: 신들은 영생을 위해 불사주를 구하고, 인간들은 사랑과 명예를 위해 삶을 버린다 마하바라따 2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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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도 언제나 다르마를 향해 있고, 다르마와 베다를 알고 있으며, 열망에 넘치고 덕을 구족한 브라만을 사제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쁘르타의 아들이여,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크샤뜨리야는 누구든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사제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을 정복하려는 왕은 브라만을 자기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하니, 덕 높은 브라만을 당신들의 사제가 되게 하십시오.(p697)... 크샤뜨리야의 빛은 힘이며 브라만의 빛은 인내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700


  위야사의 <마하바라따 2 : 태동>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리뷰에서는 통치권을 가진 크샤뜨리야보다 브라만의 힘이 왜 더 강한가를, 그래서 인도 전통의 계급 구조에서 최상위에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한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인 크샤뜨리아가 속(俗)의 권력이라면, 브라만의 권위는 성(聖)으로부터 나온다. 힘으로 남을 복속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기에, 크샤뜨리야의 지배를 위해서는 브라만의 힘이 필요하다. 단지 이것만으로는 브라만이 크샤뜨리야 위에 있다는 설명에는 부족하기에, 우리는' 브라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봐야 한다. 다르마를 깊이 알고 있는 이에 따르면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삼계와 신들의 제왕이 되는 것, 혹 그보다 더한 것도 다 버릴 수 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이 향기를 버린다 해도, 물이 제 맛을 포기한다 해도, 빛이 비추는 일을 그만두어도, 바람이 접촉하는 성질을 잃는다 해도, 태양이 빛을 버린다 해도, 불이 뜨겁지 않게 된다 해도, 창공이 소리를 버린다 해도, 달이 차가운 빛을 뿜지 않는다 해도, 인드라가 위용을 버린다 해도, 다르마의 왕이 다르마를 저버린다 해도 제가 진리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482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지만, 아무나 진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누구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엄격하게 제약된다. 각자 저마다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왕이 아닌 자가 왕의 친구가 될 수 없듯, 오직 진리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만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브라만이고,  브라만의 진리 추구는 금욕(禁慾)으로 행해진다.


 학식 없는 자는 학식 있는 자의 벗이 되지 못하며, 마차 없는 자는 마차 가진 자의 벗이 되지 못한다. 왕이 아닌 자는 왕의 벗이 될 수 없다. 옛날의 벗이며, 무엇을 바라는가?(p666)....  

 

 인간이 아무리 다르마와 아르타와 까마를 추구해도 그것들은 인간을 빠져나간다. 그것들과 멀어지니 모진 고통만 따르는구나. 어떤 이는 해탈을 최상이라 말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듯하다. 재산을 아무리 모은다 해도 지옥이 기다릴 뿐이다. 재산을 바라는 그 자체가 크나큰 고통이 따른다. 가진 것을 사랑하는 자가 그것을 잃으면 더 큰 고통이 뒤따른다. 나는 이 재난을 헤쳐 나갈 어떤 방법도 아직 찾지 못했구나.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643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깨달음을 위한 정진. 브라만의 금욕 수행은 아킬레우스와 같은 전사의 분노를 세상의 법칙 안으로 던져 넣었을 때 완성된다. 아서 왕(King Arthur)이 죽음 직전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 아발론(Avalon)으로 떠났듯, 브라만의 힘은 크샤뜨리아의 힘을 버린 후에야 얻을 수 있음을 <마하바라따 2>는 알려준다. 불과 같은 분노를 버리고 물과 같은 평정심을 얻었을 때 브라만은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브라만이 크샤뜨리아보다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난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 결심했소. 묶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이기 때문이오. 난 아버지의 멸하지 않을 선행을 본받아 반드시 필사적인 고행에 나를 묶을 것이오. 탁발로 연명할 것이며 머리를 삭발하고 성자들처럼 이 세상을 유랑하겠소. 내 몸이 먼지에 파묻히도록 내버려둔 채 빈집이나 나무둥치 아래 의지해 살겠소. 좋고 나쁜 것을 모두 떠나고, 어떤 일에도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비난이나 칭찬을 똑같이 여길 것이오. 누구의 축복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소. 양극의 상반되는 모든 개념을 버리고 철저히 무소유가 될 것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521


  <마하바라따>의 저자는 한 손에 불을, 다른 손에 물을 들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을 넘어선 물은 깨달음을 위한 단순한 단계에 대한 설명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저자가 성(聖)과 속(俗)이 함께 할 수 없음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하바라따>를 통해 후대에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모두 가지려는 이들이나, 두 권력의 결탁이 후대에 계속되어 나타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들게 된다....


 분노에서 일어난 불, 세상을 삼키려 하는 그 불을 물속에 던지거라. 그리고 축복 있거라. 세상은 물 위에 서 있는 것이란다. 모든 것의 진수는 물로 이루어진 것이며, 실로 온 세상은 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훌륭한 브라만이여, 그러니 불 같은 네 화를 물에 던지거라. 브라만이여, 네가 하고 싶다면 성냄에서 비롯된 네 불을 바닷속에 있게 하거라. 물을 태우거라.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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