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빌리 브란트는 각자 두 가지 역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우파를 대체로 자유주의 이상에 관용적인 하나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통합했고, 서독을 서방에 안착시켰다. 브란트는 사회민주당을 중도 좌파 집권당으로 만들었고, 전 세계에서 독일에 대한 존중을 회복시켰다.

국내 정치에서, 시민권과 위대한 사회로 인해 민주당은 한 세대 동안 남부의 지지를 잃을 것이라고 존슨은 예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간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그가 너무 적게 추산한 셈이었다. "백인의 반격"으로 민주당은 남부에서, 그리고 북부의 노동 계급 다수에게서 지지를 잃었는데, 법원이 주택 공급 양상 때문에 전교생이 흑인이거나 전교생이 백인인 지역 학교들에 인종이 섞이게 하고자 강제 버스 통학을 명령한 후에 특히 그랬다.

하이에크와 달리 뷰캐넌은,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적·윤리적 안정성을 영원히 뒤집어버리기 이전의 분명한 역사적 평온 상태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이 믿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정치적으로 말해서, 1950년대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은 자유주의적 중도파로 수렴되었다. 존 롤스는 미국이 최우선적인 자유주의적 합의를 근간으로 하는, 관리 가능한 불일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유주의 역사학자 하츠와 자유주의적 정치학자 립셋은 미국을 마치 진짜로 그런 나라인 것처럼 다루었고, 이 두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미국주의 각각이 도전에 직면했다. 좌파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의 오랜 루스벨트-트루먼 연합의 분열을 도왔다. 민주당은 국가와 도시보다 피부색, 민족 집단, 젠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는 도덕 정치가 과거의 소수파를 지배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핵심 세력으로 만들면서 공화당을 완고하고 협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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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자료만 보면 나보니두스는 바빌론 신전의 조직과 경제적 구조를 개혁하고, 이라크 남부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막 무역로를 확보한 성공적인 통치자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작성된 기록에는 매우 다른 평가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무례하고 건방진 자로서 마르두크와 바빌론 주민들을 크게 모욕했기 때문에 고결한 키루스가 이 사악한 자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크세르크세스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에산길라 신전의 사회적·경제적 조직을 와해하고, 신을 섬기는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신전공동체의 큰 매력인 오랜 특권을 박탈함으로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하다. 아시리아 왕들을 좌절시켰던 바빌론의 도시 엘리트들이 장악한 종교적·정치적 권력은 종언을 고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귀족 세력이 와해되면서 페르시아 통치에 대한 바빌론의 오랜 저항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바빌론을 외형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전통적 특권을 사수하려는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빌로니아의 문화적·인종적 용광로는 시골 지역이었다. 아히캄, 아히카르와 같은 포로 출신들은 사업 기록에 점토판을 활용하거나 아람어 문자를 수용하는 등 새로운 고향 및 이웃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다.

쐐기문자 문화는 에산길라 및 바빌로니아의 다른 신전들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차 의례·주술·의식 및 천문학의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텍스트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인데, 이는 미래에 대한 신의 설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바빌론에서 알려진 가장 마지막 텍스트는 서기 74년에 쓰인 것이고, 우루크의 경우는 몇 년 후인 서기 79년이다.

《바빌론 탈무드》는 서기 3~5세기 사이 이라크 남부와 사산제국 지역에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바빌론이라는 이름은 바빌론 도시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지역은 ‘순수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의 유대인은 별다른 확인 없이 통혼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었다. 만다교 서책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탈무드》는 고대 바빌론의 징조와 의학 및 주술 지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식 전수의 통로가 되었다. 한때 철저하게 통제되던 바빌론의 관측천문학과 수리천문학은 이제 고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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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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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의 봉기는 19세기 중반 청제국이 처했던 상황, 또 그러한 상황을 가져온 세계사적인 변화와 연관시킬 때 비로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기폭제는 결국 1862년 섬감 陝甘 지역에서 일어난 회민 봉기의 성공과 그로 인한 청조의 권위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이었다(p134)... 1864년 신강 무슬림 봉기는 태평천국운동, 섬감의 회민 봉기 등이 표상하는 청조체제의 근본적인 동요 속에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동아시아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변화들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135

김호동 (金浩東, 1954 ~ )교수의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Revolution and its failure in modern Central Asia>는 19세기 중반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 약 10년 간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신강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Jacob Beg, 1820 ~ 1877)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성립과 멸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이다. 약 10여 년에 불과한 이 짧은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청 제국의 일부가 된 신강을 내지와 마찬가지로 '성 省'으로 편입되고 중국의 '불가분할적' 영토의 일부로 바뀌는 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이 일리 장군을 필두로 각급 대신 大臣들이 관할하는 군사적 지배, 하킴을 비롯한 현지의 벡 관리들을 활용하는 간접적 지배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곧이어 청조 말기 내지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의 한인 漢人들이 신강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이를 통해 점진적이지만 확고한 '중국화'가 진행되어갔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3

저자는 본문에서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과의 전쟁 전후 청나라의 대(對)신장 지역에 대한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지방 귀족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느슨한 형태의 지배를 실시해왔다. 이러한 형태의 간접 지배 결과 중앙정부는 끝없이 많은 돈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쏟아부어야 했으며, 적지 않은 군대의 주둔도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이러한 형태의 구조는 수탈자의 증가에 불과했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1864년 무슬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간접 지배층 역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었기에 1864~77년의 혼란이 마무리 된 후 지배형태는 직접 지배 형태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무슬림 봉기가 있기 전 신강에 있는 청조 관리들이 봉착해 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비부족이었다. 매년 150만량 이상을 내지 각성 各省으로부터 보조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으나 1840년대 이후 청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보조금의 지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71

무함마드 카쉬미리의 <승전서 勝戰書>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기 전 무슬림 농민들에게 부과된 과도한 세금, 특히 청조 관리 -> 통사 通事 -> 무슬림 벡 -> 농민들에게로 내려가면서 그 액수가 점점 더 불어났던 폐습 弊習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이 이산하고 '고향'(vatan)을 버리고 타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96

19세기 후반의 신장 지역의 한(漢)화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무슬림 세력과 종교적인 권위는 쇠퇴하고 근대적인 민족(民族)문제가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시기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시기로 판단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신장-위구르' 지역명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리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을 통해 독자들은 신장 지역의 근현대사 단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 주민에 대한 각종 탄압과 대규모 한족 이주 문제의 기원이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 이 전쟁이 영국-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지역전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야쿱 벡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영국과는 대조적으로 그 정권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 세력 확장에 대해 일리점령으로 대응했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청군에 대한 식량판매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노리려 했던 것은 아마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09

글의 마지막은 야쿱 벡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고 한다. 한 지도자의 외교적 판단이 어떻게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지 동투르키스탄의 아픈 역사가 잘 보여준다...

조직적인 훈련과 신식장비로 무장한 3만 명 이상의 야쿱 벡 군대가 그렇게 쉽게 궤산된 직접적인 원인에는 야쿱 벡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립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 청과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특사를 런던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속을 희망했던 영국측의 중재노력에 기대를 걸었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할 용의도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그 같은 협상을 원만히 타결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전선에서 청군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함으로써 휘하 군대에 대해 청군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의 군대는 투르판으로 밀려내려왔고, 야쿱 벡의 발포금지 명령으로 아무런 대응책도 취할 수 없었던 무슬림 군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버렸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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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양장) - 또 하나의 초강대국은 탄생할 것인가
모리 가즈코 지음, 이용빈 옮김, 정승욱 감수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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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하는 정책, 변하지 않는 제도'가 현대 중국의 특질이라고 한다면 현란한 정책 변화에 의해 눈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으며, 제도 및 가구가 변화되었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관찰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책을 '용'으로 삼고 제도 및 기구를 '체(體)'로 상정한다면, 전통 중국에서의 '용'과 '체'의 관계에 가깝다. 전통 왕조도 '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37


 모리 가즈코(毛里和子, 1940 ~ )교수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現代中國 內政と外交>에서 중국 정치와 외교의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중국의 역대 왕조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제도와 기구라는 하드웨어(hardware)는 크게 손대지 않고, 공산당의 정책(sotfware)만 변화해온 중국 정치(政治)와 자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중화(中華)사상의 연장선에 있는 중국 외교(外交)가 저자가 생각하는 오늘날 중국 공산당의 현실이다.


 본질적으로 하자면 중국외교는 보수적이다. 강한 언사는 '공격으로 수비를 삼는다'는 양동 작전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실로 화려한 외교를 전개하며 국력상의 약함을 커버해왔던 것이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168


 저자는 중국의 정치체제를 당(黨)을 중심으로 한 국(國)과 군(軍)의 집합체로 본다. 다수의 공무원과 군인들은 당원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국가가 '50%+a' 이상 주식을 소유한 국유기업은 물론, 민간기업의 임원들 역시 다수가 공산당원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철저한 엘리트 지배를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결국, 공산당이 지키고자 하는 체(體)는 '당-국가-군'의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여겨진다. 


 현대 중국 권력의 안정적 지속은 모두 당(중국공산당), 국가(의회, 정부, 사법기관), 군(중국인민해방군)의 '삼위일체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의 지속적 고도성장과 글로벌 대국화를 가능케 했던 최대의 요건은 국내 거버넌스의 안정, 리더십의 일체성, 경제체로서 지방정부의 활성화 등의 정치적 요인이 크지만, 특히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당, 국가, 군의 삼위일체 체제에 결정적인 틈새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 지속적 성장을 밑받침했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38


 다른 한편, 저자는 외교에서 중국은 '자신- 주변'이라는 자국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국력이 약했던 과거에는 화려한 동맹 외교로, 국력이 신장된 2010년대에는 '핵심적 이익' 수호로 외교정책은 변화되어왔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G2에 해당하는 국력을 갖춘 오늘날에도 중국의 외교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보다 활발해진 군사 무기 수출과 자원 확보를 위한 움직임 등이 과거보다 적극적인 외교 행보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선제적 공격'을 통한 방어 전략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팡중잉(龐中英, 난징대학)도 다음과 같이 매우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즉, "중국은 장기간 지역 수준에서 자신과 아시아의 관계를 처리해오지 않았다. 주변과 중국과의 두 나라 간 관계의 연쇄의 결과로서 아시아를 고려해왔다", "중국의 아시아 인식은 주변과 자기이며, 아시아 속에 융합되는 것으로서 자기인식이 아니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140


 국제무대에서 중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호해야 할 국가이익을 '핵심적 이익'으로 천명하게 된 것은 2009 ~ 2010년에 남중국해, 동중국해의 해양 이익을 둘러싸고 중국이 주변의 관계국들과 충돌하기 시작할 무렵부터이다. 2010년 말 외교 담당의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秉國)는 다음의 세 가지를 '핵심적 이익'으로 규정했다. 1) 국체, 정체와 정치의 안정(중국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 제도, 사회주의의 길), 2) 주권의 안전, 영토 보전, 국가 통일 3) 경제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기본권 보장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180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저자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정치와 외교를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규정한다. 이러한 정책의 기원이 과거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던 시기의 체(體)에서 나오는 거버넌스(governance, 治理)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면, 과거와 다른 몸집과 힘을 갖춘 오늘의 대국(大國)통치에는 분명 다른 정체(政體)가 요구될 것이다. 


 현재 중국의 레짐이 다양한 민주주의적 의태로 외양만 꾸민 것이라해도 집권도와 지배도가 강력한 당/국가가 일체가 되고 있다는 숨길 수 없는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면서, 이 체제의 역사적 역할이 사실상 이미 끝났고 객관적으로는 탈권위주의가 당분간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274


 그렇지만 마오쩌둥의 당정불분(黨政不分) 상태에서 덩샤오핑의 당정분업(黨政分業)으로 옮겨간 후, 1987년의 자오쯔양의 당정분리(黨政分離)가 실패하고 다시 당정분업으로 쇠퇴했으며, 2023년 시진핑의 3연임으로 다시 한 번 당정불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저자가 지적한 탈(脫)권위주의라는 과제는 뒤로 밀린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해 최근까지 중국 공산당이 달성한 경제 성과 등은 다수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중국 정체에서의 권위주의적 특성은 한동안 계속 되지 않을까.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해 비록 서구 민주진영은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정작 중국인민들의 시각에서는 80대 바이든, 펠로시 등이 지금도 건재한 미국 등 서구 정체가 천안문 당시 비상 소집된 '팔로 회의'만큼 위기상황의 체제로 비춰지지 않을까.


 중국 정치에서는 비상시 개인 독재자 아래에서 대단히 비제도적인 정책결정이 행해졌으며, 중앙정치국을 떠났던 8명의 연령이 80세가 넘는 노인들에게 최종 결정이 위임되는 등, 실로 비상 수법이 사용되었다. 한편 상시에 특히 일상적인 사항 및 정책 문서는 관료기구와 '문서 정치'가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_ 모리 가즈코, <현대 중국의 정치와 외교>, p79


 공산당의 권위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의 엘리트 체제의 대립이 오늘날 미국과 중국 지도부의 특성을 요약한 것이라면, 소수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손을 잡는 것도, 대립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조용히 움직이는 동안, 입으로만 '자유, 자유'를 외치며 천둥벌거숭이 마냥 날뛰는 철없는 어느 국가 지도자의 행동이 더욱 딱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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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정책, 변하지 않는 제도‘가 현대 중국의 특질이라고 한다면 현란한정책 변화에 의해 눈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으며, 제도 및 가구가 변화되었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관찰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책을 ‘용‘으로 삼고제도 및 기구를 ‘체(體)‘로 상정한다면, 전통 중국에서의 ‘용‘과 ‘체‘의 관계에 가깝다. 전통 왕조도 ‘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 P37

주지하다시피, 중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중국공산당이다. 국가의 정치제도 중에서 유일한 정당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 당의 권력과의사를 국가의 정치제도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정치에서의 실질인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행위자는 무력, 즉 중국인민해방군이다. 사회주의 국가 및 발전도상국에서 군이 정치적으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있는 예는 많다. 정치와 군사가 분화되지 못한 것 자체가 앞의 2가지 정치체의두드러진 특징이다. 중국 정치에서 군은 단순한 국방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 파워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져왔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서처럼 정치 변화의 주역을 맡았던 일도 있다. - P38

1989년 톈안먼 사건이 중국에서의 군의 역할을 재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군은 국방에 특화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정치적 위기 속에서 ‘치안군‘ 즉 적나라한 강제 수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군 자체가 일당독재를 밑받침하는 유일한 물리적 힘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서처럼 군의 정치화, ‘철포가 당을 지휘‘하는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국제 환경에 극적으로 변화했으며 중국 자신도 경제개발 우선의 방침을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이 철포를 지휘하는 것‘은 중국식 문민통제인 것이다. - P56

 국유기업의 약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① 민간기업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고, ② 기업 경영자는 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으며 당과 기업 간의 유착이 진전되어 권력과 재력을 한 손에 쥐게된 특권층과 구조적 부패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P111

특히 부패의 뿌리가 일당지배체제, 패트론 • 클라이언트 관계, 투명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 국가에 의한 미디어 지배, 법치의 결여에서 초래되는 구조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시진핑이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반부패 캠페인이 성공할 리가 없다고 준엄하게 지적하였다(Shambaugh, 2015). - P126

 필자가 지금 갖고 있는 가설은 중국에서는 현재 국가의 무한한 사유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국가자본주의에서의 당국 체제란 중국공산당에 의한 국가의 사유물화 외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 P128

본질적으로 하자면 중국외교는 보수적이다. 강한 언사는 ‘공격으로수비를 삼는다‘는 양동 작전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실로 화려한 외교를 전개하며 국력상의 약함을 커버해왔던 것이다. - P168

 2011년 9월 6일에 출간된 백서인 『중국의 평화발전」에서는 더욱 엄밀하게 ‘핵심적 이익‘이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즉 ① 국가 주권, ② 국가안보, ③ 영토 보전, ④ 국가 통일, ⑤ 국가 제도와 사회 대국(大局)의 안정, ⑥ 경제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기본적 보장 등의 6가지 항목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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