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제국 : 중국 - 고대―1600
발레리 한센 지음, 신성곤 옮김 / 까치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극적인 성장 기간들 동안 중국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관찰자들은 모두 제국이 통합되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제국을 통일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바랐다. 그들은 분열과 전쟁, 잇따른 혼란에서 얼마나 많은 활력(活力)이 비롯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87

발레리 한센 (Valerie Hansen, 1958 ~ )은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The Open Empire : A History of China to 1600> 을 통해 한(漢)족이 수립한 제국(帝國)이 천명(天命)에 의한 정통성있는 국가인 반면, 주변 이민족에 의해 수립한 이른바 유목제국들은 혼란과 파괴만을 주었을 뿐이라는 한족 중심의 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중원을 지배한 유목제국들은 천명에 어긋나는 오랑캐에 불과했을까.

천명사상은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 때에 등장하였지만, 후대 왕조교체의 틀 속에 교묘하게 편입되어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를 기록할 정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천명은 신의 의지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만 확인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을 신의 의지의 결과로 여기도록 만들어 주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59

저자는 <열린 제국>에서 시선을 아래로 돌린다. 왕조 중심의 중국사가 아닌 당대의 시대상에 초점을 맞춘 저자의 분석은 단편적으로만 접하던 생활상에 활력을 부여한다. 문학작품에 남겨진 언어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저자는 작품의 행간속에 담겨진 감정을 헤아리고, 생활상을 통해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분위기를 보다 생동감있게 전달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으로 독자들은 단편적인 지식의 파편이 아닌 열리고 닫히는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국 전역의 집안에서 일어났음직한 이 대화는 가문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 및 구원과 불교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요 주제를 보여준다. 안령수는 자신의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을 구원받게 해주고 싶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체의 이기적인 동기를 부인한다. 공덕(功德)을 베푼다는 불교의 교리, 즉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교리가 안령수가 펼친 주장의 근거였다. 비구든 비구니든 승려가 됨으로써 자신들이 쌓은 공덕을 자신들의 가족에게 베풀어줄 수 있고, 대신 가족들은 승려를 지원함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98

유행에 민간함 여성들은 중앙 아시아풍의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어깨까지 덮는 최신 유행의 숄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외출의 자유는 후세 상류층 여인의 규방 속 생활풍속과는 전혀 달랐다. 후세의 여인들은 걷기 어려울 정도로 발을 졸라매는 전족(纏足)을 해야 했고,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당대의 그림을 보면 북방의 여인들이 누렸던, 상대적으로 강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말을 탄 여인들은 매우 편안해보이고, 한 어머니는 딸에게 말의 고삐를 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251

이러한 이해의 기반 위에 독자들은 고대 상(商)으로부터 근대의 명(明)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팽창과 축소라는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선진(先秦)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은 크게 진나라의 법가(法家)에 의한 규율과 유가(儒家)에 의한 예(禮)로 정리되면서 국가 단위에서 법과 도덕의 틀을 형성한다.

진한 제국의 통치 400년 동안 중국 사회는 이후의 제국에서 나타날 윤곽이 대부분을 드러냈다. 제국시대는 다양한 계층 사회 사이의 이동 없이 교육받은 가문이 강력한 지주계층으로서 최정상을 점하였다. 한대의 시장경제와 이를 규제하는 정부의 역할 또한 유지되었다. 중대한 변화가 올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은 바로 정신적인 측면이었고, 이 변화는 왕조의 붕괴 직후에 바로 찾아왔다. 유교와 도교를 양 축으로 하던 한대의 신앙세계는 새로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84

이에 반해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도가(道家) 사상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서방으로부터 전파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도가의 용어 위에서 이해되면서, 본래의 종교와는 다르게 융합된 종교적 색채를 보여준다. 외래로부터 전래된 사상을 중국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은 '열린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회는 가톨릭의 주요 개념과 교리를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곧 문제에 부닥쳤다. 그들은 비기독교적인 함의를 내포하는 기존의 중국어 단어를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것인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초기의 불교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도교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곤란에 대처하였다... 엄격한 일신교인 가톨릭은 중국에 존재하던 모든 종교적인 전통과 상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가톨릭 교리를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66

그렇지만, <연린 제국>에서 다루는 기간 내내 중국이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게는 유목민족에 의한 지배 시기, 한족이 지배하는 왕조에서도 중상(重商)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은 경우 외부와의 교역이 활성화되고 비단길이 열리는 등 열린 제국으로 기능했지만, 반대로 중농(重農)주의자들이 집권한 경우 제국은 장성과 강을 경계로 문을 닫아버리는 닫힌 제국이 되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전매정책에 대한 논쟁에는 두 집단이 참여하였다. 한쪽은 대부(大夫)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매정책의 입안자들이었고, 다른 쪽은 검소한 생활풍속과 자급자족적 경제체제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비판적 지식인에 속하는 문학(文學) 집단이었다. 문학 집단은 독점의 폐해뿐만 아니라 중국 외의 국가들과 교역을 장려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정부관리가 교역을 금지시키고 전매정책을 폐지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는 보다 단순한 경제체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大夫)는 정부의 교역정책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63

왕안석의 신법(新法) 중 대부분은 화폐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정부의 모든 관리, 심지어 하급 관리가 이전에 받던 모든 종류의 급량(給糧)을 현금 봉록으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왕안석은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는 다마(茶馬) 무역을 관장하는 시역무(市易務)라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창설하였다. 상인들이 대거 이 관서에 관리로 충원되었으며, 관리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를 기준으로 승진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325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민족에 의한 굴욕의 시기가 오히려 중국문명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신이며 도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분열과 대립의 시기 동안 세계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이 안정의 시기를 거치며 오히려 서서히 침몰해가는 것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같이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는 중국인이 아닌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객관적인 중국사라 생각된다.

전통시대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분열은 사람들에게 혁신을 강요한다. 이 시기 동안 도교의 연금술사들은 새로운 처방전과 약초를 실험하였다. 또한 대담한 불교 구법승들과 상인들은 비단길과 바닷길을 개척하여, 이를 가로질러 빈번히 중앙 아시아, 인도, 동남 아시아로 여행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1600>, p230

중국은 명대를 통해서 번영과 성장을 누렸다. 이전 시기와 비교해보면 제국의 경제적 팽창은 전례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1600년에 중국은 더이상 세계의 선진국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그늘에 가려졌던 유럽이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80

글의 마지막은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중국에 가서 거래하는 조선상인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의 또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노걸대(老乞大)>는 말을 팔러 베이징에 갔던 한 무리의 한국인들의 여행을 자세히 묘사한 회화책이다. 비중국인을 위한 언어교재로 1400년 이후에 쓰인 이 책은 한글-중국어 두 언어가 병기된 판본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p470)... <노걸대>를 보면 지폐가 없어도 화폐경제가 순조롭게 기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인들은 모든 거래에서 은을 사용함으로써 현금판매를 하였다. 그들이 상품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상품과 바꾼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73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6-3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의의 뒷모습이네요. 연의의 여름이 건강하고 즐겁기를 바라요!

겨울호랑이 2023-06-30 11: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께서도 건강한 여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30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이 책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렸어요. 요즘은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입장에서 본 역사를 여러 모로 주목하게 되는 듯 합니다. 안 그래도 중국사 읽기를 진행하고 있는 관계로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6-30 15: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왕조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초점을 맞춘 다른 매력있는 중국사로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도 좋은 독서 시간 되세요! ^^:)

그레이스 2023-06-30 18:22   좋아요 1 | URL
우리 동네 도서관에도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그런데 까치거면 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ㅋ
 

그러면 노르드인들이 빈란드를 버리고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가는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노르드인들이 목재 말고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넌지시 운을 띄웠다.

1000년 무렵에 일어난 다른 만남들과 비교할 때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조우가 장기적으로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약간의 대화, 이따금 진행된 물물교환, 아마도 사고로 일어났을 몇 차례의 육탄전.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에 일어난 접촉은 이 정도였다.

노르드인의 아메리카 탐험은 세계화와 관련된 그 밖의 다른 정보도 제공해 준다. 아메리카 대륙의 교역이 그들의 탐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말하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노르드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장거리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르드인의 탐험이 가장 중요했다. 이미 존재했던 대서양 양쪽의 교역망이 그 탐험으로 연결되어 세계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르드인들이 만일 유카탄반도에 닿았다면 그 경로는 해상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가능성은 훨씬 낮지만,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유카탄반도에 도보로 끌려왔을 수도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바이킹 페니가 발견된 메인주의 고다드 포인트에서 육로를 통해 치첸이트사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자. 메인주에서 멕시코로 가는 데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경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남으로 흐르는 미시시피 계곡을 통과하는 길이다. 물론 그것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유골이든 물건이든, 그 여정을 끝까지 마쳤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확장된 경로 네트워크가 1000년 무렵에 형성되었고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물건과 사람, 정보가 그 경로들을 따라 이동했다고 확신한다.

콜럼버스는 카누의 중요성을 즉각 파악했다. 배 안에 "그 고장의 모든 산물이 실려 있다는 것을 (……) 한 순간에" 알아차린 것이다. 콜럼버스는 수놓아지고 채색된 면 의류, 목검, (아마도 흑요석이었을) "강철처럼 절개된 부싯돌" 칼, 구리 방울 등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롭고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물건들"을 마야인들에게서 빼앗았다.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스페인인들이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치첸이트사가 중심이 되었던 그 교역망은 1000년에는 북쪽의 차코 캐니언과 카호키아로 뻗어 나가고, 남쪽의 콜롬비아까지 도달했다. 그 교역망은 유연하기도 했다. 1000년 이후의 치첸이트사나 1050년 이후의 카호키아처럼,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들이 생겨나면 주민들이 새로운 통로를 개통하거나 새로운 중심지와 연결되는 해로를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은 기독교계를 형성한 핵심적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영역에는 프랑스의 두 배 크기인 40만 제곱마일(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인구 5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했으니, 동유럽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메카도 아닌, 비잔티움 쪽에 서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도 이제 더는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보유하지 않았다. 고향에 머물러 지내는 사람까지도 포함해, 그들은 이제 그들의 출생지를 종교 블록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규모가 큰 집단 사람들과 자기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핵심 단계로 진입한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초호에서 고기를 잡고 텃밭을 일구며 고향에 머물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심지어 더 넓은 섬에서도 사회적 삶의 근간이었다. 농경과 연관된 사회 구조는 상속과 토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생 순서가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원해의 식민화를 추진한 원동력은 땅과 상속권에 대한 추구일지도 모른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50/188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1936 ~ )의 <인류의 대항해-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Beyond The Blue Horizon>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바다로 연결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두 발로 대지를 딛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바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경작 가능한 토지'의 제약 때문이었다. 중세 봉건 귀족들의 봉토(封土)가 제한적이어서 장자에게만 상속되고, 둘째 이하의 자녀들은 성직자 등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고대 지중해, 인도양, 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바다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고대 항해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겼던 것 중 하나는 인명 피해의 불가피성, 결코 귀환하지 못한 카누들, 현대의 유럽과 미국 어부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침몰과 좌초에 대한 거친 숙명론이었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러운 항해 그리고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였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9/188

항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축적되지도 않은 시기 항해자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갖는 지식의 깊이 이상의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하나의 섬이 사라지면 다음 섬이 보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연안 항해을 통해 그들은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거래하면서 보다 멀리까지 나아가며 교류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가르침, 온갖 종류의 날씨 속에서 힘겹게 쌓은 경험, 하루하루 힘들게 암기한 각종 항해 지침은 글로 쓰이지 않은 전문 지식을 대대로 전달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연안 항해는 짧았다. 모든 여정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여정, 순풍이 불기를 기다리거나 수지맞는 교역로 근처에 잠복해 있는 해적들을 피해 피난처에 몸을 숨기고 몇 주 씩 기다리는 항해였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화물은 끊임없이 사고파는 과정을 거치며 여정의 끝에 가서 완전히 바뀌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1/188

이렇게 바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길(道)이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 두 채의 민가가 있고, 과거 나그네들이 호텔과 같은 커다란 숙박업소와 식당 없이도 시골집의 후한 인심에 의지해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바다는 원주민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인류의 대항해>는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했기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평등적이었고,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 1884~1942)가 말한 '쿨라의 교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바다의 영토는 상상의 영역까지 이어진다. 육지 부족들 사이에 꿈 Dreaming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바다의 영역과 물길을 아우르는 바다 꿈 Sea Dreaming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하루의 실제 세계와 정신적 영역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 원주민의 삶 속에, 창의적이고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며 육지나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연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속에 하나로 얽혀 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26/188

이와 같은 교환 관계가 파괴된 것은 바다와의 협력관계가 깨지고, 바다를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로 인식된 근대 이후 부터다. '바다로 연결된 세계'가 아닌 '바다로 단절된 세계'로 바다를 타자화하는 관점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이후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 ~ 1950)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오늘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에는 '단절에서 연결'이라는 공통된 인식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컨테이너선과 초대형 유조선의 세계에서 공식 항해 지침서는 훨씬 짧아졌고 레이더 목표물과 항만 규정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저자들은 이제 작은 정박지와 포구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데 유람선을 타고 다니는 선원들에게는 이제 그들만의 안내서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가 다시 우리로부터 멀어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느낌은 원양 여객선이나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 가장 분명해진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5/188

지중해와 마찬가지로 인도양에서도 그러한 연안 항해는 전쟁중인 지배자들과 국제 외교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 각광을 받지 않은 채 번성했다. 근해 운항은 수천은 아닐지라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채 오로지 예측 가능한 바람의 리듬으로만 이어진 여러 민족과 국가들 간의 연결을 촉진했다. 긴밀하게 상호 연관된 몬순 세계는 그렇게 생겨나 동아프리카 해안과 홍해에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뻗어 갔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78/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스가 유럽에 보급되면서 몇몇 기물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기물을 만드는 기공들이 코끼리의 두 엄니를 주교 모자의 두 꼭지로 오해해 코끼리가 비숍(주교)으로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바이킹들도 폴리네시아인 탐험가들과 마찬가지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이 1000년에 굳이 새로운 지역들을 탐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탐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구조였다. 특히 전사 집단의 역동성이었다. 야심 찬 지도자들이 새로운 영토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세계 여행을 1492년 이전에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일어난 특정한 접촉의 한 순간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바이킹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한 1000년이 바로 특정한 접촉의 순간이다. 그곳을 기점으로 사료에 묘사된 길들을 따라가며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다른 길들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모르는 사이에 - 제12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책마을 112
김화요 지음, 오윤화 그림 / 웅진주니어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엄마 지갑이 없어졌단 말이야. 너희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간 바로 어제!" 주목이가 험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거칠게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이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8

김화요의 <내가 모르는 사이에>는 주목이의 생일 파티에서 엄마의 지갑이 사라져 버린 사건과 이 사건에 얽힌 아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각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은 사건이 가져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평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문제들이 사건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결코 작은 일이라 볼 수 없는 사건이지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사건. 그리고, 친구들 간의 갈등과 심리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아이들이 재밌게 읽는 것은 아닐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내별마을에 산다고 하면 바로 어색해지는 어른들의 표정, 아파트 단지 꼬마들이 거지 동네라고 생각 없이 부르는 곳. 그래도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길고 가파른 계단도,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도, 낡아서 바람이 세게 불면 신음 소리를 내는 우리 집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내별마을은 무지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조용히 나이 들어 묵묵해진 골목길이 있는 곳이었다. 갈 곳이 없어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서로에게 각별히 끈끈한 곳이었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15

<내가 모르는 사이에>를 읽으면서 아빠는 작품에 나오는 친구들의 장점에 대해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가난한 동네에 살지만, 그곳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곳만이 갖는 장점을 발견하는 효민이. 효민이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효민이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주먹이.

한 번도 고효민을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가진 게 적은 것이 확실한데도 나보다 많이 가진 것 같아서 고효민을 볼 때마다 속이 배배 꼬였다... 그러나 고효민은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아이였다. 처음에는 단점이나 약점을 찾아낼까 싶어서 지켜봤으나 나중에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쳐다보게 되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냥 고효민이라는 인간 자체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고효민이 신경 쓰이고, 그 애의 말에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가끔은 같이 어울리고도 싶었다. 어쩌면 나는 고효민과 친구가 되고 싶었나보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103

그리고, 지갑을 가져간 친구의 마음까지. 아빠는 이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멋진 친구들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갖는 좋은 점만 보고 자신의 것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마음, 자신이 피해를 볼 까봐 뒤로 숨는 마음 등. <내가 모르는 사이에>의 친구들은 어른들도 하기 힘든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어서 아빠도 많이 배우게 되었단다. 아니, 어쩌면 어른들이어서 갖기 힘든 마음일 수도 있겠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지.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채우려 하거나 남을 이겨서 앞서 가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빠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로부터 배울 수 있어 좋았어. 연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떤 점이 좋았니? 이번 한 주는 부회장 선거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겠구나. 아빠는 결과와 관계없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의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 이번 한 주도 건강하게 잘 보내고 행복한 토요일을 맞이하자꾸나. 사랑하는 아빠가.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국 말해야 하는 것은 진실 뿐이었다.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월요일에 **이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아마 내일도 나는 지금처럼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그런 것밖에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 회피하는 것, 숨어 있는 것.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