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한 근대성 - 현재의 존재론에 관한 에세이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황정아 옮김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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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한 근대성>은 근대성의 '단수성'을 설파하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근대성 담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체작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성에 연루된 각종 자가당착과 내적 한계를 짚어가는 그의 분석에서 핵심은 앞서 말한 대로 근대성 담론은 근대성이라는 비유가 투사된 서사이며 그것도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서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옮긴이의 말>, p272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 ~ )의 <단일한 근대성- 현재의 존재론에 관한 에세이 A Singular Modernity: Essay on the Ontology of the Present>는 옮긴이의 말에서 드러나듯, '근대성'에 담긴 일종의 모호성 또는 이중성을 지적한다. 저자는 근대를 먼저 '단절'로 규정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잘 나타나듯 근대 이전과 이후 단어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근대화의 힘은 단어의 의미를 단층(斷層)처럼 어긋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규정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동시에 반복되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 근대의 모호성은 드러난다.


 '근대'라는 용어에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핵심은 바로 이런 단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부스(nonus)와 모데르누스 사이의, 새로움과 근대 사이의 구별이다. 모든 근대적인 것은 반드시 새롭지만 모든 새로운 것이 반드시 근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6


 우리가 확인하고자 했던 바는 단절(break)과 시대(period)의 변증법이고 이는 그 자체로 연속성과 파열이라는 (다시 말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더 광범위한 변증법의 한 계기다. 후자의 과정은 스스로를 멈추거나 '해소할' 수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형식과 범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32


 프레드릭 제임슨은 '서사의 내재화'라는 개념을 통해 모더니즘 안의 차이와 반복을 드러낸다. 근대 이전 시기와의 단절을 선언한 2차 대전 이전의 전기 모던과 자기 회귀적인 후기 모던이 차이를 보여준다면, 모더니즘을 부정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사실은 직전의 후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일종의 시대의 반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은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단일한 근대성> 서두에서 '근대'(modern)라는 단어의 사용이 이미 5세기부터 있어왔음을 말한다. 빅히스토리에서 여러 차례의 대멸종과 이전과는 다른 생명체의 번성이 반복되어온 것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근대의 의미는 반드시 자본주의와 연관지을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제기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영어의 modenity를 근대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현대성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다른 실마리를 제시한다...  


 결정적인 것은 서사의 내재화(interiorization)다. 서사는 이제 예술작품 내부에서 도출될 뿐 아니라 작품의 근본 구조가 된다. 통시적이었던 것이 이제 공시적인 것이 되고, 사건들의 시간적 연쇄는 예기치 않게 다양한 요소들의 공존이 되며 이런 요소들이 행하는 재구조화가 마치 영화의 정지화면처럼 포착되고 정지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145


 고전적인 모던 내지 본격 모던은 재현 자체에 대해 반영적이고 자의식적이다. 대체로 그것은 재현이 내적 논리에 따라 자체의 반(半)자율적인 진로를 밟아가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재현이 스스로를 자신의 내용과 대상에서 분리하도록, 말하자면 스스로를 해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p227)... 내가 보기에 후기 모더니스트들에게 귀속되는 반영성은 이런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후기 모더니즘적 반영성은 모더니스트로서의 예술가의 지위와 관련되고, 예술에 관한 예술, 예술 창조에 관한 예술로의 끊임없는 그리고 자의식적인 회귀를 내포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28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본적으로 단절하려고 한 것은 후기 모더니즘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과 단절함으로써 고전적 모더니즘이나 심지어 근대성 일반 내지 근대성 그 자체와 단절한다고 상상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 p241

단절과 시대의 변증법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핵심은 이중적인 움직임이다. 한편에서는 연속성의 중시, 곧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음새 없는 이행에 대한 고집스럽고 확고한 강조가 서서히 근본적 단절에 대한 의식으로 바뀌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단절에 집중된 관심이 점차 그 단절을 하나의 자체적인 시대로 바꾼다. - P33

근대성의 비유는 리비도를 장전하고 있다. 즉 그것은 다른 형태의 개념들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 독특한 종류의 지적 흥분을 작동시킨다. 이는 분명 기쁨이나 열렬한 기대 같은 정서와 희미하게 연결된 하나의 시간적 구조로서, 현재의 시간 안에 약속을 응축해 넣고 현재 그 자체 안에 미래를 더 직접적으로 소유하는 법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 P45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Dialectic of Enlightenment)에 바탕을 두고 있는바, 여기에 따르면 이른바 지식과 과학의 진보라는 것은 일종의 낯설게하기이며 이는 이전의 합리성을 미신의 지위로 강등시키고 결국에는 실증주의라는 반(反)이론적 황무지로 보낸다. 그러고나면 이 새로운 설명의 관점이 훨씬 더 만족스럽고 이해가능한 과정을 통해 이른바 모더니즘적 혁신이라는 목적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 P181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모던한 작가들에 있어서 그런 형식은 결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한 마주침에서 실험적으로 발생해 결코 예단할 수 없는 구성물이 되어간다. 형식의 구조가 미리 알려질 때, 즉 주어진 또는 이미 선택된 내용의 날것 그대로의 경험적 요소들이 충실히 따라야 할 일련의 필수요건으로서 미리 알려질 때 동학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형식을 미적인 것의 자율성 또는 예술작품의 자율성으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이상이자 처방으로서의, 또 규제원칙이자 지고의 가치로서의 미적 자율성은 모더니즘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부산물이자 나중에 덧붙여진 관념이었다는 게 지금까지의 이 글의 주장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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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점점 더 ‘국치’國恥와 동일시되었고, 젊고 새로운 엘리트들은 여기에 대해 혁명과 ‘구국’救國을 요구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고대의 위엄에 대한 회상과 중국의 퇴보에 대한 분노가 결합되어 중국의 혁명적 민족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900년 무렵 시작된 이러한 전개는 청조의 빠른 종말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공화국의 구조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민족을 정치적 공동체 혹은 ‘상상된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상상의 요소들은 공통의 역사, (방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영토에 대한 권리, 민족성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공통의 역사적 목적telos 등으로 구성된다. 혁명적 민족주의는 공통 유산의 독특하고 구속력 있는 측면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배타적이었다.

혁명이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혁명이라는 말이 서구의 혁명 개념에 좀 더 어울리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기의 남은 기간에 이 폭넓고 더욱 급진적으로 된 개념이 사상가들과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 용어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서처럼) 왕조 체제의 폭력적 전복과 연관되었고, 또한 그와 함께 인민과 국가의 사회경제적, 심지어 지적 상황의 총체적 전환과 연결되었다. 현대 시기에 혁명과 관련된 용어들이 빠르게 다양화되었다.

전반적으로 개혁으로 고취된 민족주의가 빠르게 청 국가의 통제를 벗어났고, 신문과 혁명적 집단들에서 인종주의적·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융합되었다. 이 세대 전체의 급진화는 신정 개혁의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결과로 볼 수 있다. 대담한 제도적 혁신은 너무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국을 구하는 데 실패했지만, 새로운 중국을 형성시켰다.

패러다임의 명백한 전환을 보여준 5·4운동은 분명한 단절이자 중국의 전통에서 현대성으로 전환하는 데 대한 널리 퍼진 연속성 이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5·4운동은 식민지 세계의 더 일반적 흐름을 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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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일기 -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되돌아본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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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라는 인간의 최대 특징은 하나의 개체로서의 사인 私人일 뿐, 지도자로서의 공인 公人됨이 거의 부재하다는 것이다. 사적인 개인일 뿐 공적인 리더임을 망각하거나 지향하지 않거나, 아예 존재의 과제상황에서 제외시킨 매우 특유한 인간이라는 것이다(p12)... 대강 이런 비젼이 그의 개체로서의 사인적 私人的 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고, 또 신념화되어 잇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대화를 거부하고 토론이나 타협의 장을 벗어나 있다. _ 김용옥, <난세일기> , p13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의 <난세일기 亂世日記>는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등 취임 후 불과 1년 만에 모든 국정을 총체적 위기로 몰아넣은 윤석열 정부의 시대를 바라보는 철학자의 일기다. 일기 속의 날짜는 4월 24일부터 5월 24일까지의 한 달이지만, 한 달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 - 윤석열의 미 의회 연설, 기시다 방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관련 문제 등 - 속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화제가 되었던 여러 사건들의 의미를 자신의 철학(哲學)을 통해 바라보면서, 사건의 의미와 사상의 여정을 함께 드러낸다.

나는 나의 책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실상 나의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그것이 쉽게 쓰여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논술방식이 파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또 그 주제의 선정이 항상 새롭기 때문에 평균적 저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언어 그 자체는 충분히 풀어헤쳐져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 농축된 언어에 피곤을 느낀다는 것, 그러한 사실이 충분히 반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_ 김용옥, <난세일기> , p21

제목처럼 어려운 시대(亂世)를 살아간다는 공통된 기반 위에서 저자는 자신의 사상을 쉽게 정리한다. <노자>부터 최근 <동학>과 <주역>에 이르는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한 달 동안의 사건과 함께 펼쳐져 지식의 넓이와 함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다루는 장은 깊이도 함께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난세일기>는 어려운 시대의 의미를 저자 자신의 철학으로 비추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능과 무지로 평가하는 윤석열 정부의 폭정이 방식에 있어서는 거칠지만, 그 의도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행동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보이지만, 그 의도는 마치 혈(穴)자리를 끊듯 우리의 가치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자신의 사상의 여정을 정리하며 밝힌다. 윤석열을 철학적으로 조망한다... 조금은 이질적인 조합처럼 느껴지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의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정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를 책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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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18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시절의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구호가 난무하던 시절이 기억납
니다.

지금이 난세가 아니라면 언제가
난세일 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7-18 21:57   좋아요 1 | URL
비정상의 정상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이 더 안 좋아지니,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요즘 자연과 사회 모두 절박함이 일상이 된 듯 합니다...
 

로마나 아테네에서 실제로 구현된 정치체제는 처음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가 현실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반면 중국에서 공자는 군주에게 정치적·법적·도덕적 지침 일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주나라에서도 신적 존재가 군주 권력의 근거로 작동했다. 그리스나 로마에서처럼 중국에도 삶의 각 부분을 책임지는 신들이 무수히 존재했지만,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존재는 단 하나, 바로 천天이었다. 중국 사상에 따르면 ‘천’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신으로, 인간의 행위에 기뻐하거나 분노하고 천명을 내리거나 회수할 수 있으며 희생물을 바쳐서 달래야 하는 존재였다.

주나라의 군사적·행정적 변화는 보다 광범위한 경제 변화를 수반했다(그리고 그것을 유발했음이 틀림없다). 농업 생산성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농업 분야는 국가가 소유한 땅에서 공동 생산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토지의 개인 소유와 상품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자유시장으로 이행했다. 화폐의 도입도 변화를 촉진했다.

로마 사회에서 중시했던 미덕과 공자가 꼽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예를 들어 ‘인’은 후마니타스humanitas, ‘덕’은 디그니타스dignitas, ‘의’는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로마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금욕적 수양이 강조되지 않았다.

후대의 기록들은 노자와 공자가 서로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며 치열하게 경쟁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회 운영에 대한 두 사상의 견해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는 사람이 도, 즉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던 반면 도교는 사람이 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정치혁명과 정치철학이 고대 사회가 직면했던 문제에 대응하고 한발 앞서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는 몇 차례의 대내적 사회 변혁과 대외적 전쟁을 경험하면서 몇몇 인물의 주도하에 국가 구성원들의 요구를 조율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세 나라에서 각각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폴리비오스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혼합된 로마의 균형 잡힌 정체와는 달리, 카르타고의 민회 투표권은 민중에게 과도한 권력을 주어 결국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가 속한 공동체 관계를 재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대 세계를 더욱 가까이, 주로 폭력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그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동맹을 구축하면서 전쟁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단일 통치자의 지배하에 거대하고 통합된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특히 동쪽에서 외견상 무질서하게 시작된 대이주로 인해 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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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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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자뵨=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 시스템이 존재한다. 먼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방치되면 반드시 경제적 격차와 계급대립으로 귀결된다. 그에 대해 네이션은 공동성과 평등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자본제경제가 초래하는 모순들의 해결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는 과세와 재분배나 규칙들을 통해 그 과제를 해결한다. 자본도 네이션도 국가도 서로 다른 것이고, 각기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접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어느 하나를 결여해도 성립하지 않는 보로메오의 매듭이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1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의 <세계사의 구조 世界史の構造>는 '자본(capital)', '네이션(nation)', '국가(state)'의 긴밀한 연계로 얽혀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기원과 문제점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대안에 대한 논지가 담겨있다. 고진이 본문에서 '보로메오의 매듭'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의 본질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고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주장에 주목한다. 고진은 헤겔의 <법철학>에 나타난 사회 구조를 파악하려는 관점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드러난 역사를 정신적인 것이 아닌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통해 시스템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우리는 1990년 이후의 상황 하에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라는 고전철학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검토하는 것은 액추얼한 문제이다. 이 경우 우리는 칸트는 헤겔에 의해 극복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통념을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칸트를 각지의 자본과 국가에의 대항운동이나 코뮌이 나누어지고 대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읽어야 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427


 그렇지만,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철학자들의 논지를 그대로 빌려오지 않는다. 헤겔의 논지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데는 유용하지만, 이들의 관계성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비판되며, '생산양식'에 주목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기에 부족함이 있어 고진에 의해 '교환양식'으로 바꾸어 해석된다. 이처럼 <세계사의 구조>에서 고진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논지를 '가로지르기(trans- )'를 통해 현재 문제를 해석하는데, 최종적으로 이러한 논의의 종점은 '초월적인' 칸트의 '세계 공화국'에 이른다.


 헤겔이 <법철학 강의>에서 파악하려고 한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매듭이다.  이 보로메오의 매듭은 일면적인 접근(approach)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헤겔이 변증법적 기술을 취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서는 이런 매듭이 근본적으로 네이션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상력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 즉 네이션이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매듭이 지양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23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 전제에서 생각하고 있다. 홉스는 주권국가(리바이어던)에 의해 평화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평화는 국가 내부만의 것으로 국가 간에는 없었다. 한편 칸트는 국가 간의 평화상태를 창설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된 상태가 세계공화국이다... '세계공화국'이란 국가들이 지양된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차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경제적인 '불평등'이 있는 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영원평화는 일국만이 아닌 다수의 나라에서 '교환적 적의'가 실현됨으로써만 실현된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35


  <세계사의 구조>에서 우리는 다양한 보로메오의 매듭을 만나게 된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현재 자본주의 구조와 이들을 나타내는 '감성-상상력-오성(지성)' 그리고 이들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마르크스-헤겔-칸트'의 주장까지. 그렇지만, 이들 보르메오의 매듭은 서로 정합(整合)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환양식 A에서 교환양식 B로 옮겨갈 때, 유목상태에서 정주상태로의 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국가가 태어나듯, 이들은 다르지만 동시에 공통된 부분을 갖고 있다. 다르지만 같은, 조금씩 어긋난 구조 속에 생겨난 틈 사이에서 생겨난 균열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잘라냈을 때,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어낸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BCE 323) 처럼 문제를 풀어내고 '세계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교환양식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전작 <트랜스크리틱>이 칸트, 마르크스, 헤겔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이라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보다 많은 역사와 정치철학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 책은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얻은 '비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다 깊게 하는 계기를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네이션-국가는 네이션과 국가라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립하기 전에 실은 자본=국가, 즉 자본과 국가의 결합이 선행하고 있다. 이것이 절대왕권이다. 네이션이 나타나는 것은 그 후, 즉 절대왕권이 시민혁명에 의해 무너진 이후이다. 간단히 말해, 네이션이란 사회구성체 중에서 자뵨=국가의 지배 하에서 해체되어 가던 공동체 내지 교환양식A를 상상적으로 회복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네이션은 자본=국가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본=국가가 가져오는 사태에 항의하고 대항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자본=국가의 결락을 보충해서 매우는 것으로서 출현했다. _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 p304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처럼 상품교환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 성립한 것은 일반적인 등가물(화폐)에 의한 교환이다. 국가는 이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는 국가와 법이 없으면, 상품교환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계약이 이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화폐가 가진 힘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화폐는 국가에 의해 주조되지만, 그것이 통용되는 것은 국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다. 상품(소유자)들의 세계 속에서 형성된 힘에 의한 것이다. 국가나 제국(광역국가)이 하는 일은 화폐의 금속량을 보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화폐의 힘은 제국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이른다. - P47

미니세계시스템은 교환양식A에 의해, 세계=제국은 교환양식 B에 의해, 세계=경제(근대세계시스템)은 교환양식C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것을 안다면 그것들을 넘어서는 세계시스템X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환양식A의 고차원적인 회복에 의해 형성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군사적인 힘이나 화폐의 힘이 아니라 증여의 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가 ‘세계공화국‘이라고 부른 것은 그와 같은 세계시스템의 이념이다. - P66

화폐경제는 개인을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제국=코스모폴리스의 인민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급진적 평등주의‘는 공동체에 존재했던 평등주의, 바꿔 말해 호수적 경제와 윤리를 파괴해버린다. 즉 그것은 빈부의 격차를 가져온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보편종교가 등장하는 전제이다. 요컨대 보편종교는 제국형성 과정에서 교환양식 B의 지배하에 교환양식 A를 교환양식C를 통해 해체해갈 때, 이에 대항하는 교환양식D로서 출현한 것이다. - P207

네이션이란 상품교환의 경제에 의해 해체되어가는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에 다름 아니다. 네이션은 말하자면 자본=국가에 결여된 ‘감정‘을 거기에 불어넣는 것이다. 헤겔은 <법철학 강의>에서 홉스적인 국가를 ‘오성적 국가‘라고 불렀다. 그것은 거기에 ‘감정‘이, 따라서 ‘네이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이 생각하기에 자본=네이션=스테이트야말로 진정한 ‘이성적 국가‘인 것이다. - P312

우리는 호수적 원리의 고차원적인 회복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보아왔다. 이제는 그것을 국가 간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국가연방을 새로운 세계 시스템으로 형성하는 원리는 증여의 호수성이다. 증여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강한 ‘힘‘으로서 작동한다. 보편적인 ‘법의 지배‘는 폭력이 아니라 증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 ‘세계공화국‘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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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7-25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훌륭한 책인 듯 합니다 ^^
전 이 책 읽고 거진 보름 동안 충격에 잠 못 이룬 것 같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3-07-25 23:10   좋아요 1 | URL
아, 북다이제스터님께 <세계사의 구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느껴집니다.저도 철학-역사를 넘나들면서 의미를 해석하고 자신의 관점과 향후 전망을 제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 정연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세부적으로 조금 더 공부해야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다른 전집으로 보완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