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임에서 논의하는 안건은 제규 제1조에 내건 것처럼 오로지 교육에 관계되는 학문, 기술, 사물의 이치, 일의 이치 등, 대저 인간의 재능을 풍부하게 하고, 품행이 나아지는 데 필요한 일들이다. 더군다나 기약하는 바는 오로지 후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간혹 현재의 꺼리는 것을 건드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에 관해 논하는 일 같은 것은 본래 우리가 모임을 연 주된 뜻이 아니다. _ 모리 아리노리, <메이로쿠 잡지>, p19

미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와 니시무라 시게키가 주도해서 발간한 메이로쿠 잡지. 발간 초기 연설문에서 드러나듯 이들은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을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와 기존의 제도에서 수용할 수 없다면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가야하는 종착지는 정해졌지만, 가는 방식은 서구의 방식을 따를 수 없었기에 지식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민선의원 선출, 처와첩 문제, 부부동권 문제, 정부주도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논의가 본문에 소개된다.

우리의 《메이로쿠 잡지》의 논의는 앞으로 정치상의 일과 관계가 없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대할 수 없음이 이미 명백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 모임 안에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잡지의 이름에 의지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 간행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로쿠 잡지>, p25

그렇지만, 현실문제의 궁극적 해결안을 갖고 있는 것이 정치이며, 정치를 배제한 이들의 논의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1875년 이후 발간되지 않는다. 지식인의 고민과 정치적 한계를 잘 보여주는 <메이로쿠 잡지>를 통해 독자들은 일본 개화기에 벌어진 백가쟁명과 치열한 고뇌의 결과가 낳은 일본 번역 문화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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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후 마오가 죽을 때까지 재생의 희망은 철저하게 망가졌다. 문화혁명은 새로운 중국을 만들려는 노력이 혼란, 내부 투쟁, 당혹감, 고립 그리고 파괴 속에서 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의 역사는 열망과 배신, 새로운 시작과 경착륙, 실험과 실패의 역사다.

공산주의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통해 나타날 이성적인 체제였다. 사회주의는 그러한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있는 이행적 단계였다. 이 단계에서 공산당은 전위로서 사회에 대한 권력을 독점하고, 민주집중제로 불리는 새로운 제도적 질서로 통치했다.

특정 집단들로부터는 지지를 얻었을지 몰라도 혁명 직전까지도 공산당은 폭넓은 지지와 수용을 얻지 못했다.
근본적인 정당성의 부재는 처음부터 공산당 통치의 특징이었다.

당 기구는 새로운 국가의 핵심에 있었다. 당이 혁명 기간에 군대를 통제했던 것처럼, 새로운 민간 행정 기구를 만들고 통제했던 것은 당이었다.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의사결정의 권력은 공산당 손에 있었다.

정부와 당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구별된 채로 남아 있었다. 당은 지방 사회에 스스로를 주입하고 지방 사회와 깊은 상호작용을 했다. 당은 또한 마오주의적인 정치적 전망과 손상된 국가를 위한 회복의 기획을 제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국민 대부분의 추종을 확보했다.

한반도에서 미 제국주의와 싸운다는 결정과 내부 계급투쟁 선언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은 토지 개혁을 가속화하고 농촌 경제에서 더 많은 자원을 추출해야 한다는 훨씬 더 큰 압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경제 정책의 변경을 이끌었다.

공산당에 정치 학습, 고백, 비판을 통한 지식인의 재교육이 사상 개조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었다. 당은 개인의 배경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저장함으로써 문화 영역에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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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의 신격화와 동시에, 신은 갈수록 통치자의 형상을 닮아갔다. 이 시대 예술 작품에서 비슈누는 왕국의 상징물을 들고 있는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4세기 로마 성상에서 신과 그리스도가 갈수록 권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380년 1월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에 익숙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한 위엄과 삼위일체 개념 아래" 하나의 신성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식 노선을 따르지 않는 자는 ‘미치광이’로 규정되어 신과 황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와 이단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황제의 관계에도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을 제국과 교회 계급 구조의 정점이자, 주교들의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경의 선포를 주관하고 통합을 위협하는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열세 번째 제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기독교 사상과 전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충돌은 로마제국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같은 기간에 매우 다른 형태의 기독교가 발달한 아르메니아에서는 세속적 통치와 종교적 통치의 분열이 더욱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촉발했다.

결정적으로, 타론 공의회는 기원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아르메니아 남부에서 해오던 역할을 전 국가로 확장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교회가 보다 복잡하고 완전한 위계 체제하에 필요한 이에게 도움과 구제를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 무대에서 전개된 종교적·정치적 변화로 이후 20년간 아르메니아 내부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4세기에 일어난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역동적인 변화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고대 세계가 연결되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각 종교는 전파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쳤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간다. 고대 힌두교와 불교가 특히 그런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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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임승휘.박윤덕 옮김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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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들에 대한 콩종튀르(conjoncture)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종종 구조(structure)의 더딘 역사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이 기준이 되는 수면(水面)과 비교해야 한다(p446)... 더디게 움직이는 것과 빠르게 움직이는 것 사이를, 그리고 구조와 콩종튀르 사이를 분리하는 것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논쟁의 한복판에 남아 있다... 결국 문제는 모순되는 연대기들을 조율하는 것이다. 콩종튀르에 따라서 국가와 문명들, 그 국가와 문명의 주역들, 그들의 한계와 의지들이 어떻게 부침했는가? 난세는 국가의 팽창에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문명의 번성은 종종 경기가 하강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강대한 제국의 문명들이 자신을 과시한 시기는 거대한 해상제국들의 가을이었다. 이스탄불, 로마, 마드리드의 제국이 그러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447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3>은 <지중해> 3부작의 마지막이면서, 구조-콩종튀르-사건의 가장 표면에 있는 역사를 그린다. 대중들에게 사건(event)로 기억되는 역사적 사실. 저자 브로델은 상세하게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사실 보셀 화약(和約)의 체결은 로마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교황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조약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협정이 깨어진 것은 어쨌든 교황 덕분이다. 아직 남아 있던 전쟁의 불씨가 이토록 신속하게,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다시 타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거센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상기시켜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62


 브로델이 그려낸 사건사에서 개인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오스트리아-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 화의를 내용으로 한 보셀 화약을 파기시킨 파울루스 4세 교황(Papa Paolo IV, 1476-1559)이나, 북유럽 저지대에서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제압하지 못한 알바 공작(Gran Duque de Alba, 1507-1582),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1578)의 경우는 개인의 의지, 능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펠리페 2세는 이 계획에 동조했지만, 알바 공작은 예산 부족과 유럽의 상황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국왕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가짜 위인은 사실 소인배였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공격할 줄 알았던 근시안적인 정치가였다. 그가 내린 총사면령은 너무 뒤늦은 조치였다. 결국 스코틀랜드 여왕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고 말았다. 끝으로 알바 공작은 불안한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는커녕, 결코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이나 술책에 의존하려고 했다. 1569년, 먼 거리와 상황으로 인해서 사태를 책임졌던 것은 에스파냐 국왕이 아니라 신중한 알바 공작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06


 그럼에도 개인이 거둔 빛나는 승리는 두드러진 사건에만 머무르게 된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결국 콩종튀르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최후의 갤리선 간 해전이라는 레판토 해전(1571)에서 거둔 에스파냐-베네치아 연합함대가 거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완승(完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판토 해전의 의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은 레판토의 패전이 오스만 투르크 해군의 궤멸을 의미하거나 에스파냐의 우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예기치 않은 승리는, 1571년 10월 7일에 벌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군은 모돈[메토네]에서 패퇴했다. 1573년에 재정이 바닥난 베네치아는 전쟁을 포기했다. 1574년 투르크는 라 굴레트와 튀니스에서 승리했다. 십자군의 모든 꿈은 이렇게 역풍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들, 즉 빛나는 역사의 외피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수천 가지의 새로운 현실이 팡파르 없이 조용히 나타나서 레판토 너머로 이어진다. 투르크의 마법은 깨졌다(p245)... 결국, 1574년의 승리 이후, 특히 1580년대 이후에 투르크의 대함대는 안으로부터 해체되었다. 1591년까지 지속되는 바다의 평화가 투르크 함대에게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그 평화로 말미암아 투르크 함대는 항구에서 썩어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결과들을 야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은 분명히 이것들에 기여했다.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 사건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사건사(histoire evenementielle)"의 한계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46


 단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레판토는 해전에서의 승리일 뿐이고,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라는 물의 세계에서 한 번의 승리로 대륙으로 길게 뻗은 투르크의 뿌리를 잘라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성동맹의 운명은 로마에서만큼이나 빈에서,  폴란드의 새로운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 지상의 국경에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렇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결국 에스파냐는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철저하게 지중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68


 중요한 것은 지중해의 양대 세력이 거의 같은 시기 서로의 시선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제국은 신대륙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금은과 함께 포르투갈 합병으로 인해 거대해진 대서양 영토로,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반도로부터 시작되는 중부유럽으로의 확장과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찾지 않은 평화로운 쇠퇴의 시기를 맞게 된다. 돈 후안의 빛나는 사건은 콩종튀르의 분기에서 전환점이 아닌 과정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브로델은 <지중해> 3부작을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작은 사건을 구조에서 보여준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환경인가. <지중해>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개인으로 현현한 시대정신(Zeitgeist)이지만, 그러한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요소의 합(合)임을 생각하게 된다...


 에스파냐가 지중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투르크는 지중해에서 그들의 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화, 16세기 말의 준(準)평화는 서로가 적을 내버려둠으로써 성립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에스파냐가 북아프리카에서 기회를 놓쳤다면, 그것은 레판토 해전 이후 몇 년 동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6세기 초였다. 당시에 에스파냐는 자신이 추구하지 않았던 아메리카를 획득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땅에서는 과거에 에스파냐의 "역사적" 임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오늘날 한층 더 새로운 표현인 에스파냐의 "지리적" 임무를 저버리고 새로운 그라나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15


 이는 투르크의 강력한 전쟁을 전제로 하는가? 그런 정책은 존재한다. 술레이만 대제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른바 쇠퇴는 잘못된 평가이다. 투르크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야만적이지 않고 오히려 잘 조직되고 훈련된 신중한 세력이었다. 투르크가 갑자기 지중해의 잘 알려진 땅들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향했을지라도, 이것은 투르크가 "쇠퇴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가 아니다. 투르크는 단지 운명을 따랐을 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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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게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매력적인 지역이다. 투르크는 페르시아 문제를 두고 고심한다. 결국 이 시기 내내 지중해의 역사는 자율적이지 않다. 지증해의 운명은 인근 지역 또는 먼 지역의 운명과 연결된다. 이 연결 고리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고난의 1558-1559년에 이르러, 위기감이 고조되고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지중해는 이제 자신의 전쟁을 치르며 홀로 분투하게 될 것이다.  - P17

섬(코르시카)는 자원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고, 전쟁은 불행을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p51)... 코르시카의 잘못이라고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것뿐이다. 이 섬이 합스부르크 왕가 대발루아 왕가의 전쟁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섬 자체보다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파르마, 심지어 시에나 이상으로,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와 그 동맹세력 사이의 연결을 방해했다. - P52

캅카스 산맥의 맞은편 전역, 캅카스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지역이 카스피해로 열린 통로와 함께 오스만의 지배 아래에 복속된 것이다. 이것은 작은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활력의 신호이고, 사실 유일한 신호도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지중해에서 먼 카스피 해 방향으로 투르크의 힘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심력에 의한 방향 전환이 적어도 1590년까지 지중해 무대에서투르크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 P359

에스파냐의 정책은 1578~1583년의 시기에 대서양과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펠리페 2세의 치세 전반부를 결산한 1575년의 파산 직후, 귀금속의 유입으로에스파냐가 쓸 수 있는 전쟁 자금이 갑자기 늘어났다. 이 "전환기" 이후 1579년부터1592년까지 "은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펠리페2세의 정책이 다른 곳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지나치게 격해지고 대담해졌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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