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교사는 학교에서 사망해 특히 파장이 컸는데, 유사한 비극 다수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까. 현장에서 들은 교사들의 생각은 좀 복잡했다. S초에 모여든 추모객 대부분의 목적은 분명 A 교사에 대한 애도만이 아니었다. 현재 침해되고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투쟁 성격도 짙었다.  - P16

교사들이 지지하는 ‘학생 인권과 교권의 공존‘이란, 두 권리가 ‘파이 나누기‘가 아니라는 의미에 가깝다. 학생은 학대당하지 않고 더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며, 교사는 부당한 간섭과 방해없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약화한다고 다른 쪽이 자동으로강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P17

그런데 아동학대 범죄를 저지를 수있는 ‘보호자‘에는 부모나 친인척처럼 ‘아동을 교육할 의무가 있는 자‘뿐 아니라 ‘업무 등의 관계로 사실상 아동을 보호·감독하는 자‘도 포함된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아동을 가르치는 교사가 여기에해당한다(이 법에서 아동이란 18세 미만인 사람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교사도 아동학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가정 내 아동학대 조기발견을 위한 신고-출동-조사격리 등 일련의 절차가 비교적 공개된 장소인 ‘학교내‘에서도 일률적으로 적용되면서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9

고용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윤석열정부의 접근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서비스 확대를 위한 재정지출에 얼마나 의지를 보이느냐다. 사회서비스 분야에 집중하겠다고 정책적으로 천명했으면, 여기에 따르는 자원 투자 계획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서비스 분야에 예산을 늘리겠다는 구체적 발표는 아직 없다.  - P26

김여정의 대한민국 호칭 사용은 남북한이 두 개 국가에 기초해서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느긋한 주장이 아니다. ‘군사적공세‘의 시작이고, 위험한 도발의 전주곡이다. 8월18일 미국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열린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강화에대응하는 차원에서 그 이름이 어떻든 간에 한·미·일 3국의 핵억제협의체가 논의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한·미·일군사협력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 P31

"정치인들은 ‘특별재난지역 선포‘라는 걸쉽게 말한다. 사람들도 이런 발표를 들으면 뭐라도 다르겠지‘ ‘이제 복구가 빨리되겠지‘ 기대한다. 그런데 정작 주민에게는 통신비 인하, 융자 지원 같은 게 전부다. 특별재난지역의 피해 주민이어도 별다른 보상지원책이 없다는 걸 알려야 이재민들이 제대로 대응이라도 할 수 있지않겠나." - P33

총수요 증가만으로 인플레이션의 급등을 설명하기는어렵다는 이야기다. 역시 중요한 것은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마비와 충격이었다. 반도체나 천연가스, 곡물등의 공급이 억제된 상황에서 정부의 소득 지원으로 인한) 총수요가 확대되면서물가를 크게 자극했다. 마침 퇴직자 증가로 노동 공급 역시 억제되고 있었는데, 기업들은 이직을 우려하여 노동자를 확보해놓으려 했다. 이로 인해 노동시장에선 구인율이 높고 실업률이 낮은 뜨거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 P38

"넷플릭스가 글로컬 전략을 짜는상황에서는 버티기가 수월하다. 한국뿐아니라 유럽, 남미에서도 콘텐츠를수급할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한 국면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창작자들도 할리우드의 싸움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전 세계 콘텐츠 업계의룰을 바꾼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한다는 버거움은 뜻밖에 ‘글로벌한 연대‘의가능성도 열어놓았다. - P59

삶은 외롭고 무섭다. ‘다 그런거야‘라는 말로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을 하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손 내밀지않는다. 철학은 하나의 완결된 답을주지 않는다. 대신 "그저 말할 뿐이다.
다른 목소리를 들으라고".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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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 - 한국어 더빙 수록
로니 델 칼멘 외 감독, 리처드 카인드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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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 라일리 안에 자리한 다섯 감정 버럭이, 까칠이, 기쁨이, 소심이, 슬픔이 이야기.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난 여러 감정들과 라일리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일상의 날 중 하루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들은 다섯 감정캐릭터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고로 인해 라일리는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로부터 벌어지는 혼란과 마무리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지만, 영화를 통해 아빠가 흥미롭게 본 것은 영화의 설정이었어.

영화에서 어린 라일리의 주도적인 감정이 '기쁨'이었다면, 엄마와 아빠의 주도적 감정은 달랐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보여졌어. 라일리 아빠의 주도적 감정은 '버럭이', 엄마의 주도적 감정은 '슬픔'인 것을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생각만큼 기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과 아이들이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이미지가 '슬픔'과 '화(버럭)'이라는 생각에 연의에게 아빠는 어떻게 보일까를 돌아보게 되네. 슬프게도 아빠도 '버럭'이 편에 가까운 것 같지만 말이야... 버럭이가 아빠의 주도적 감정이 되지 않게 더 노력해야겠다는 반성을 영화를 보면서 하게 되었단다.

한편으로, 아빠는 그런 생각도 해봤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다섯 감정 뿐일까? 우리가 하는 행동이 과연 모두 감정과 연결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 영화 <인사이드 아웃 2> 예고편을 보니 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에게 새로운 감정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포함된 것을 보니 다섯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은 것 같기도 같지만, 하나의 감정만으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지는 않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친구에게 까칠하게 대하다가 버럭 화를 내거나, 소심하게 행동해서 슬펐던 경험이 있다면 이런 경험 속에서 감정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또, 마음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애써 웃어야 하는 경우처럼 감정과 행동이 다른 경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갑자기 너무 어렵게 이야기가 나간 것 같네. 쉽게 표현해서 <인사이드 아웃>에서의 설정 - 마음 속의 캐릭터 - 이 재밌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감정과 함께 또 다른 것 - 이성 理性- 도 있다는 것, 그래서 감정만으로 사람이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만 연의가 알았으면 해. 또 다른 것의 이름은 잊고 그냥 그런 것도 있다는 것 정도로만 알면 지금은 충분할 것 같고. 너무 깊게 들어가면 영화가 재미없어질테니 아빠 이야기는 흘려들어도 좋을 것 같구나. 요즘 날이 많이 덥지? 더위에 너무 지치지 말고 기운내서 즐겁게 여름방학을 보냈으면 좋겠구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구.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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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8-03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이 영화를 어쩌자고 극장에서 두 번 보았을 정도로 인상 깊었어요. 어린이보다 어른에게 좋은 영화 아닐까 했는데 2가 만들어졌어요?^^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처음 알았습니다. 2편도 극장에서 봐야겠어요!

겨울호랑이 2023-08-03 08:00   좋아요 0 | URL
얄라얄라님께서도 재밌게 보셨군요. 말씀처럼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다가왔던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합니다. <인사이드아웃 2>는 내년 개봉예정이라네요. 기분 좋은 소식으로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원인데, 순환의 지속적인 균등함을 방해하는 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원은 나누어질 수 없고 그 자체 중심과 시작과 끝을 이루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비례 개념을 신의 절대적 정체성에 의해 유도되는 형이상학적 정서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다.

비례를 신의 불가분한 완전성과 연결짓는 것은 복합적이며, 거기에는 모순의 씨앗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중세 미학이 양의 미학과 질의 미학 사이에서 해결을 요구받고 있는 문제이다.

모든 사물들이 현상계에서 자신들의 기능과 위치의 의미를 소진한다면, 그리고 본질을 통해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은 부조리하게 되라는 점을 중세 시대는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상징적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본질과의 조화 및 본질에 대한 유추가 담겨 있다. 사실 하위징아는 상징적 해석을 본질의 면에서 사고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상징과 상징된 사물은 추상될 수 있고 비교될 수 있다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중세의 상징주의는 그런 식으로 그 세계의 미적 개념들을 표현해 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상징주의로서 세계의 미 속에서 신의 손을 식별해 내는 철학적 습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보편적인 알레고리로서, 이 세계를 신의 예술 작품으로, 즉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도덕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의미를 가진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판단의 일치를 보게 되는 아름다운 대상 속에는 객관적인 특질이 있지만, 미의 결정적인 요소와 표시는 시각적 감각을 수반하는 즐거운 동의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절로서 많은 근본적인 요점들을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사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은 둘 다 형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형식은 그것이 어떤 욕구의 대상이 되는 한, 즉 현실화나 형식의 소유를 위한 갈망의 대상이 되는 한, 그 형식이 실재하는 한, 선함을 지닌다. 반면 미는 형식과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보일 때 즐거움을 주는visa placent 사물들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시각으로 보면 즐거움이란 완전히 객관적인 사물들 속의 잠재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다. 즐거움이 미를 규정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아퀴나스의 미에 대한 세 가지 규준, 즉 완전성, 비례, 명료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실체적인 형상보다는 구체적 실체의 특징으로 여겨질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사실 〈비례〉라는 용어의 여러 가지 의미들 속에서 이런 견해의 여러 예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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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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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게도 희망은 있었다. 눈치챈다면 난 당장 죽을 목숨이지만. 그가 방수포를 헤치고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웠다. 그 대답을 놓고 두려움과 이성이 다투었다. 두려움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다. 발톱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성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방수포는 화선지가 아니라 튼튼한 캔버스천이라고. 내가 높은 곳에서 그 위로 뛰어내려도 끄떡없었다고.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175/498


 얀 마텔 (Yann Martel, 1963 ~ )의 <파이 이야기 Life of Pi>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호랑이와 함께 보낸 소년의 이야기가 큰 틀이자 하나의 골격이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는 갇힌 공간에서 호랑이와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위협이며 공포로 소년에게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소년은 생명을 내려놓지 않는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의 응원을 덕택이기도 하다. 소설 속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그에게 공포와 평온함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내 얼굴에 단호하고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29/498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48/498


 사실, 개인적으로 <파이 이야기> 전체 글 중에서 시선이 머무른 것은 생(生)에 대한 의지, 공포 등보다 아래의 문단이다. 좀처럼 넘어갈 수 없었던 이 구절은 소설의 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구명보트라는 갇힌 공간. 소년과 호랑이의 일정한 거리.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도, 넓혀질 수도 없는 반지름이다. 소년의 이름은 파이(Pi). 원주율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는 영원(永遠)에 대한 열망의 상징일까.


 원주율(圓周率), 파이(pi) =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원둘레)의 비율. 3.141592....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322/498


 원(圓, circle) =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다. 소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원과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원. 이들은 서로 다른 중심점을 갖기에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개의 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갈등이며 공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도형을 그려보자. 소년의 중심점과 호랑이의 중심점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도형을 그릴 수 있다. 타원이다. 이들은 각각의 원을 가지고 겹치는 공간으로 인해 갈등하지만, 각각의 중심점으로부터 다른 사건(배고픔, 갈증, 폭우 등등)을 바라볼 때는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가지며 이번에는 서로를 의존하게 된다. 


  타원(楕圓, ecllopse)= 두 초점 사이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렇게 본다면, 소년 파이 위의 두 원은 호랑이 원과 둘의 타원이 아닐까. 호랑이 원이 주는 공포와 위협과 소년-호랑이 타원이 주는 위로와 평안이 소년 파이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상반된 힘은 아니었을까를 도형의 정의를 통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반전은 언어와 비유를 통해 나중에 드러나는 호랑이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소년과 호랑이의 거리는 추상과 현실을 매개하는 언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44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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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중국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범위에 걸친 새로운 제도가 수립되어 성장과 번영의 기초를 놓았다. 인상적으로 높은 GDP 성장률과 함께 성공적인 시장 이행이 이루어졌다. 평균 소득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억의 중국인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의 장기적 전개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었다.

중국은 분명히 마오 시대의 중국을 닮지 않게 되었고, 전통적인 소련 스타일의 공산주의 국가와는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 시장 경제를 가진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중국 수수께끼’라고 불리는 것이다. 경제는 재산권의 분명한 보호 없이 호황을 이루었고, 국유기업은 계속 국가 경제의 핵심 영역을 지배했다. 일부 분야에서 점점 증가하는 자유와 국가 통제 이완이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를 확고하게 통제한다는 사실과 충돌했다.

1980년대 말 무렵이 되자 흔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시장 자유화와 국가의 계획을 결합한 모델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경제는 과열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사회적 긴장이 정치적 저항을 자극했다.

중심점은 경제성장이었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과 덩샤오핑이 1978년에 내세웠던 ‘4가지 기본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이 기본 원칙들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1989년의 베이징 학생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정치적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저항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관료 부패 그리고 학문 분야의 경제적 전망 악화 등과 같이 새로 생겨난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기도 했다.

1989년 학생운동 진압의 이와 같은 결과들은 ‘두 전선에서의 강함’(兩手硬)이라는 구호에 요약되어 있는 1989년 이후 핵심적 정치 전략의 두 가지 일반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 두 전선은 경제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고, 해결책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톈안먼과 1989년은 개혁의 후퇴를 상징하게 되지 않았고, 영구적으로 중국 개혁의 궤적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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