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차가 유행하지 않은 까닭이 풍토 때문은 아닐까요? 중국과 일본에는 차가 잘 자라는 습한 기후의 산지가 널려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가 자라는 지역이 적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찻값이 담뱃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던 겁니다. 우리 농민들은 음식 먹고 텁텁한 걸 숭늉으로 풀었고, 다도茶道를 즐길 만한 계층이 중국과 일본보다 턱없이 적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를 도입한 공은 씨앗 몇 개를 가져온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씨앗을 심어 목화를 얻어낸 농업 기술입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씨앗으로부터 목화를 길러냈고, 또 그걸 죽이지 않고 더 많은 씨앗을 얻어냈습니다. 목화 재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해낸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둘째는 하얀 솜털 같은 열매로부터 실을 얻어내는 기술을 확보한 것입니다. 열매 안에 있는 목화씨를 빼내야 솜으로 쓰는데 그 기술을 알아냈고, 목화 솜뭉치에서 실을 뽑는 특별한 기술도 배웠습니다.

목화는 전국으로 퍼져 재배되었고, 목화로 짠 무명은 삼베를 밀어냈습니다. 무명이 옷감의 질이 좋고, 겨울을 날 솜을 제공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삼베 천을 제작할 때보다 힘이 다섯 배나 덜 들었거든요. 한마디로 경사 난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후 조선은 재배 기술이 없는 일본에 무명을 팔아 엄청난 은을 벌어들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전까지 의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의방유취》를 출간하면서 단숨에 의학 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건 마치 천문학 분야에서 중국의 역법과 이슬람 역법에 통달해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한 포부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도 비슷합니다. 1444년에 《칠정산》 내·외편이 간행되고, 4년 뒤인 1448년에 《의방유취》 초고 편찬이 완료되었으니까요.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한 분야 전체를 통째로 이해하고 최고의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나라만의 과학을 이루었다는 데 있습니다. 조선은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중국과 맞먹는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계의학사에서 《동의보감》과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이슬람의 아비센나Avicenna(이븐시나, 980~1037)가 지은 《의학정전》을 들 수 있습니다. 아비센나가 이슬람권이라는 다른 지역에서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와 로마의 갈렌의 의학을 종합한 체계를 세웠듯, 허준의 《동의보감》도 중국과 다른 지역에서 《황제내경》, 《상한론》 등의 전통에서 비롯한 고금의 의학 전통을 멋지게 종합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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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레지스트 위에 투사된 빛은 화학 구조를 변화시켜 포토레지스트와 함께 게르마늄도 씻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아주 작은 사각형 홈이었다. 그 어떤 왁스 덩이로도 만들 수 없었던 아주 작고, 게다가 정확한 형태의 사각형이 만들어졌다.

집적회로는 전자 부품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연결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반도체는 여러 나라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소련마저 실리콘밸리의 제품을 베끼면서 스스로 그 네트워크의 일부로 편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자국의 비즈니스 엘리트와 미국 정부의 협조를 통해 의도적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에 통합되었다.

초소형 전자공학의 핵심은 복잡성을 줄이는 데 있다. 납땜 된 부위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그만큼 장비의 신뢰도는 위험에 노출된다. 전자 장치가 단순할수록 시스템은 더 신뢰도가 높고 전력 효율도 높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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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학자들도 고추를 넣는 것을 우리나라 김치의 가장 큰 특성으로 꼽습니다. 고추는 비타민 C가 사과의 50배, 귤의 2배에 이를 정도로 풍부합니다.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비타민 E는 비타민 C를 싱싱하게 유지해줍니다. 우리 조상들은 겨우내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C를 김치를 통해 섭취했던 겁니다.

밭에서 인삼을 재배하게 되면서 인삼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졌습니다. 인삼을 재배함으로써 수확량을 조절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삼이 흔하지 않은 건, 아무 데서나 자라지 않고, 담배나 감자처럼 1년짜리 작물이 아니라 최소한 4년에서 6년은 길러야 하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삼 농사는 개성 사람들이 적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사해서 번 돈을 인삼에 투자했고 재배 기술을 발달시켜 인삼 농사를 성공시켰습니다. 고려가 망한 후 개성 사람들은 벼슬을 도모하지 않고 거의 다 상인의 길로 나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타고난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인삼은 개성상인이 주도한 조선 최대의 ‘벤처 산업’이었습니다. 인삼의 역사를 연구한 이철성 선생은 인삼을 "조선 경제를 유지해준 조선판 반도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삼은 세계 전체 인삼 수요의 수십 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품질이 가장 좋은 고려 인삼이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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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신화 1 - 기술과 인류의 발달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49
루이스 멈포드 지음, 유명기 옮김 / 아카넷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정신의 내적, 외적 요인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조직하여 의식적으로 지도하여 더욱 일관되고 더욱 이해하기 쉬운 전체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기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인류가 바로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 낸, 신체 이외의 형태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도구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돌이나 나무, 섬유로 만든 도구는 제 몫을 다할 수 없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1> , p78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1895 ~ 1990)의 <기계의 신화 1_기술과 인류의 발달 The Myth of the Machine: Technics and Human Development>은 초기 문명사에서 과도하게 평가된 '기계(machine)'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도구 사용의 변화가 생산량의 변화로 이어지고, 이러한 생산량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변동이 수렵채집경제에서 농업경제로, 도시문명으로 만들고 중앙집권적 제국을 만들었다는 일종의 상식을 저자는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초기 인류가 번성했던 것은 오로지 도구를 사용한 덕분이라기보다는 의례나 언어의 사회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도구 제작과 도구 사용의 기술은 의례 표현과 말 만들기에 비하여 오랫동안 뒤쳐졌다. 애초에 인류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자신의 몸에서 끌어낸 형식화된 음과 이미지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점들을 공유하려는 노력들이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였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1> , p111


 저자 루이스 멈포드는 초기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리는 초기 문명에서의 모든 기술적 도구의 변화는 이러한 변화가 수용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충분히 갖춰진 후에야 비로소 수용이 가능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커진 뇌 용량으로 인간 정신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상징(symbol) 체계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인프라가 갖춰진 후에야 비로소 언어(言語)가 등장할 수 있었고 시간적 제약을 넘어선 지식의 축적 이후에야 잉여 생산물 축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루이스 멈포드에게 있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결정짓는다. 


 인간의 정신은 뇌에 비해 특별한 이점을 갖고 있다. 즉, 일단 의미 깊은 상징을 창조하고 중요한 기억을 저장하게 되면, 정신은 그 특유의 활동을 뇌의 짧은 수명보다 훨씬 오래 남는 돌이나 종이 같은 물질에 옮길 수 있다. 유기체가 죽으면, 평생 축적한 모든 것과 함께 뇌도 죽는다. 그러나 정신은, 애초에 상징을 모으고 정리하는 개개의 뇌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적 매개물에게 상징을 전함으로써, 자기를 재생산한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1> , p53


 추상적 음성이 현실의 사람, 구체적 장소와 대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말이 지닌 근원적인 마법적 특성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대단한 마법은, 이들 같거나 비슷한 음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이미 지나간 일을 상기시키거나 전혀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것은 동물세계의 폐쇄적 신호에서 인간의 열린 언어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언어가 여기에 이르자,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의 살아있는 일부가 되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1> , p145


 루이스 멈포드가 기술적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술적 발전은 기껏해야 사회적 구조 변화를 따르거나 진폭을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앞서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초기 문명에서 정신적/사회적 변화는 초격차를 유지하며 언제나 과학기술을 선도했다는 <기계의 신화 1>의 내용은 5G, 사물인터넷으로 연결된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추상성과 상상으로 다른 생물과 차별화해온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계로 새로운 위협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새로운 종류의 기계에 불과할 것인가. 최근 사회 전반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문제와 함께 <기계의 신화>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보다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기술적 진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간과되어 온 더 중요한 동력이 있었다. 곧,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존재의 모든 차원을 변화시킨 새로운 종류의 사회조직의 힘이었다. 그런 변화는 작고 현실에 밀착된 초기 신석기시대 규모의 공동체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선사시대의 가설적 재구축을 시도하면서 내가 보여주려는 것은, 모든 기술적 진보는 그 이전과 이후의 필연적인 심리적, 사회적 변환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1> , p314

내 해석이 맞다면, 의례가 언어를 통한 효과적인 표현과 의사 전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처럼, 터부는 도덕적 훈련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둘이 없었다면, 인류의 발달 과정은, 수많은 강력한 통치자나 국가가 정신병적 폭거나 생명을 억압하는 타락 후에 만한 것처럼, 이미 예전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 P122

지적 담론의 전달 수단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 언어는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직접적인 구체적 표현과 연상에서 조직적인 정신유형에 이르는 기나긴 인류 성장의 여정에 마지막으로 뿌려진 씨앗이었다. 신화는 그 여정에서 이루어진 첫 개화(開花)였다. 통일된 음성 담론, 합리적 담화, 추상적 상징주의, 분석적 뜯어보기는 그 꽃이 지고 꽃잎이 떨어지기까지는 불가능하였다. - P157

왕권과 함께, 추상으로서의 힘,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힘이 ‘문명‘을 확인하는 중요한 표식이 되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모든 문화의 규범과 형태에 반하는 것이었다(p349)... 역사를 통하여 그 비중은 가변적이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존재하는 ‘문명‘의 주된 특징은, 정치권력의 중앙 집중화, 계급 분리, 종신 분업, 생산의 기계화, 군사력 팽창, 약자에 대한 경제적 착취, 그리고 노예제의 보편적 도입 및 산업과 군사 목적의 강제 노동이다. - P350

인간기계의 위계 구조가 일단 확립되면, 그것이 통제할 일손의 수나 행사할 힘에는 이론적 한계가 없었다. 사실 인간적 차원과 생물학적 한계의 배제야말로 그런 권위주의적 기계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 생산성의 일부는, 인간의 게으름과 신체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 써먹은 무제한의 물리적 강제 덕분이다. 직업의 전문화는 인간기계의 조립에서 필수적인 걸음이었다. 공정의 모든 단계에 기능을 확실하게 집중함으로써만 초인간적으로 정밀하고 완벽한 생산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현대 산업사회 전반에 걸친 대규모 노동 분화와 세분화는 이때 시작되었다. - P374

자본주의가 번영한 곳에서는 성공적인 경제 기업을 위한 3개의 주된 규준이 확립되었다. 곧, 수량의 계산, 시간의 관측과 통제, 그리고 추상적인 금전적 보수에의 전심전력이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치 - 힘, 이윤, 위세 - 는 이들 원천에서 나왔고, 빤히 들여다 보이는 위장 아래의 그 모든 것은 피라미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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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바위그림은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새겨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림에는 아주 정교하게 쪼아낸 흔적이 많습니다. 돌 도구로는 이렇게 쪼아낼 수 없고, 정교한 청동 도구나 철기 도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쌀의 생산량이 늘어 주식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인구 1천만 명이 1인당 1가마 생산량에 도달했습니다. 공평하게 분배된다면 조선 사람 누구든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생산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식량은 늘 부족했고,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계급과 신분에 따라 식량이 불공평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무궁화가 원래 우리의 나라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공식 꽃은 오얏, 즉 자두였습니다. 왕의 성씨인 이 씨가 ‘오얏 리 李’였기 때문이죠. 개화기에 열강들이 물밀듯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오던 시절, 영원히 지지 말라는 염원을 담아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 지도이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땅 지도입니다. 두 지도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제작 시기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395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입니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나라를 세우자마자 하늘 지도와 세계지도를 만든 셈이죠. 이 세계지도도 새 왕조 건국과 관련되어 있겠죠? 그래서 이름도 거창하고 심오하게 지었나 봅니다.

다 이어놓고 보면, 지도의 윤곽선이 오늘날의 지도와 비슷해서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 정확성의 비밀 중 핵심은 경위선 방안법의 사용입니다. 전국 각 곳의 읍 지도를 유클리드 기하원본의 축소 비례 방법을 써서 동일 축척으로 네모난 방안에 정밀하게 이어 붙인 것입니다. 게다가 산악 지형은 넓게, 평야 지역은 좁게 보정하는 백리척百里尺도 응용되었죠.

위도와 경도를 쓰면서 전국 모든 지역을 같은 척도로 한데 합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서 한 일이 바로 이겁니다. 큰 지도, 작은 지도를 ‘똑같은 척도’로 그리는 거죠. 거기에다가 지도를 합칠 때 서양 기하학의 비례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모든 읍과 도시 지도들이 더욱 정확하게 배치되었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정상기의 백리척을 적용하고, 신경준의 방안 도법을 정리한 데 이어서 서양 기하학 방법을 세련되게 응용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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