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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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카스테 :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도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허튼소리에요.

오이디푸스 : 이런 단서를 잡고도 내 출생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지 않소.

이오카스테 : 당신 목숨이 소중하시다면, 제발 이 일은

따지지 마세요. 나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

오이디푸스 : 염려 마시오,. 내 어머니가 노예이고 내가 삼대 째 노예로

밝혀지더라도, 당신이 천민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이오카스테 : 제발 내 말 들으세요. 부탁이에요. 더는 따지지 마세요.

오이디푸스 : 진실을 분명히 밝히지 말라는 당신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이오카스테 : 나는 좋은 뜻에서, 당신에게 최선의 조언을 하는 거에요.

오이디푸스 : 당신의 '최선의 조언'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소.

이오카스테 : 오오, 불운하신 분.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지 않기를! _ 소포클레스, <오이푸스 왕>, 1056~1068, p71 


 인간의 휘브리스(hybris)가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가 그리스 비극(悲劇)의 주제라면, 오이디푸스에게 닥친 비극의 탄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神託)이 오이디푸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의 잘못으로 봐야할 것인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는 유명하지만, 정작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된 불행한 인물 정도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희생자인가? 해설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죄를 지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이 대물림하여 벌을 받기 마련이고,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좋든 싫든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우스의 은총이라는 죄와 벌의 변증법이 아이스퀼로스 작품들에 담긴 중심 주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결코 인간사의 뒤안길에 숨은 궁극적 의미를 파고들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신의 섭리를 알아내려는 주제넘는 행동도, 인간에게 가해지는 운명의 타격에 반항하는 것도 옳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아는 인간의 지혜롭고 건강한 마음만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_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옮긴이 해설 , p524


 사자 : 예언자의 말인즉,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는 과도한 생각을 품게 되면, 

 너무 웃자라 못 쓰게 된 그런 자들은 필시

 하늘이 보낸 재앙에 쓰러진다고 했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758~761 , p265


 자신의 무고함을 지나치게 믿고 실현된 예언을 끌어내어 세상에 드러내면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예언의 도구로 희생된 아들/남편 오이디푸스와 도덕을 수호해야 하는 심판자 오이디푸스의 구도 속에 밀어넣게 된다. 어머니/아내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예언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과도한 자신감.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닐까. <아이아스>에서 사자의 말은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 아아, 내 딸들이자 내 누이들이여!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29, p169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모계 중심의 가계도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누이들이자, 부계 중심에서는 그의 딸들인 뒤틀린 관계.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니었다면 풀지 않아도 될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기 어려운 도덕적 과제가 주어졌기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이 먼 테이레시아스가 되는 선택을 내린 것이 아니었을까.


테이레시아스 : 내 아들이여!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고칠 줄 알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오.

다름 아닌 고집이 어리석음의 죄를 짓게 하는 것이오.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1024~1027, p136


 테이레시아스는 소포클레스(Sophokles, BCE 497 ~ BCE 406) 대신 휘브리스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복수의 여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복수의 여신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륜(人倫)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로 테바이를 질병으로 몰아넣고, 오만한 오이디푸스를 불행으로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자신의 행동과 오만함(휘브리스)에 고난으로 속죄하는 오이디푸스 곁에 여신은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죽음 후에 복수의 여신은 크레온에게 가서 그의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뤼디케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소포클레스에게 복수와 휘브리스는 아이스퀼로스의 그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아이스퀼로스(Aeschylus, BCE 525 ~ BCE 455)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복수의 여신(에리니에스)은 탄탈로스와 그의 후손들 곁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3부작에서도 에리니에스의 분노는 오이디푸스 혈통을 절멸시키지만,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처럼 아테나의 한 표로 분노가 억압되기 전에 옮겨갔다는 것은 복수와 휘브리스에 대한 두 작가의 인식 차이에서 온 것은 아닐런지.


 데이아네이라 :  만일 그대가 내 상처 주위에, 그 중에서도 레르나의 

 괴사(怪蛇) 휘드라의 담즙에 화살이 까맣게 물들었던

 곳 주위에 엉겨 붙은 피를 손으로 모은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의 약이 되어, 그가 그대보다 더 사랑하려고 

 다른 여인을 쳐다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73~577 , p320


 테우크로스 : 그렇다면 당신을 구해주신 신들을 모독하지 마시오.

 메넬라오스 : 내가 신들의 법을 어기고 있단 말인가?

 테우크로스 : 당신이 여기 서서 죽은 자를 묻어주지 못하게 한다면

 메넬라오스 : 공공의 적을 묻어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129~1132 , p280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휘브리스가 등장한다.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임을 과신한 <아이아스>의 아이아스, 남편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확고히 붙들고자 넷소스에게 받은 휘드라의 독을 사용한 <트라키스 여인들>의 데이아네이라. 그들은 모두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 죽음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미치지 않는다. 대신, 신들의 법(天倫)을 어긴 또 다른 이에게 복수의 여신은 옮겨간다.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과 함께 탄탈로스의 후손임을 생각해본다면, 탄탙로스 가문의 비극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아이스퀼로스는 탄탈로스의 업보로, 소포클레스는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으킨 아가멤논과 아이아스에 대한 메넬라오스 형제의 업보가 분노의 여신의 방문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을까.

 

 테우크로스 : 헥토르는 여기 이분에게서 선물로 받은 혁대로

 전차 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소. 한편 이분은 헥토르한테서 

 이 칼을 선물로 받았다가 이 칼 위에 엎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소. 쇠를 불려 이 칼을 만든 것은

 복수의 여신이고, 그 혁대를 만든 것은

 잔혹한 장인인 하데스가 아니었을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029~1035 , p276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실린 여러 단편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안티고네> 해석과 함께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오이디푸스 왕>에서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1967 ~ )의 <그을린 사랑 Incendies>을,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왕>이 연상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할 것이다. 후대 명작의 원형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에서 연좌제에 대한 구원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코로스 :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418~1420 , p292


 데이아네이라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헤라클레스가 이름만 

 내 남편이지, 실은 더 젊은 여인의 남자가 되는 거요.

 하지만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화를 낸다는 것은

 분별 있는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이여, 그 구원 수단을 그대들에게 말하려는 거요.

 나는 오래전에 옜날의 괴수(怪獸)한테 받은 선물을

 청동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다오. 그것은 내가

 아직 처녀였을 때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털복숭이 가슴의 넷소스한테 받은 것이라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52~558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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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론의 한가지 함의는 남과 북의 주민들 다수는 동포관계지만, 이미 그것은 동포이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분단체제가 나쁘기 때문에, 남쪽 인민에게도 나쁘고 북쪽 인민에게도 나쁘니까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그 이야기예요. 또다른 일면은 우리가 비록 두개의 국가로 나뉘어, 두 국가의 지배하에 살고 있지만 혈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문제와 별도로 분단체제라는 공통의 정치체제 속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로 같은 식구라는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핵문제도 북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평양 당국에 있지만, 분단체제라는 범한반도적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면 여기에 연루되어 있는 모든 행위주체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큰 책임을 져야 할 메이저플레이어가 나는 미국이라고 봐요.

분단체제가 나쁜 체제가 된 이유 중의 하나도 한 뿌리인 민족을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데 남들이 와서 갈라놨기 때문인데, 그 갈라놓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독재를 해야 되고 외국에 의존을 하게 되고, 그래서 분단체제의 비자주성과 반민주성이 발생한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한 뿌리라는 것도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긴 한데, 한 뿌리라는 것을 근거로 한 국가를 이뤄야 된다 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시민과 민중이 뉘앙스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에요. 촛불혁명 과정에서는 국민과 시민이라는 것을 주로 강조하지 민중은 그렇게 강조가 안 됐습니다만, 그것은 그 상황에서, 박근혜정권에 반대하고 탄핵하고 물러나라 그럴 때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게 제일 편리하고 효과적이잖아요. 헌법에도 있고요.

변혁과 중도라는 것이 해당되는 차원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둘을 갖다 붙여놔도 상충하지 않는 겁니다. 같은 차원이라면 이런 개념들을 묶어놓는 것은 말장난이거나 모순, 자가당착이 되겠죠. 그러니까 변혁은 한반도 차원에서의 변혁입니다.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혁입니다. 중도는 그리로 가기 위해서 남한사회에서 취해야 할 어떤 실천노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죠.

그런데 분단체제 극복이라고 하면 같은 민족이니까 하나의 국민, 단일형 국민국가로 통일돼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지금 분단된 결과, 또 그 분단이 오래되고 거의 체제화되면서 우리가 이러저러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소하려면, 남북 각기에서 내부 개혁도 필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한반도 전체에 걸쳐 있는 분단체제를 해소해야 된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해소된 상태가 단일형 국민국가일 수도 있지만, 나는 사실 그것은 가능성도 낮고 꼭 바람직하냐 하는 것도 문제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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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1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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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철학자는 그가 제시한 대답이 얼마나 옳은가보다는 그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플라톤은 철학자 중에 더 이상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의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진정으로 깊이 있고 위대한 철학의 수많은 문제들을 처음 제기하였으며, 이들 대다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세계의 지적인 유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르네상스 이후 계속 받아들여져 온 학문의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164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의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Ancient Philosoph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1>은 피타고라스( Pythagoras, BCE 570 ~ 495)부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 까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당연하게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철학자 플라톤(Platon, BCE 427/424 ~ BCE 348/347)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 ~ BCE 322)의 사상이 큰 기둥이 되어 본문의 내용을 떠받친다.


 <케니의 서양철학사>가 다른 철학사 책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주제별 구성'이라 여겨진다. 대부분의 철학사 책이 철학자 별로 그들의 삶을 비롯한 사상적 배경, 사상의 주요 내용과 후대의 영향 순으로 서술된다면, <케니의 서양사>는 논리학, 인식론, 자연학, 형이상학 등 철학의 여러 주제를 각 장(章)으로 설정하고 여기에 맞춰 철학자의 사상을 대비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철학자들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내용 이해에 도움을 준다.


 본문 내용 중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살펴보자. 플라톤의 사상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부정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I am who I am"처럼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의미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보여지는 개체를 방해하는 상상적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영원불멸의 이데아의 긍정과 부정은 이후 정치학과 논리학 등에서 보여지는 플라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플라톤에 따라 처음 네 요소를, 즉 '원'이라는 단어, 원에 대한 정의, 원이라는 도형,  내가 지닌 원의 개념을 구별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이들 네 요소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래야만 이들을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래야만 이들을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요소, 플라톤이 '원 자체'라고 부른 것과 분명히 구별하고 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유명한 이론이 다루려는 바도 바로 이 다섯 번째 요소, 즉 이데아이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104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 강력하게 이데아론은 스스로 제기했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아론을 통해서는 개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불변하는 형상은 어떻게 개체들이 현존하게 되고 변화를 겪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형상은 인식, 즉 다른 것들의 존재를 밝히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A 9. 991a8 이하). 이데아론은 기껏해야 설명되어야 할 실재와 같은 수의 실재를 새로 도입할 뿐이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131


 <국가>에서 플라톤은 철인(哲人)에게 의해 통치되는 도시국가를 최상의 정체(政體)로 설명한다. 이들 철인은 국가의 덕, 정의를 잘 구현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국가>는 정체의 이데아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이데아는 훗날 <법률>에 이르면 사람 대신 '법률(Nomoi)'로 대체되지만, 개체들에게 공통된 소수의 본질에 의한 통치라는 점에서 '귀족정'이 최선의 정체로 규정된다. 파르메니데스처럼 유일한 일자(the one)의 세계관에서는 '군주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겠지만.  이런 면에서 플라톤의 정치론은 이데아의 현실적 적용이었다.


 플라톤은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가 <국가>에서 묘사된 이상적인 정치 체제보다 열등한 다양한 형태의 국가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상적인 도시국가에 살지 않는 한 행복한 삶을,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살 수 없으며 또한 이런 국가는 철학자가 통치지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5,473 c~d)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118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 데모스(demos)로부터 출발한다. 그 결과 그가 이른 곳은 민주정이다. 플라톤과 거의 같은 정체 모형을 사용하고도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정체는 서로 달랐는데, 이것은 이데아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도 관련있지 않을까.


 국가의 목적은 시민들에게 선하고 행복한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공동체 안에 진정으로 탁월한 개인이나 가문이 있다면 군주정이 최선의 정치체제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이며 따라서 실패할 위험성이 상당히 크다. 또한 군주정이 전제정으로 타락하면 모든 정치체제 중 최악의 것이 되고 만다. 이론상 귀족정이 군주정 다음으로 바람직한 정치체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종의 입헌 민주정을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이상적 민주정'이라고 부른 국가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각각의 권리를 서로 존중하며 최고 수준의 자질을 갖춘 시민들이 모든 시민의 만족을 목표 삼아 통치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4.8.1293b30 이하).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155


 이러한 차이는 논리학에서도 보여진다. 논증을 통해 참, 거짓을 판별하는 논증의 문제는 개체로부터 본질에 이르는 과정이기에 실체, 분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자세, 의상, 능동, 수동 등의 범주와 명제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데아로부터 출발하는 플라톤의 논증에서는 '있음'과 '없음'만이 중요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들에서 우리는 명제의 구조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본성에 관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중 하나는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이 제시하였던 명사와 동사 사이의 구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모든 문장은 최소한 하나의 동사와 하나의 명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62a~263b). 바로 이런 문장의 개념, 즉 서로 전혀 이질적인 두 요소가 결합한 것이 문장이라는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명제론>에서도 전면에 등장한다. 명제의 구조에 대한 이런 식의 개념은 프레게 이래로 현대 논리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통용되었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219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결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한량 언어와 명제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주의를 집중한다. 술어로부터 주어를 구별해 주는 특성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명사 중심의 이론이 지닌 문제점 중의 하나는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 사이에 혼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명사와 동사를 언급하면서 플라톤은 자신이 일종의 기호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매우 명확히 드러낸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220


 윤리학에 있어서도 두 철학자의 상반된 면모가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행복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 행복이 쾌락과 지혜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데아가 없는 상태에서 답을 찾는 것은 보다 복잡한 과정과 결론을 요구한다. 행복은 지혜와 덕이라는 상태가 쾌락에 의해 결합된 것이라는.


 <필레보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며 오직 이 두 요소가 적절하게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매 순간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맛보지만 이성이 부족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의 쾌락이 아닌 다른 어떤 쾌락도 기억하거나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을 듯하다.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424


 사실, 다른 철학책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같은 설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각자에게 할당된 목차 내에서 설명이 한정되다보니, 철학자들 사상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수고로운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주제별로 철학사를 정리한 구성은 새롭게 철학사상을 연결시켜 이해하게 해주는 저자의 작은 선물이라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가능한 대답을 세 가지로, 지혜와 덕, 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그는 이들은 각각 세 형태의 삶, 즉 철학적, 정치적, 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말한다(1.4.1215a27). 이 세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탐구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p426)...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EE 2.1.1219a 39 : NE 1.7.5 1098a16). 하지만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다. 지혜와 도덕적인 덕은 비록 서로 다른 상태이기는 하지만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발휘되므로 이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협동하여 행복에 기여한다(NE 10.8.1178a~18). _ 앤서니 케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1권 : 고대철학>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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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8-18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모르던 서양 철학사 책이네요.
언제나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 겨울호랑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
평점도 좋아서 찜해 놓았습니다. ㅎ

겨울호랑이 2023-08-18 21: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철학사가 연대와 인물 중심으로 정리된 것에 비해 주제 별로 명료하게 비교해주니 더 명료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대철학사까지 완간되어 있어 틈나는 대로 올려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분단체제론의 핵심은 한반도 차원에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과 한국사회의 개혁이 결합될 때만 진정한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있다. 특히 남과 북이 점진적·단계적인 방식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한반도에서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리고 그 실천적 태도를 "변혁적 중도주의"로 설명해왔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자체가 분단체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주요한 방식이며 분단체제의 극복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경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개혁이 순조롭게 진전될 리는 만무하다. 자칫하면 촛불혁명을 거치며 만들어진 대전환의 동력도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나 공허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데서 더 진전하여 한반도에서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근본문제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천착해야 한다.

그러면서 과연 민중이라는 게 누구냐, 통일운동의 주역을 민중이라고 할 때 도대체 지금의 수많은 대립구도 속에서 누가 민중이고 누가 통일운동의 주역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 정서와 객관적인 데이터상으로 속하는 위치가 달라서 과연 나는 민중인가 기득권층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정서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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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4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 엮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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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나 상황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을 농축된 형태로 구현하는 이율배반적인 존재단위이다. 시대란, 서로 다른 시간표를 갖는 여러 배열체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성좌 configuration로서, 시간의 균질적 흐름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유한 시간을 정한다. 그러니 어느 한 시대가 시간성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 시대 앞뒤의 다른 시대들이 시간성을 경험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다. 시대 사이에는 비약이 있다는 뜻이요, 이어진 시대들 사이의 이행은 문제적이라는 뜻이요, 역사적 과정에 단절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71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Siegfried Kracauer,1889~1966)는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History: The Last Things Before The Last>에서 역사를 연대기적 시간과 고유한 시간을 갖는 이질적이면서 양 면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사이에서 과연 역사가는 개별 사태로부터 역사의 일반 법칙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역사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역사가는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역사계의 구조의 문제가 나온다. 역사계는 역사가가 서로 다른 차원들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균질적인 세계인가? 거시사의 실체성과 타당성, 곧 거시사의 실재성 reality character은 막힘없는 양방향 교통에 달려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39


 저자 크라카우어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비균질적인 구조 속에서 역사가는 지극히 한정된 정보로 자신의 주관과 이해의 깊이에 따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역사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서다. 크라카우어는 성공적인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이 융합을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예술작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허구적 아름다움. 결국 완벽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결합은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이 교통하는 데는 극심한 제약이 따른다. '원근의 법칙'에 따라서, 증거의 일부는 자동 누락된다. '수위의 법칙'에 따라서, 누락되지 않은 증거의 일부는 손상된 상태로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은 역사계가 비균질적 nonhomogeneous 구조임을 뜻한다. 역사계는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지는 여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편으로는 불가해한 회오리에 싸여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44


 예술의 본질적 기능이 완수되는 때는, 예술이 역사가가 세운 목표일 때가 아니라 역사가가 이룬 결과일 때이다. 역사가가 어떤 사료를 다루느냐에 따라 미학적으로 훌륭한 언어가 요구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언어의 아름다움은 역사가의 이해의 깊이를 보여주는 데 그친다. 언어의 아름다움은 부산물이지 명시적 목표가 아니니 말이다. 역사가가 예술을 생산하는 때는 예술가일 때가 아니라 완벽한 역사가일 때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94


 크라카우어에 의하면 <역사철학>에서 보여준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시대정신(Zeitgeist)은 연대기적 사건 속에서 역사의 법칙에 맞는 선택적 조합이다. 마치 회귀분석(regression analysis)에서 연속형 변수들 사이에 연구자의 주관에 맞는 모형을 구축한 뒤 실선 바깥의 수많은 표준편차들이 무시되는 것처럼 거시사의 역사법칙 위에 역사의 개별 사례들은 무시되어도 좋을 것인가. 크라카우어는 이 점에서 철저하게 개별사례에 집중할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top down식의 대륙철학보다는 bottom up 방식의 경험론철학에 가까운 셈이다. 


 역사가가 미시적 차원을 벗어나 보다 일반적 차원으로 올라갈 때, 그는 내가 '역사적 이념'이라고 명명한 지점에 도달한다. 그가 그 지점을 지나 '철학적' 이념의 차원 내지 극단적 추상화의 차원으로 올라가면, 그의 통찰의 의의는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든다. 대규모 역사는 미시적 차원의 많은 사실들을 제외시킨다는 것에 주목하자. 아주 높은 추상화는 증거와의 연관성을 잃게 되며, 없었던 이념을 끼워넣게 된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47


 우리가 '상상적 구축'이라고 여기는 것들, 곧 인류의 운명에 대한 종교적 예언들, 신학적 추론들, 형이상학적 이념들이 오랜 세월동안 통사의 존재이유 raison d'etre였다. 역사의 행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바로 그런 것들에 기초한다. 모든 기본적인 여구는 '위'로부터의 접근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제국들과 민족들의 운명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접근이 '아래'로부터의 접근에 항복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였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08


 역사는 한 편으로는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다른 한 편으로는 추상세계와 접한다. 이러한 접점은 알타미라 동굴(Altamira)과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에 보여지는 생생한 동물 그림과 여기에 담겨진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의 결합처럼 예술에서는 성공적으로 작동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극단이 아닌 대기실에 있는 처지의 역사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헤겔의 시대정신은 그의 <미학강의>에서는 허용될 수 있겠지만, <역사철학>에서는 유용하지 않는, 미(美)의 경계를 넘어 진(眞)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볼 때 딜타이의 이런 흔들림은 근본적인 흔들림이다. 그의 흔들림의 한쪽 극단은 헤겔의 '세계정신'이고 다른 쪽 극단은 하이데거의 '존재가능 Seinkoennen'이다. 후자는 모든 객관성을 삼켜버리고 아울러 일련의 진실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삼켜버린다. 진보의 이념은 역사 전체에 적용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의 이념이 그렇게 전면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진보의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두 측면을 갖고 있으므로 이 개념에 대한 모든 정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진보의 이념은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런 시대들의 연속은 진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20

  

 이처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시대와 역사가의 한계를 통해 미시사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이 비판되는데, 크라카우어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과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1902~1994)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보여준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점의 같은 듯 살짝 다른 내용을 비교해 본다면 보다 의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현대 작가들과 현대 예술가들의 파괴적 의도는 종합을 노리며 '외적인 총체적 연속체'를 강조하는 내러티브에 대한 역사가들과 사상가들의 점증하는 의혹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런 유사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정신 Zeitgeist이란 신기루이다. 교차영향들을 상쇄하는 온갖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00

크로체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의 시대란 그 시대 특유의 정신 spirit을 소유하고 있는 통일체라기보다는 경향들, 목표들, 활동들의 덩어리이며, 이런 경향들, 목표들, 활동들은 많은 경우 서로 무관하게 발현된다. 물론 어느 한 순간을 놓고 보면 특정한 믿음들, 목적들, 태도들 등등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고 심지어 대세가 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시대적 대세가 존재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당위"라기보다는 경험적 사실일 뿐이다. - P81

프루스트는 연대순 시간을 실체적 시간으로 회복시키지만, 그것은 사후적 a posteriori 회복일 뿐이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파편화된 삶의 이야기를 하나의 통일적 과정으로 볼 수 있으려면,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야 한다. 또 그가 이렇게 맞서는 두 명제를 화해시킨 것, 곧 그의 승리는 그가 예술 차원으로 물러난 것, 곧 그의 후퇴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에는 적용될 수 없는 해결이다. 역사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학적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P179

역사가가 예술가로 성공하면 역사 그 자체는 많은 경우 실패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가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라는 말이 유의미할 때는 예술이 역사의 외적 요소가 아니라 역사의 내적 속성일 때, 예술이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역사가의 자기 삭제 및 자기확장 능력, 그리고 역사가의 진단과 탐구의 취지일 때, 다시 말해 예술이 익명성을 잃지 않았을 때로 한정된다. - P195

시간의 핵심은 이율배반이다. 시간은 한편으로는 관습적인 흐름 이미지에 부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이미지에 부응하지 않는 면도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물줄기로 이루어진 폭포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물줄기들 사이에는 왠지 간섭현상을 연상시키는 ‘구멍들‘이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와 같은 구멍에서 솟아나는 어떤 이념들의 상대성은, 잠정적으로는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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